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유성룡 일화

회기로 2010. 1. 24. 19:16

효는 곧 슬기인 것을 가르친 유성룡



 조선 왕조 5백 년 중에서 가장 비참한 전쟁이라면, 그건 당연히 선조 25년 (1592)년에 있었던 임진 왜란일 것이다. 이때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한 장본인이 바로 유 성룡이다. 유 성룡은 조선 제 11대 임금인 중종 37년(1542) 10월 1일, 지금의 경상 북도 의성군 사촌리에 있는 그의 외가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성룡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이름이 뚜렷하게 내려오던 명문 집안으로서, 할아버지는 강원도 간성군의 군수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황해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그의 집안은 본디 대대로 경상 북도 안동에 살았으나, 6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하회촌으로 옮겨 와 살았다. 유 성룡은 어려서부터 여느 아이와는 달랐다. 그는 네 살 때 이미 글을 읽기 시작했으며, 여섯 살 때는 종조부로부터 '대학'이라는 어려운 한문책을 배웠다.


 유성룡은 여덟 살 때 '맹자'라는 대학보다 어려운 책을 배웠는데, 그 중 한 대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좔좔 외어 그의 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부터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풍산 유시 집안에 인물났다.'는 말이 나돌게 되었다.


 어린 유성룡은 공부에 열중하는 것 못지 않게 옳은 일에 대한 고집도 대단하여, 한때는 고집불통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유 성룡의 아버지는 의주 등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그도 아버지를 따라다녀야 했다. 유 성룡의 나이 열 여섯이 되던 해, 그는 처음으로 지방에서 보는 향시에 응해 당당하게 합격했다. 열 아홉이 된 유 성룡은, 다음 시험 준비를 위해 관악산에 있는 한 외딴 임자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의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유성룡이 있는 암자 근처에 자그마한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중 하나는 유 성룡이 낮이나 밤이나 책에 파묻혀 사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건성으로 그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과연 어느 쪽인지 시험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 날 자정이 되자, 그 중은 암자가 있는 계곡으로 숨어 들어갔다. 창호지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희뿌연 호롱불이 깜박깜박 졸고 있었다. 힘이 장사인 그 중은, 끙끙거리며 큰 돌덩이 하나를 집어 들더니 담 안으로 휙 던졌다. '쿵'하는 둔한 소리를 내며 돌덩이는 툇마루 바로 곁에 떨어졌다. 숨을 죽인 채 안을 살폈으나 끝내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흥, 공부하는 게 아니라 애꿎은 호롱 심지만 태우고 있군." 이튿날 아침, 상을 물리고 나서 다시 책상머리에 앉는 유 성룡을 보고 간밤의 중이 실쭉샐쭉 웃으며 말을 걸었다.

 "밤새 별일 없었는지요?"

 "자정 쯤 되어 앞마당에 웬 바위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던데 하도 재미난 대목을 읽고 있던 참이라 내다보지 못했다네." 예의 중은 아무 소리 못하고 암자를 내려오며 혼자 중얼거렸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예사 분이 아니군."


 관악산에서 학문에 심혈을 기울인 보람이 있어 유성룡은 그 이듬해인 그의 나이 20세 되던 해에 생원, 진사 두 가지 시험에 거뜬히 합격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는 그 당시 국립 대학교인 성균관에 입학을 하게 되었으며,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 10월에는 이윽고 조선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과거에 보라는 듯이 급제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유성룡은, 당시 뛰어난 학자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퇴계이 황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유성룡에게 몇 달 동안 학문을 가르친 이 퇴계는, 그 총명함에 연신 감탄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젊은이는 하늘이 실수하여 지나친 총기를 주었거나, 아니면 특별히 귀여워하여 여느 사람의 몇 배도 넘는 재주를 주었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 말을 들은 퇴계 이 황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김성일은 벗인 유성룡에게,

 "내가 선생님 밑에서 오랜 해 가르침을 받았지만, 한 번도 칭찬하시는 일을 본 적이 없었다네. 자네가 처음일세." 하고 부러운 듯 말했다. 효성 없는 학문은 눈뜬장님이다. 나이 스물다섯에 승무원에 들어간 유성룡은 선조 2년(1569)에는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뒤로 유성룡의 학문과 행동은 날이 갈수록 명성을 얻어, 선조 3년(1570) 가을에는 학문을 하는 신하로서 가장 명예스러운 사가독서(나랏일을 하지 말고 편히 쉬며 하고 싶은 학문을 하라는 휴가)를 받게 된다.


