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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정약용

회기로 2010. 1. 24. 18:31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茶山 丁若鏞

★다산이 34세 때 우부승지(右副承旨)의 중앙 요직에서 금정찰방(金井察訪)의 한직으로 몇 단계 밀려 좌천되었다.

준비 없이 내려간 걸음이어서 딱히 볼 만한 책 한 권이 없었다. 어느 날 이웃에서 반쪽짜리 '퇴계집(退溪集)' 한 권을 얻었다.

마침 퇴계가 벗들에게 보낸 편지글이 실린 부분이었다. 다산은 매일 새벽 세수한 후 편지 한 통을 아껴 읽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오전 내내 새벽에 읽은 편지 내용을 음미했다. 정오까지 되새기다가 편지에서 만난 가르침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서

한 편씩 글을 써 나갔다. 33편을 쓰고 났을 때, 정조는 그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 올렸다. 그 경계와 성찰의 기록에 다산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란 제목을 붙였다. 남들이 낙담해서 술이나 퍼마실 시간에 그는 선현의 편지 속에서 오롯이

자신과 맞대면했다. 박순(朴淳)에게 보낸 답장에서 퇴계가 말했다. "어찌 바둑 두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한 수를 잘못 두면 온 판을 그르치게 됩니다. 기묘년의 영수(領袖) 조광조(趙光祖)가 도를 배워

완성하기도 전에 갑자기 큰 명성을 얻자, 성급히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자임하였습니다."

이 글을 읽고 다산은 퇴계의 평생 출처가 이 한 문단에 다 들어있다고 적었다.

 

당시와 같은 성대에도 앞선 실패를 거울삼아 이렇듯이 경계한 것을 보고, 군자의 몸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한 수 배웠다고 했다.

자신의 실패 또한 몸가짐을 삼가지 못한 데서 왔음을 맵게 되돌아본 것이다. 이담(李湛)에게 보낸 답장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은 모두 세상이 날 몰라준다고 말하는데, 저 또한 이 같은 탄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들은 그 포부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탄식하나, 저는 제 공소(空疎)함을 남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탄식합니다." 허명을 얻은 것이 부끄럽다고 하신 말씀인데, 다산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그만 진땀이 나고 송구스러웠다고 적었다. 이렇게 해서 퇴계의 편지 한 줄 한 줄이 자신을 반성하는 채찍이 되고,

정신을 일깨우는 죽비가 되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사람의 본바탕이 드러난다. 좌절의 시간에 그저 주저앉고 마는 사람과 그 시간을

자기 발전의 밑바대로 삼는 사람이 있다. 평소의 공부에서 나온 마음의 힘이 있고 없고가 이 차이를 낳는다. ★

 

                          

 

을묘년(1795, 정조 19)겨울에 나는 금정(金井)에 있었다. 마침 이웃 사람을 통하여《퇴계집(退溪集)》반부(半部)를 얻어,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마치고 나서 곧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 1편을 읽고 나서야 아전들의 참알(參謁)을 받았다.

낮에 이르러 연의(演義) 1조씩을 수록(隨錄)하여 스스로 깨우치고 살피었다. 그리고 돌아와서《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이라 이름하였다. 이 상국 준경(李相國浚慶)에게 답하는 편지에 ‘재상(宰相)의 일시의 인물에 대한 한 글자의 허여(許與)가

화곤(華袞 왕공(王公)의 의복)보다 영화롭고, 한마디 말의 배척이 부월(斧鉞 도끼류로서 형륙(刑戮)에 사용하는 도구)보다

엄합니다.’ 하였다.이것은 선생이 겸손으로 한 말이다. 이제 단장 취의(斷章取義)하면 대개 윗사람이 된 이는 마땅히 여기에

대해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매양 스스로 경시하고, 스스로 업신여긴다. 그러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헐뜯거나

칭찬하고 손에 닥치는 대로 누르거나 부추기어, 그 사람의 영욕(榮辱)과 이해(利害)가 이처럼 아주 판이하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한다.

 

허여해서는 안 될 사람을 허여하는 것은 잘못이 오히려 나에게만 있을 뿐이거니와, 배척해서는 안 될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해가

장차 남에게 미칠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 되겠는가. 하물며 은혜와 원한이 흔히 한마디 말에서 말미암고 재앙과 복이 더러 한

글자의 글귀에서 일어나니, 명철(明哲)한 선비는 마땅히 독실하게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11월 21일

 

홍 상국 퇴지(洪相國退之)에게 답하는 편지에 ‘최여지(崔與之)는 예부 상서(禮部尙書)로 나라에서 불렀으되 사직소를 13번이나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고, 두범(杜範)은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므로 임금이 명하여 성문을 닫아 버리고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되

오히려 틈을 엿보아 돌아갔습니다.’ 하였다. 12인의 사례를 죽 인용하였다.

 

선생의 이 편지는 옛사람의 득실(得失)과 출처(出處)를 죽 서술하여 이리저리 모아 얽어 문장을 만들었으니 대개 문장가의

한 가지 법이다. 선생이 일생 동안 염퇴(恬退 퇴축(退縮))를 주로 하였기 때문에 무릇 예전 사람이 인퇴(引退)한 사례를 모두 찾아

모아 쓰일 때를 기다렸으니, 그 애쓰신 마음, 굳은 지조는 볼 만한 것이 있다. 세상의 허명(虛名)을 외람되이 무릅쓰고 나아가기를

탐하여 마지않는 사람이 어찌 이 백이(伯夷) 같은 풍교(風敎)에 청렴해지지 않으랴. 아! 임금의 은총(恩寵)을 못 잊고 이록(利祿)을

사모하여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죄망(罪網)에 빠진 사람이 고금을 통해 어찌 한량이 있으랴.

 

선생의 덕망은 조야(朝野)의 우러름이 거의 일치하니, 조정에 있더라도 반석(磐石)처럼 안전할 것 같은데도 오히려 이처럼

물러갔거늘 하물며 언행(言行)이 남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고 비방이 세상에 날로 높아져 원한과 저주가 사면에 집중되어

있는데도 머뭇거리고 떠나가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슬프다!

 

홍퇴지(洪退之)에게 답하는 편지에 ‘명예를 훔치고 지위를 도적질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3일 동안

벼슬하다가 마음에 만족하지 않아 곧 물러나 다시금 거짓을 꾸며, 이름을 자랑하는 것으로써 명예를 훔치고

지위를 도적질하는 징검다리로 삼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습니다.’ 하였다.

선생의 이 편지를 지극한 정성과 애타는 성심 중에 점잖은 익살의 의사를 넌지시 띠고 있다. 그러나 군자가 환난을 염려함이

주밀하다 하겠다. 당시에도 경박하고 비루하고 패악(悖惡)한 무리가 혹 소인의 마음으로 성현(聖賢)을 헤아리는 자가 없을 줄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남에게 혐의 받을 일은 대인(大人)도 이를 멀리하였던 것이다. 근세(近世) 조정에서는 ‘출처(出處)’

두 글자에 대해 강구하는 사람이 없다. 대신 이하가 나아가고 물러나며, 사양하고 받는 의리에 하나도 의거한 바가 없고,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어려운 처지라서 얼굴에 부끄러운 바가 있으니, 사대부의 풍절(風節)이 땅을 쓴 듯 다 없어졌다.

 

염치의 도리가 없어지고 예의(禮義)가 따라서 허물어지니, 장차 어느 지경엔들 이르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사람을, 갑자기

고도(古道)로 요구할 수는 없으나, 진실로 성명(聖明)이 배양(培養)에 유의하여, 지절(志節)을 꺾어 누르거나 구속하지

않는다면 몇 해 뒤에는 절의를 지키는 선비가 차차 나올 것이다.

