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문화재를 대하면서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는 동시에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삶의 지혜를 얻는 일이기도 하다. ‘갈암금양강도지(葛庵錦陽講道址)’는 조선 말기 붕당의 갈등 속에서 살았던 갈암 이현일(1627~1704) 선생의 삶을 공부하면서 지금의 사회문제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문화재다. 이곳은 갈암 선생이 도학을 강학했던 터인 동시에 조선 시대의 문제를 온몸으로 해결하려 했던 퇴계 학맥의 응축이자 영남 사림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조선왕조의 역사와 붕당의 다툼이 맞물려 있는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갈암은 1627년 1월 11일 영해 나라골(인량리)에서 태어난다. 이 시기는 인조가 숙부 광해군을 밀어내고 왕이 되었던 인조 반정(1623)과 이괄의 난(1625)이 있었던 직후였다. 그리고 임진왜란이란 세계 대전으로 조선, 명, 왜는 그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이 전쟁을 뒷전에서 보고 있던 여진족이 누루하치를 중심으로 만주를 장악하고 청나라를 세우기 위한 기틀을 다지고 있을 때였다. 갈암이 탄생한 곳이 역사적 소용돌이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왕조의 불안과 외적이 침입하던 내우외환의 시대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역정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도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조상은 황해도 재령이 고향이다. 갈암의 5대조 이맹현(1436~1487)이 세조 때 문과장원으로 관찰사와 예조 참의, 부제학으로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 그의 아들 이애가 영해부사로 있던 숙부 이중현을 따라왔다가 그곳의 진보백씨와 혼인을 하면서 영해 나라골에 자리를 잡았다.
안동과 인연이 된 것은 이애의 손자 의령현감 이함(父 이은보)이 안동 와룡의 두루의 이희안의 따님과 결혼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함의 셋째 아들 석계 이시명(1590~1674)이 임진왜란 때 예안현 의병장을 지낸 외내(군자리) 광산 김씨 김해의 따님과 혼인을 한다. 김씨 부인은 1남을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뜨고 난 뒤 1616년 경당 장흥효의 따님과 재혼한다.
이시명과 장씨 부인과의 만남은 단순한 혼반을 넘어 퇴계 이황-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갈암 이현일로 이어지는 퇴계학맥과의 인연이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시명과 그의 아들들이 학문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둘째 이휘일은 20세 전에 외조부 경당 장흥효의 학문 아래 성숙되어 있었고 갈암도 경당의 학문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갈암은 14세 때 아버지 이시명(51세)을 따라 영해 나라골을 떠나 영양 석보 두들마을에서 기거하다가 다시 영양 수비 골짜기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당시 이시명(64세,1653)이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깊은 수비 골짜기에서 버려진 땅이나 개간하면서 일곱 아들에게 강학이나 하며 지내려 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 이후 영양 석보와 수비를 오가며 학문을 하게 되었고 가끔 안동으로 나와 퇴계 문인들과 만남을 가졌다.
과거 합격이 취소되고
1646년(인조24)9월 5일 아버지의 권유로 20세에 과거시험을 보고 진사에 합격 되었으나 갑자기 합격이 취소(罷榜파방)된다. 실록에는 별시의 시제(試題)가 ‘눈물을 흘리면서 옛 임금과 이별하다’(유체별구군流涕別舊君)라는 것이었는데, 인조 임금이 뒤늦게 알고 문제를 삼았다. ‘옛임금(광해군)’을 운운한 것이 반정으로 왕인 된 인조의 마음을 자극하게 되었다. 이것이 시험관은 파직되고 합격자는 모두 불합격처리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후 그는 과거 응시 자체를 달갑게 여기지 않게 된다. 그의 이름은 1659년 5월 효종 대왕이 세상을 뜨고 예송논쟁이 일어났을 때 송시열의 기연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영남의 선비들 간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갈암은 1668년 9월 42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과거는 보지 않고 포천의 조경과 연천의 허목을 뵙고 돌아온다. 조경은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로 부친 이시명을 강릉 참봉에 추천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허목 또한 산림처사로 갈암이 존경하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과거 시험을 피하게 된 것은 20세 때 과거에 합격하고도 불합격 처리된 것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이다.
