전통자료

[스크랩] 반남박씨 소고 박승임 선생 문인록

회기로 2010. 1. 24. 17:59

소고선생(嘯皐先生) 문인록(門人錄)


김늑(金玏 1540~1616)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 본관은 선성〔宣城:예안(禮安)의 고호〕이다. 영천(榮川)에 살았다.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현손이고, 좌랑(佐郞) 사문(士文)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경자년에 태어났고, 갑자(1564)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만력(萬曆) 병자년(1576)에 문과에 급제했다. 벼슬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열 살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행함에 성인(成人)과 같았다. 열세 살에 모부인의 명으로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일찍이 동문 수십 인과 더불어 선생을 모시고 연화산 (蓮花山:영주 남쪽에 있다) 응석사(凝石寺)를 유람하면서 수창(酬唱)한 시가 있다. 선생의 문집 부록에 보인다.

선생에게 올린 제문의 대략을 보면, “삼가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천부적으로 풍성한 자질을 타고나셨고, 자질이 옥처럼 윤택하셨으며, 도량 또한 바다처럼 넓으셨다. 의리에 나아갈 때는 목마른 것처럼 하셨고, 이익을 들으면 벙어리 같으셨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명리(命理)에 관통하셨으며, 복희씨의 글이 마음속에 있고, 성두(星斗)가 가슴속에 있었다. 도기(道氣)가 한없이 넓었고, 덕용(德容)은 더욱 충만하였다. 당신께서 얻은 바를 미루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즐기셨고, 아름다운 문하에 학도들이 빽빽하였다. 운운.󰡓 하였다.

같은 고을 제현(諸賢)들과 더불어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성품이 겸손하고 공손하고 온화하고 단아했기에 보는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했다. 조정에서 벼슬한 지 40년에 직언과 정론(正論)을 조금도 회피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월군수(寧越郡守)로 부임하여서는 맨 먼저 노산군(魯山君) 묘소를 참배하고, 사당을 중수하고 신위(神位)를 세우고 송씨(宋氏) 부인을 배향하였다.

임진(1592)년에 경상좌도안집사(慶尙左道安集使)에 임명되어 의병을 일으켜 이끌고 유민들을 진무하여, 죽령(竹嶺) 이하 여러 고을이 그 덕택으로 온전할 수 있었다. 광해군 때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 · 퇴계(退溪) 두 선생을 헐뜯자, 공이 대사헌으로서 상소하여 변론하였다. 이어 오현(五賢)을 문묘에 종사할 것에 대하여 누차 아뢰어 시행되게 하였고, 또 기축년 여러 신하들을 신원하라고 아뢰었다. 광해군이 생모를 추숭(追崇)하자 공이 예경(禮經)을 근거로 홀로 정성스럽고 절실하게 아뢰었는데, 광해군이 진노하여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좌천시켰다. 이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만년을 보냈다.

귀학정(𪛃鶴亭) · 천운정(天雲亭) · 서벽정(樓碧亭) 등을 짓고, 길일이나 좋은 계절을 만나면 술과 시로 스스로 즐겼다.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신년에 선생과 함께 향사(鄕社) 뒤에 귀강서원(𪛃江書院)으로 고쳤다. 에 나란히 향사되었다. 선무공(宣武功:임진왜란에 세운 공)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문집이 있다.



오운(吳澐 1540~1617)

선조 때 문신. 자는 태원(太原), 호는 죽유(竹牖), 본관은 고창이다. 1540년(중종 34) 영천(榮川)에서 출생하여 소고선생(嘯皐先生) 문하에서 수학하여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7세 때인 1566년(명종 21)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급제 후에도 관직을 멀리하고 수기(修己)와 학문에만 힘쓰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진영에 합류하여 선비의 몸으로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합천군수(陜川郡守)가 되어 왜적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시정(施政) 대요(大要)에 관한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려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정을 베풀 것을 건의하였다. 종2품인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승진하여 치적이 있었다. 선천적으로 정의감이 강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내직(內職)에 있을 때 권세 있는 고관을 멀리하면서 직간하기를 서슴치 않았으며, 경주부윤을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돌아와 시문(詩文)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면서, 백암(栢巖) 등 여러 문하생과 더불어 스승인 소고선생의 문집과 유고를 정리하였다. 그의 글에 보면, “소고선생의 학문과 덕망은 한 세상의 으뜸이었고 그 혜택이 온 고을에 미쳤다. 학문을 좋아하고 독서한 공이 만년에 더욱 독실하시어 후생을 가르쳐 성취시키셨는데, 그 풍성(風聲)이 어제인 듯하고 지금까지 태산처럼 우러르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사당에 모시고 제향하는 전례(典禮)가 없으니 그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다.” 하였다.



남몽오(南夢鰲 1528∼1591)

자는 경상(景祥), 호는 삼송(三松), 본관은 영양(英陽). 영천(榮川)에 살았다. 영의공(英毅公) 민(敏)의 후손이고, 참봉 기(麒)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무자년에 태어났고, 만력(萬曆) 계유(157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자품이 고매하고, 기도가 크고 넓었다. 경사(經史)를 널리 공부하고, 의리를 깊이 탐구했다. 후진을 가르쳐 많이 성취시켰다. 선생이 시를 지어주기를,

강주(剛州:영주) 북쪽 마을의 남부자(南夫子)                   剛州北里南夫子

강석(講席)에서 많은 제자 가르치네                               講榻陵莪七十徒

사방에 둘러앉은 동지들 물가까지 가득하고                    四座佩衿彌水次

가을 맑은 해 하늘 높이 통하였네                                 九秋霜日豁天衢

유가의 사업은 책 일천 권이고                                     儒家事業書千卷

스승의 풍류는 술이 일백 병이라네                               師席風流酒百壺

성대하고 아름다움 늙은이 흥기시켜                             盛美起人忘老朽

많은 선비들 뒤따라 공부하고 싶게 하네                        欲隨群彦究工夫

하였고,

퇴계선생도 일찍이 시를 주기를,

지성스러운 마음 삼익우(三益友)을 바라고                      中誠望三益

외모(外慕:다른 것을 구함)는 초개처럼 잊었네                 外慕忘一芥

이 즐거움은 훈지(塤篪)와 같고                                     此樂如塤篪

저 인(仁 ) 피와 같은 것이 아니라네1)                            夫仁匪稊稗

운운하였다.