 

판서 민기(閔箕)에게 답하는 편지에 나아가는 것이 옳아서 나아가면 나아가는 것을 공손함으로 삼고, 나아가지 않는 것이

옳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 것을 공손함으로 삼는 것이니, 옳음[可]이 있는 곳이 곧 공손[恭]이 있는 곳이다.’ 하였다.

이것은 맹자(孟子)가 말한 ‘나만큼 왕을 공경하는 이가 없다.’는 것과 같다. ‘옳음[可]이 있는 곳이 곧 공손함이 있는 곳이다.’라고

한 한마디 말은 이야말로 ‘군자로서 때에 알맞게 한다.[君子時中]’는 그 뜻이다. 저울질하여 헤아림이 지극히 정밀하여 바꿀 수

없으니, 일생 동안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사군자(士君子)가 벼슬길에 나아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 이 한마디

말로써 종신토록 패복(佩服 몸에 지님)하는 부신(符信)으로 삼지 않으면 곧 임금의 뜻에 아첨하고 영합함이 어느 지경엔들 이르지

않겠는가. 윗사람된 이가 아랫사람을 대하고 대중을 거느림에도 또한 그 옳고 옳지 않음을 조용히 살펴보고 먼저 좋아할 만한

순종과 미워할 만한 교만으로 성급히 공손과 오만을 결정하지 않는다면 거의 공평을 얻게 될 것이다.

 

판결사 임호신(任虎臣)에게 보내는 편지에 ‘선정(先正) 정공(鄭公 여창(汝昌))은 어느 고을 사람이며, 어느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무슨 관직에 이르렀습니까?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된 것은 무슨 일로 인하여 그렇게 외직에 보임되었으며, 그 죄를 얻게

된 것은 점필재(佔畢齋) 문도였기 때문이라 하나 자세한 것은 또한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으며, 관북(關北)에 귀양간 것이 정확히

어느 지방이며, 죄를 입은 해는 어느 해이며, 장사는 어느 지방에 지냈습니까? 아울러 일러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선생의 당시에도 오히려 일두(一蠹)의 행적을 알지 못함이 이와 같았다. 대개 선생의 이전에는 사화(士禍)를 여러 번 겪어서 모든

전현(前賢)들의 언행(言行)이 다 없어져서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연대가 그다지 멀지 않았으되 그 아득하여 알지 못함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송태수(宋台叟)에게 답하는 편지에 ‘전일 정상(丁相)이 나를 책망한 뜻도 「돌아와서 숙배(肅拜)한 뒤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상은 병이 없는 사람이므로 병의 고민을 알지 못한 것이고, 또 내가 전후로

물러나기를 애걸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니 서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고 여겨서

전일 편지에 운운(云云)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영공(令公)의 의사를 살펴보니 정상이 책망한 바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하였다.

 

정상(丁相)은 곧 우리 선조(先祖) 좌찬성(左贊成) 충정공(忠靖公 정응두(丁應斗)의 시호)을 두고 이른 것이다.

당시에 아마도 선생의 출처(出處)로써 권면한 말이 있었으므로 선생이 그렇게 말한 듯하다.

참판 박순(朴淳)에게 답하는 편지에 ‘어찌 바둑 두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한 수를 헛놓으면 온 판을 실패하게 됩니다.

기묘 영수(己卯領袖 조광조(趙光組))가 도(道)를 배워 완성하기도 전에 갑자기 큰 명성을 얻자, 성급히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자임하였습니다.’ 하였다.이 한 문단은 그야말로 선생이 평생 동안 이에 말미암아 출처를 그리하였던 대목이다.

 

당시 군자(君子)가 지지를 얻고 뭇 선인(善人)이 나아감이 마치 기러기털이 순풍을 만난 듯하여 막을 수 없었다. 국조(國朝)에

선인(善人)이 성대히 진출하여 마침내 패망함이 없는 상황으로는 이때만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선생이 놀라고 두려워하고 삼감이

이처럼 심각하여 앞 사람의 실패한 일을 거울로 삼아 항상 경계하였으니, 군자가 명철(明哲)하여 몸을 보전한 것이 이러함이 있었다.

선생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組)의 호)의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세상일을 담당한 것 때문에 실패하게 되었다.’ 하여, 탄식하고

애석히 여기면서 세 번이나 자기 의사를 밝히었다. 아 ! 선생이 바야흐로 정암(靜庵)을 경계로 삼은 것이다. 비록 성상(聖上)이

옆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고, 공경(公卿)이 홀(笏)을 들고 바라고, 도성 백성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맞이한들 선생이 어찌 오래

머무르고 지체하여, 성상의 뜻이 혹시라도 싫어하고 소인들이 그 틈을 타서 여지없이 패망하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려 하였겠는가.

 

곧 선생은 위대한 덕을 깊이 숨겨 흔들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하였으니, 다만 자신만을 편안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실로 당시 조정에

있는 선류(善類)를 널리 구제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제공(諸公)들의 소견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초빙(招聘)하자는 청이 날마다

왕에게 진달되고, 책면(責勉 퇴계에게 벼슬에 나서라고 권하는 것)하는 편지가 시골에 번갈아가며 날아들었으니, 선생이 어찌

생각을 바꾸어 나서려 하였겠는가.

 

아! 예로부터 진출하기를 탐내어 싫어함이 없는 무리는 임금이 바야흐로 미워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아첨하여 용납받으려 하고,

조정이 바야흐로 참소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논박(論駁)하여 나아가려 하고, 백성이 바야흐로 원망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임금을

속여서 지위를 굳히려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권세가 떠나가고 운수가 다하면 허물과 재앙이 아울러 일어나고, 영수(領袖)가

한번 패망하면 부하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명목없는 죄안(罪案)은 아홉 번 죽어도 밝히기 어렵고, 뜻하지 않은 변고는 천리

밖에서 모여든다. 그래서 마침내는 7척(尺)의 몸을 보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도도(滔滔)히 잇달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진실로 한 구역의 임천(林泉)을 얻어서 소요 배회하고, 조정에서는 남을 따라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며, 일체의 현우(賢愚)ㆍ

득실(得失)과 시비(是非)ㆍ영욕(榮辱)에 대해서는 담담하게 사물[物]은 각각 사물[物]의 이치대로 버려두고 마음에 두지

않음으로써 내 본연(本然)의 천성을 보전한다면 거의 퇴옹(退翁)의 죄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조건중(曺楗仲)에게 답하는 편지에 ‘보내온 편지에 《학자(學者)가 이름을 도둑질하여 세상을 속인다.》는 논의는,

고명(高明 상대방에 대한 존칭)만이 근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대저, 이름을 좋아한다는 말을 피하려 하면 천하의 일은

할 만한 것이 없다.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는 사람은 본디 미워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 논의를 가벼이 하면 이는

천하의 사람을 거느리고서 악으로 몰아가는 것이 된다. 그래서 반드시 주정하고 꾸짖고 음탕하고 설만하며 말이 패악하고

재물을 탐내어 염치가 없어진 뒤에야 바야흐로 이름을 좋아한다는 말을 잘 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의사(疑似)한

사이에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그 논의가 예민한 자, 노둔한 자 등의 모든 병통은 곧 선생이 평일 많은 사람을

교육하여 다 일일이 경험한 것이다. 이들을 다 감싸고 아울러 포용하여 훈도(薰陶)하고 고주(鼓鑄)해서 함께 대도(大道)에

이르게 하였으니, 아! 그 얼마나 훌륭한가.

