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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당쟁의 투사-송강 정철

회기로 2010. 1. 24. 18:57



 

 

   정철(1536~1593)의 생가가 있던 서종로 청운초등학교  

    -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성산별곡, 훈민가, 한시 5개의 시비 건립 중 '관동별곡' 시비

 

 

1. 정철에 대한 엇갈린 평 - 사독? 청렴 강직?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음유시인 송강 정철.

그러나 역사는 정철에게 극과 극의 엇갈린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사독(邪毒)한 정철은 천고의 간흉이라"  - <선조실록>

 

"무고한 명현을 얽어 죽였다."  - <선조실록>

 

다른 한편,

 

"청렴하고 강직한 정철" 

 

"있지도 않은 일로 정철을 모함하다." - <선조수정실록>

 

천 명의 선비가 죽음을 당한 기축옥사(己丑獄事 ).

그 중심에 송강 정철이 있었다.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송강 정철.

가사문학의 1인자로 손꼽힌다.

 

그가 쓴 관동별곡사미인곡

지금까지도 우리 한국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큼 높이 평가된다.

정철이 이룩한 문학적 행보와 명성을 생각해보면 정치인으로서의 정철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철은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조선시대 최대의 정치 참사로 일컬어지는 기축옥사.

천 명의 선비가 죽는 그 회오리 바람의 중심에 정치인 정철이 있었던 것이다.

잔인한 죽음과 관계해 정철의 행적은 후세에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다.

 

천하의 문객이 왜 이런 비극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일까?

 

 

2. 정여립 모반 사건!~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전남 나주시 왕곡면. 광산 이씨 집성촌.

 

이 마을에선 고기를 다질 때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낙들의 단순한 입버릇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특정인에 대해 퍼붓는 일종의 주술이다.

 

"고기를 다질 때 '정철 정철 정철'하면서 다지라,

아버님 그 말씀 하신 게 기억에 남아 있는데,

그것이 한이 돼서 우리 이씨가 이런가 보다 느꼈지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고기를 다지는데까지 '정철'이란 그 이름을 말하게 하셨을까 했거든요"

                                                                                           - 이민요(65세, 왕곡면 옥곡리)

 

기축옥사 때 멸문지화를 당하고 숨어지내야 했던 광산이씨의 후손들.

그들의 피 맺힌 한이 400년을 넘게 이어져온다.

 

그 뿌리 깊은 한은,

1589년(선조 22년) 황해감사가 올린 한 장의 비밀장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정여립(, 1546~1589)이란 자가 모반을 꾀했다는 것.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산속의 섬으로 불리는 전라북도 진안 죽도(竹島).

당시 역모의 주동자라 불리는 정여립이 관직에서 낙향해서 터를 잡은 곳이다.

 

"저기 보이는 게 죽도입니다.

정여립이 조정에서 낙향해서 대동계를 조직한 후 죽도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호가 '죽도선생'이라 부르고, 그 뒤가 천반산이며,

매월 15일에 이곳 죽도에 와서 글을 가르치고 무술훈련을 했던 곳으로 전합니다."

                                                                                    - 신정일(문화사학자)

 

정여립은 1567년(명종 22) 진사가 되고, 1570년(선조 2) 문과에 급제했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에 올랐다.

 

처음에는 서인으로서 이이와 성혼(成渾)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면서

이이· 성혼· 박순을 비판했다.

 

이에 따라 서인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고

선조의 눈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정여립은 당시 조선 성리학적 가치관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의 통론이 아니었다"

"백성이 임금보다 중요하므로(民重君輕) 왕위계승은 혈통보다는 자격여부에 중요하다"

                                                                           -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정여립은 '죽도선생(竹島先生)'이라 불리며 군사력을 키워나갔고

실제로 1587년에는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무술을 연마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그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이렇게 대동계를 꾸민 정여립은 역모로 오인받았다.

그의 활동과 대담한 발언에 선조는 진노했고, 결국 체포령이 내려진다.

관군에 ?긴 정여립은 결국 천반산 동굴에서 최후를 맞는다.

