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자기 극복과 실학운동 - 역사 에세이 中
2009.01.04 18:49 | 역사/풍속/지리 | nyscan
역사 에세이/ 정옥자| 문이당| 1996.04.01 | 318p
성리학의 자기 극복과 실학운동
실학이라는 용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 이르는 동양 삼국에서 통시대적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만 한정시켜 보더라도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대응하여 유학을 실학이라 하였고, 여말선초에는 사장에 대하여 성리학을, 조선 중, 후기에 걸쳐서는 강경 중심이 경학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실학이란 그 시대의 사상이나 학문 경향이 말폐화하여 부화하고 공허해지는 현상에 대하여 이의 극복을 위한 대안 제시의 학풍으로 일컫는 것이므로 시대에 따라 거기에 담는 내용과 실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실학을 현재와 같이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상 조류로 파악하는 연구 경향은 세 시기의 발전단계를 겪으면서 성립되었다.
제1기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말 국가의 위기 극복 모색에서 비롯되었다. 개항 이후 밀어닥친 외세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한 자강(부국강병, 개화문명)이 모색되면서 응용과학인 실용학문(기술학 등)을 실학이라 하는 경향이었다.
제2기는 1930년대 일제 통치기에 민족의 성찰과 재발견을 위하여 '조선학'으로 이름하는 국학 연구열이 고조되면서 나타난 민족주의의 강렬한 표출이었다. 이 무렵부터 실학을 근대사상의 맹아로 보는 견해와 역사적 시대성의 반영에서 온 위대한 개혁론으로 보는 견해 등 시각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
제3기는 광복 후부터 현재까지 40년이 넘는 기간으로 민족문화의 재선양과 정신적 지표를 설정하기 위해 조선 후기 역사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 작업이라는 기조 위에 방대한 연구축적을 이룬 것이다. 특히 1960년대에 사회경제사 연구자들에 의하여 제기된 자본주의 맹아론은 일제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당위에 직면하여 정체성이론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되면서, 농업생산력의 발전, 상품화폐경제의 성장 등 사회, 경제적인 진전에 따라 중세적 농업사회에서 근대적 상공업사회로 전환되던 조선 후기 사회변동기의 새로운 시대사상으로서 실학을 조명하는 연구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학의 시기 설정에 대한 견해차도 심하여 16세기 후반까지 소급하는 경우도 있으나 새로운 사상이나 학문의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무한대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시간성을 염두에 두고 일정한 역사적 산물임을 전제로 할 때 실학시대에 대한 명확한 해명이 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실학이 극복해 낸 성리학은 오히려 그 태반이 되기 때문에 조선 성리학에 대한 동태적인 연구가 선행되고, 시기 구분에 의한 사상사적 접근과 해석의 연계선상에서 그 대응논리로서의 실학을 조명할 때 비로소 그 역사성이 자명해질 것이다.
유학체계를 사장지학, 의리지학, 경세지학, 고거지학으로 분류해 본다면, 실학은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의리지학보다는 경세지학 내지 고거지학의 측면을 강화하려는 개신유학이라 할 수 있고 형이상학에서 형이하학으로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종래 실학의 특징을 실정, 실증, 실용으로 규정하고 근대 지향적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연구사적 검토를 한 후에 학파별로 추출하여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실학에 대한 분석의 틀로서 성리학의 분류방식으로도 문제가 있는 주기론을 대입시켜 시대적, 논리적 모순을 노정하고 사상 계보 내지 인적 계보마저 착종현상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실학의 개념 정리는 시기적으로 18, 19세기, 지역적으로 서울내지 근기 지방에서 발생한 개신유학적 사상체계로서 조선 후기의 현실 속에서 성리학적 학문체계와 사유방식을 자발적으로 극복하면서 내재적으로 발전시킨 사회개혁사상 이며 지배층 자체 내의 비판학풍이므로 체제전복이 아닌 개량주의적 성격을 지닌 학풍이라 규정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상이라는 단순논리로 진행되어 온 실학사상연구를 학파별로 분류하여 정리를 시도한 것은 1970년대에 와서이다.
, 제1기 경세치용 학파(18세기 전반)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며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 , 제2기 이용후생 학파(18세기 후반) 상공업의 유통 및 생산기구 일반, 기술면의 혁신을 지표로 하며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 , 제3기 실사구시 학파(19세기 전반) 경서 및 금석, 전고의 고증을 위주로 하며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학파.
앞의 분류방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라는 용어가 모두 유학에서 나온 것으로 각 학파의 이념적 표출임은 분명하지만 상호혼유되어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학파의 명칭으로 사용할 때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으므로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또 18, 19세기 실학의 경험적 사실을 고전적 용어로 분류, 개념화함으로써 역사적 경험의 적극적 개념화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는 비판도 있다.
경세치용학파는 중세 체제를 인정하면서도 토지개혁론을 내세웠다. 이는 중세사회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농업에 대한 관심이 전론으로 표출되고 상대적으로 상공업이나 화폐경제에 대한 관심이 희박했기 때문에 중농학파로 지칭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변화하는 제반 사회적, 경제적 변동에 부응하여 상공업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중세사상으로서의 조선 성리학을 극복하여 근대적 지향을 보인 북학사상은 중상학파로 불리는데 이용후생학파와 실사구시학파가 이에 해당된다.
중농학파는 16세기 말부터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영남사림의 일부가 생활 근거지를 서울 및 경기도 광주 지역으로 옮겨 벼슬을 살며 정권에 참여했다가 17세기 말인 1694년 갑술환국으로 실권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당색은 동인에서 분파를 보인 남인과 북인이었다.