월천(月川) 조목(趙穆),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교분이 가장 깊었는데, 학봉이 항상 유장(儒將)이라 지목하였다. 귀만서원(𪛃灣書院)에 향사하였다.



김농(金農 1534 - ? )

자는 명보(明甫) 호는 화남(華南),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서울에서 영천(榮川)으로 와서 살았다. 허백당(虛白堂) 양진(楊震)의 후손이고, 수찬(修撰) 의정(義貞)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갑오년에 태어났다. 벼슬은 사의(司議)를 지냈고, 승지에 추증되었다. 선생이 일찍이 시를 지어주기를,

화남(華南)의 밝은 달 어둠 속에 비추니                       華南明月暗中投

이 선비 어찌 지금의 세속 부류리오                             此士如今豈俗流

운운하였다.

연화산 모임에서 차운한 시가 있다. 성품이 굳센 것으로 자부하였고, 사람들과 논의하다 서로 들어맞지 않으면 옷을 털고 떠나버렸다. 일찍이 고개를 숙이고 뜻을 굽혀 구차하게 영합한 적이 없었다. 고을 사람 중에 잘못을 저지르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면전에서 내쳤고, 행실이 비루한 이는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꺼리는 자들이 많았다. 마침내 세상과 부합하지 못하였으나 후회가 없었다.



이중립(李中立 1533∼1571)

자는 강중(剛仲), 호는 귀계(𪛃溪), 본관은 월성(月城). 용궁(龍宮)에서 안동(安東)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제정(霽亭) 달충(達衷)의 후손이며, 호군 준(竣)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계사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행실이 지조가 있고 곧았으며, 마음 씀씀이가 넓고 공평했다. 문장에 능한 것으로 이름을 떨쳤고, 무오년 진사시에 장원했다.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등 제현들과 도의(道義)로 교류하였다. 융경(隆慶) 무오년에 모친상을 당하여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슬픔이 지극하여 병이 되었다. 상을 마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9세이다.



이개립(李介立 1546∼1625)

자는 대중(大中), 호는 성오당(省吾堂),․역봉(櫟峯)이다. 중립(中立)의 아우이다. 예천(醴泉)에 살았다. 가정(嘉靖) 병오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연화산(蓮花山)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융경(隆慶) 정묘(156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행실이 단아하고 신중하여 원근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선조조(宣廟朝)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같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벼슬이 현감에 이르렀다. 후진을 가르치면서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아, 인근 고을의 문사들이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어버이가 병들자 똥을 맛보면서 간호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소금에 절인 채소를 먹지 않았다. 천계(天啓) 을축년에 세상을 떠났다. 뒤에 효행으로 참판에 추증되었고, 의산서원(義山書院)에 향사되었다. 문집이 있다.



권두문(權斗文 1543~1617)

자는 경앙(景仰), 호는 남천(南川), 본관은 안동(安東), 영천(榮川)에 살았다. 태사(太師) 행(幸)의 후손이고, 주부 증참의(贈參議) 유년(有年)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계묘년에 태어났다. 만력(萬曆) 임신(1572)년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통례(左通禮)에 이르렀다.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선생에게 올린 제문의 대략은 보면, “선생님의 문하에 나아가서 높은 덕을 엿보았습니다. 저에게 인척으로 허여하셔서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가 보통 사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오로지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운운.” 하였다.

임진(1592)년에 평창군수(平昌郡守)가 되어 좁고 험한 곳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병사를 모으고, 군량을 쌓아두고 죽을 때까지 싸우려하였으나, 목책이 무너지고 적에게 잡혀 협박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아들 진사 주(黑主)가 몰래 업고서 돌아왔다. 계사년에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상소하여 당시의 급무를 진달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천성이 성실하고 사람을 대함에 진솔하여. 고을에서 70년을 살면서 일찍이 남과 더불어 잘못된 일이 없었다. 김백암(金栢巖) 등 여러분들과 기영회(耆英會) 고사를 모방하여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었다. 정사년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5세이다.



김개국(金蓋國 1548∼1603)

자는 공제(公濟), 호는 만취(晩翠), 본관은 연안(延安),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나복산인(蘿葍山人) 도(濤)의 후손이고, 훈도 몽득(夢得)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무오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계유(157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신묘(159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총명함이 뛰어나 7,8세에 이미 향학에 뜻을 두었고, 장성하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연화산(蓮花山)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임진년에 본군의 의병장이 되어 적의 길목을 끊고, 영동(嶺東)의 막부(幕府)가 되어 감사 정구(鄭逑)와 서로 뜻이 맞았다. 수개월 동안 옥천군수(沃川郡守)가 되었다가 돌아오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성품이 자애롭고 선량하고 깨끗하고 정직하였다. 벼슬을 한 지가 오래지 않았지만 청렴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끝내 세상에 불우하게 보냈지만 조금도 도를 굽히고서 남에게 구하지 않았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고,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슬픔이 지나쳐 병을 얻어 담제(禫祭)를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이다.

