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한시의 멋스러움
- 용만 권기의 시에 반영된 문예미(1) -
이 원 걸 (구독회원)
머리말
용만 권기(1546-1624)는 영가지의 편찬자로 안동 지역 사회에서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안동인으로서 영가지와 권기에 대한 인식은 일반화되어 있지만, 그의 문학적인 성취면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행적과 영가지 편찬 내력은 안동문화원에서 영인한 영가지 원본 서두 부분에 정리되었다.1) 이어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에서는 퇴계의 재전제자들의 문집을 표점․영인했는데, 용만 권기의 시문집인 용만집이 편찬되었다. 이종호 교수는 용만집 해제2)와 안동 처사의 전형인 용만의 삶을,전원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성의 실천으로 요약했다.3)
용만은 처사적 선비로서, 그가 평생을 살다가 뼈를 묻은 우리 고장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이런 그의 삶은 우리 농토와 농민의 삶에 대한 아주 밀착된 것이었는데, 전원적인 시를 창작했다. 아울러 그는 향토의 미풍 진작을 위해 고민하기도 했다.4) 그의 만년 역작 영가지와 안동권씨세보는 이런 의식에서 찬술된 것이라고 한다.5)
용만집」은 2권 1책으로, 권 1에 시 166수가 실려 있다. 권 2에는 잡저 및 묘갈명 등이 몇 편 실려 있다. 때문에 그의 문예적인 성취는 시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용만의 시를 분석하여 거기에 반영된 문예미를 검토하기로 한다.
용만의 생애
후인들에 의해 완성된 비지문자(碑誌文字)를 통해 그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그는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사립(士立), 호는 용만으로 권태사의 23대손이다. 그의 조부는 미수(眉壽)로 벼슬은 부장(部將)이었다. 부친은 몽두(夢斗), 모친은 영양남씨 한립(漢粒)의 따님이다. 한립의 벼슬은 충순위(忠順尉)였다. 이로써 볼 때, 용만의 선대나 처족 모두 그리 현달한 집안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7세 때에 모친을 여의고 외로운 유년기를 보낸다. 이 당시 권기는 집안에서 보리떡을 만들자, 여종에게 정갈한 그릇에 그것을 담아 달라고 해서 공손히 머리에 이고 모친의 빈소문에 바치는 효성을 보였다.6) 3년간의 모친상을 마친 그는 10세 무렵에 고을의 선비들을 따라 광흥사에 놀러 갔는데, 행동거지가 단아하여 기특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13세 때 무렵에 부친의 가르침을 따라 소학을 익혔다. 이 당시, 스승으로부터 소학을 잘 외운다는 칭송을 받았다. 부친은 그가 일찍이 모친을 여읜 것이 안쓰러워서 학업을 독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용만은 17세가 되어 스스로 현감인 고흥운(高興雲)에게 가서 1년 정도 배운 뒤, 송암 권호문의 문하에 들어가 「위기지학」을 듣고서 밤낮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용만은 그에게서 순수한 처사형의 선비 형상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용만은 23세부터 과장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용만은 그해 곧, 선조 1년(1568)에 향시(鄕試)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회시(會試)에는 운이 닿지 않아 번번이 실패한 것이 모두 열여섯 차례였다. 그가 이렇게 번번이 과거에 응한 것은 부친의 집요한 요구 사항에 응한 것이었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부친이 세상을 뜬 이후로는 과거 보러 가는 것을 청산하고, 향리에서 처사의 삶을 마친다. 이 당시, 그의 나이는 대략 40세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그는 다방면에 걸친 독서와 사색을 통해 광범한 학문을 구축한다. 그리고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의 문하에도 출입을 하면서, 대인군자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되었다.
만년에 조정에서 그를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으로 불렀으나, 부친상을 당한 터라, 출사하지 못했다. 만년에 역작을 남기게 되는데, 안동권씨세보 16권을 편수했으며, 영가지 8권을 찬술했다. 그런데 영가지를 만든 목적이 그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노경에 소회삼아 편찬한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그는 이 일 때문에 중한 눈병을 앓을 만큼 혼신의 힘을 쏟았다고 고백했다.7) 이후로 그는 눈병과 육신의 질고 속에 17년 동안이나 문밖출입을 못하다가 79세의 일기로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중략~ (사람과 문화 122호)
1) 徐守鏞, 永嘉誌 原本 影印, 安東文化院, 1993.
2) 李鍾虎, 龍巒集 解題, 退溪學資料叢書 14卷, 安東大學校退溪學硏究所編, 1997.
3) 李鍾虎, 「朝鮮中期 安東處士의 典刑과 現在的 意味」, 安東漢文學論輯 第6號, 安東漢文學會, 1997.
4) 安東 鄕土에 대한 논의는 朱昇澤, 「안동 선비의 향토관과 국가관」, 안동의 선비 문화, 아세아문화사, 1997.
吳壽京, 「안동 선비의 문화의식과 향토문화 창달」, 안동의 선비 문화, 아세아문화사, 1997를 참조.
5) 龍巒集, 退溪學資料叢書 14卷, 安東大學校退溪學硏究所編, 1997, p.230. 「永嘉志」, 「八帙永嘉志, 粧黃顔色鮮. 古今明日 月, 人物辨蚩姸…」.이하, 龍巒集으로 약칭함.
6) 龍巒集 卷1, 「墓誌銘」, p.282, 「七歲丁母喪, 家內, 適造麥餠. 公懇言于女僕, 盛以潔器, 手奉頭載, 佇立殯門, 有若神 靈, 降欽然者, 其悲惻之容, 使人隕淚」.이러한 일화외에도 용만은 부친이 등창을 앓았을 때, 지렁이 즙을 바친 일이나 부친 이 이질에 걸려 생선회를 들고자 했을 때, 생선을 바친 일은 신이성이 개입된 효성의 표출이지만, 그의 효성이 매우 뛰어 났음을 반증해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대거 편찬된 「열녀전」이나 「효자전」의 서사 구조에 드러나는 「신이적 요소의 개입을 통한 입전 인물의 이미지 부각」과도 관련이 있다.
7) 龍巒集 卷1, pp.240-241, 「居家卽事」, 「八年修譜七年誌, 五十年間枉費神. 兩眼忽昏終廢業, 床頭堪恨亂書塵」 및 p.202, 「 病中雨吟」, 「修譜兼成花山志, 勞心磨琢忽傷眸. 幹兒總理枝兒兒輔, 老父無憂一病叟」 참조.
'전통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제현 (0) | 2010.01.24 |
---|---|
[스크랩] 조선후기 유림의 4대 학파 (0) | 2010.01.24 |
[스크랩] 무흘구곡-한강 정구(1543~1620) (0) | 2010.01.24 |
[스크랩] ↘:무흘구곡을 찾아서-mt주왕 (0) | 2010.01.24 |
[스크랩] 붕당의 갈등을 온 몸으로 감당했던 갈암 이현일 - 김호태 (0) | 2010.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