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월천(月川) 조목(趙穆)

회기로 2010. 1. 24. 18:54

월천(月川) 조목(趙穆)
 

조목은 종종 19년(1524) 예안현 월천리에서 출생한다. 그의 자는 사경(士敬)이고, 호는 월천(月川) 또는 동고산인(東皐山人), 부용산인(芙蓉山人)이라 하였고, 관향은 횡성(橫城)이다.

율곡은 그의 『석담일기 石潭日記』에서 “공은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다섯 살에 구두로 대학을 배우고, 열두 살에 경서를 모두 배웠다고(公生有異質 五歲口受大學 十二盡學經書) 하여 조목의 총명 호학을 특기하고 있다.

조목이 퇴계의 문하에 들어간 것은 1538년,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이때 퇴계는 38세로 정 6품의 지위인 좌랑의 직임에 있던 중앙관인 이었다. 당시에 퇴계는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와 집상중이었다. 이때부터 퇴계와의 끊임없는 만남이 계속되는바, 그 영향으로 조목은 성리학을 연찬하는 처사형 학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21세에는 당시 풍기 군수로 재직하면서 백운동 서원을 창건한 신재 주세붕을 찾아뵙고, 이 고을의 향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23세에 모부인 권씨상을 당했고, 26세에 참봉 권개세의 딸과 결혼한다. 얼마 후 당시 풍기군수로 재직 중이던 퇴계를 찾아가 수업한다. 29세에는 현사사에서 권대기ㆍ김팔원ㆍ구봉령ㆍ금난수 등과 함께 경서강독을 위한 독서계를 만든다. 이듬해에는 서울에 올라가 반궁(泮宮:성균관)에 유학한다.

퇴계와의 교유양상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ㆍ1555년: 퇴계와 서한을 통해「연평답문」과 ‘호연지설’에 대해 강론함.
ㆍ1556년: 퇴계의 청에 따라 주서(朱書)를 필사함.
ㆍ1559년(36세): 정월에 권대기 등 여러 사람과 부용산에 올라가 집 뒤 3리쯤되는 독조동에다 정사
    를 세울 것을 의논하고 3월에 독조동에 청원대를 축조함.
ㆍ1560년: 3월 퇴계를 모시고 부용산에 올라 정사터를 정하고, 4월에 월난사에서 독서한 뒤 다시 
    퇴계를 모시고 고산의 승경을 유람함.
ㆍ1561년(38세): 퇴계에게 글을 올려 ‘부용산대(芙蓉山臺)’로 자호(自號)하였음을 알림.
ㆍ1562년: 퇴계를 모시고 취미봉에 오르고, 5월에는 퇴계에게 글을 올려『심경 心經』에 대한 주자
    의 주석에 대해 강론함.
ㆍ1563년: 8월에는 퇴계를 도산서당에 가서 뵙고 며칠을 유숙하면서 경학을 논함.
ㆍ1564년: 7월에도 퇴계를 모시고 퇴계동 입구에 있는 자하봉에 오름.
ㆍ1565년: 6월 퇴계에게 글을 올려『심경』을 논하면서「인심도심정일집중도人心道心精一執中
     圖」를 고칠 것을 제의하고, 8월에는 퇴계에게 글을 올려 ‘심경심학도구방심(心經心學圖求放心)’
    일절과 여러장의 주설(註說)을 논함.
ㆍ1558년: 12월에 다시 퇴계를 찾아 뵙고『심경』부주와『대학』장구에 대하여 문의함.
ㆍ1566년: 5월에 퇴계에게 「논심경정임은심통성정도 論心經程林隱心統性情圖」를 올리고 또 ‘정
    황돈사실(程篁墩事實)’을 논한다. 7월에는 퇴계를 찾아뵙고『심경』에 대해 질의함.

이렇듯 30년을 지속한 퇴계와의 사제관계가 1570년 퇴계의 죽음으로 인해 마감되면서 조목의 사업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고 유업을 빛내는 일에 집중된다.

조목의 사업 중에 손꼽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동서원(易東書院)의 창설과 봉화향교의 중수이다. 역동서원의 창설과정을 개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565년 9월에 퇴계를 모시고 능운대와 오담 등을 유력했는데 역동서원의 설립을 의논하고자 함이었다.  

역동서원 전경

 

 

 

 

 

 

 

 

 

 

 

 


일찍이 1557년 정월 초이틀 우씨(禹氏) 족보를 베껴서 퇴계에게 보내고, 1558년 3월 26일 퇴계는 편지를 보내 금난수와 조목이 역동서원 지을 터를 지정해 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다고 했다. 역동서원 창건에 힘을 쏟은 조목의 공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1567년 12월에 「역동서원사적 易東書院事蹟」을 짓고 1568년 정월 퇴계에게 글을 올려 향중서치(鄕中序齒)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논한다. 1570년 7월 퇴계를 모시고 제생과 더불어 역동서원에 모여 『심경』을 강론한다. 8월에는 제주 우탁선생을 역동서원에 봉안하고 「역동서원춘추항용축문 易東書院春秋恒用祝文」을 초한다.

1579년 조목은 봉화 향교를 중수했다. 봉화향교의 중수에 대해 실록에서는 “향교가 옛터를 잃고 고을 서북의 궁벽한 곳에 있었는데 매우 누추하고 체제도 갖추어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향교의 옛터에는 이미 향서당을 세웠기 때문에 형세가 움직이기 어렵게 된지 오래였다.