김백암(金栢巖)이 만시(輓詩)에서, “백성을 다스린 지 두 달에 신묘한 교화 이루었고, 삼년상을 치르면서 효성 다하였네. 운운.” 하였다.

선무훈(宣武勳:임진왜란에 세운 공)으로 집의(執義)에 추증되었고, 뒤에 효행으로 벼슬이 더하여 승지에 추증되었다. 삼봉서원(三峰書院)에 향사되었다. 일고(逸稿)가 있다.



김도(金陶 1546~?)

자는 견숙(甄叔), 본관은 함창(咸昌), 영천(榮川)에 살았다. 삼로(三路) 이음(爾音)의 후손이고, 참봉 응린(應麟)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오년에 태어났다. 아우 물암공(勿巖公)과 더불어 선생의 문하에서 같이 배웠고, 문명이 자자하여 동생과 더불어 한 고을에서 존중받았다.



김융(金隆 1549∼1593)

자는 도성(道盛), 호는 물암(勿巖)이다. 김도(金陶)의 아우이다. 가정(嘉靖) 기유년에 태어났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생이 매우 애지중지하였다.

선생이 서울에서 벼슬하게 되자, 공의 학업이 날로 진보하여 가르침을 중단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여 함께 데리고 가서 수업하게 했다. 공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선생이 시를 지어 주기를,

꽃비가 봄 저자에 부슬부슬 내리고                             花雨濛春市

솔바람은 저문 언덕에서 불어오네                             松風沸晩岡

돌아가고픈 마음은 구름 따라 멀고                             歸心雲共遠

이별의 한은 물길 따라 깊네                                      離恨水爭長

사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十五男兒志

3천 제자의 대열에 들어야 하는 법                            三千弟子行

도(道)를 가리키는 길 바르게 있으니                          指南玆路直

채찍질하여 머뭇거리지 말고 달리게나                        鞭策莫棲遑

하였다.


일찍이 선생을 모시고 강학하며 감회를 읊은 시에,

수목은 들쭉날쭉 물은 어지럽게 흐르는데                   草樹參差水亂流

선생님 모시고 근원을 묻네                                      追陪杖屨問源頭

봄날 얼음 녹으니 못에 찬물 고여                             春氷消盡寒潭出

마음속 백발의 근심 쏟아내네                                   瀉却胸中白首憂

하였다.


《계몽(啓蒙)》을 강학하고 밤에 돌아오면서 지은 시에,

선생님 뒤따라 겹겹 관문 열고                                   追扳杖屨闢重關

필마로 왔다가 밤이 되어 돌아가네                              匹馬來時犯夜還

그늘진 구렁과 양지바른 언덕 길이 갈라지는데              陰壑陽崖分路脉

하늘의 밝이 달은 산천을 비추네                                一天明月照溪山

하였다.

<의심나는 것을 강론함[講疑]> 시에,

산에 해 비치니 짙은 안개 사라지고                             晴日照山陰霧釋

물에 바람 불어오니 흐릿한 구름 걷히네                      光風吹水暝雲歸

숱한 화초들 제각기 형기(形氣) 받아 자라고                 繁花衆草分形氣

한 조각 맑은 연못에 새가 스스로 나네                       一片明潭鳥自飛

하였다.

또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사는 곳 구릉 뒤쪽에 두릉정사(杜稜精舍)를 짓고 좌우에 도서를 쌓아두고 연구하며 체험하였으며, 더욱이 예학(禮學)에 힘썼다. 계사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재랑(齋郞:참봉)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승진시켜 제수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벼슬을 제수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향년 46세였다. 뒤에 고을 사람들이 공의 학행으로 조정에 상소하여 승지에 추증되었다. 삼봉서원(三峰書院)에 향사되었다.

저서로 《주인록(做人錄)》과 《가례(家禮)》 · 《태극도설(太極圖說)》 · 《통서(通書)》 · 《소학(小學》의 강록(講錄)을 남겼다.



이홍제(李弘濟 1536~1586)

자는 자시(子施), 본관은 공주(公州)이고, 영천(榮川)에 살았다. 공숙공(恭肅公) 명덕(明德)의 후손이며, 전적 극공(克恭)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신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병술년에 세상을 떠났다. 벼슬은 직장(直長)을 지냈다.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학문에 뜻을 두어 선비가 되어, 고을에서 상당한 존중과 칭송을 받았다. 자제를 가르침에 경서의 교훈으로 하고 엄격하게 독려하였다. 또한 향리의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가 묘갈명을 지어 말하기를, “몽매함을 깨달아 이름을 이룬 것이 실로 공에게 배운 것이 바탕이 되었다.” 하였다.



진종길(秦宗吉 1537~1612)

자는 응하(應賀), 본관은 영정(永定)이고,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장령 호(浩)의 후손이고, 참봉 황(晃)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정유년에 태어나 벼슬이 훈도(訓導)에 이르렀다.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성품이 단아하고 평소 학문과 행실이 있었다. 여러 번 향해(鄕解)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나이 40세가 되어서는 다시 과거를 보지 않고, 매일 자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일삼았다. 고을 사람들이 크게 추앙하였다. 향년 76세이다.



남치형(南致亨 1540~?)