 

그 가운데 처음에는 정성스럽다가 마지막에는 소홀한 자와, 곧장 폐하였다가 자주 회복하는 자들은 이 또한 사장(師長)들이

쉽게 버리는 바이다. 그런데, 위대하다, 선생이시여! 진실로 학문으로 자처하면 기꺼이 즐겨 받아들여 다 함육(涵育) 속에

있게 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이러한데도 오히려 교화에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이 글을 여러 번 되풀이 읽고 나니, 나도 모르게 기뻐서 뛰고 감탄하여 무릎을 치며 감격하여 눈물이 나서 애연(藹然)히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鳶飛戾天] 물고기가 못에서 뛰는[魚躍于淵]’ 뜻이 있다.

 

노과회(盧寡悔)에게 보내는 편지에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훈석(訓釋)한 말 몇 군데에 나의 견해로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우리들의 날마다 하는 일은 정한(程限)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정한이 없기 때문에 잠시 떨치다가 곧 허물어져서 토붕와해(土崩瓦解)

하여 어찌 할 도리가 없게 되니, 이것이 진남당(陳男塘)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지은 까닭이다. 천하에 가르칠 수 없는

두 글자로 된 나쁜 말이 있으니 곧 ‘소일(消日)’이 그것이다. 슬프다. 그 어떤 일을 하는 바가 있는 사람의 처지에서 말하면,

1년 3백 60일, 1일 96각(刻)이 거의 스스로 이어대기에 부족할 것이다. 농부는 밤낮으로 농사일에 부지런히 힘쓰니, 만일 해를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반드시 끈으로 끌어당길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곧 이날을 보내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고민하여 장기ㆍ바둑과 축국(蹴踘)놀이 등등 도모하지 않는 바가 없단 말인가. 남당(南塘)의 이 숙흥야매잠 때를

안배하고 차서를 배열(排列)하여 극히 정한이 있으니, 참으로 학자(學子)들의 보결(寶訣)이다.

 

이재(伊齋)가 선생 및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호)와 이 주해(註解)를 가지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변정(辯訂)하여 해를 넘기고

서독(書牘)이 쌓였으되 지루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진실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혹 자기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라서 자기

잘못을 고치기를 꺼리지 않고, 혹은 언론(言論)를 정립(定立)하여 자기 뜻을 보여서 구차히 남의 의견에 뇌동(雷同)하지 않기에

이른 것은 이것이 다 옛날 현철(賢哲)들의 풍류운사(風流韻事)이고, 후생들이 도저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같은 현철(賢哲)하고 지혜로운 이도 그 저술한 바에 대해서는 문인과 지구(知舊)들에게 마음대로 잘못을

지적하게 하여 발견되는 대로 다듬었는데, 하물며 초학말류(初學末流)에 있어서이겠는가. 초학말류로서 우연히 기록한 것이 있으면

편벽되게 고집하여 바꾸려 하지 않고, 정하게 써서 보물로 간직하고서 사람을 만나면 과시(誇示)하여 칭찬을 받으려 하며, 혹

수정이나 지적을 받으면 발끈 좋지 않게 여겨서 억지로 자기 잘못을 꾸며대고, 속으로는 부끄러우면서 겉으로는 뉘우침에 인색하여

너절하게 구차히 때워넘기는 자는 그 옛날 선철(先哲)들의 천하에 공정(公正)한 마음과 비교한다면 어떠하겠는가.

 

노이재(盧伊齋)에게 답하는 두 번째 편지에 ‘살아 있지 않으면 정체한다.[不活則滯]에 대해서는

내가 전일 본 것이 매우 잘못되었으니 지금 공의 말씀대로 따릅니다.’ 하였다.

이것이 비록 미세(微細)한 것이나 실로 선생의 큰 본원(本源)이 나타난 곳이니, 천하의 대용(大勇)이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고, 인욕(人欲)이 말끔히 다 없어지고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는 경지가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의 문인(文人)이나 학자(學子)들은 혹 한 글자 한 글귀라도 남에게 지적을 당하면, 속마음으로는 그 잘못을 깨달으면서도

잘못과 그른 것을 문식(文飾)하여 승복하고 굽히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발끈 얼굴빛에 나타내고 꽁하게 마음에 품고 있으며,

마침내는 해치고 보복하는 사람까지 있기도 하니 어찌 여기에서 보고 느끼지 못하는가. 어찌 문자(文字)에서만 그러할 뿐이겠는가.

모든 언론(言論)과 시행(施行)하는 사이에도 더욱 이러한 근심이 있으니, 마땅히 거듭 생각하고 살펴서 이런 병통을 없애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만일 그 잘못을 깨달으면 즉시 생각을 바꾸어 고쳐서 봄눈 녹듯이 선(善)을 좇아야만,

거의 무상(無狀)한 소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12월 1일 이중구(李仲久) 담(湛) 에게 답하는 편지에 ‘전일 제법(除法)을 직접

가르쳐주셔서 스스로 이미 요령(要領)을 얻었다고 여겼는데, 스스로 산대[籌]를 놓아봄에 미쳐서는 또 그 방법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어둡고 둔함이 이와 같습니다. 태현경(太玄經)을 이제 입수(入手)하였으니 다행입니다.’ 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주일무적(主一無適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 잡념을 없앰)의 공부를 알 수 있다. 선생처럼 곰곰이 생각하고

세밀히 살피는 방법으로 진실로 상수학(象數學)을 잠깐만 연구하면 어찌 세밀하게 분석하지 못하였겠는가. 아마도 한쪽에 버려두고

철저히 힘쓰려는 의사가 없었을 뿐이리라. 그러나 그 편지 중에 이미 ‘어둡고 둔하다.’고 스스로 책하고, 또 ‘늙어 정신이 흐리다.’고

스스로 핑계대며, 조금도 능멸하거나 흘겨보는 의사가 없었다. 겸손한 군자(君子)가 자기를 지키고 또한 남에게 굽힘이 이와 같았다.

 

태현경(太玄經)에 이르러서는, 이미 ‘세상에 울렸다.[鳴於世]’고 허여하고, 또 ‘후세의 자운(字雲)이 되지 못한다.’고 스스로 판단하였다. 우리 유가(儒家) 사람들이 이단잡서(異端雜書)를 진실로 외면하여 멀리하고 좋아하여 쏠리는 의사가 없음이 이와 같다면 어찌 젖어

빠져들고 미혹됨을 근심하겠는가. 대개, 이 일에서 이미 의리(義理)의 참맛을 얻었기에, 그 마음속에 둔 것이 차서 넘치고 흡족하여

천하만물이 이것과 바꿀 수 없음을 안 것이다. 때문에 그 주일무적(主一無適)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중구(李仲久)에게 답하는 편지에 ‘나이 60인데 아직도 반쯤 밝고 반쯤 어두우며, 마음이 보존된 듯 잃어진 듯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선생의 ‘반쯤 밝고, 보존된 듯하다.’는 말씀은 참인지 거짓인지 모르겠다. 대현(大賢)의 지위에 이르러도 오히려 이러한

광경이 있겠는가. 아마도 겸손으로 한 말씀일 것이다. 공자(孔子)의 말씀에 ‘나에게 몇 해만 더 주어 《주역(周易)》 배우기를

마치게 하면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공자가 어찌 《주역(周易)》 배우기를 마치지 못하였고, 또한 일찍이 큰 허물이

있었겠는가. 성현(聖賢)의 이러한 말씀은 대개 후학(後學)으로 하여금 장차 미칠 수 있어 하늘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이르지 못할까 여겨 선을 긋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 무릇 고묘(高妙)하고 황홀(恍忽)하며, 신변(神變)하고 영통(靈通)한

것은 모두 우리 유가(儒家)의 기미(氣味)가 아니니, 학술을 선택하는 자는 몰라서는 안 된다.