특히 북인계인 소북의 일부를 포함한 이들 근기 남인들은 17세기 후반 산림으로서 정치 일선에 나선 허목에서부터 원시유학 체제로의 회귀성을 보이면서 육경 중심의 학풍을 형성하였는데, 갑술환국으로 정권에서 도태되자 재야의 비판학문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하여 18세기 전반 성호 이익에 이르러 가학화하면서 근기 남인 실학파로 문호를 이루었다. 이 학파는 성리학의 관념화, 예학의 의식화에 대한 반성에서 하학인 민생문제 해결에 주목하여 토지제도, 행정기구의 개편 등과 지방관의 폐정을 지적하여 제도상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들이 정권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의 생활 근거지가 토지에 근거한 농촌이며 당시는 어디까지나 농업사회였으므로 농촌 현실에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들의 학문 기반은 원시유학인 육경 체제였는데, 이는 바로 요순삼대의 문물제도이므로 삼대의 이상인 민본주의를 제창하고 민의 발판인 토지제도에 관심을 집중시켜 삼대의 토지제도인 정전법을 모델로 전론을 쓰게 된 것이니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 등이 그 예였다.
이 학파는 17세기 후반 사상계의 재편과정에서 자기 회복 방법으로 제기된 비판의식에서 싹트기 시작하여 정계에서 주도권을 잃은 18세기 전반 재야의 비판학문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지배층 내부의 개량주의적 학풍이라 하겠다. 따라서 근기 남인 재야 학파로 규정할 수도 있다.
중상학파는 18세기 중반 홍대용, 박지원 등에 의하여 제창된 북학운동에서 출발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후 조선 후기 사회는 양란의 후유증을 치유하면서 체제 재정비를 위해 북벌대의를 국론으로 삼아 일로매진하여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조선 고유문화 창달에 일단 성공하지만 1세기에 걸친 고립주의와 폐쇄성으로 인한 후진성을 극복해야 하는 당면과제가 대두된 것이었다.
북벌론은 성리학적 명분론인 화이론에 기초하였다. 삼라만상을 중화와 이적으로 분류하고 중화란 인간만이 될 수 있고 여타의 짐승이나 물건은 이적이므로 인간의 범주에 넣을 수 없으며 중화의 적통인 명을 계승하는 조선이 바로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를 제창하고 문화적 국제 질서를 무력으로 무너뜨린 청나라를 쳐서 복수설치(復讐雪恥: 복수하여 치욕을 씻는다)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세기에 걸친 국론인 북벌론이 현실성을 잃게 되자 18세기 초 노론학계 내에서 벌어진 사상논쟁인 호락논쟁은 집권층인 노론 내의 진보주의라 할 북학사상 형성의 내재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논쟁은 송시열의 직계 제자들이 벌인 사상논쟁인데 충청도 지방의 학자들이 주장한 호론은 사람의 본성인 인성과 물질의 본성인 물성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으로 기존의 화이론적 사유체계로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었다.
낙론은 서울 지방에서 벼슬 살던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주장한 이론인데 인성과 물성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인물성동론으로 화이론을 극복하는 논리체계를 제시하였다. 이 논리에 의하여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 없어짐으로써 대청 의식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사람에 대한 관심의 이론체계인 심성론뿐만 아니라 물체에 대한 관심으로 영역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물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생산력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다.
인물성동론에서 도출한, 사람과 물체를 구별할 수 없다는 인물막변의 논리를 통해 조선이 이라는 자아의 각성과 함께 청의 문화가 곧 중화문화라는 재평가가 가능해졌다. 더구나 여진족이 세운 청은 창업의 대업을 끝내자 한족 출신의 문사들을 대거 등용하여 중국 역대 문화유산의 총정리 작업인 '사고전서' 간행 등 국가적 문화사업을 벌여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찬란한 건륭문화를 이룩하였다.
홍대용, 박지용 등 낙론계 노론 집권층의 젊은이들은 자제군관으로 연행사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건륭문화의 선진성에 충격을 받았다. 이에 조선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청의 문화를 받아들어야 한다는 각성을 하게 된 것이 북학사상 형성의 외재적 요인이 된 것이다. 이제 청은 타도대상이 아니라 배워야 할 대상이고 그 길만이 1세기 이상의 폐쇄성과 낙후성을 극복하여 발전을 모색할 돌파구라고 인식되어 집권층 자체 내에서 북벌에서 북학으로의 대전환이 제기된 것이다.
이 북학파들은 부조들이 서울에서 벼슬 살고 있던 집권층으로 그들 역시 서울에서 출생, 성장한 사람들 이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도 자연히 도시 서민층과 소시민적 생활양식, 도시적 생산활동인 상공업의 발달과 화폐의 유통 등이었다. 농업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이행하는 사회변동이 도시에서 첨예하게 감촉되었으리 라는 개연성 외에 집권층의 자제로서 시대의 변화에 대해 민감하게 인식을 심화시키면서 부국강병을 위한 기술문명과 국가경제 활성화를 위한 상공업의 발달, 생산수단의 개발에 주목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이 낙론적 전통의 사상 기반 위에 청의 선진적 건륭문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학문체계인 고증학을 도입, 북학사상을 형성하여 중화를 지역이나 국가개념으로 인식하되 '화이일야'로 파악한 것은 조선 성리학의 발전적 자기극복과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18세기 중반 북학운동으로 시작된 이 진보주의운동은 19세기 전반에 사상적 틀을 완성,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각되고 중인계층에 확산되어 개화사상으로 연결되었다.
(1990년 1월) |
http://kr.blog.yahoo.com/nyscan33/2250.html?p=3&pm=l&tc=76&tt=1260252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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