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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8)고산 윤선도-시인·풍류객·직신·예학자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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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8)고산 윤선도-시인·풍류객·직신·예학자 下
입력: 2008년 07월 04일 17:27:31

ㆍ“내 비록 포의의 신분이나 권신의 횡포 눈감을 수 없다”

불굴의 투사, 나이 들수록 더 강해져

포의한사로 벼슬도 하지 않던 30세의 나이에 권신들의 무도한 정치를 차마 놓아둘 수 없어 독한 탄핵상소를 올렸던 곧은 선비가 윤선도다. “비록 포의의 신분이었으나 군부(君父)의 위태로운 처지를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라는 마음에서 충성심과 분노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후손 자격으로 상소를 올렸다는 역사가들의 평가를 받은 사람도 윤선도였다.

 

 

 <녹우당 전경 사진작가 | 황헌만>


윤선도는 억울하게 탄압을 받다 희생된 선배들에 대해서도 절대로 그냥 두지 않고 진실을 밝혀 그들의 억울함을 푸는 데도 언제나 앞장섰다. 이른바 ‘기축옥사’라는 정여립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한 호남의 선배 학자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의 신원과 문집간행에도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학자라 칭송하면서 정개청의 문집인 ‘우득록(愚得錄)’을 교정하고 정리하며 완전한 책으로 만들어 간행을 서둘렀으며, 그가 억울하게 죽어간 상황을 제대로 밝혀 원상으로 회복시키지 않으면 국시(國是)에 어긋난다 하여 수천자에 이르는 장문의 ‘국시소(國是疏)’를 올려 반대파들의 혹독한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힘없고 약하며 세력에 밀리는 학자들 편에 서서 진리와 정의를 두둔하던 윤선도의 정신은 나이가 더 들수록 강해지기만 하였다.

기해 예송의 한 복판에 자리하다

고산 73세, 1659년이던 기해년에 10년 재위의 효종이 세상을 떠났다. 효종의 장사를 치르며 산릉(山陵)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자의대비의 복제(服制) 문제가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격화되면서 예학자(禮學者)로서 윤선도의 학설은 남인계열의 중심이론으로 정리되었다. 송시열·송준길 등의 서인들이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가 죽어서 자의대비가 3년 복을 입었으니 효종은 인조의 차자로 기년의 복을 입으면 된다고 결정했다. 이에 윤선도는 종통(宗統)을 부인했다고 송시열을 비난하며 강력한 반대 상소를 올린다. 윤선도 주장의 핵심은 서인들이 ‘비주이종(卑主二宗)’의 잘못을 저질러 나라의 예(禮)를 완전히 무너지게 했다는 지적이었다. 임금에 오른 효종이 종통을 잇는 것이므로 효종의 상사에 당연히 3년복을 입어야지 기년(朞年)의 복을 입음은 종통을 두 개로 갈리게 하는 죄를 짓고 만다는 것이었다. ‘임금을 낮추고 종통을 둘이게’ 했다는 윤선도의 주장은 송시열 계열과 대립하던 미수 허목 등의 중심논리를 제공한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윤선도의 주장은 그가 평안도 끝의 삼수(三水)로 귀양가는 불행을 안아야 했다.

효종이 붕어하자 풍수에 밝았던 윤선도에게 간산(看山:묘자리 선정)의 일이 맡겨졌다. 윤선도는 수원(지금의 사도세자 묘소)에 길지가 있음을 말하고 그곳으로 장지를 정하자고 했으나 송시열 일파는 그것도 반대하며 다른 곳으로 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윤선도의 상소문 불태우다

서인들의 권력남용은 극도에 이른다. 역사에 없는 악한 일이 벌어졌으니, 윤선도의 복제설(服制說)에 대한 상소문을 정원에서 임금께 올리지도 않고 불태워버린 사건이다. 상소 내용에 잘못이 있다면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고, 그에게 벌을 내리면 되지, 그것을 불태우는 일은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패악한 권력에 맞서 윤선도는 싸우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현종 1년 74세의 윤선도는 삼수로 귀양 가 안치되고 그 다음 해에는 함경도 북청으로 이배되려 했으나 취소되고 더 무겁게 가시울타리를 씌우는 형편에 이른다. 그 이유는 남인으로 대제학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올랐던 용주 조경(趙絅 : 1586~1669)이 윤선도의 억울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려 삭탈관작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에서다.