 

"관군이 포위하자

 정여립이 칼을 땅에 거꾸로 꽂고 자살하니 그 소리가 소 울음 소리 같았다." - <선조수정실록>

 

 

전북 전주시 정여립 집 터.

이후 조정에선 정여립의 집 터까지 파내어버렸다.

 

"여기가 '파쏘'예요.

 정여립의 집터를 숯불로 지져버리고 파서 못을 만들었다 해요.

 역적이 난 곳은 그곳에 풀이라도 말이 먹게 되면 역적질을 하게 된다 해서 그렇게 했대요."

                                                                                                 - 신정일(문화사학자)

 

"역적의 집에서 서찰을 수색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22년>

 

당시 정여립의 집에선 많은 서찰들이 발견,

이를 근거로 선비들을 대거 잡아들였다.

기록에 의하면 정여립을 칭찬한 사람은 다 죄를 받았다고 한다.

 

 

3. 정적을 처단하는 최고 심판관 위관(委官) 정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일망타진했다"

 

그리고 역모에 가담한 자를 색출하기 위한 대규모 국문이 열렸다.

국청에서 죄인을 심문하고 재판하는 최고 담당자인 위관(委官).

당시 위관을 맡은 이가 정철(, 1536~1593)이었다.

 

1589년 10월.

정철은 상소를 통해 역적을 체포하고 계엄을 내리는 등

사건을 엄중히 처리할 것을 주문했다.

 

옥사는 강경하게 처리,

사형이 난무하고,

단근질로 매우 참혹하게 국문이 이루어졌다.

이 일로 정철은 역사에 오명을 남기게 된다.

 

"사형과 단근불로 매우 참혹하게 국문하였다." - <기축록>

"정철이 기축년에 많은 그물과 함정을 만들었다." - <선조실록> 선조 27년, 사헌부의 상소 중

"(정철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일망타진했다." - <선조실록>

 

 

전남 나주 <호암서원>에는

기축옥사 당시 희생 당한 호남 출신의 사림 아홉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기축사화때 옥중에서 정철의 모략으로 인해 같이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 이병식(전남 나주 왕곡면)

후손들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일까?

 

실제 <선조실록>은

이들의 죽음이 거짓 고변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는 정철이 꾸민 일이었다.

 

"선홍복을 사주하여, 이발, 이길, 백유양 등은 거짓으로 고변하게 하였다."

                                                                                                         - <선조실록, 1589. 12.12>

 

곤재 정개청을 배향하는 전남 함평 <자산서원>.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은 정개청(困齋 鄭介淸, 1529∼1590) 

벼슬을 사양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학문에만 전념했던 인물이다.

 

그가 지은 <우득록(愚得錄, 전남유형문화재 146호)>은 선비들의 윤리교과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개청에 대한 정철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정철이 정개청에게 앙심을 품었다." -<선조실록>

 

"정개청 같은 경우는,

정철이 비록 문학 중심이지만은 문학을 하면 술과 기생이 따르는 법인데,

주색으로써 후배들을 이끌었다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 이종범 교수(조선대학교 사학과)

 

정철은,

정개청의 <우득록>에 '배'자를 넣어

평소 절의를 논한 정개청을 절의를 배척한 인물로 몰아세웠다.

 

"정철이 말하기를 '네가 주자를 어떻게 아느냐? 주자도 스승을 배반했던가?'" - <선조수정실록>

 

우득록 서문에는

 "정철이 정개청의 논설을 '배(背)절의설'로 바꾸었다"고 적고 있다.

 

"3년 동안 집중 조사를 해가지고

 이건 동인쪽에서 이야기하는 것, 맘에 안드는 사람들을 모두 얽매어 죽였다 합니다.

 천명이면 엄청난 수입니다.

 또 그것은 처절한 당쟁인데 그 주역이 되었다는 건 불행한 일이죠."

                                                              - 이성무 원장(한국역사문화연구소) 

 

조선사회 광풍을 몰고온 기축옥사.

조선 최대 정치 참사.

그로인해 무려 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단한 죄가 아닌데도 백성들이 연좌되어 감옥이 가득차고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 김천일 상소 중

 

"이 모두를 정철이 지휘한 것이다" - <선조실록> 사헌부 상소 중 

 

 정철, 그는 왜 당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것일까?