자는 양중(養仲), 호는 용계(龍溪), 본관은 영양(英陽)이고, 안동(安東)에서 풍기(豊基)로 이사하여 살았다. 영의공(英毅公) 민(敏)의 후손이고, 어은(漁隱) 신신(藎臣)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경자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계유년(1573)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천성이 강직하고 호방하였으며, 재기가 영특하고 뛰어났다. 아우 분지공(賁趾公)과 더불어 강학에 힘써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여 효행으로 소문이 났고, 만년에 김천찰방(金泉察訪)에 추천받았으나 미처 나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집에 유고(遺稿)가 소장되어 있다.



송복기(宋福基 1541~1605)

자는 덕구(德久), 호는 매포(梅圃), 본관은 야성(冶城)이고, 예천(醴泉)에서 살았다. 야성군(冶城君) 길창(吉昌)의 후손이고, 참봉 증참의(贈參議) 의(儀)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신축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병자년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천성이 고매하고, 기개와 도량이 깊고 고요했다. 성균관 유생으로서 재행(才行)으로 추천되어 소촌찰방(召村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서사(書史)로 즐기며 초야에서 유유자적하였다. 날마다 문사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즐겼다. 일찍이 동문 20여 인과 제민루(濟民樓)에서 선생을 모시고 놀면서 차운한 시가 있는데, 그 시에,

물고기 뛰고 솔개 날아 모두 자유자재                        魚躍鳶飛俱得意

밝은 하늘의 이치 어찌 깊이 숨겠는가                        昭昭至理詎幽潛

하였고, 또 읊기를,

경계하신 말씀 모두 저를 반성하게 하니                      規警令人多省吾

신신당부하신 교훈 은근하여라                                 丁寧貽訓尙慇懃

하였다.

임진년(1592)에 본군의 임시 군수가 되어 한 고을을 평안하게 하였다.

을사년에 세상을 떠났다. 옥천서원(玉川書院)에 향사되었다.



송복원(宋福源 1544~?)

자는 천지(川至)이고, 호는 만대정(晩對亭), 복기(福基)의 아우이다.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가정(嘉靖) 갑진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을유년(1585)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제민루(濟民樓) 모임에서 공 또한 선생을 모셨는데, 일찍이 그가 도를 독실하게 믿고 자신을 잘 지킨다고 칭송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슬픔이 지나쳐 몸이 여위어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

두문불출하면서 학문을 독실하게

송잠(宋潛 1545~1611)

자는 경소(景昭), 본관은 야성(冶城)이고,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증참의(贈參議) 복숭(福崇)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을사년에 태어나, 벼슬이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향년 67세이다.



송한(宋漢 1556~1611)

자는 종우(宗于), 본관은 야성(冶城)이다.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우후(虞候) 덕숭(德崇)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진년에 태어나,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청렴하고 신중하여 장려를 받았다. 연화산 모임에서 선생을 모셨다. 임진(1592)년에 안집사(安集使) 김백암(金栢巖) 휘하에 있으면서 많은 계책을 세웠다. 뒤에 백암이 재행(才行)으로 천거하여 봉사(奉事)에 제수되었고,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향년 80세이다.



배응경(裵應褧 1544∼1602)

자는 회보(晦甫), 호는 안촌(安村),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성주(星州)에서 영천(榮川)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증 판서(贈判書) 무원(茂元)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갑진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계유(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병자(1576)년 문과에 급제했다. 임진년에 청도군수(淸道郡守)가 되어 군량을 모으고 성(城)을 수축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계책을 하였는데, 순찰사(巡察使)가 적의 예봉을 피하라고 명했으나 듣지 않고 힘껏 싸워 2백여 명의 적을 베었다. 뒤에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어 학문을 진흥하고 군대를 검열하니, 상공 이원익(李元翼)이 모든 고을에서 본보기로 삼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벼슬은 나주목사(羅州牧使)에서 그쳤다. 김백암(金栢巖)과 의논하여 선생의 문집을 간행했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행하였다. 모부인이 일찍이 배가 불러오는 질병을 앓았는데, 하루도 의복을 풀지 않고 직접 약을 달여 간호한 것이 3년이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誠龍)이 일찍이 공을 맞이하여 천지 원회(元會)의 수리에 대하여 헤아렸는데, 공이 하나하나 정밀하게 통하자 서애가 감탄하고 말하기를, “이를 미루어 독실하게 공부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나주(羅州)에서 돌아온 후로 매일 김백암(金栢巖) 등 제공들과 아름다운 산수 사이를 배회하였다. 간혹 서당에서 문회(文會)를 열고 경서(經書)를 통독하였는데, 언제나 부지런히 하면서 권태를 잊었다.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무훈(宣武勳:임진왜란에 세운 공)으로 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술한 시문과 《임진천토록(壬辰天討錄)》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장여흥(張汝興)

자는 인중(仁仲), 호는 수남(水南),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연복군(延福君) 말손(末孫)의 후손이고, 과재(果齋) 수희(壽禧)의 아들이다.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독서하고 역사를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고, 실학(實學)에 더욱 깊었다. 재능과 기국과 학식과 도량이 다 세상에 쓰임에 맞았으나, 불행히 미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여치(張汝山直 1538~1608)

자는 산보(山甫), 호는 단구(丹丘), 여흥(汝興)의 아우이다. 가정(嘉靖) 무술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무신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깨끗하여 고을에서 의지하는 바가 중했다. 이른 나이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일찍이 정시(庭試)에 응시하였는데, 공의 글씨가 졸렬하여 선생의 아들에게 대필시켜 내었는데, 선생이 당시에 고시관이어서 그것이 자제가 지은 것이라 여기고 빼버리니, 세상에서는 운명의 소관이라고 전한다.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사림들과 함께 고을 향서당(鄕序堂) 좌측에 선생의 사당을 창건하였다.