그 후 집으로 돌아와 영덕 창수 저곡의 중형의 병 구환을 하러 갔다가 갈암도 돌림병에 걸려 인사불성이 되는 경험을 하고 난 뒤 영양 수비에서 1672년 정월에 부모 양친과 형제가 모여 형제간은 붕우와 같은 것으로 동기애를 다짐하고 작은 술자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평소 스승이자 부모처럼 따랐던 중형 이휘일이 53세로 세상을 뜸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게 된다. 부친 이시명이 1672년 11월 진외가(아버지 외가) 진성 이씨 터전인 안동 명리 두실원으로 이사하고 이현일은 수비에 그대로 머문다. 7월에 막내아우가 죽고 12월에 돌림병으로 부인 무안박씨가 세상을 뜸으로 형과 아우와 아내를 줄줄이 잃고, 갈암은 수비에서 영양 석보 두둘마을 동쪽의 남악으로 이주한다. 1674년 암행어사가 이 지방을 돌다가 갈암의 학행을 듣고 유일 선비로 추천했으나 8월에 부친 이시명이 84세로 별세하게 되어 안동 수동에서 시묘살이를 한다. 그리고 삼년상이 끝나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바로 석보 남악으로 돌아가 학문 탐구에만 열중했다.
첫 벼슬 길
처음 과거에 실패하고 산중에 묻혀 있던 갈암이 벼슬길에 나가게 된 것은 숙종3년 51세(1677) 때 허목의 추천에 의해서다. 궁중의 음악을 담당하는 장악원 주부(6품)으로 임명했다가 실무를 보기도 전에 공조좌랑(6품)으로 옮겨 발령을 한다. 그리고 11월 사헌부 지평(5품)의 벼슬로 승진한다. 사헌부는 시정 논의하고 관리들을 규찰과 기강과 풍속 정립하는 청요직이다. 이때 조정의 중진이 유명천과 이옥의 개인적 갈등에 대해 고관으로서 체신을 잃었음을 지적하고 두 사람 모두 탄핵했다. 그 연유로 부사직으로 좌천된다. 이후 불안한 조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천거가 있을 때마다 거절하고 학문에만 열중한다.
벼슬을 내릴 때마다 상소를 올려 자신의 뜻을 임금께 전했다. 1679년 8월 배는 임금, 물은 백성과 같다는 고사를 그림으로 그린 어제주수도설발휘(御製舟水圖說發揮)를 지어 숙종께 올렸다. 숙종은 ‘충성스러운 마음이 글에 넘쳐난다. 매우 가상하니 내가 곁에 두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하고 호피 한 벌을 하사했다. 이때부터 숙종과의 인연은 깊어지게 된다.
1680년 1월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7월 모친 장씨가 별세하여 두실원에 장사하고 삼년상을 마친다. 1683년 2월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이변이 있어 전국의 진신(縉紳-모든 신하)에게 직언을 구하라고 했다. 이때 갈암은 왕실 외척의 세력이 너무 성해 방종(放縱)과 전단(專斷)하는 조짐을 지적하고 파당의 문제점을 거론하자 영의정 김수항이 갈암을 역적으로 몰았으나 주위 사람들이 변호하여 간신히 무마되었다.
이 사건 이후 영양 석보에서 친척을 모아 초하루 보름에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월삭 강회를 만들어 강학하며 학문에 열중한다. 그 때 60세 나이로 중형 이휘일과 같이 시작했던 [홍범연의(洪範衍義)]를 35년 만에 완성하고 정치적 도리에 대해 자신의 주관을 갖게 된다.
퇴계학설의 계승과 율곡의 학설 비판
남인들은 사단칠정에 대해 퇴계 선생과 기대승과의 8년에 걸친 논변으로 마무리 된 것으로 보고 별다른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호학파는 율곡을 중심으로 퇴계의 학설을 계속 비판하게 된다.
퇴계의 이론은 사단은 리(理)의 발(發)이고, 칠정은 기(氣)의 발이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것이다. 그런데 율곡은 리는 형체도 없고 행위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존이므로 기만이 발하는 이기론의 기본적 개념을 고수한다. 같은 시대 성혼의 학설을 토대로 자기학설을 설명한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율곡 이후 김장생, 송시열까지 100여 년 동안 퇴계의 이기호발설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가해왔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살았던 퇴계 학파의 정경세, 허목 같은 큰 학자들이 있어도 기호학파의 비판에 대항하지 않고 이기론보다는 예학이나 경세학에 취중하고 있었다. 금옹 김학배(金學培, 1628~1673)가 율곡의 학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으나 본격적인 비판은 없었다. 이현일이 1688년에 지은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은 율곡학설에 대한 영남학파의 본격적이고 체계적, 이론적 비판이었다. 이것은 기호학파의 거두이며 서인(노론)을 대표했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맞서게 되면서 갈암은 퇴계학파는 물론 영남학파의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된다.
