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씀 마십시오." "유정(사명당의 법명), 나라가 이렇게 가다간 큰 변고가 생길 것이네. 늙은이의 직감이야." "저도 걱정입니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양반들은 당파질로 허송세월이니." "구름이 몰려오는군. 비라도 내릴 모양이야. 무릎도 시큰하이. 이제 일어남세." 물기가 잔뜩 배인 바람이 웅석봉을 타고 내려 왔다. 남명과 사명당은 단속사를 떠나 덕천동(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향했다.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를 돌고 며칠 산천재에 묵었으니 떠날 때가 되었다 생각한 사명당은 마지막으로 남명과 덕천동과 가까운 곳에 있는 단속사를 보러 갔던 것이다. 천년을 이어온 석탑 앞에 마주앉아 남명과 사명당은 시절을 걱정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남명과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사명당은 나이를 넘어서 통하는 것이 있었다. 제자들에겐 엄했으나,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누더기 승복을 걸친, 형형한 눈빛을 가진 사명당이 산천재를 찾았을 때 남명은 오랜 지기를 만난 듯했다. 그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길 나흘이 지났고, 이제 이별할 시간이 된 것이다. 단속사의 당간 지주가 소나무 숲에 가릴 무렵 비가 흩뿌렸다. 남명은 잠시 길섶 너른 바위에 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사명당은 성긴 짚신을 조여 매고 남명을 등에 업었다. "고마우이. 자네를 붙잡고 고생을 시키네." "제가 괜히 모시고 나와서 편찮으실까 걱정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자네 등에 업혀 가는 것도 괜찮으이." 남명은 사명당의 등에 업혀 천천히 시를 읊조렸다. 사명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비가 눈썹을 타고 내린다. 입술을 깨물었다. 남명은 사명당의 어깨가 약하게 들썩이는 것을 느꼈다. 이제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돌로 된 물 홈통 위에 꽃잎 떨어지고, (花落槽淵石) 옛 절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春深古寺臺) 이별할 때를 잘 기억해 두게나! (別詩勤記取) 정당매(政堂梅) 푸른 열매 맺었나니. (靑子政堂梅)" 남명과 사명당, 그들이 만나는 상상을 하다
남명은 그의 나이 예순에 지리산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다 일흔 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벼슬에 나서지 않고 산림처사로 묻혀 살았으나 그의 기개는 시퍼렇게 선 칼날이었다. "백성은 물이며, 임금은 배이니 물이 노하면 배가 뒤집힐 수 있다"<민암부(民巖賦), "문정왕후는 '과부'이며, 명종은 '고아'일 뿐"<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이라고 목숨을 걸고 상소 직언하는 선비가 바로 남명이었다. 그와 교유하였던 성운이 쓴 남명의 묘비문에는 "그는 세상사를 잊지 못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애달파하였다. 매번 달 밝은 밤이면 홀로 앉아 슬피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마친 뒤에는 눈물을 흘렸다"고 적혀 있다. 산림처사였으나 현실을 등지지 못하고 항상 나라와 백성을 걱정했던 것이다. 남명은 경(敬)과 의(儀)를 강조하며 이론에 치중하지 않고 실천을 중요시하는 학풍을 내세웠고,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정인홍, 곽재우 등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그 자신이 경의검(敬儀劍, 정인홍에게 물려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에 '안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內斷者儀)'를 새기고, 몸가짐이 흐트러질까 방울(惺惺子)을 차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열일곱의 나이에 승과에 급제하고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명산대천을 떠돌던 사명당과 남명의 만남은 요즘말로 '코드'가 딱 맞았을 것이다. 자신을 찾은 범 같이 용맹한 장부의 상을 가진 사명당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짧은 만남이었지만 남명은 사명당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길 원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남명은 그 짧은 만남과 자신의 가르침을 사명당이 잊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별할 때를 잘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나니." 이 문장만으로도 남명이 사명당과의 이별을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사명당이 불문에만 들지 않았어도 자신의 제자로 삼길 원하지 않았을까. 세 번째 걸음에서야 활짝 핀 정당매를 보다
지세가 험한 웅석봉 자락에 둘러싸인 단속사터는 참으로 고즈넉하다. 동,서 삼층석탑과 당간지주 사이에 서서 주위를 살펴보면 단속사가 상당한 규모와 짜임새를 갖춘 절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속사의 창건설화는 748년(경덕왕 7년) 이준이라는 사람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개창하여 단속사라 하였다는 설과 763년(경덕왕 22년) 신충이라는 사람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하였다는 설이 삼국사기에 전해 온다. 그러나 단속사는 1568년(선조 1년) 유생들에 의해 불상과 경판이 파괴되고, 다시 정유재란에 불에 타 천년의 법맥이 끊어지고 만다. 이후 다시 재건되었다 전해지지만, 지금은 세월이 흘러 돌로 된 동, 서 삼층석탑과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생명을 가진 것은 고려 말 이곳에서 공부하였다는 강회백이 심은 정당매(강회백의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붙은 이름이다)뿐. 매화향 가득한 단속사터를 뒤로 하고 산천재와 덕천서원이 있는 덕산으로 향한다. 시천(矢川, 화살처럼 물살이 빨라 붙은 이름이다)을 왼쪽에 끼고 덕산 가는 길은 언제나 아름답다. 봄이 무르익는 소리가 들린다. 남명과 사명당은 이 길 어디쯤에서 헤어졌을까. 사명당을 배웅하고 오는 길, 남명은 홀로 세심정에서 슬픈 마음을 시천 맑은 물에 씻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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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인암브리취러스코
글쓴이 : 신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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