이여복(李汝馥 1556~1631)

자는 덕훈(德薰), 호는 감계(鑑溪)․취사(炊沙), 본관은 우계(羽溪)이고,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도촌(桃村) 수형(秀亨)의 현손이고, 참봉 효신(孝信)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진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신묘(159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을사(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적(典籍)에 이르렀다. 문장이 화려하고 풍부하여 한 시대의 존중을 받았다.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사우록(師友錄)》을 지었다.

공은 혼탁한 시대를 만났으나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일찍이 감회를 서술한 시를 지었는데, 그 대략에,

적은 봉급은 바른 천성 갉아먹고                    寸廩蝕降衷之正

낮은 벼슬은 자연의 성품을 굽히네                   微官屈偃蹇之性

말은 본래 졸렬한데 인욕이 교묘하게 하고            言詞本拙人欲使之巧

기색 본래 태연한데 인욕이 꾸미게 하네              氣色本舒人欲使之佞

사슴에게 관을 씌운 것과 같으니                    有如麋鹿而冠巾

몸이 위축되어 회포 풀길이 없네                    蹙蹙中懷靡所騁

하였다.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계축옥사(癸丑獄事)1)가 일어나 이이첨(李爾瞻) 등이 동조(東朝:인목대비를 지칭)와 대군(大君:영창대군)을 배척하였다. 공이 마침 상복을 입고 집에 있었는데, 상소하여 은혜를 온전히 하기를 청하였다. 7일 동안 대궐 앞에서 엎드려 청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벼슬에 뜻이 접고 나무를 이용하여 집을 만들고 여생을 보냈다. 숭정(崇禎) 신미년에 세상을 떠났다. 도계서원(道溪書院)에 향사되었다.



임흘(任屹 1557∼1620)

자는 탁이(卓爾), 호는 용담(龍潭)․만회재(晩悔齋), 본관은 풍천(豊川)이고, 안동(安東)에서 살았다. 소간공(昭簡公) 유겸(由謙)의 증손이며, 태신(泰臣)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정사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임오(1582)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성품이 개결하여 권세에 굴하지 않았고, 학문과 예법을 좋아했다. 선생이 심히 애지중지하여 시를 주어 면려하였다. 선생의 문집에 보인다. 일찍이 <기몽(記夢)> 시를 지어 올리기를,

봄바람 부는 자리에 또 봄바람                      春風座下又春風

어느 날 훈훈한 향기 고요한 방에 풍길꼬             何日薰香靜室中

잊지 못하는 이 마음 돌아갈 곳 없는데               耿耿此心歸未得

꿈에 주공(周公)을 만나니 그래도 다행하네            夜來猶幸夢周公

하였다.

뒤에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임진년에 유종개(柳宗介) 공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약속 16가지와 명령 5가지를 정하였다. 유공(柳公)이 전몰하자 김해(金垓) 공의 의병에 합류하였다. 김공이 죽자 그의 아들 한 명을 데려다가 가르치고 길렀다.

만년에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상소하여 학문을 논하고 당시의 일에 대하여 극언하였다. 이어서 교관(敎官)에 제수되었으나 이이첨이 한창 정권을 휘둘러 폐모(廢母)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은거하면서 생애를 마쳤다.

한강(寒江) 정구(鄭逑)가 보낸 편지에, “당신께서 도학(道學)에 침잠하여 날마다 새로운 맛을 얻고 있겠지요?” 하였다. 경신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중청(金中淸 1566)∼1629)

자는 청지(淸之)․이화(而和), 호는 구전(苟全), 본관은 안동이고, 봉화(奉化)에서 살았다. 태사(大師) 선평(宣平)의 후손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몽호(夢虎)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인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통하여 선생이 그를 매우 인물 감으로 여겼다.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임진(1592)년에 유종개(柳宗介) 공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경술(1610)년에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리에는 본현의 의병장이 되었다. 일찍이 천추사(千秋使)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조정에 나아갔을 때 황태후(皇太后) 상을 만났다. 예부(禮部)에서 천추사 일행에 대하여 길례(吉禮)에 따라 의례적으로 연회를 베풀자, 공이 글을 올려 면해 주기를 청했다. 예부에서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그 글의 내용은 온당한 것이었다.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이 말하기를, “공은 만 리의 행차에서 얻은 바가 많다.ꡓ 하였다.

공이 문장과 경술(經術)로 동류들의 추중을 받았다. 혼조(昏朝)를 만나 조정에서 벼슬할 마음이 없었으나, 거듭 어버이의 뜻을 어기고 애써 녹봉으로 봉양하는 일을 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구차하게 보전한다.’는 의미의 구전(苟全)이란 호를 한 것도 바로 그 뜻을 표현한 것이었다. 만년에 한가로이 시골 집에서 생활하면서 생도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즐겼다.

