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44)조선 최후의 문장가 이건창의 삶과 사상 下 | ||
입력: 2008년 10월 03일 17:23:10 | ||
ㆍ탐관오리 벌벌 떨게 한 암행어사, 백성의 아픔 절창하다 조선 7대 문장가 이건창과 가장 많이 어울리면서 문장과 학문을 논하며 세상을 걱정했던 친구는 창강 김택영이었다. 전라도 구례에서 살았던 매천 황현도 지기지우였으나 살아가던 곳의 거리가 서로 멀어 자주 만나거나 어울릴 수 없었음은 당연했다. 서울과 강화도는 멀지 않은 곳이요, 벼슬살이에 서울 생활이 잦았던 이건창은 활동무대가 서울이던 김택영과는 자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최근의 기록에서 강화학파의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고, 또 강화학파라는 이름을 명명한 민영규 교수는 김택영이 제대로 이건창을 알지 못했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도 있으나 무엇으로 판단해도 김택영은 영재의 지기지우였다.
김택영은 고려·조선 천년의 문장가를 식별하여 고려의 김부식·이제현 두 문장가에 조선의 장유·이식·김창협·박지원·홍석주·김매순·이건창 등 7인을 더해 ‘여한9가’, 즉 고려와 조선의 9대 문장가를 선정하였다. 나라가 망할 무렵 중국으로 망명해버린 김택영은 자신의 제자인 개성의 왕성순(王性淳)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라는 망했지만 역대 문장가들의 글은 없어지지 않고 세상에 영원토록 전해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왕성순은 김택영의 명을 받아 그 책을 간행하였다. 자신의 스승인 김택영의 글을 뽑아 함께 넣어 ‘여한10가문’이라는 책으로 중국 양계초의 서문을 받아 1921년 중국의 남통에서 간행하였다. 이른바 ‘여한10가문’이라는 책이 그렇게 해서 탄생하였다. 그렇다면 이건창은 김택영에 의하여 뽑힌 조선 7대 문장가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이건창이 조선 7대 문장가로 뽑힘은 김택영 개인의 의견은 아니었다. 이미 언급했던 대로 해학 이기도 이건창은 문장가의 반열에 오름을 말하였다. 당대의 공론에 의하여 그러한 선발이 가능했으리라 믿는다. 문장가에 못지않은 시인 이건창, 타계한 지 벌써 110년이 넘었다. 근래에는 그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고 있다. 문장가와 시인이기 이전에 그의 마음에는 뜨거운 애국심과 인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라의 위급한 때를 당해 할아버지가 자결하던 때가 영재의 나이 15세였다. 이미 학문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고, 세상물정을 대부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시절이다. 그 해에 문과에 급제, 조선 500년 최연소 문과 급제자임도 그의 자랑이었다. 영재가 살아가던 시대가 어떤 때인가.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기 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쳤고, 임오군란에 갑신정변, 갑오동학운동에 갑오경장, 급변하던 시국, 마침내 을미년에는 민비시해라는 전대미문의 국란이 일어났다. 왕비가 외국인의 침입으로 살해되는 비통한 시절, 그에게 어찌 나라에 대한 아픔이 없었겠는가. 이 무렵, 영재는 ‘민시우국(憫時憂國)’, 시대를 고민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수많은 시를 짓는다. ‘전가추석(田家秋夕)’이나 ‘협촌기사(峽村記事)’ 같은 절창의 시는 바로 다산의 ‘상시분속(傷時憤俗)’,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는 시들을 연상케 해준다. 국가나 인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애정이 있었기에, 가난하고 병들어 끼니도 제대로 못 먹는 인민들의 아픔에 한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핍진하고 생동적인 현실비판시를 저작하기에 이른다. 인민의 아픔에 한없이 속상해하면서도 그가 지나거나 목격했던 조국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의 혼이 서린 곳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곱고 아름다운 시어로 생생하게 묘사해냈다. 조선의 직신으로, 누구에게도 아부하거나 굽실거릴 수 없던 영재, 암행어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서는 탐관오리들을 한 치의 양보 없이 무섭게 징치하는 무서운 어사였다. 온갖 위계와 꼬임으로 탄핵에서 벗어나려던 수령들의 농간에도 전혀 흔들리거나 굽힘없이 참으로 통쾌한 어사 임무를 수행하였다. 오죽했으면 고종황제가 도신(道臣)이나 수령을 제수할 때 올바른 목민관 생활을 당부하면서 “만약 잘못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이건창을 암행어사로 파견하겠다”고 하고, 벼슬아치들이 암행어사 이건창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겠는가. 소론과 남인 이건창의 가계는 오래전부터 소론계의 집안이었다. 강화학파는 주로 소론계로 형성된 학파였다. 노론계와는 대립관계였고, 그 때문에 노론계와 반대파이던 남인계와 소론계는 가까웠다. 양명학의 원조 정제두의 손서에는 이광명(李匡明)과 신대우(申大雨)가 있었다. 이광명은 이건창의 5대조였고, 고관대작이던 신대우는 다산 정약용과 가까웠던 석천 신작(石泉 申綽) 형제들의 아버지였다. 때문에 이건창의 선대는 정약용 집안과도 교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강화학파의 이긍익·이충익·이영익 등이 독실한 실학자였고, 다산 일파도 뛰어난 실학자였음을 상기하면 이들의 교류는 너무나 당연했다. 특히 노론들과도 학문적 교류에 소홀하지 않았던 정약용의 입장에서 보면 실학자들과 교류는 정말로 당연했다. 교류의 구체적인 증거가 많지 않으나 짐작이 가는 점들은 매우 많다. 