 

<조선왕조실록> 1543년, 인구 416만 2,021명.

 

인구 400만의 조선에서 천명의 선비가 살해를 당했다.

이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에 정철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역사 기록들이 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내용과는 너무도 다른 내용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4. 송강 정철은 누구인가? - 서인의 영수 정철.

 

송강 정철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강호(江湖)에 병(病) 깊어 죽림(竹林)에 누웠더니

 관동(關東) 팔백리(八百里)에 방면(方面)을 맡기시니

 어화 성은(聖恩)이야 갈수록 망극(罔極)하다.' 

 

송강 정철은 1년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강원도 곳곳엔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이 바위가 송강 정철과 관련된 설화가 남아있는 누룩바위입니다."

 

누룩바위(강원도 양양군 상운리)

당시 관찰사인 송강 정철이 이곳 마을에 와서 이 누룩바위를 두동강냈다는 전설.

이외에도 정철에 대한 많은 설화가 전하는데 대부분 완고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정철과 청평사 부처.

정철과 놋대야.

 

"송강 정철의 설화가 다른 목민관들의 설화와는 좀 다르게 남아있는 것은

 송강의 성격이 강직하고 타협을 싫어하는 완고한 특이한 성격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 김기설 소장(강릉민속문화연구소) 

 

14세기.

고려말 공민왕의 반원 자주 개혁을 지지하며 등장한 지배층 신진사대부

조선 건국을 둘러싸고 둘로 나뉘어진다.

 

고려를 끝까지 지지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던 정몽주, 이색 등의 온건개혁파

고려를 부정하고 조선 건국을 주장하는 정도전, 조준 등의 급진개혁파(역성혁명파).

 

1392년. 결국 조선이 결국 되었을 때

조선 건국의 주체로서 급진개혁파가 '훈구파'를 형성하고,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온건개혁파들은 '사림파'로 낙향한다.

 

그리고 9대 성종때를 기점으로

사림파들은 3사와 이조전랑의 언론직을 장악하며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파의 정치를 비판하며 권력을 장악해가지만,

훈구파의 반격으로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를 통해 

큰 타격을 입은 사림파는 다시 지방에 은거하게 된다.

 

16세기.

지방에서 서원과 향약으로 정치적 기반을 잡은

 사림(士林)은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기 이른다.

 

성리학의 이상을 조선사회에 실현하려고 한

들 신진세력에는 이황, 이이, 조식 등 대표적 인물이다.

 

"산림(山林)에 숨어 있는 선비들을 불러들였다." - <운암잡록>

 

사림의 한 명이었던 송강 정철

26살에 장원급제를 하면서 화려하게 정치에 등극한다.

정철은 주목받는 정치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철은 호랑이와 독수리의 절개를 가졌다." -<선조실록>

 

서울시 정릉동.

서울시 동대문동.

 

정권을 잡은 사림 내부에서 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왕도(王道)'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생겨난 입장 차이가 결국 당쟁(黨爭)으로 번졌다.

 

활동 근거지를 따라 동대문쪽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기성세력 동인(東人),

 

정릉쪽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신진세력 서인(西人)으로

당이 나뉘었다.

 

"선조 이후로 하나가 갈려 두 당이 되고, 두 당이 갈려 네 당이 되었다." - <곽우록>

 

 "나라를 공정하게 이끌겠다고 하는 그런 이상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외척문제라든지, 임금을 대하는 태도라든지,

  임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임금과 일체가 되어 나라를 이끌 것이냐,

  이런 문제에서 갈들이 약간 있었습니다."

                                                                                                      - 이종범 교수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

 

북인의 영수는 남명 조식(임난때 의병장 배출, 곽재우)

남인의 영수는 퇴계 이황(영남학파, 주리파) 

노론의 영수는 율곡 이이(기호학파, 주기파) 

소론의 영수는 우계 성혼(강화학파, 양명학 연구)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치열해지면서

정철의 존재는 더욱 돋보이기 시작했다.

 

정철이 서인의 영수로 전면에 나선 것이다.