기사환국과 산림처사 갈암
숙종은 1689년 장희빈의 아들 윤(昀-뒷날 경종)을 세자로 삼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으려 했다. 이때 반대했던 서인은 물러나고 이를 지지하던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사사(賜死)되었고 김수흥(金壽興)과 김수항(金壽恒) 등 많은 사람이 파직되거나 유배되어 서인은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대신 권대윤(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목래선(睦來善), 여성제(呂聖齊) 등의 남인이 득세하였다. 그리고 인형왕후는 폐출(廢黜)되고,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다.
남인은 정권을 잡았으나 권력 기반은 미약했다. 정권의 기반이 약하면 늘 산림에 묻혀 지내는 선비를 찾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광해군 때 대북 정권은 정인홍을 등장시켰고 인조반정 때 김집, 효종 때 송시열, 송준길을 등장 시켰다. 그리고 1674년 갑인예송 때 남인 정권은 정구의 제자 기호남인 허목과 윤휴를 등장 시켰다. 이 기사환국으로 등장한 남인 정권은 기호 남인과 영남 남인을 대표할 수 있는 갈암 이현일을 천거하여 어려운 현실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갈암은 그해 2월에 성균관 사업의 벼슬을 주었으나 13년 전 사헌부 지평에서 물러난 일을 기억하고 사양한다. 3월 초에 우의정 김덕원의 추천했으나 거절하자 3월 17일에 호조판서 권대재가 다시 추천하여 경상도 관찰사가 영양 석보를 직접 방문하여 조정에 나올 것을 권유한다. 결국 숙종의 특명으로 4월 중순에 상경 도중에 사헌부 장령(정4품)의 벼슬이 내려진다. 5월 3일 경기도 광주에 이르렀을 때는 통정대부 공조참의(정3품)로 특진되고 5월 4일 하루 만에 이조참의로 승진한다. 그러나 바로 사직상소를 올린다.
이러한 특별 진급에 대한 사직 상소는 대간직을 비롯한 청요직에 임명된 문신들의 전통이 되어있었다. 이러한 사직 상소는 관직을 그만둔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상소문을 통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조정의 문제를 시정케 하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10년 전 경신환국 때 남인들과 동조하였다가 역모로 몰렸던 이연, 이환, 이혁 등 숙종과 가까운 친지들의 억울함을 다루고 있다. 이들의 복권은 바로 남인들의 복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임금은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이상진의 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의 건의를 받아주고 출사하기를 거듭 재촉한다.
숙종과 만남은 1689년 5월 15일에 경연에서다. 이것은 단순히 당상관 정3품 이조 참의 관원이 아니라 임금 앞에서 강의하는 경연관으로서의 첫 근무를 시작하는 자리였다. 그 후 1694년 갑술환국이 있을 때까지 6년간 경연을 주도 하면서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 대신들의 책무, 억울하게 귀양 간 대신의 복권, 왜란과 호란 때 공적이 평가되지 못한 선비들의 시호와 포상, 증직 등을 건의하여 성사시킨다.
그는 주로 새로운 정책이나 임금이 결정하기 어려운 당쟁의 소지가 있는 일이 있을 때마다 현명한 방법을 제시했다. 남인들이 효종과 현종 두 임금과 현종왕비 명성왕후 청풍 김씨와 숙종의 전비 인경왕후의 묘지문을 서인 송시열과 김석주(명성왕후 인척이며 서인이 중진)가 사실을 날조하여 지었으므로 고쳐야한다는 의견으로 서인과 대립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숙종은 영양 석보까지 예관을 보내어 질의한다. 갈암은 이 문제를 ‘비록 전대(前代)에 잘못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선왕의 묘역을 파고 옛날의 기록을 새로 바꾸는 일은 선왕에 대한 도리가 아님을 지적하여 숙종이 이를 받아드려 무리 없이 처리되게 한다.
또 숙종이 사육신들에게 제사하고 벼슬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이 세조의 후손이고 그 때 신하들의 후손이 조정의 신하인 점에서 함부로 결정을 못 내렸다. 이때도 갈암은 ‘백이(佰夷)가 무왕을 그르다고 했으나 공자는 주나라 사람인데도 백이의 충절을 찬양했음’과 세종대왕이 이미 ‘육신(六臣)들은 후세에는 충신이 될 것이라’ 한 점을 들었다. 숙종이 판단하기 어려웠던 것을 갈암이 쉽게 풀어 준 것이다.