숭정(崇禎) 기사년에 세상을 떠났다.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윤흠(金允欽 1539~1573)

자는 여경(汝敬), 호는 만오헌(晩悟軒),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안동(安東)에서 영천(榮川)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양경공(襄景公) 승주(承霔)의 후손이고, 박(博)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기해년에 태어나 융경(隆慶) 정묘(1567)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형제 5명이 다 자질이 아름답고 문학과 행실에 독실하였다. 제민루(濟民樓) 모임에서 선생을 모시고 수창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윤사(金允思 1552~1622)

자는 이득(而得)이고, 호는 송음(松陰)이며, 윤흠(允欽)의 아우이다. 안동(安東)에 살았다. 가정(嘉靖) 임자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무자(1588)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효성과 우애와 문학으로 성균관의 천거를 받았고, 김천찰방(金泉察訪)을 지냈다. 임술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윤안(金允安 1560∼1622)

자는 이정(而靜), 호는 동리(東籬)이다. 윤사(允思)의 아우이다. 가정(嘉靖) 경신년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였고 기상이 범상하지 않았다. 나이 4세에 퇴계선생이 보고서 기특하게 여겼다. 어릴 적에 놀 때에도 아이들이 외경하여, 둘러싸고 추종하면서 ‘김영공(金令公)’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친절한 가르침을 받았고, 선생이 특히 그를 인물감으로 중하게 여겼다. 문장에 능한 것으로 서울에 이름을 떨쳤다.

무자(1588)년 사마 양시에 합격했다. 갑진(1604)년에 영남의 유생들이 상소할 때 소수(疏首)로서 회재선생(晦齋先生)이 무함을 입은 것을 논변하니, 유성룡(柳誠龍)이 편지를 보내 치하하면서, “공이 임금을 감동시켰다.” 라고 했다. 신해년(1611)에 내섬시(內贍寺) 직장(直長)으로서 상소하여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려 하였으나, 자리를 나와 올리지 못하였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임자(1612)년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계축(1613)년에 대구부사(大丘府使)에 제수되어서 다스림에 있어서 관대하게 하였다. 공무 여가에는 번번이 사수(泗水) 가에 있던 정한강(鄭寒岡)을 방문하여 쉬지 않고 강론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와서는 세상사에 뜻을 끊고 명사들과 강호 사이에서 유유자적하였다. 평소 마음을 쓰고 일을 행함에 있어서 평탄하게 하고 털끝만치도 막힘이 없었다. 바다를 읊은 시를 보면

천지 사이에 반을 차지한 것                        有物半天地

만고에 원기를 머금고 있네                         萬古含元氣

내 흉중에도 그런 바다 있으니                      胸中亦有海

대장부 응당 이와 같아야 하리                      丈夫當如此

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기상이 볼만하다고 하였다.

선생에 대한 제문의 대략을 보면, “해와 달의 광명이 바로 공의 정신이 아니던가. 흐르는 강과 높은 산이 바로 공의 기상이 아니던가. 휘황찬란한 오색구름이 공의 문장이 아니던가. 선비들은 태산북두처럼 우러르고, 나라는 시초(蓍草)와 영귀(靈龜)2)처럼 여긴다네.” 하였다.

천계(天啓) 임술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정신(金正身)

자는 극중(克中), 본관은 선성(宣城),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선생의 내형(內兄:외사촌 형) 참봉 언철(彦哲)의 아들이다. 연화산(蓮花山)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김윤함(金允諴 1527~?)

자는 경순(景純), 본관은 선성(宣城),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현손이고, 첨정(僉正) 택민(澤民)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정해년에 태어나 융경(隆慶) 무진(1568)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제민루(濟民樓) 모임에서 선생을 모시고 수창하였다.



이질(李耋)

자는 숙노(叔老), 호는 일계(逸溪), 본관은 공주(公州), 풍기(豊基)에서 살았다. 공숙공(恭肅公) 명덕(明德)의 후손이고, 진사 극검(克儉)의 아들이다.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금복고(琴復古 1549~1631)

자(字)는 호여(皥如), 호(號)는 송음(松陰), 본관은 봉화(奉化),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학사(學士) 의(儀)의 후손이고, 진사 인(軔)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기유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계유(1573)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임진(1592)년에 의병이 일어났을 때 공이 있어 재랑(齋郞:참봉)에 제수되었고, 뒤에 수직(壽職)으로 호군(護軍)에 올랐다.

천성이 매우 후덕하면서도 행실이 엄격하고 단정하여, 한 고을에서 존중하였다. 연화산(蓮花山)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저술한 <필설(筆說)>에서 선생의 덕업(德業)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선생의 문집 부록에 보인다. 선생을 사당에 모신 일은 실로 공이 제창한 것이다. 그에 대한 내용이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에 나타나 있다.



안경희(安慶喜 1549~1611)

응일(應一)로 고쳤다. 자는 중하(仲賀), 호는 일암(逸庵)․농산(農山), 본관은 순흥(順興), 순흥에 살았다.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손이고, 첨지(僉知) 구(榘)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기유년에 태어났다.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효성을 타고나서, 어버이가 편찮을 때 똥을 맛보았고 상을 당하고 나서 늙도록 질(絰)을 벗지 않았다. 장례 때에는 손수 묘소의 흙을 쌓았다. 문예가 비범하였으나 일찍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향연 74세이다. 뒤에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박려(朴欐 1551~1592)

일명은 양(樑)이다. 자는 거중(居中), 호는 물재(勿齋),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서울에서 영천(榮川)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판서 만(蔓)의 후손이고, 현감 대령(大齡)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신해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계유(1573)년 사마시에 장원했다. 퇴계선생이 일찍이 현감공(縣監公)을 방문하였을 때 공이 겨우 8세였으나 응대함에 법도가 있었다. 이선생(李先生)이 유념하여 뒤에 손녀서를, 이어서 선생에게 수학하게 하였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과거 공부에 뜻을 끊고 예학(禮學)에 전념하였다. 벼슬은 세마(洗馬)와 위솔(衛率)을 거쳐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향년 42세이다.



황서(黃曙 1554~?)