 

"정철이 서인의 입장만을 주장했다." - <선조실록>

 

대립이 심해지자

율곡 이이가 중재로 나서서

동.서인간에 화해를 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서인의 영수 정철

동인의 영수 이발이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대립은 계속 되었다.

 

"정철은 서인의 주장을, 이발은 동인의 주장만을 강하게 내세웠다."

 

"정철의 강직한 성미로 인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 <선조수정실록>

 

이 일로 동인과 서인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동서간의 당쟁이 더욱 치열해질수록 정철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졌다.

 

 

5. 평생 벗삼은 술,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

 

원칙과 소신을 중시여기며 타협을 거부했던 선비.

하지만 정철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평생을 벗 삼았던 술이다.

술로 인해서 정적들로부터 숱한 공격을 받기도 했던 송강 정철.

 

충북 진천 <송강 정철의 종가>.

 

그의 인생에 남은 술의 흔적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가보로 내려오는 임금이 직접 정철에게 하사했다는 은잔.

 

"술을 많이 잡수셔서 선조대왕께서 잔을 내리신거죠.

꼭 이 잔에 한잔씩만 드시라고."

                                                - 정구성(송강 정철 16대 종손)

 

그런데 이 은잔을 두고 동인들은 정철이 두드려펴서 크게 만들었다고 했다.

정철은 자신이 술을 못끊는 이유를 당당히 밝히며 늘 술을 마시며 살았다.

정적들은 정철을 공격했다.

 

"정철이 술에 취해 있어 일을 돌보지 않는다." - 유성룡 <운암잡록> 중 

 

"정철이 술에 취하면 탐학한 사람을 미워하며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면전에서 꾸짖었다." - <선조수정실록>

 

평생을 술과 함께 하며 타협을 몰랐던 정철.

동.서당쟁 속에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정철은 결국 낙향했다.

율곡 이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어지러운 정치판을 떠났다.

 

전남 담양 남면 지곡리 <식영정>.

당시 정철은 이곳 담양의 자연속에 파묻혀 시를 쓰며 정치에 찌든 몸과 마음을 쉬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續美人曲)>

후세에 길이 남을 가사를 지은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담양가사문학관에는 송강의 시가 목판에 새겨져 보관되어 있다.

<송강집 목판> (담양가사문학관 소장 유물) 

 

임금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 정철.

한글로 씌여진 정철의 가사속엔 선조에 대한 충정이 얼마나 컸는지 잘 드러나 있다.

 

시대와의 불화를 위대한 시로 승화시켰던 송강 정철.

그는 뛰어난 문체와 표현력으로 독보적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한글로 씌여진 가사문학

우리 한글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대에 보기 드물게 한문학과 한글문학에 모두 정통했던 정철.

그는 실로 천재적인 예술혼을 지닌 시인이었다.

하지만 송강 정철의 풍부한 감수성은 예술적 차원에서 그쳐야 했다.

 

 

6. '을사사화'로 어린시절 권력의 비정함을 맛보고...

 

이곳 담양을 떠나 그가 뛰어든 정치는 조선사회에 큰 비극을 안겨준다.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숱한 좌절을 겪으면서도 권력에 대한 지양을 끝내 버리지 못했던 정철.

그 이면에는 어린시절에 겪었던 깊은 상처가 숨어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송강가사(松江歌辭)>

 

송강 정철의 가사 속에는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님'이다.

임금을 님이라 부르며 충정을 노래한 정철.

그의 연군지사는 소년시절의 추억에서 비롯된다.

 

정철은 어린 나이에 이미 궁궐을 엿보았다.

누이들이 왕가에 시집을 가면서 자연스럽게 궁궐을 출입했고

남들보다 일찍 궁궐의 화려함을 경험했다.

 

"당시 대군이었던 명종(조선 13대왕)과 함께 뛰어 놀았다." - <송강집>

 

그러나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정철이 10살 되던 해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이 사건에 정철의 매형 계림대군이 연루되면서 정철의 집안은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났다.

 

"매형은 모진 고문끝에 능지처참 당했고,

 이조전랑으로 있던 형은 곤장맞아 죽었고..."

 

정철은 어린 나이에 권력의 쓴맛을 보았다.