그런데 조목이 부임하자마자 즉시 향인들을 모아 놓고 ‘향교를 옛터에 회복시키라는 명을 알리고 나서 향서당을 헐고 성묘(聖廟)를 옮겨지었다. 이보다 앞서 성전(聖殿) 안의 송현(宋賢)의 위차가 동현(東賢)과 함께 남쪽 모퉁이에 병렬되어 있었는데, 조목이 이에 대해 늘 미안하게 여겨 왔었다.그래서 봉안할 때에 상달하여 개정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전제(殿制)를 특별히 넓혔는데 계획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그 뒤 이 뜻을 조정의 진신들에게 말해서 계청하여 개정하게 했다. 각 고을 성전의 송현들의 위치를 바로잡은 것은 모두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적고 있다. 봉화향교 중수는 이처럼 향교사당 전제의 개편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갖는다. 이처럼 퇴계 사후에 조목은 스승의 유업을 발전시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목의 후학계몽 활동은 『연보』에서는 1577년(54세) 2월 생도들을 모아『소학』,『대학』을 강의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때부터 그의 문하에 젊은 서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579년 9월 이후 여러 유생들과 더불어 청량산을 유람했는가 하면 월천서당과 도산서원, 역동서원 등지에서『심경』등을 강학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배움을 청하는 학자들에게 반드시『소학』과『대학』을 경학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지도하였다.

조목의 편집, 서술에 대해 살펴보면, 1580년『주자대전 朱子大全』을 초해서 한 책으로 만들고 이름을『주서초 朱書抄』라 하고, 또 선현들이 훈계한 말씀을 뽑아서 『곤지잡록 困知雜錄』을 엮고, 1584년(61세) 9월 『퇴계선생문집 退溪先生文集』을 엮고, 1588년 8월에는 퇴계가 평소에 그에게 보냈던 서찰을 모아『사문수간 師門手簡』8권을 엮는다.

1591년 「무명공전 無名公傳」과 「무이정사서 武夷精舍序」, 「도산기 陶山記」등 10여 편을 모아 베껴서 『한중잡록 閒中雜錄』을 엮는다. 1595년(72세)  퇴계가 엮은 『고경중마방 古鏡重磨方』을 손수 베끼고 후기를 썼으며, 1596년『주역구결 周易口訣』을 표하였다.

조목의 독서와 강학은 이같이 퇴계로부터 계발을 받아 시작되었고 또한 퇴계의 유업을 계승 추모하는 데서 끝맺고 있다.

조목은 약관시절부터 과거에 뜻을 두고 여러 차례 향시에 응시하여 합격하긴 했으나 대과에는 불리하였다. 하지만 학행을 인정받아 생원으로 43세(1566년) 전조의 추천에 의해 장사랑 공릉참봉에 제수되어 81세에 호조참판을 제수받기까지 십 수 차례 음직이 내려진 바 있다.

이에 대해 정온(鄭蘊)은 조목의「신도비명」에서 “본래 벼슬에 뜻이 없어 해매다 임명하고 달마다 옮겨 40여 관직에 이르렀으나 취임한 적이 얼마 없었으며, 혹 나갔다 해도 또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모두 여덟 번 수령에 임명되었으나, 다만 봉화ㆍ영덕ㆍ합천에만 부임하였고, 그것도 곧 버리고 돌아왔다.

늘 호문정(胡文定)의 ‘차고 덥고 주리고 배부른 것은 스스로 짐작해 알아야 한다.’는 말로 스스로 경계하여 나아가기를 어렵게 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함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이같이 그는 중앙관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만년에 이르러 수년 동안 지방의 목민관(현감, 군수)을 맡았을 뿐이다.

조목의 삶에서 몇 가지 특징적 모습을 찾아보면 앞에서 우리는 그가 예안의 퇴계학단에서 퇴계의 의발을 잇고자 스승의 저술에 조력을 아끼지 않았고, 스승 사후에도 그 유업을 정리하기는 일에 힘써 왔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퇴계 생전에 역동서원의 창설에 주도적 기여를 했고 사후에는 봉화향교를 중건하여 전제(殿制)를 새롭게 시행한 일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점들은 퇴계학단에 속한 여타의 인물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조목이 좀 더 주도적이고 활동적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조목이 그토록 퇴계의 적전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사후에 그에 걸맞는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에 의문을 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이 조목을 퇴계학단에서 개별화하는 단서가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그의 말년의 모습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을 맞은 조목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연보』에서는 전란의 소식을 접하고 고을 수령에게 성을 비워서는 안된다는 뜻을 전하고 서당에 의연하게 머물러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그가 지닌 향토수호정신의 일면을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또 5월에 왜적이 서울을 핍박하여 선조가 의주로 몽진했다는 소식을 듣자 광현에 올라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향중인사들과 상의하여 식량과 병사를 모아 적을 토벌했는데 김해(金垓)에게 그 일을 통괄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의 의병활동 상황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는 『임진왜변일기 壬辰倭變日記』 기록을 조목이 남겼다고 하는데, 현재는 매암 이숙량과 관련된 부분만이 초록된 일부가 전한다.

이와 같이 조목의 생은 단순하고 완만한 곡선을 그려가고 있다. 불규칙적인 혹은 돌출하는 생애의 국면은 거의 감지할 수 없다. 그 만큼 그의 삶이 처사적인 평정에 바탕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개인의 삶이 역사적 상황과 무관할 수 없는 까닭에 정국의 변화나 내우외환에 처해서는 다소의 불안정이 엿보일 뿐이다. 

 도산서원 전경(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도산서당이다.)

 

 

 

 

 

 

 

 

 

 

 


조목은 1606년 10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 뒤 우리가 그를 만나는 곳은 도산서원이다. 1675년 정월에 조정에서 예조정랑 남복규를 예관으로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써 조목은 퇴계의 사당에 유일한 종향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조목의 삶은 도산서원이 지니는 상징성에서 의미를 획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출처 : 월곡 예절 카페
글쓴이 : 월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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