자는 광원(光遠), 호는 종고(宗臯)․남파(南坡), 본관은 창원(昌原), 풍기(豊基)에서 살았다. 훈도(訓導) 여규(汝奎)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갑인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고, 성장하여서는 문장이 화려하고 성대하였다. 만력(萬曆) 병자(157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진(158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선생 제문에서, ꡒ규벽성(奎璧星)이 빛을 나누고 금과 옥덩어리에는 쇳돌이 없다네. 기국은 원대하고 도량은 하해처럼 넓으셨네. 평소 의리를 즐기시고 번거로움을 제거하고 순수한 곳으로 돌리셨네. 정(情)은 조화(造化)를 궁구하고 학문은 천인(天人)을 꿰뚫었도다. 사림(士林)이 산처럼 우러르고 모든 사람들이 의심나는 것을 질정받았도다.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으셨고, 교육을 즐거움으로 삼으셨도다. 오직 소자도 그 가르침 입어, 몽매함을 깨우치고 분발하니 저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푸셨도다. 운운.ꡓ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다른 사람에게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벼슬하던 초기에 당시의 재상과 뜻이 맞지 않자, 옷을 털고 귀향하여 후진을 가르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임진년에 안집사(安集使) 김백암(金栢巖)이 공을 풍기(豊基)의 임시 장수로 삼으니, 군사와 농사를 권장하고 죽령(竹嶺)을 견고하게 지켰다. 계묘년에 세상을 떠났다. 선무훈(宣武勳:임진왜란에 세운 공)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황엽(黃曄 1556~1631)

자는 경휘(景輝), 호는 양심당(養心堂)․남애(南厓)·재수(䏁叟), 본관은 창원(昌原), 풍기(豊基)에 살았다. 습독(習讀) 담(譚)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진년에 태어나 벼슬은 훈도(訓導)에 이르렀고, 숭정(崇禎) 신미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조상을 추모하는 데 독실하여, 선조의 제사를 예로써 받들었다. 소고선생이 일찍이 묘소의 제사와 사당의 제사를 지낼 때에 반드시 집사안(執事案:식순)을 바르게 써서 거행하였는데, 공 역시 통가(通家:대를 이은 교분)의 의리로 선생의 제례에 참석하여 보고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선조의 제사를 지내는 예법이 그와 같았다고 한다.



황언주(黃彦柱 1553~1633)

자는 자건(子建), 호는 농고(農臯), 본관은 창원(昌原), 풍기(豊基)에서 살았다. 귀암(ꜫ巖) 효공(孝恭)의 손자이고, 흠(欽)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계축년에 태어나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고, 숭정(崇禎) 계유년에 세상을 떠났다. 연화산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남천(南川) 권두문(權斗文)이 농고정사(農臯精舍)에 대하여 쓴 시에서,

뜻을 세우니 공을 세우게 되고                      志立功斯立

서재 정결하니 학문 또한 정밀하네                   堂精學亦精

지금에 정사(精舍)를 여니                          至今開精室

단정히 앉아 경서 궁구하리라                       端坐可窮經

운운하였다.



김경적(金景迪)

일명 경업(景業)이다. 자는 태지(泰之), 호는 일호당(一壺堂), 본관은 안동(安東),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부사(府使) 순필(舜弼)의 손자이고, 영(甯)의 아들이다. 연화산 모임에서 선생을 모셨다.



민흥건(閔興建)

자는 덕우(德宇), 관향은 영천(榮川). 영천에서 살았다. 헌납(獻納) 인(寅)의 후손이고 원훈(元勳)의 아들이다. 성품이 총명하여 일찍이 선생으로부터 《강목(綱目)》을 수학하면서 하루에 공부하는 것이 몇 권이 되므로 선생이 말하기를, “선비의 공부는 오직 침잠하여 사색하는 데에 있고, 보고 기억하는 것이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였다. 공이 이로부터 명심하여 행하였고, 선생으로부터 가장 아낌을 받았다. 재능과 기개가 넉넉하고 글공부가 일찍 통달하였고, 성품 또한 순박하고 신중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실수한 적이 없었다. 나이 25세에 거듭 향시에 합격했으나 회시(會試)에는 이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민흥선(閔興先)

자는 효숙(孝叔), 본관은 영천(榮川).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응록(應祿)의 아들이다. 신사(1581)년 봄에 선생을 모시고 지천대(至天臺)에서 유람하면서 시를 남겼다.



김천영(金天英 1566~?)

자는 자정(子挺). 상주(尙州)에서 살았다. 도(燾)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인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병오(160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술(1610)년 문과에 급제했다. 벼슬은 학유(學諭)에 이르렀다.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뒤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易學啓蒙(역학계몽)》의 <기장(期章)>을 논하였는데, 공이 어려운 책을 너무 쉽게 읽고 산가지를 펴놓고 승제(乘除)하면서 손과 입으로 서로 대응함에 법에 맞지 않음이 없는 것을 보고서 그 내력을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ꡒ일찍이 소고선생(嘯臯先生)에게서 배운 것이다. 선생께서는 이 분야에 정통하여 깨달은 분이다.ꡓ 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가 이에 선생의 문하에 이르지 못한 것을 평생의 불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김원량(金元亮)

자는 선명(善明), 본관은 예안(禮安), 영천(榮川)에 살았다. 응운(應運)의 아들이다. 연화산(蓮花山)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김명성(金鳴盛)

자는 문창(文昌), 본관은 수안(遂安), 영천(榮川)에 살았다. 생원 윤찬(允粲)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경인(1590)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연화산(蓮花山) 모임에서 수창한 시가 있다.