 그 뒤 유성룡은 이조 좌랑, 병조 좌랑 등의 벼슬을 역임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 평소에 존경하던 퇴계 이 황이 세상을 떠나고 또 종조부마저 돌아가시자, 겹치는 슬픔을 이겨내지 못해 헌신짝 버리듯 벼슬을 내팽개치고 고향인 안동으로 달려갔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뵙자 유성룡은 지금까지 자신이 나랏일에 쫓겨 어머니 봉양을 게을리 한 게 죄스러워, 다시는 한양 땅에 올라가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제아무리 글을 많이 읽어도 어머니께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개, 돼지와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효성 없는 학문은 눈뜬장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선조는 유성룡을 어머니 곁에 오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에게 정 3품 벼슬인 홍문관 부제학을 내렸으니 곧 상경하라는 전갈이 왔다. 다시 마음에도 없는 벼슬길에 오른 유성룡은, 서재에 고향의산수도를 걸어 놓고 그곳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곤 했다.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아 애달프다 어버이시여, 그 은혜 갚고자 하나 하늘같이 끝이 없거늘.'  유성룡은 한번 어머니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면 그 날 밤은 한 잠도 이루지 못하고 하얗게 새우기가 일쑤였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날이면 날마다 뜬눈으로 지새다보니, 유성룡의 낯빛은 이제 누가 봐도 몹시 앓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어느 날 임금이 유성룡과 더불어 나랏일을 상의하다가 그의 얼굴색이 초라한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경은 혹시 무슨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요? 얼굴이 아주 안 되었구려."

 "전하,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잠을 좀 설쳤을 뿐입니다."

 "잠을 설쳤다구요? 그럼 무슨 마음의 병이라도 있단 말이요?"

 "황공하오나 마음의 병이라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허, 그거 안 되는 일이지요. 이 몸이 도와 줄 길은 없소?" 유 성룡은 그렇지 않아도 오늘 같은 기회를 기다려 왔으므로 곧장 아뢰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은 몸만 한양땅에 있을 뿐이지 마음은 줄곧 고향 어머니 곁에 가 있습니다. 어머니 봉양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떨어져 있으니, 그저 밤잠을 설칠 뿐입니다."

 임금은 유 성룡의 효성에 눈시울을 적시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참된 신하는 동시에 효도하는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잠깐 잊고 있었구나.'

 선조는 얼마 동안을 생각하더니 이윽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주라면 경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니, 그곳 목사로 부임하여 소원대로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하시오."


 유성룡이 벼슬길에 오른 지 10년, 그 동안 그는 줄곧 중앙에만 있었지 지방 근무를 하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사내 나이 서른아홉이라면 한창 벼슬 욕심을 낼 때가 아니던가. 그럴수록 지방보다는 중앙에 있어야 모든 일이 유리하게 돌아가게 마련인데, 유성룡은 아무 미련 없이 효도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버이에 대한 효는 나라에 대한 충보다 작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사사로운 것에 대한 애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유성룡에게 충과 효 중에서 어느 것이 크냐고 묻는다면 그는 둘 다 크다고 대답했을지 모른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유성룡이 몸으로 보여준, 그의 나라에 대한 헌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머니를 봉양하듯이 나라를 위했으며 나라를 위하듯이 어머니를 받들어 모셨다. 결국 그의 자세를 통해 우리는 불효하는 충신이 있을 수 없으며, 반역하는 효자 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 후 유성룡은 그의 나이 49세 때, 지금의 부총리에 해당하는 우의정이 되었으며, 이듬 해인 선조 23년(1590)에 신하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벼슬인 좌의정에 올랐다.

 임진 왜란이 끝나자, 조선 시대의 가장 고질인 당파 싸움이 시작되었다. 반대파의 모함을 받는 유 성룡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24년간의 오랜, 그러나 결코 악착스럽게 탐하지 않았던 벼슬 생활을 미련 없이 청산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에게는 어머니를 뵙는다는 것보다 더한 즐거움이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었으므로, 그의 발걸음은 마냥 가벼웠다. 고향으로 가던 중 어머니께서 태백산 밑에 있는 도심촌이란 곳으로 피난을 가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로 가 어머니를 하회촌으로 모셨다.


 유성룡이 물러난 이후 조정에서는 당시 가장 청렴하고 공이 많은 공신 셋을 뽑았는데, 그 중 유성룡이 으뜸으로 지목되었다. 선조 34년인 1601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성룡은 서미동이라는 곳에 작은 초가집을 지어놓고 혼자 쓸쓸히 지냈는데, 그즈음 그는 끼니를 이어나갈 양식조차 어려웠다.


 1607년, 몸이 쇠약해진 유성룡이 자리에 눕자 선조는 왕과 왕비의 치료를 도맡는 내의를 내려 보내 그의 병을 돌보도록 했으나, 그런 임금의 정성도 보람없이 그는 66세인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임금은 아끼던 유성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닷새 동안이나 나랏일을 쉬며 슬퍼하였다.

 "짐은 그의 학식과 충성에 대해서 누누이 감탄하는 바이지만, 그의 효성을 더욱 잊을 수 없노라. 짐은 그를 통해 효를 다하는 자는 충도 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노라. 또 효, 그것은 곧 슬기인 것을 알게 되었노라."

 

 
출처 : 낙동민속보존회
글쓴이 : 해동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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