 

이중구(李仲久)에게 답하는 편지에 ‘다만, 책을 볼 때에는 맛이 있어서 맹씨(孟氏)의 추환(芻豢)의 설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음을 실감했는데, 이 뜻이 한 해 한 해 갈수록 더 깊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공부를 갑자기 폐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정자(程子)ㆍ주자(朱子) 제선생(諸先生)이 그 제자의 물음에 답할 적에나 혹은 경전(經傳)의 뜻을 해석할 적에 흔히 ‘마음을 가라앉혀

음미하여 스스로 깨쳐야 한다.’ 하였고, 마침내 그 맛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에 더욱 의혹스러웠으나 풀지

못하였다. 요즘 들어 차츰 생각해보니 대개 맛이란 이 맛을 맛본 사람과 말할 수 있고, 맛보지 못한 사람과는 비록 말하더라도

한결같이 모르게 되는 것이다. 후세 사람은 안자(顔子)가 즐긴 것이 무슨 일인지 모른다. 사람이 안자의 지위에 이르지 못하면

반드시 안자가 누리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알겠는가. 비유컨대, 꿀을 먹어본 자가 꿀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

꿀맛을 말하려 하나, 마침내 형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선생의 ‘맛이 있었다.’는 말씀은 그 무슨 좋은 맛이 있음을 분명히

아는 것이지만, 거칠고 부족한 사람은 또한 상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슬프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정자(程子)ㆍ

주자(朱子)ㆍ퇴옹(退翁)이 맛본 바의 맛을 맛보지 못하고 또 안자(顔子)가 누리던 바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면, 비록 날마다

오제(五齊 다섯 가지의 술)와 팔진미(八珍味)를 실컷 먹으며 공후(公侯)의 부귀를 누리더라도 오히려 주리고 또 궁곤하다 하겠다.

 

그 편지에 또 ‘내 기(記 도산기(陶山記))와 시(詩 도산잡영(陶山雜詠))가 공에게까지 들렸다 하니 깊이 송구스럽습니다.

우스개삼아 한 말이라 반드시 다 이치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가벼운 짓을 한 허물은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하였다.

내 평소에 큰 병통이 있다. 무릇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술작(述作)이 없을 수 없고, 술작(述作)이 있으면 남에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바야흐로 그 생각이 이르게 되면 붓을 잡고 종이를 펴서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글을 쓰며, 글을 짓고 나서는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좋아하여 곧 조금만 문자(文字)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미처 내 말이 완전하냐, 편벽되냐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친밀하냐,

소원하냐 하는 것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급히 전하여 보이려 한다. 그러므로 사람과 한바탕 말하고 나면 마음속과 상자 속에는

도무지 한 가지 물건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로 인하여 정신과 기혈(氣血)이 다 흩어져 없어지고 새어나가서 쌓이고 길러지는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이러하고서 어찌 성령(性靈)을 함양(涵養)하고 몸과 명예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와서 점검해보니,

모두가 ‘경천(輕淺)’ 두 글자가 빌미가 된 것이다. 이것은 덕을 숨기고 수(壽)를 기르는 공부에 크게 해로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언론(言論)과 문채(文彩)가 다 수두룩 멋이 있으나, 점점 천루(賤陋)해져서 남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지금 선생의 말을 보니 더욱 느끼는 바가 있다.

 

이중구(李仲久)에게 답하는 편지에 ‘요구하신 재명(齋銘 정존재명(靜存齋銘))은 공의 의도는 주로 정(靜)에 의착(依着)하는 것으로

법을 삼아 기질(氣質)의 병통을 구제하려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의도는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정존(靜存)’ 두 글자는 끝내

한쪽의 도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잠(箴)의 중간 부분과 끝 부분에 동적(動的)인 측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경(敬)도 아울러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정존(靜存)과 동찰(動察)은 서로 보완하여 이루어진다. 대개, 정존(靜存)하지 못하면

동찰(動察)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존(靜存)의 공부는 마땅히 어떻게 힘을 써야 하는가. 주경(主敬)을 본(本)과 체(體)로 삼고,

궁리(窮理)를 용(用)과 말(末)로 삼아야 한다. 이른바 궁리(窮理)란 현묘(玄妙)하고 심오(深奧)한 이치를 탐색(探索)하며 만 가지

변화를 두루 섭렵하는 것을 두고 이르는 것이 아니라, 무릇 우리의 일용(日用)하는 인륜(人倫)의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다 헤아려

요리하여 말없이 마음 속에서 분변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헤아리되 ‘어버이에게서 무슨 명이 있으면 내가 어떻게 순종해야 할 것인가.

임금에게서 무슨 일을 시킴이 있으면 내가 어떻게 받들어야 할 것인가.’ 하고, 또 헤아리되 ‘전쟁이 일어나 어수선하고 범이나 이리

그리고 도적 등의 일이 있으면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하여, 일일이 정해진 계책이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일을 당하여 수용(需用)함에 있어 전착(顚錯)되거나 황란(慌亂)되는 병폐가 있음을 면할 수 있다. 이것이 정존(靜存)이

동찰(動察)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헤아림’을 분수에 지나치게 해서 어지러이 생각하고 망령되이 상상하는 지경으로

범해가면 곧 함양(涵養)의 공부에 크게 방해로움이 있다. 그러니 모름지기 항상 주의를 환기하여 한 ‘경(敬)’자를 뭉쳐 쌓아서

마음속에 있게 해야만 바야흐로 정존(靜存)의 진경(眞境)이 된다.

 

이것이 선생이 담적무위(湛寂無爲 깊고 고요하여 아무 하는 일 없음)를 정존(靜存)의 완전한 공부로 삼으려 하지 않고, 반드시

동찰(動察)의 측면도 겸해서 말한 까닭이다.

