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제산(霽山)선생과 제산종택(霽山宗宅) - 김윤규

회기로 2010. 1. 24. 18:57

 

 

1. 제산선생

 

제산 김성탁선생(霽山 金聖鐸, 1684 - 1747)은 의성김씨 청계공 김진(金璡)의 육대손으로 가계는 다음과 같다.

청계 김진(靑溪 璡) - 장남 약봉 김극일(藥峯 克一) - 장남 대박 김철(大朴 澈) - 장남 표은 김시온(瓢隱 是榲) - 장남 김방렬(邦烈) -3남 김태중(泰重) - 장남 제산 김성탁(霽山 聖鐸) - 장남 구사당 김낙행(九思堂 樂行)

선생은 일찍이 가문의 학통을 이어받아 적암 김태중(適庵 金台重)에게 공부하여 학문의 기반을 익혔다. 이어서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이 귀양에서 돌아와 금양에서 제자를 가르치자 그에게 나아가 학문의 꽃을 피웠다. 이로써 그는 가문의 학통과 퇴계 학문의 적전(嫡傳)을 이었다. 이 계통은 다음과 같다.

퇴계 적전: 퇴계 이황(退溪 李滉) -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 제산 김성탁(霽山 金聖鐸)

가학 연원: 학봉(鶴峯) - 운천 김용(雲川 金涌) - 표은 김시온(瓢隱 金是榲) - 금옹 김학배(錦翁 金學培) - 적암 김태중(適庵 金台重) - 제산(霽山) - 구사당(九思堂)

 

이처럼 제산선생은 당대 영남유림의 석덕제유들과 왕래교유하면서 학덕을 쌓았다. 이러한 결과로 1710년에 향시에 합격하고 1711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학문적으로도 멀리 정만양(鄭萬陽), 정규양(鄭葵陽)선생 등과도 왕래하고, 지역의 이만(李槾), 권두경(權斗經), 이광정(李光庭), 류현시(柳顯時), 류승현(柳升鉉)선생 등이나 일문의 여러 선후학과도 날로 교유하였다. 이러한 교유강학으로 인해 명망이 높아져 가고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동창의소에서 용와 류승현(慵窩 柳升鉉)선생과 함께 의진(義陳)을 일으켰다. 그때 그는 손수 역적을 토벌하는 글[討逆文]을 지어 각 지역 지도문중에 발송하여 난이 진압되는 데 기여하였다. (중략)

제산선생은 자신이 그런 예우를 받을 수 없다고 하여 52세 되던 1735년에 증광시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영조는 그의 급제를 고대하고 있었고, 마침 그가 급제하자 바로 어전에 불러 손수 축하시를 지어 차운하게 하였다. 이때 임금과 주고받은 시는 온 나라에 유명하였다.

 

昨日嶺南貢擧人 어젯날 영남에서 과거보러 온 선비

今辰頭上桂花新 오늘 아침 머리 위에 월계화 새롭구나

豈徒於爾爲親喜 어찌 다만 어버이 위해 그대만 기쁘랴

爲予金門文學臣 나에게도 금마문의 문학신이 되었는 걸(영조)

 

自是遐荒賤末人 본디부터 저 먼 시골 미천한 사람이

不堪今日聖恩新 오늘날 새 성은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許歸榮渥尤殊絶 어버이 뵈러 가란 은혜도 특별하니

萬殞難酬愧小臣 만 번 죽어 갚지 못할 부끄러운 소신입니다(제산)

 

과거에 급제한 뒤로 그는 매번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고 고속으로 승진하였다. 바로 사헌부(司憲府) 지평에 임명되고, 사간원(司諫院) 정언, 홍문관(弘文館) 부수찬,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사헌부와 사간원과 홍문관은 조선시대 삼사(三司)라고 불리던 언론기관이며 왕의 자문에 응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또한 이 삼사의 관원이 된다는 것은 향후의 중요한 임무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선생은 급제 이후 단 2년 만에 이런 직책을 다 거친 것이었다. 제산선생은 이런 중요한 직책에서 임금에게 좋은 진언과 효율적인 정책을 올려서 칭찬을 받고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집권하고 있던 노론정권의 입장으로 볼 때 제산은 불편한 존재였다. 임금은 지나치게 총애한다는 표시를 내고 신하는 탁월한 능력으로 그 기대에 부응하는 이 구조는, 권력자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마침내 노론 권력은 그를 해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그를 역적의 제자라고 헐뜯었다.(중략)

제산선생은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제주와 광양의 유배지에 있을 때까지,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저술들은 대부분 편지 왕래를 통해 당대의 학자들과 공유되었는데, 그 내용들은 도학(道學)과 예학(禮學)의 높은 경지를 논한 것이었다. 그가 고향에 있을 때는 당대의 정치가이며 학자들이던 조현명, 박문수, 김시형 등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그 중에서 조현명은 선생께 배움의 예를 갖추고 가르침을 청해서 사양하기도 했다.