정약용이 나라와 인민을 사랑했던 이유로 그런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시를 많이 읊었듯이, 이건창도 그런 시를 많이 읊었다. 정약용이 지나거나 목격했던 강산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땅을 놓치지 않고 시를 읊었듯이 이건창도 그가 지나간 강산이나 역사적인 땅에 대한 시를 많이 지었다. 중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읊은 시, 암행어사로 다니면서 목격한 백성의 아픔을 노래한 시는 대체로 다산풍이다. 한때 전라도 보성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오면서 지났던 전라도의 명승지나 유적지에 대한 이건창의 기행시는 절창이 아닌 것이 없다. 그는 그만큼 뛰어난 시인이었다. 한말 호남의 최고의 성리학자였던 노사 기장진의 유택을 찾아가 읊었던 시, 그 유명한 면앙정 송순의 정자 면앙정에서 읊은 시들은 지금 읽어도 명작임을 금방 이해하게 된다. 대단한 시인이었다. 이건창은 충신의 손자로 15세라는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곧고 바른 그의 성품과 높은 기개 때문에 당로의 고관들과는 언제나 마찰을 빚어 벼슬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30년의 벼슬살이에 참판의 지위에 올랐으나 47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타계하면서 애석한 생애를 마쳤다. 대원군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권신들과도 늘 상반되는 견해로 귀양살이를 떠나거나 고향에 칩거하는 때가 많았다. 그런 불우한 시기에 그는 시로 마음을 달래고 저술로 울분을 풀었다. 그의 뛰어난 산문이나 시들의 대부분이 그런 시절에 완성되었으니, 불우한 시절이 있었기에 그의 문장과 시가 세상에 이름을 날린 것도 사실이다. ‘당의통략’이라는 명저 조선 500년의 당쟁은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다. 서인과 동인으로 싸우다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고 끝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면서 4색당파라 일컫지만, 거기도 갈래갈래 나뉘어 누구도 제대로 가닥을 추릴 수 없는 것이 바로 당쟁의 계파다. 소론 계열의 이건창도 당색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가장 공정한 안목과 비판정신으로, 당색이나 가문의 계통에 구애받지 않은 당쟁관계 저술이 바로 ‘당의통략’이라는 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일단 조선의 당쟁사를 거론할 때 이 책을 참고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충익-이면백-이시원으로 내려오는 역사학에 대한 추적이 바로 ‘당의통략’에 간추려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건창은 자신의 조부 이시원의 행략(行略)이라는 글에서 할아버지가 보학에 뛰어났음을 언급하였다. 지나간 역사나 남의 집안 내력을 그만큼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할아버지 슬하에서 그런 내용을 많이 듣고 알았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가학(家學)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런 가정의 학문에서 이건창 같은 뛰어난 문장가·역사가가 나올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강화도, 산자락이나 골목마다에 역사의 흔적과 문화유산의 보고들이 널려 있다. 남한 땅에 단군의 유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 강화군 문화원 양태부 사무국장의 안내로 돌아본 강화도는 대단한 역사의 땅이다. 하곡 정제두의 묘소도 둘러보고 이건창의 유적지를 살펴보면서 또 하나의 제안이 생각났다. 형인 이건창의 유적지가 제대로 복원되고 아우 이건승의 역사적 유적이 복원되어야 한다. 그만한 애국지사, 학자가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야 되겠는가. 문화재 당국은 제발 영재의 묘소를 제대로 단장하고 이건승의 유적도 제대로 찾아내 새로 꾸며야 한다고 여긴다. 조국의 미래를 위해 계명의숙을 창설하여 육영에 힘쓰고 ‘서행별곡(西行別曲)’이라는 우국개세의 국문시를 지은 그의 업적은 반드시 재조명되어야만 한다. 영재의 죽음 1852년 음력 5월26일 태어난 이건창은 47세를 일기로 1898년 6월18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친구 매천 황현은 3년이 지나기 직전, 구례에서 강화도까지 천리길을 걸어서 문상을 왔다. 슬프고 애처로운 제문과 만사를 지어 가지고 와서 영위에 고해 바쳤다. 망국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그런 나라의 슬픔까지를 영재의 죽음에 함께 담은 너무도 슬픈 제문이었다. 뒤에 매천은 ‘매천야록’이라는 뛰어난 역사책에 이건창의 졸기(卒記)를 올렸다. 먼저 죽은 뛰어난 문장가 친구를 그렇게 해서 이별하였다. “전 참판 이건창이 죽었다. 그는 성품이 청렴 개결하여 악을 증오하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길이 순탄치 않아 급제한 30년 만에야 가선대부(참판)의 위계에 올랐다. 갑오년 6월에 통곡하고 고향에 내려가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았다. 중풍으로 시골집에서 죽었으니 47세였다. 소식을 들은 모두가 애도를 표했다. 이건창은 문장이 고아하여 홍석주와 어깨를 견줄 만하였다.”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출처 : 기산인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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