이중구(李仲久)에게 답하는 편지에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의 잘못된 곳을 지적해 보여 주니 매우 고맙습니다. 보내온 편지에 《간혹 긴요하지 않은 것도 수록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우리 유가(儒家)의 학문이 이단(異端)과 같지 않음이 바로 이러한 곳에 있습니다. 오직 공자(孔子) 문하의 여러 제자들이 이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논어(論語)》에 기록된 것에는 정(精)하고 깊은 곳도 있고, 거칠고 얕은 곳도 있으며, 긴요히 수작한 곳도 있고 한가히 수작한 곳도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의 이 글은 전편(全篇)이 매우 좋다. 이를테면, 청선(聽蟬)과 정초(庭草)의 비유는 옛사람의 풍범(風範)과 신채(神彩)의 진수를 깊이 얻은 것이다. 대개 의리(義理)와 심신(心身)에 나아가 언제나 강론 확립하는 것이 진실로 절실할 것이다. 그러나 그 성령(性靈)을 편히 기르고 정신을 잘 펴서 혈맥이 잘 통하고 수족(手足)이 뛰고 춤추게 하는 것은 반드시 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하며, 꽃을 찾고 버들숲을 다니는 즈음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기수(沂水)에서 멱감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쐬겠다.’는 증점(曾點)의 대답이 홀로 부자(夫子)에게 허여를 받은 까닭이었다. 선생이 홀로 도의 근원에 이르고 오묘(奧妙)한 경지에 나아갔으므로 본디 제공(諸公 퇴계의 제자들을 가리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중구(李仲久)의 문목(問目)에 대하여 답하는 편지에 ‘선생(先生 주자(朱子)를 말함)이 일찍이 제거절동상평다염공사(提擧浙東常平茶鹽公事)를 지냈으니 실로 감사(監司)가 출척(黜陟)하는 소임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말로 《거자(擧刺)의 임무를 외람되이 무릅쓰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거(擧)는 올려 씀을 말한 것이고, 자(刺)는 내침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을 천거하는 것을 거삭(擧削)이라 하는 것은 또한 자세히 알 수 없는 바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주자서의의(朱子書疑義)에 답한 것은 모두 80여 조(條)인데 다 정확(精確)하고 명백하여 묵은 의문점이 환하게 풀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 방언(方言)ㆍ속어(俗語) 및 명물(名物)의 알기 쉬운 것과 자의(字義)의 근거가 있는 것은 선생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고증하기 쉬운 것이다. 주자(朱子)의 출처(出處)ㆍ교제(交際)와 연월(年月)의 선후와 사적의 본말이 연보(年譜)에 보이지 않고 다른 책에 뒤섞여 나온 것에 이르러서도 다 조목별로 정리하고 유별로 연결하여 눈앞의 일처럼 환하게 밝혔으니, 진실로 순수한 마음, 지극한 정성과 독실히 애경(愛敬)하고 멀리 사모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그 혜경(蹊逕)과 문리(紋理)의 세밀함을 찾은 것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주자(朱子)를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기에서 법받아야 할 것이다. 옛날에 사람을 천거할 적에 판대기를 깎아서 그 이름을 썼으므로 ‘염독(剡牘)’이라 하였으니, 거삭(擧削)도 또한 ‘천염(薦剡 천거)’을 두고 이르는 듯하다. 그러나 또한 감히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이중구(李仲久)에게 보내는 답서에 ‘사람들이 항상 말하되 《세상이 나를 알지 못한다.》하는데, 나도 이러한 탄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포부를 알지 못함을 탄식하고, 나는 내 허술함을 알지 못함을 한탄합니다.’ 하였다.

이것은 선생에게 있어서는 실로 겸손으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또한 실로 이러한 근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 대개 허명(虛名)이란 비방이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고, 재앙이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평생에 총명이 부족하거늘 모르는 사람은 혹 ‘잘 기억한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을 적마다 나도 모르게 땀이 나고 송구스럽다. 이를 태연히 받아들여 사람들이 속아 주는 것을 즐기다가, 하루아침에 천근의 무게를 난장이에게 지워서 그것을 메고 일어서라고 책임지운다면, 검려(黔驢)의 기능이 다 드러남에 군색하고 답답하여 몸둘 곳이 없을 것이니, 이는 매우 두려워할 일이다.

아! 선생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학문과,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주는 대업(大業)으로, 당시 조정에 있는 제공(諸公)도 오히려 문장(門牆)의 밖에 있어서, 그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성대함을 한 두 가지도 엿보지 못하였을 것인데, 선생은 오히려 허술함으로 자처하여 포부를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지 않았으니, 겸손한 군자이시다. 선생이 아니면 내 누구에게 의귀(依歸)하겠는가.

임사수(林士遂)에게 보내는 편지에 ‘보내온 행록(行錄) 뒤의 제시(題詩)는 족하(足下)가 재주와 필치(筆致)가 호쾌(豪快)하여, 강운(强韻)을 얻어 영기(英氣)를 부리고 어려운 운자(韻字)를 인하여 공교함을 내보이되, 순풍을 만난 배와 진중에 내닫는 말이 한번 손을 놓기만 하면 그칠 줄 모르듯 질펀하게 치닫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은 시인(詩人)이나 부객(賦客)의 품평에 있어서는 좋은 풍격(風格)과 아름다운 제목(題目)이 된다. 그러나 《퇴계집(退溪集)》 안에서 살펴보면 도리어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운 빛이 얼굴에 뒤덮이고 식은땀이 등을 적시게 하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어쩌면 도덕ㆍ인의(仁義) 중에 재인(才人)과 묵객(墨客)의 이러한 기미(氣味)를 내버리어서, 마치 광대와 하천(下賤)이 공자(孔子)ㆍ안자(顔子)의 자리에 이르면 그 풍신(風神)이 서늘함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슬프다. 그 이러한데도 망연(茫然)히 깨닫지 못하고 반생 동안 깊이 빠져서 시문(詩文)의 벽(癖)에 부대끼어 풍월(風月)을 읊고 화조(花鳥)를 희롱하여 경망하게도 스스로 기뻐하고 위세 당당하게 스스로 우쭐대어 만인들 가운데 내달아 뽐내려 한다. 그러나 식자들이 비루하게 여김이 시장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것과 다름을 알지 못한다. 어찌 천루(賤陋)한 것만이 밉살스러울 뿐이랴. 뭇 시기와 대중의 성냄이 또한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마침내는 간혹 재앙이 그 몸에 미침을 면치 못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생의 말뜻을 살펴보건대 찬양하는 중에도 기풍(譏諷)을 띠고 있다.

노인보(盧仁甫 경린(慶麟))에게 답하는 편지에 ‘문열공(文烈公)의 화상(畵像)은 손에 몇 알의 염주를 쥐고 있으니, 이것은 한 시대의 습상(習尙)으로 그러한 것이지만, 지금 학교의 곁에 두는 것은 후학에게 보이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선생이 선배 유현(儒賢)에 대하여 극히 존경을 가하여 터럭만큼도 침범하는 일이 없었으나, 지금 문열공의 화상에 몇 알의 염주를 쥐고 있는 일에 대해서 논의를 정립함이 자못 엄절(嚴截)하니, 평일에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한 것을 여기에서 일부 볼 수 있다. 그처럼 겸손한 덕으로 이처럼 정직하고 준절(峻截)한 말씀이 있었으니, 학자들이 여기에서 두려워할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자발(李子發)에게 답하는 편지에 ‘한훤당(寒暄堂)이 도학에 있어서 만일 과연 자사(子思)ㆍ맹자(孟子)ㆍ정자(程子)ㆍ주자(朱子)와 같다면 세대(世代)의 설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매우 마땅합니다. 다만, 선생(김굉필을 지칭함)은 덕행이 높기는 하나 미처 논저(論著)하지 못하여 후세에 고술(考述)할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한훤당(寒暄堂)의 학문에 그 존모(尊慕)를 극진히 하였으나, 도문학(道問學)의 측면에 미진한 바가 있었으므로 항상 완전히 구비하기를 요구하는 말이 있었다. 문열공(文烈公)에 이르러서는, 이미 세상에 드문 충절로 허여하면서도 사론(士論)이 격렬히 배척하는 것을 아름다운 뜻이라고 돌리고 어찌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하였으니, 그 이단(異端)에 엄격함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유인중(柳仁仲)이 조정암(趙靜庵)의 행장을 논함에 답하는 별지(別紙)에 ‘오늘날로 말미암아서 그 서여(緖餘)를 살피려 하나 거의 정확하게 의거할 만한 사실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성현이 능히 후세의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입언(立言)하여 후세에 전한 데에서 힘입은 것입니다.’ 하였다.