謫所에서는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증정 중용의의(增訂 中庸疑義)나 계몽질의변(啓蒙質疑辨) 등의 저서를 남겼다. 당시에 오간 편지 중에는 중요한 학문적, 문학적 논쟁에 대한 것도 있었다. 예를 들면 강좌(江左) 권만선생과 대산(大山) 이상정선생 사이의 이른바 유소(酉蘇) 논변이 일어났을 때, 그분들은 적소에 계신 제산선생께 글을 보내어 의견을 묻고 중재를 구하기도 했다. 이런 점은 당시 제산선생이 영남유림의 종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산선생이 광양의 적소에 있을 때에 많은 현지 선비들과 경상도의 학자들이 방문하여 위로하거나 가르침을 받았다. 장남 구사당 낙행(樂行)은 거의 항상 모시고 있었으며, 1738년 광양으로 이배되신 뒤에는 김우한(金宇漢)공이, 1739년에는 김강한(金江漢), 김명석(金命錫), 김성흠(金聖欽), 이유원(李猷遠)공 등이 찾아갔다. 그 뒤에도 권모(權謨), 김기호(金起浩), 류관현(柳觀鉉)공 등이 찾아갔으며, 단성, 진주, 의령, 함안의 선비 자제들이 선생께 학문을 배우고 행실을 닦았다. 이 선비들은 선생을 모시고 강학 소요하던 곳에 집을 지어 함장대(函丈臺)라 하였으며, 선생이 돌아가시고 상여가 떠나신 뒤에는 경모대(景慕臺)라 하였다.

또한 선생은 가족에 대한 각별한 염려를 수많은 작품과 편지에서 보였다.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아유가(我有歌)는 그 간절하신 마음으로 세간에 유명하거니와, 가족에게 보낸 한글편지도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어서 그 안타까운 형편과 세밀한 자애를 눈에 본 듯 느낄 수 있다.

제산선생이 돌아가신 이듬해인 1748년에 죄명을 지우라는 전석(全釋)의 명이 있었으며, 1750년에 직첩(職牒)을 돌려주라는 명이 있었고, 1795년 정조 19년에 복관(復官)의 특명이 있었다. 이때 정조는, 제산선생께 대한 전대의 가혹한 처벌과 유배가 지나친 것이었음을 말하고 구사당선생을 등용하지 못한 것을 아까워했다.

1801년에는 사림의 공의로 문집 제산선생문집(霽山先生文集)이 이루어졌으며, 1860년에 문집의 부록을 간행하고 1893년에 문집을 중간하였다. 돌아가신 뒤 5대가 되어 제사를 폐하게 되었을 때 사림은 공의를 모아 선생을 불천위(不遷位)로 봉안하게 하였다.

 

2. 제산 종택

 

제산종택은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56번지에 있다.

이 집은 현 종손의 11대조 통덕랑공 김태중(泰重 , 1661-1726)이 분가할 때 지은 집이다. 이 집에는 그의 아들 제산(霽山) 김성탁(聖鐸, 1684-1747)과 손자 구사당(九思堂) 김낙행(樂行, 1708-1767)이 살았으며, 이후 대를 이어 제산 종손이 살고 있다. 대체로 처음 지어진 연대는 현종년간 1600년대 말일 것으로 보인다. 제산선생 문집의 年譜에 의하면 1693년에 천전리 집으로 다시 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집이 낡아서 19세기 중반 분계(賁溪) 김진성(鎭誠)이 중수하였다.

부속건물 가헌(可軒)은 제산 35세 때(1718년) 지어서 가헌(可軒)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역시 낡아서 1855년(을묘)에 중수하였다.(중략)

제산종택은 2002년에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제산선생의 산소는 처음 기령산에 모셨다가 나중에 청송 병보리로 옮겨 모셨다. 산소를 수호하는 재사가 그 시기에 건립되었는데, 이 산소를 지키는 사람에게 부역을 면제하라는 청송부사의 완문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이 재사는 2005년에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더 읽을거리

 

李廷燮(문화재 전문위원) 霽山 金聖鐸의 生涯

許捲洙(경상대학교 교수) 霽山先生의 學問觀과 嶺南儒林에서의 役割

金時晃(경북대학교 교수) 霽山 金(聖鐸)先生의 上疏文에 대하여

金周漢(영남대학교 교수) 霽山 詩의 一面

東方漢文學 12집(1996)

 

(사람과 문화 119호 5P)

출처 : 안동 문화지킴이
글쓴이 : 운영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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