 

"어렸을 때 물에 빠진 사람은

수영을 쉽게 배우지 못한다든가, 물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키 어려운 것처럼,

정철의 경우 어린시절의 기억이 뼈저리게 남아있어

성장해서도 어떻게든 권력의 중심부에 서 있지 않으면 위태롭지 않겠는가 하는 강박관념이 있었을 것입니다."

                                                                                                                            - 박영주 교수(강릉대 국문과)

 

권력의 비정함을 일찍부터 깨달은 정철은

강경한 정치인으로 성장, 자신이 정한 원칙과 소신에 따라 행동한다.

타협을 하지 않는 정철, 외골수 성격은 주변 사람들에게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자기와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을 늘 탄핵하였다." - <선조실록>

 

"정철이 너무 삼하게 다른 사람을 미워하다." - <선조수정실록>

 

 

7. 조선 최고 정치 참사, '양광(佯狂)' 정철.

    "이발 모친과 남은 아이까지 죽이니 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정철이 이미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589년 10월(선조22년) 역모자가 있다는 비밀장계가 조선 조정을 뒤흔들었다.

역모자가 동인정여립으로 알려지면서 동인 전체에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당시 조정을 집권하고 있던 세력은 동인이었다.

 

"정여립이 역적이 되자, 서인들은 기뻐 날뛰지 않는 자가 없었다."

 

"동인들은 일어설 길이 없었고, 서인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기뻐하였다." - <연려실기술>

 

무수한 고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위관은 누가 되어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고변하는 자가 서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 <부계기문>

 

"정철은 사양했지만, 임금이 하루 세 차례나 재촉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결국 정철은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부름에 나아갔다.

 

"정철이 조금 순진하고 감성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나선거죠.

왠만한 사람은 잘 안나서고, 나서도 심하게 안하는 게 정상인데,

이분은 아주 소신을 가지고 나선거죠."

                                                          - 이성무 원장(한국역사문화연구원)

 

1589년 11월.

정철은 위관의 자리에 앉았다.

기축옥사 최고의 자리였다.

 

정철은 역모를 색출하기 위해 죄인들을 직접 심문했다.

정철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은 모두 '당색의 원수들'(선조실록)이었다.

 

정여립이 자살한 상황에서

이 역모의 배후를 밝히는 상황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당색이 같은 사람들 속에 조금이라도 혐의가 보이면 역모로 몰아 처형했다.

 

그중엔 정철의 최대 정적이었던 이발(前 대사헌 李潑)도 있었다.

동인을 대표하는 영수로 정철과 침을 뱉어가며 싸웠던 이발.

그는 결국 고문끝에 죽었고 '일족을 멸하게'(족멸, 선조실록) 되었다.

 

가족중에 여든이 넘는 노모와 어린 아들만 남았다.

 

"(정철은) 늙은이와 어린아이에게는 형벌을 실시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선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아버지에게 오직 충효만 배웠다는 아이의 말에 선조는 더욱 분개했다.

 

임금께서 말하기를

"이런 말이 어찌 역적 놈의 자식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느냐" - <연려실기술>

 

"이발 모친과 남은 아이까지 죽이니 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 <연려실기술>

 

 

전남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이곳에 기막힌 사연을 가진 한 주인공이 있다.

 

<광산이씨의 족보>.

여기엔 당시 멸족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이발 가문에 숨겨진 사연이 있다.

 

이발의 직계 아들인 '만수(萬壽)'

 

"이 '만'자 '수'자 할아버지는 종의 아들과 바꾸어서 살아남은 우리집 14대 조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선조대왕에게 죽임을 당한 아들은 실제 아들이 아니었단 말씀이세요?)

예, 종의 아들이었지요."

                                                                                        -이진우(이발 15대 종손)

 

기축옥사 당시 잡혀간 아들은 이발의 아들이 아니라 종의 아들이었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이발의 후손들은 본관을 바꾼 채 숨어지내야 했다.

그후 300년이 지나서야 이 기막힌 사연이 밝혀졌고

후손들은 광산이씨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

 

"지금도 여야가 싸우지만은 죽이고 그러진 않거든.

근데 그땐 막 죽이고 했으니 그게 문제지. 삼족까지 멸하고 그게 문제였지..."