정암(靜庵)이 한창 나이에 요직에 쓰이어 학문이 바야흐로 진취하는데 뜻이 이미 펴졌고 이름이 바야흐로 성대한데 화가 이미 이르렀으니, 아무리 저서(著書)하고 입언(立言)하여 후학(後學)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했더라도 될 수 있었겠는가. 비록 도학의 전체에는 한쪽이 부족하나 마땅히 용서할 만한 경우에 있는 듯하건만, 선생이 정암을 논함에 오히려 이와 같았다. 하물며 초야(草野)에 곤궁하게 살고 있는 선비로서 나아가서는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사우(師友)ㆍ제자와 선왕(先王)의 도를 강명(講明)하지 못하여 후세로 하여금 고술(考述)할 바가 있게 하지 못하고서 그 고루(孤陋)함을 편안히 여기고 그 오만함을 키워나가며, 남과 서로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거짓 겸손으로 꾸미어 길게 읍하고 우뚝 꿇어앉으며 방자히 존덕성(尊德性)으로 자처하는 자는, 아마도 주자(朱子)ㆍ퇴옹(退翁)의 가법(家法)과는 다름이 있는 듯하다.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은 그래도 낫거니와, 육상산(陸象山)과 같은 이단으로 흐르지 않겠는가. 이는 다 학술의 차이가 호리(毫釐)가 어긋나면 마침내 천리로 벌어지게 되는 부분이다. 이 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박택지(朴澤之)에게 보내는 편지에 ‘사서(四書) 이외에 기록된 공자(孔子)의 언행(言行)은 대부분 전국(戰國) 때 기탄이 없는 간인(姦人)의 가탁(假托)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평생에 고루하고 아는 것이 적으나, 다만 고문(古文)을 독실히 좋아하였다. 무릇 선진(先秦)ㆍ서한(西漢)의 글은 근고(近古)의 것이기 때문에 시(詩)를 논하고 예(禮)를 설명한 것이 혹 경의(經義)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항상 보면서 후세 사조(詞藻)의 글보다는 낫다고 여겼었다. 지금 선생의 말씀이 대정지엄(大正至嚴)하여 비록 《가어(家語)》나 《설원(說苑)》 같은 책들도 잡서(雜書)로 돌려서 매우 깊이 배척하였으니, 미세한 조짐이 생길 때 막는 뜻이 이러한 점이 있었는데, 더구나 잠시라도 패관(稗官)이나 소품(小品) 등 음탕사벽(淫蕩邪僻)하여 바르지 못한 서적에 눈을 기울일 수 있겠는가. 근세의 재사(才士)와 빼어난 유자(儒者)가 대부분 《수호전(水滸傳)》ㆍ《서상기(西廂記)》 등의 책에서 발을 빼지 못하였으므로 그 문장이 다 가냘프고 구슬프며 뼈를 찌르고 살을 녹게 하니, 도의(道義)와 이취(理趣)에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번화한 부귀가(富貴家)의 구기(口氣)에도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복록(福祿)에 매우 해롭다. 이는 다 잡서를 즐겨 본 해이다.

또 박택지(朴澤之)에게 보낸 편지에 ‘사람의 일신은 이(理)와 기(氣)를 겸비하였는데,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합니다. 그러나 이는 작위함이 없고 기는 사욕(私欲)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理)의 실천을 위주하는 사람은 기(氣)를 기름이 그 가운데 절로 있으니 성현(聖賢)이 바로 그러한 분이고, 기(氣)를 기르는 데에 치우친 사람은 반드시 본성(本性)을 해치기에 이르니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위생(衛生)의 도리를 진실로 그 극치를 충만시키려 한다면 밤낮 게을리하지 않으며, 몸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직분은 다 폐기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것은 맹자(孟子)의 ‘대체(大體)ㆍ소체(小體)의 설과 일관된 의리이다. 사람의 일신은 이(理)ㆍ기(氣) 두 가지가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理)가 기(氣)에 붙여 있음은 사람이 집에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그 집에 거처할 적에 기둥ㆍ들보ㆍ서까래가 혹 썩고 기운 것이 있으면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결같이 이것에 힘을 쓰고 그 다른 것을 모르면 이것은 그 궤만 아름답게 하고 그 구슬은 잊어 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송(宋) 나라 때의 제 선생(諸先生 정자(程子)ㆍ주자(朱子) 등을 말함) 이후로 혹 도가(道家)의 글에서 한두 가지 취한 것은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가지며 정신을 발산하고 기운을 펴는 것이 혹 본원(本源)을 함양(涵養)하는 공부에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날 선왕(先王)이 백성을 기르는 데에는 그 기(氣)를 기르는 법이 ‘예악(禮樂)’ 두 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예법이란 신체를 단속함으로써 그 방종하여 병을 발생시킴을 금지하는 것이고, 음악이란 혈맥(血脈)을 유통시킴으로써 그 막히어 병을 이룸을 소통한 것이다. 한번 늦추고 한번 죄며, 잡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며, 아울러 행하되 어그러지지 않고 겸하여 나아가되 치우치지 아니하여 이(理)가 능히 기(氣)를 거느리고 기(氣)가 능히 이(理)를 기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다 수고 강녕(壽考康寧)하고 휴양 생식(休養生息)하며, 풍속이 순박하고 화합하여 태평스러운 경역에 들되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후세에는 예악(禮樂)이 허물어져 정욕(情慾)이 방종해졌다. 혹 일락(逸樂)으로 해서 재앙을 부르기도 하고 수고(愁苦)로 해서 화기를 상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요사(夭死)하는 자가 잇달고 기상이 처참하게 되었다. 이에 묵은 것을 토해 내고 새 기운을 들이마시는 술법과 곰처럼 더위잡고 새처럼 목을 늘이는 방법[熊經鳥伸之方]이 그 사이에 횡행하게 되고 음사(淫邪)하고 괴이한 설이 그 양심(良心)을 파괴하고, 금석(金石)으로 제조한 약제(藥劑)로 그 타고난 원기를 해치어, 수명의 근원에는 도움이 없고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하여 돌이킬 줄 모르게 하니 불쌍하다. 《참동계(參同契)》의 주(註 주자(朱子)가 참동계의 주를 지었다.)는 아마도 세상을 근심하여 풍자(諷刺)의 뜻을 붙인 의도일 뿐이지, 어찌 참으로 이에서 취한 바가 있어서이겠는가.

영천군수(榮川郡守)에게 보내려고 초한 편지에 ‘중문(仲文 김중문(金仲文)으로 당시 서원의 유사(有司)임)이 비록 두 번 허물이 있었으나 능히 고치면 허물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였다.

예로부터 성현(聖賢)이 다 허물을 고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고, 혹 도리어 ‘애초에 허물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하기까지 했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사람의 상정(常情)은 매양 잘못된 곳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이 성냄으로 바뀌어진다. 그래서 처음에는 문식(文飾)하려 하고 마지막에는 괴격(乖激)하게 되니 이것이 허물을 고치는 것이 허물이 없는 것보다 어려운 까닭이다.

우리들은 허물이 있는 자들이다. 힘써야 할 것 중에 급한 일은 오직 ‘허물을 고치는 것[改過]’ 두 자일 뿐이다. 세상을 오시(傲視)하고 남을 능멸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기예를 자랑하고 재능을 뽐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영화를 탐내고 이익을 사모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은택(恩澤)을 생각하고 원한을 잊지 않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뜻이 같으면 한패가 되고 뜻이 다르면 배척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잡서(雜書) 보기를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고, 새로운 견해 내기를 힘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니, 가지가지 결점을 이루 셀 수 없다. 여기에 맞는 약제(藥劑) 하나가 있으니 ‘고칠 개(改)’ 자가 그것일 뿐이다. 진실로 그 허물을 고치면 우리 퇴옹(退翁)도 또한 ‘아무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다.’할 것이다. 아! 어떻게 해야 이를 얻을 수 있겠는가.