6년간의 많은 상소와 직간들은 귀양살이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1689년 9월 24일 늦가을에 천둥번개가 치는 이변이 생기자 숙종은 전국의 선비들에게 직언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갈암은 폐출된 인현왕후를 별궁에 거쳐하라는 건의를 했다. 폐비에 대한 언급을 금했던 숙종도 이 건의를 받아드려 별궁을 수리하게 된다. 그러나 숙종은 갑자기 명을 취소한다. 이 일은 뒷날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인현왕후를 별궁에 가두고 감시하라는 모해로 둔갑하게 된다.
또 경종에 이어 영조가 태어나자 숙종에게 세자 책봉과 등급을 명확히 할 것을 건의한다. 이것은 숙종이 독단에 의해 경신환국(서인)과 기사환국(남인)의 두 번의 정변을 주도하였으며, 왕비를 두 번이나 폐출하는 숙종의 성품과 기질을 알고 이미 세자를 세웠으니 바꾸는 일이 없이 하라는 갈암의 의도였다. 숙종도 이것을 받아드렸으나 뒷날 서인들이 모해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1693년 봄 경연에서 궁중의 일을 처첩과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 비유하였다. 숙종도 장희빈의 오라비 장희재가 권력과 결탁하여 문제를 야기 할 때라 듣고 느낀 바가 있어 갈암의 충심에 감동하고 가슴 속 깊이 새겨두겠다고 한다. 이해 병조참판과 우참찬(의정부 정2품)으로 차례로 승진하고 7월 14일 이조판서(정2품)에 오른다. 4년 남짓 벼슬을 하면서 고속 승진이다.
임란 이후 영남출신이 이조판서(정2품)에 오른 이는 정경세, 이원정, 이현일 뿐이다. 임금의 융숭한 대우와는 달리 이현일의 정책적 제안은 기호남인들에 의해 시행이 잘되지 않거나 대신과의 마찰도 일부 있었다.
숙종과의 영원한 이별과 귀양살이
1694년 백성의 환곡 탕감을 건의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저지되었다. 3월에 어전에 하직하는 자리에서 어린 세자를 걱정하자 숙종은 세자를 불러와 보게 하고 속히 돌아오라고 거듭 일렀다. 그러나 이것이 숙종과의 마지막 자리였다.
그해 4월 갑술환국으로 남인은 죽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현일도 이조판서의 자리에 있었기에 함경도 홍원으로 유배를 명했다. 이유는 기사환국 때 송시열을 공격했던 남인 조사기를 경신년에 구원했다는 죄목이었다. 홍원에서 다시 서울로 압송하여 폐출된 인현왕후를 별궁에 거처하도록한 상소문과 세자의 서열을 적서에 따라 구분하라는 상소 때문에 함경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음력 8월 14일 이미 북방은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 고을 향교에서 주자서절요를 빌려 아들 이재에게 강의하고 1695년 봄부터 고을의 젊은이들이 찾아와 배움을 청해서 사서, 대학,소학,가례를 강의하였다. 그때 한 사람인 주건은 뒷날 안동까지 갈암과 밀암을 찾아오기까지 한다.
종성에 2년을 보내고 1697년 남인에게 다소 동정적인 남구만과 윤지선의 건의로 위리안치가 해지되고 남쪽 전라도 광양으로 옮겨진다. 1697년 섬진강변의 갈은리로 유배지를 옮기고, 그해 11월 아우 이숭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1699년 봄 귀양 6년차에 왕세자가 홍역이 걸렸다가 나은 것을 계기로 사면령을 내려 이현일도 풀려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조정의 대간들의 상소로 경남 하동군 악양동에 1년간 머무르면서 조선중기 정여창의 유적과 신라 때 최치원이 바위에 썼다는 쌍계석문(雙溪石門)을 돌아보고 청학동을 유람한다.
금양정사의 강학 활동
1700년 2월 9일 사간원의 논계를 마쳐 1년 뒤에 완전히 귀양에서 풀려났다. 갑술환국 이후 고향을 떠난 지 만 6년 햇수로는 7년의 귀양살이였다.