권홍계(權弘啓)

자는 경관(景寬), 호는 낙금(樂琴), 본관은 예천(醴泉), 영천(榮川)에서 살았다. 졸재(拙齊) 오기(五紀)의 손자이고, 직장(直長) 우(祐)의 아들이다. 벼슬은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다. 연화산(蓮花山) 모임에서 선생을 모시고 유람했다.



태순민(太舜民 1550~1589)

자는 군헌(君獻), 호는 지담(止潭), 본관은 영순(永順), 예천(醴泉)에서 살았다. 장령(掌令) 두남(斗南)의 손자이고, 진사 석룡(錫龍)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경술년에 태어나 융경(隆慶) 경오(1570)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향년 40세이다. 역봉(櫟峯) 이개립(李介立)이 시를 지어 애도하기를,

옛날 선생님 문하에 함께 참여한 분들                師門當日共相參

오직 매옹(梅翁)과 지담(止潭) 뿐이었네               獨有梅翁與止潭

이십년 이래로 모두 세상 떠나니                     二十年來俱物化

슬픈 눈물 부질없이 강 남쪽으로 뿌리네              謾將哀淚灑江南

하였다.



김(金)

자는 문숙(文叔)이다.



장(張)

자는 자명(子明)이다.

구본(舊本)에 단지 ‘김자모(金字某:성은 김씨, 자는 문숙(文叔)이다.)’, ‘장자모(張字某:성은 장씨, 자는 자명(子明)이다.)’라고만 쓰여 있었다. 대개 당시에 이미 그 이름을 잃어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상세히 상고할 수 없어, 다만 구본에 의거하여 썼다.



박녹(朴漉 1542~1632)

자는 자징(子澄)이다. 선생의 장자인데, 가정(嘉靖) 임인년에 태어났다. 성품은 평이하고 소탈하였다. 욕심이 적어 산업을 일삼지 않았고, 가정에서 수학하였다. 시(詩)와 예(禮)에 밝았고, 누차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다섯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번번이 버렸다. 지은 시에서,

세상사 다 잊어버리고                             身世相忘外

산수 속에서 반쯤 취하네                           溪山半醉中

잠에서 깨도 일이 없어                             睡餘無一事

초가 정자 바람 속에서 베개 높이네                  高枕草亭風

하였다. 이를 인하여 호는 취수헌醉睡軒)이라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숭정(崇禎) 임신년에 세상을 떠났다.



박조(朴澡 1549~1584)

자는 자탁(子濯)이다. 선생의 계자(季子)로, 가정(嘉靖) 기유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기묘(1579)년 사마시에 합격했다. 성품이 옛것을 사모하고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유가(儒家)에 관련된 일을 숭상하였다. 일찍이 선생이 평소 저술한 글과 퇴계선생과 왕래한 서찰과 강론한 문건들을 모아 엮었다. 갑신년 회산(檜山)에서 선생을 찾아뵙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공이 이미 세상을 떠나자 아들이 실성하여 소장한 서적들을 모두 유실하여 선생의 사적들이 마침내 다 없어지게 되었다.

금송음(琴松陰)이 지은 <필설(筆說)>을 살펴보면, 선생이 일찍이 《예경여의(禮經餘意)》를 편집하고 《사례변해(四禮辨解)》를 편찬하였다. 또 상제(喪祭)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하여 의심스러운 부분을 기록하였다가 퇴계선생에게 나아가 질의하여 한 질의 책으로 엮고 《의례강록(儀禮講錄)》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주역(周易)》 한 책에 온 정력을 쏟아, 괘상(卦象)과 효사(爻辭) 및 낙서(洛書)의 수리를 추리하고 부연하여 각각 한 편을 이루었다. 이에 대하여 퇴계선생도 한번 보고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러한 책들을 이 당시에 잃어버렸다고 한다.



박년(朴涊 1560~1633)

자는 희숙(希叔), 호는 나재(懶齋), 선생의 종자(從子)이다. 가정(嘉靖) 경신년에 태어났다. 필법(筆法)이 뛰어나 한 때 사람들의 추중을 받았다. 선생의 유사를 기록한 것이 선생의 문집 부록에 보인다.



이서(李瑞)

자는 연신(延信)이고, 호는 휴재(休齋), 홍제(弘濟)의 아들이다. 벼슬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향년 56세이다.



윤흠도(尹欽道 1567~?)

자는 홍지(弘之), 본관은 양양〔襄陽:예천(醴泉)의 구호〕, 안동(安東)에서 살았다. 별동(別洞) 상(祥)의 후손이다. 융경(隆慶) 정묘년에 태어났다. 풍류가 고매하고 재능이 비범하였다. 임진(1592)년에 형 흠신(欽信)과 더불어 참의 유종개(柳宗介), 처사 임흘(任屹)과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형제 모두 전몰했다. 뒤에 관직이 추증되고 정려(旌閭)되었다.

단곡(丹谷) 곽진(郭山晉)이 지은 공의 정려문(旌閭文)에서, “형제가 함께 처사 물암(勿巖)에게 수학했다.” 하였다. 생각건대, 공이 어려서는 선생에게서 수학하다가 나중에 물암 문하에서 수학한 것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양필(李良弼)



임중규(任仲圭)



임신규(任信圭)

《물암집(勿巖集)》을 살펴보면, “물암이 경저(京邸)에서 선생에게 수학할 때 이모(李某) · 임모(任某) · 임모(任某)와 더불어 선생에게 공부하였다.”라고 하였다. 구본(舊本)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금에 고증할 수 없어 성명만 썼다.

 

출처 : 풍산김씨좌윤공종중
글쓴이 : 김정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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