풍기 군수(豐基郡守)에게 보내려고 초한 편지에, ‘아아, 저 남의 어버이를 욕하는 사람은, 입에서 나온 나쁜 말이 남의 어버이에게 가해지자마자, 귀에 들어오는 더러운 욕이 이미 자기 어버이에게 미칩니다. 입으로 말할 수 없고 귀로 차마 들을 수 없으며, 몸이 떨리고 마음이 아프며, 하늘이 놀라고 귀신이 비난합니다.’ 하였다.

아아, 이러한 풍속은 옛날에도 있었던 것인가. 그 윤리를 해치고 이치를 어그러뜨리며 인도(仁道)를 해치고 의리를 해치는 죄는 선생의 말씀이 상세하다. 유생(儒生)이 벗을 모아 학업을 닦을 적에 농지거리로 하루를 마치어 마침내 과정(課程)을 놓치고 만다. 혹 지벌(地閥)이 부족한 자가 있어 그 실제를 범하면 농담한 것이 진담이 되어 마침내 서로 원수가 된다. 조사(朝士)들이 동료가 되어 관사(官司)에 앉아서 떼를 지어 농지거리나 하고 직무를 폐해 버리니, 아전이나 하인들의 보는 데에 체모가 손상된다. 혹 권신(權臣)이나 총신(寵臣)이 멋대로 더러운 욕을 가하면 몸을 굽혀 공손히 받아서 영광으로 여긴다. 그가 패망한 뒤에는 곧 탄핵하는 소장에 거론되니, 종처럼 알랑거렸다는 지목을 스스로 면할 길이 없다. 이는 다 경계함직한 일이다. 언사와 안색을 나타낼 적에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성호원(成浩原)에게 답하는 편지에 ‘선공(先公)의 묘갈명(墓碣銘)에 《기미를 알아 미리 조처하고,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몸을 보전했다.》는 등의 말을 공과 숙헌(이이(李珥)의 자(字))이 힘껏 조목조목 해명하니, 화를 받을까 회피한 것은 정법이 못된다 하고, 곽임종(郭林宗)도 숭상할 것이 못된다 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기묘년간(己卯年間)의 일에 있어서 내 생각으로는 선공(先公)의 처신한 것과 같은 것을 곧 정법이라고 여기는데, 무슨 병통이 있기에 반드시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까?’ 하였다.

맹자(孟子)의 웅어(熊魚)의 비유는 대개는 살신성인(殺身成仁)ㆍ견위수명(見危授命)을 군자(君子)가 때로는 사양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또한 군자의 불행이다. 만일 표방(標榜)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함정과 죄망(罪網)을 돌보지 않고, 뜻이 같은 사람은 한 패가 되고 뜻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여 오랫동안 뭇 소인들의 미워하는 바가 되다가 마침내 재앙이 자신에게 미침을 면치 못하고, 그 유풍여운(遺風餘韻)도 사물에 은택을 끼치지 못하며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기에 부족한 자는 또한 헛된 죽음일 뿐이다. 명철하게 그 몸을 보전함은 반드시 그 부모에게 받은 천성(天性)을 보전하려고 하는 것인데, 혹 억울한 덫에 잘못 걸려 위무(威武)로 굴복시키는 자가 있어도 군자는 또한 편안함을 탐하여 구차하게 보전하려 하지 않는다.

기묘년(己卯年)의 일에 이르러서는 선생이 붓을 들기만 하면 탄식함을 잊지 않았다. 비록 정암(靜庵) 같은 현인에게도 선생이 오히려 유감이 없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그보다 아래인 사람이겠는가. 우계(牛溪)ㆍ 율곡(栗谷)의 견해가 반드시 선생과 서로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었으므로 그 편지로 왕복 논란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남시보(南時甫)에게 답하는 편지에 ‘심기(心氣)의 근심은 바로 이치를 살핌에 투철하지 못하여 빈 것을 파고들어 억지로 탐구하고, 마음을 지킴에 방법이 어두워서 알묘조장(揠苗助長)하며, 마음을 괴롭히고 힘을 다 써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을 깨닫지 못한 데서 연유합니다.’ 하였다.

일찍이 선현(先賢)의 문자(文字)를 보니 대부분 스스로 ‘심질(心疾)이 있다.’고 일컬었으므로 처음에는 꽤 의혹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요즘 와서 점차 생각해 보았다. 대개 일반 사람은 어지러워서 일찍이 점검하여 탐찰(探察)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천 가지 병, 백 가지 아픔이 있더라도 볼 적에는 모두 파악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비유컨대, 미친 사람의 마음 안에는 도무지 근심이라고는 없는 것과 같으니 이는 곧 조찰(照察)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진실로 마음 다스리는 학문에 유의한다면, 곧 마음 안에 허다한 병통이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같이 하는 것이 병이 됨을 알면 이같이 하지 않는 것이 약이 되는 것을 곧 알 것이니, 바야흐로 맹렬히 공부할 수 있다.’ 하였다. 학자가 심질(心疾)이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어떻게 이(理)가 순조롭고 기(氣)가 조화로운 경지를 이루겠는가. 마땅히 독실히 탐찰해야 할 것이다.

또 남시보(南時甫)에게 보내는 편지에 ‘무릇 일용(日用) 사이에 수작(酬酢)을 적게 하고 기욕(嗜慾)을 절제하며, 한가하고 깨끗하며 조용하고 평온하게 지내며, 도서(圖書)와 화초(花草)의 구경과 산과 시내, 물고기와 산새를 즐기는 것 같은 것에 이르러서도 진실로 뜻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접하는 것을 싫어하지 아니하여 심기(心氣)로 하여금 늘 순조로운 경지에 있고 어그러지고 어지러워서 성냄이 없게 하는 것이 곧 요법(要法)입니다. 책을 볼 적에도 마음을 괴롭히는 데에 이르지 말 것이고 절대로 많이 보는 것을 금기해야 합니다.’ 하였다.

선생의 이 말은 그 우유(優遊)하고 함영(涵泳)하는 방법에는 극히 신묘하다. 그러나 만일 방탕하고 연일(宴佚)할 때에도 이 방법을 쓰면 전혀 검속(檢束)하고 수렴(收斂 마음을 단속함)하는 유익이 없다. 마땅히 각고(刻苦)히 공부를 하여 사욕을 극복하고 경(敬)을 마음속에 쌓이게 한다는 뜻이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오직 심기(心氣)가 번란(煩亂)하고 신사(神思)가 초조하여 혈기와 신체가 도무지 쓸쓸하고 조급한 뜻이 있을 때에 바야흐로 이 법을 쓰면, 늦추고 죄며 펴고 움츠리는 것이 서로 달려가 구제하게 되어 음양(陰陽)ㆍ한서(寒暑)를 한 가지라도 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다.