                                                                                         - 이진우(이발 15대 종손)

 

옥사는 덩쿨처럼 뻗어나갔다.

 

"옥사가 점차 번져가고 탄핵이 더욱 준엄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 <선조수정실록>

 

희생자가 점점 늘어나면서 정철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정철이 낭패하였다." - <연려실기술>

 

그러나 선조의 노여움은 더욱 커져갔다.

 

"정철이 이미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후세의 기록은 모든 책임을 정철에게 돌리고 있다.

이를 두고 두가지 왕조실록이 아직도 논쟁중이다.

 

<선조실록>에는 당시 모든 비극을 정철의 책임으로 돌리고

심지어 정철을 '독철(毒)' '간철(姦澈)' 등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왕조실록>조차도 정치적 관점에서 쓰인 것이다.

 

훗날 서인이 집권해서 <선조실록>을 수정해서 다시 쓴 <선조수정실록>에는

송강이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고 전한다.

 

 

과연 송강 정철의 진심은 어떤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경남 진주 <도강서당>.

이곳엔 최영경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최영경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학문과 덕망이 높았다.

그러나 그도 기축옥사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최영경의 죽음에 대해

동인들은 정철이 부당하게 죽였다고 주장한다.

 

"동인들은 정철이 최영경을 죽였다고 부당하게 공격한다. 이는 통탄할 일이다." - <선조수정실록>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선조실록>은 '정철의 진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 지평 최영경을 하옥하다." - <선조수정실록, 1590. 6. 1>

 

당시 최영경이 옥에 갇히자 정철은 엽기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날의 풍경은 무수한 사료에서 묘사되는데

정철은 정적들이 보는 앞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기 어린 행동을한다.

 

"이 자가 평소 나를 베려고 했지.

하지만 나 같은 군자가 어찌 같은 보복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彼漢斫吾經欲如 此以手畵其經因大笑

 피한작오경욕여 차이수화기경인대소

 

오늘 나의 이 말은 농담이 아니오.

훗날 나더러 최영경을 죽였다고 했을 때 구실로 삼기 위한 것이오.

 

(吾之爲此言非戱也 他且以余爲構殺永慶之時欲以爲口實也

 오지위차언비희야 타차이여위구살영경지시욕이위구실야)"                                                                                            

                                                                                      - <연려실기술> 

 

송강의 진심이 어떠한 것이든

그의 이러한 파격적인 언행으로 인하여 그에 대한 비난이 과장되었다는 것.

정적들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았던 송강 정철의 모습.

 

이는 송광 정철의 광기로 봐야 할까?

아니면 혼돈의 역사속에서 일부러 미친 척 한 건 아닐까?

 

<송강집> 시문속에 자주 등장하는 '미칠광(狂)'.

송강 스스로를 '광생(狂生)' '미친 서생'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그를 두고 '佯狂(양광)'이란 표현을 쓴다.

 

"'양광(佯狂)'이란 '거짓 미친 척 한다'

또는 맑은 청자 미칠광자를 써서 '청광(淸狂)'이라고 합니다. 

일부러 자기 내면을 은폐하기 위해 미친 척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 정적들은 정말 미치광이 행동이라 인식하고,

 최영경을 모함했다 인식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애초에 송강이 목적한 걸 달성한 거라 봅니다.

상대가 그렇게 인식하도록 일부러 그렇게 한 게 양광이기 때문입니다."

                                                                - 손찬식 교수(충남대 국문과)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옥사가 지나치게 번져가자 정철은 좌절에 빠졌다고 한다.

 

"정철의 집으로 찾아가 사태의 심각함을 이야기하니

 정철이 머리를 흔들고 손을 저으며 이야기하였다.

 '그대들이 지난번에 한 말이 매우 옳았네

 지금의 난리를 진정 시킬 방도가 나로서는 도저히 없었네'"

 

(君之前言極是極是 如此之輩非吾所能鎭定也

 군지전언극시극시 여차지배비오소능진정야)"

                                                                                                                                   -<대동야승>

 

정철은 위관의 자리에 앉은 걸 뒤늦게 후회했다.

"정철이 오랫동안 한숨을 쉬었다."