그가 정착한 곳은 귀양살이을 떠날 때 영양 남악이 아니라 안동 임하현 금소리였다. 여기에 정착한 이유는 명리 두솔원에 있는 부모님 묘소에 성묘하기 편리하므로 이곳을 빌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가 안동에 정착한 것은 단순히 부모의 성묘만은 아닌 듯하다. 먼저 아들 이재가 이현일의 벗인 내앞마을의 금옹 김학배의 질녀와 혼인한 점이다. 이때 의성 김씨는 내앞을 중심으로 오대와 신덕 등 주위 마을에 번성했던 시절이다. 또 적암 김태중 같은 높은 학문 경지에 이른 선비들이 많이 있었다. 적암은 갈암이 금소에 정착하자 그의 제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그 문하로 들어간다. 그가 금소에서 강학하게 된 것은 경제적 학문적 기반이 두터웠던 점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74세의 이현일은 고령에 때문에 병석에 자주 눕는 일이 있었으나 강학 활동을 거른 적은 없다고 전한다. 여기서 1730년대 안동의 퇴계학맥을 이을 제산 김성탁을 만나게 된다. 그 밖에도 많은 선비들이 갈암을 찾는데 금양급문록에는 353명의 제자의 명단이 실려있다. 지역적으로 보면 안동196명, 성주28명, 경주28명, 상주21명, 진주38명, 기호 및 기타24명 미상18명으로 안동을 중심으로 영남과 기호를 아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 갈암금양강도지는 갈암이 돌아가신 뒤에 제자들이 그의 학문을 이어가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전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口자형 형으로 안채는 양쪽에 각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하고 가운데에 3칸의 마루를 두었다. 양쪽의 방은 난방을 위해 부엌을 각각 배치하였다. 문간은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우측에는 외양간과 방, 좌측에는 마루와 방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금소리에는 선생이 후학 300여명을 교육하던 곳이며, 선생이 임종한 錦陽壇(금양단)이 있다.
갈암의 명예회복을 위한 긴 여정
귀양에서 풀려나 두실원의 부모님 묘소를 찾아보고 영해 종가에서 고유하고 인량리 인산서원을 참배했다. 이 인산서원은 당시에 중형 이휘일이 모셔져 있었고 뒷날 갈암 본인도 배향되는 서원이기도 하다.
고향에 돌아온 갈암의 명예회복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1701년 5월에 숙종은 갈암 이현일을 완전히 복권하고자 했으나 노론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더하여 8월 인현왕후가 세상을 뜨기 전 장희빈이 무당을 시켜 저주하였다는 이유로 남인들의 옥사가 있었다. 이때 노론은 갈암에게도 위리안치를 주장했으나 숙종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아 간신히 모면하게 된다.
1704년 7월에 돌림병으로 23일 자리에 눕웠다가 8월 4일에 회복할 수 없을 알고 자리에 일어나
덧없는 인간 세상
어느덧 팔십년이 흘렀네
평생토록 한 일이 무엇인가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자 하였을 뿐
란 글귀를 남기고 10월 3일 79세의 갈암은 금소에서 엄청난 세파를 뒤로하고 세상을 하직한다. 63세(1680)에 조정에 나가 고향을 오가며 5년간의 경연과 7년간의 귀양살이에 풀려나 안동 금소에서 5년간의 강학으로 일생을 마감했으나 그의 죄는 회복되지 않았다. 1705년 1월에 금소 북쪽 산기슭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이때 300여명의 제자들이 모였고 그 후 2년 뒤에 남쪽 신석리로 이장했다. 현재 묘소는 1832년 영해 나라골 행정 골짜기로 옮겨 박씨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길고 긴 신원(伸寃-가슴에 맺힌 원한을 품)의 여정은 멀리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도 수차례 복권의 노력은 있었으나 그때마다 정치적 문제로 풀리지 않았다. 1710년 제자 권두경, 나학천 등의 영남의 선비가 상소를 올렸다가 관작이 몰수되었고, 1737년 영조 때 김성탁과 조덕린이 신원의 상소를 올렸다가 조덕린은 제주로 유배되다가 강진에서 죽고, 김성탁은 제주에서 광양으로 이배되었다가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1852년 철종 때 영남 남인들이 상소를 올리고 안동김씨 김수근의 도움으로 직첩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1871년 고종 8년 안동에 우호적이였던 흥선대원군의 도움을 받아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2년 뒤에 도로 환수한다. 그의 명예가 최종 회복된 것은 1908년에 순조 2년 조선 왕조가 끝나기 2년 전의 일이다.
강직한 선비 갈암은 퇴계학을 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에게 이어받아 대산 이상정-정재 류치명-서산 김흥락-석주 이상룡으로 이어지게 하여 구한말 구국운동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승화하는데 크게 공헌했던 인물이다. 갈암 선생은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 시대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정성을 다했으며 한 평생 부끄러움이 없고자 노력했던 분이다.
사람과 문화122호 5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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