이숙헌(李叔獻)에게 답하는 편지에 ‘족하(足下)는 허물 고치는 데에 용감하고 도(道)를 향해 가는 데에 급하다고 하겠습니다. 성인의 세대는 멀어지고 성인의 말씀은 없어져서 이단(異端)이 진리(眞理)를 어지럽히니 이단에 시종 미혹하여 빠진 자는 본디 논할 것도 없거니와, 또한 처음에는 바르다가 마지막에는 사특한 자가 있고, 중립(中立)하여 양쪽을 다 옳게 여기는 자도 있으며, 겉으로는 배척하고 음으로 편드는 자도 있습니다. 그 빠져듦이 깊고 얕은 차이는 있으나, 하늘을 속이고 성인을 기망하여 인의(仁義)를 막은 죄는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어떤 사람의 말을 듣건대 《족하가 석씨(釋氏)의 글을 읽고 거기에 중독되었다.》 하기에, 마음으로 애석하게 여긴 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전일 나를 보러왔을 적에 석씨에 빠진 사실을 숨기지 아니하고 능히 그 그름을 말하였으며, 지금 두 차례에 걸쳐 보낸 편지의 뜻을 보면 또 이러하니, 내가 족하는 함께 도를 향해 갈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두려워하는 바는, 새로 좋아하는 맛의 단맛을 느끼기 전에 익히 느낀 맛을 잊기 어렵고, 오곡의 알이 여물기도 전에 가라지가 익는 가을철이 될까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 편지는 전편이 한 글자, 한 글귀도 모두 함부로 지나쳐 버릴 수 없는 것이므로 지금 그 대개를 간략히 기록한다. 그리고 하단의 신심(身心)으로 체험한다는 설은 더욱 정확(精確)하여 늘 눈여겨 보고 존찰(存察)해야 할 것이다.

이숙헌(李叔獻)에게 답하는 별지(別紙)에 ‘궁리(窮理)하는 데에는 가닥이 많습니다. 궁구하는 바의 일이 혹 얽히고 설키며 단단하여 힘으로 탐색하여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나, 혹은 내 천성이 이에 우연히 어두워서 억지로 밝혀내기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우선 이 한가지 일은 버려두고, 별도로 다른 일에 나아가 궁구해야 합니다. 이같이 궁구해 오고 궁구해 가서 오래도록 깊이 익히고 되풀이하면 저절로 마음이 점차 밝아져서 의리의 실지가 점차 눈앞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다시 전에 궁구하지 못한 것을 가져다가 세밀하게 찾고 연구하여 이미 궁구된 도리와 참험(參驗)하여 비추어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에 궁구하지 못한 것까지 아울러 일시에 서로 깨치게 될 것이니, 이것이 궁리의 활법(活法)입니다.’ 하였다.

내가 품성이 조급하여 궁리하는 데에 있어 본디 오래 견디어내지 못하였다. 혹 하나의 사리를 궁구하다가 때로 막히어 통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곧 심사(心思)가 번급(煩急)하고 정신이 황혹(荒惑)하여져 중도에 그만둠을 면치 못하는데, 독서에 특히 이런 병통이 있었다. 지금 선생이 논한 바를 보면, 그 병을 고치는 약이 절실하고 타당하여, 다 참으로 알고 실지로 이행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묘결(妙訣)을 얻어서 이것으로 궁리하면, 뚫어서 투철하지 못하고 녹여서 소화하지 못할 근심이 없을 것이니 감히 늘 눈여겨 보며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숙헌(李叔獻)에게 답하는 편지에 ‘숙헌(叔獻)이 전후 논변(論辯)한 바를 보니 매양 선유(先儒)의 학설을 가지고서 반드시 먼저 그 옳지 않은 곳을 찾아 힘써 폄척(貶斥)합니다.’ 하였다.

초학자(初學者)들이 경전에 대해 선생ㆍ장자(長者)와 왕복하며 문난(問難)하려면 반드시 그 학설에서 착오가 있는 곳을 집어낸 뒤에야 비로소 의문을 제기하여 질정할 수 있는 것이다. 율곡이 당시에 선생에게 왕복하며 문난하려 하였으니, 그 물은 바가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로 남의 흠을 꼬치꼬치 찾아내어 새로운 의견 내기를 힘쓰는 자는 본디 큰 병통이거니와, 지혜를 버리고 의욕을 끊어서 전적으로 옛 경전을 답습하는 자도 또한 실득(實得)이 없다. 학자가 선유(先儒)의 학설에 진실로 의심스러운 곳이 있으면 지레 별도의 의견을 내지도 말고, 또한 지레 지나간 일로 제쳐 버리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자세히 연구하여 말한 사람의 본지(本旨)를 깨치도록 힘써서 반복하여 참험(參驗)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혹 환하게 풀리더라도 묵묵히 스스로 한번 웃을 것이고, 혹 그 잘못된 곳을 더 발견하더라도 또한 공평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순리로 해석하여 모씨(某氏)는 그렇게 보았으므로 그렇게 말하였던 것이니, 지금 이렇게 보면 마땅히 이렇게 말해야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필 겨우 한 부분을 보고서 기화(奇貨)를 얻은 것처럼 좋아 날뛰고 조잘조잘 아는 체하여 기탄하는 바가 없이 옛것을 배척하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를 모기령(毛奇齡)처럼 할 것인가.

허태휘(許太輝) 엽(曄) 에게 답하는 편지에 ‘보내준 연방(蓮坊 이구(李球)의 호)의 서신에 이른바 선배(先輩)를 가볍게 논하는 병통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 한 말일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이러한 근심이 있는 듯하므로 이 때문에 송구하게 여겨 방향을 바꾸도록 생각합니다. 다만 주 선생(朱先生 주희(朱憙)를 말함)도 이에 대한 경계가 있었으나, 그 도학(道學)의 착오된 곳을 논변함에 미쳐서는 털끝만큼도 아무렇게나 지나쳐 버리지 않고 선배라 하여 덮어준 바가 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한훤당(寒暄堂)ㆍ정암(靜庵) 등 여러 군자에 대해 다 논한 바가 있었는데, 그 잘못된 곳에 대해서는 간혹 숨기지 않은 점도 있다. 이는 본디 대공지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감히 사적으로 좋아한다 하여 덮어 주는 바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시대에는 말하는 사람도 공정한 마음으로 말하고 듣는 사람도 공정한 마음으로 들었는데. 근세에는 당습(黨習)이 고질화되어 사적으로 좋아하는 바는 높이어 소문(小聞)ㆍ말학(末學)이라도 종사(宗師)로 받들고 사적으로 미워하는 바는 배척하여 석덕(碩德)ㆍ순유(醇儒)도 곡사(曲士)라고 배척한다. 그래서 말하는 것도 공정하기가 쉽지 않고, 듣는 것도 공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은 채 춘추(春秋 세상사를 포폄(褒貶)함을 말함)로 하여금 마음에서 현혹되지 않도록 하는 것만 못하니, 망령되이 스스로 포폄하여 화패(禍敗)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 심할 경우에는 경의(經義)와 예설(禮說)에 이르러서도 또한 각기 들은 바를 높이고자 하여 서로 의뢰하지 않으니, 이는 매우 나쁜 습관이다. 공정하게 듣고 종합하여 보아서 힘써 지당한 데로 돌아가도록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내가 우리 동방 유자들이 논한 경례(經禮)의 제설(諸說)을 가져다가 유별로 분류하여 한 책을 편성하고자 하나, 또한 의논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된다

 

[주1]《도산사숙록》 : 다산(茶山)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사모하여 《퇴계집(退溪集)》의 서찰(書札)을 읽고 그중에 특히 요절(要切)한

부분을 뽑아 강(綱)으로 삼고 다음에 부연 설명하여 자신이 경성(警省)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지은 책이다. 도산(陶山)은 이황의 별호이다. 사숙(私淑)은 경모(敬慕)

하는 사람에게 직접 배우지 못하고 단지 그 사람을 본받아 스승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그의 저서를 통하여 도(道)나 학문을 닦는 것.《孟子 離婁下》 이 책은 정조 19년(1795)에 다산이 중국의 천주교 신부(神父)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연루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되어 나갔을 때에 지은 것이다. 총 33장(章)이다.

 

 

출처 :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
글쓴이 : 松河22翰邦5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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