 

"경기도 고양에 낙향해 있다가

 정여립 모반 사건 이야기를 듣고 나라를 구해야 한다고 임금에 상소도 올리고

 임금은 어여삐 여기고 정승의 벼슬을 내리고 위관을 맡겼단 말이죠.

 위관을 맡지 않았어야 했는데 위관을 맡게 되었고

 그 책임은 누군가는 져야 하는데 송강 정철이 지게 된 셈입니다."

                                                                                   - 이종범 교수(강릉대)

 

 

8. 선조의 왕권 강화에 정치희생양 정철.

     "임금이 말하기를 '정철을 말하면 입이 더러워진다'"

       "독한 정철 때문에 나의 어진 신하들을 죽였구나"

 

기축옥사의 칼을 들었던 정철.

그러나 그의 뒤에는 선조(조선 제14대 왕, 재위 1567∼1608)가 있었다.

 

"문제는 '선조'입니다.

선조는 한 정파가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걸 싫어했습니다.

왜냐면 한 정파가 정권을 완전 장악하면 왕권이 제약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더 이상 '동인(東人)'을 용납했다가 자신의 왕권이 제약 받지 않을까 생각하고,

자신의 의중을 집행할 사람이 '정철'일 것을 판단하고 실제로 그게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 이종범 교수

 

동서 당쟁이라는 극한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송강 정철이 개입된 사건은 그 말로가 처참할 수 밖에 없었다.

기축옥사의 위관 자리는 누가 맡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격렬한 당쟁,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선조의 정치무리수.

송강 정철은 '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머나먼 변방에서

님 계신 곳 그리워

늙은 신하 눈물에

날마다 옷이 젖네.

                         - 송강 시 '至永柔縣(지영유현)' 중

 

3년간의 광란의 역사가 끝나자

선조는 변모한다.

 

"임금의 특지가 있었으므로 모두 경악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1591. 2.1>

 

정철이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책봉문제'를 건의한 것이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이 일을 미끼로 정철을 내치게 된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이날부터 정철을 크게 미워하였다." - <연려실기술>

 

결국 정철은 파직되었고 유배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선조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것이다.

선조는 '독철(毒澈)' '간철(姦澈)'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정철에게 독설을 퍼붓는다.

 

"임금이 말하기를 '정철을 말하면 입이 더러워진다'" - <선조실록, 1594>

 

그리고 모든 죽음의 책임을 정철에게 뒤집어씌운다.

 

"독한 정철 때문에 나의 어진 신하들을 죽였구나" - <선조실록>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철을 가시나무 울타리를 쳐서 중죄인을 가두는 '위리안치(圍離安置)'시킨다.

 

강직하고 솔직한 탓에 적이 많았던 그래서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던 송강 정철.

말년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고 시를 쓰는 것 밖엔 없었다.

 

<송강유필> - 가사문학관 소장 유물

 

유배 당시 글을 읽은 횟수를 표시한 기록들도 보인다.

빼어난 시인이자 실패한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준 송강 정철.

빈곤 속에서 신음하던 정철은 58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숯으로 바꾸어 먹고 소반에는 간장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 <송강집> 중

 

"소신껏 하신 게, 많이 가한 게, 많이 받은 것이라 봅니다. 정치의 한 측면이지요." 

                                                                                               - 이성무 원장 

 

"고집불통, 그래서 정치와 전혀 맞지 않는 분이었죠.

정치란 타협과 관용이 필요한데 한번 틀어지면 화해를 할 줄 모르는 성격이어서

시인으로만 계속 남았으면 아름다웠을 분입니다. 서운하지요."

                                                                                          - 이종범 교수

 

예술적 기질과 정치적 기질이 모두 날카로웠던 정철.

그래서 오히려 세속적인 처세에는 어둡고 모자랐던 것 아닐까.

 

그가 휘말렸던 1590년 기축년 비극은 한국사의 증오의 생채기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광기의 역사 속에서도 송강은 그 천재성을 발휘해 시를 썼다.

그의 시가 더욱 애절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 역사의 회한과 상처가 오롯이 묻어 있기 때문 아닐까.

 


출처 : 향기로운 세상
글쓴이 : 白 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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