남인 4선생의 활약

서인과 남인이 복제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에, 송시열 일파와 맞서 탁월한 예론(禮論)으로 그들을 압박했던 남인의 네 학자가 있었으니, ‘비주이종’의 이론을 세운 고산 윤선도, 용주 조경, 미수 허목(1595~1682), 남파 홍우원(南坡 洪宇遠 : 1605~1687)이 그들이었다. 조경은 윤선도를 비호하다 삭탈관작을 당했으나 언제나 윤선도가 옳다고 주장한 학자였고, 미수 허목은 우의정에 오른 학자였으나 뒷날 윤선도의 ‘신도비명’을 지어 그의 일생을 찬양하였다. 77세의 노학자 윤선도가 삼수에서 귀양 살던 현종 3년에 홍우원은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금고(禁固)를 당하는 화를 맞는다. 남인 4선생 가운데 가장 오래까지 살았던 홍우원은 뒤에 윤선도의 시장(諡狀)을 지어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용주 조경이 윤선도를 평했다는 말이 허목의 신도비에 전해진다. “예로부터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선 시기에는 하늘이 반드시 한 인물을 내려 보내 목숨을 걸고 예의(禮義)를 지키게 하여 한 세상에 경종을 울려주고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바로 윤선도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윤선도의 일생은 바로 조경의 이 한 마디에 모두 정리되었다. 현종 6년 79세의 윤선도는 평안도의 삼수에서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거기서 3년을 보낸 뒤, 81세의 노직신 윤선도는 임금의 특명으로 마침내 귀양살이가 풀렸다. 80의 노령으로 무려 8년에 이르는 긴긴 유배생활이었다.

가난한 백성을 위해 의장(義庄)을 설치하다

81세의 늙은이로 고향 해남으로 돌아온 윤선도는 다시 보길도의 부용동으로 들어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우국충정을 달래며 살았다. 가곡을 지어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으며 노년의 안온한 삶을 보냈다. ‘오우가’를 부르며 ‘어부사시사’도 읊고, ‘산중신곡’ ‘속산중신곡’을 읊조리면서 부용동 생활에 만족하였다.

조선왕조 중기에 호남에는 3대 부호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나주목사를 지낸 광주의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 공조참의를 지낸 보성의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과 고산 윤선도가 그들이다. 특히 윤선도의 집안은 고조할아버지이던 윤효정 시대 때부터 당대의 갑부였다고 한다. 윤효정은 정씨(鄭氏) 집안으로 장가드는데 그 정씨 집안이 당대의 부호였고, 무남독녀인 윤효정의 부인은 친정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거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다 머리가 뛰어난 윤효정의 후손들은 대부분 문과에 급제하여 고관을 지내며 재산을 늘리지는 못했어도 줄이지는 않아 계속 부가 상속되었다.

그런 재산 때문에 윤선도는 서울에도 집이 있었고 지금의 남양주시 덕소 근처의 고산(孤山)에도 별장이 있었으며, 해남 일대와 보길도 일대에는 토지와 산을 많이 소유하게 되어 곳곳에 별장과 정자가 있었다. 그래서 윤선도는 언제나 가난한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84세 때에는 ‘의장(義庄 :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농장)’을 마련하여 의곡(義穀)을 비치해두고 극빈자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고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양심적인 선비로서의 삶에 한 치의 부족함이 없는 일생을 보낸 사람이 윤선도였다.

윤선도가 부자였기 때문에, 인민을 착취한 반민중적 문인이었느니, 노예들을 학대하여 부를 축적하고 풍류나 즐겼다는 등의 악의적인 뒷사람들의 평은 일고의 가치 없음을 그의 일생은 보여주고 있다. 권력에 맞서 그만큼 싸웠던 투사,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온갖 조건을 갖추었으면서도 전후 16년의 유배생활을 자초했던 것만으로도 그의 평가를 달리할 이유가 없다. 그는 의인이자 시인이고 예학자였다.

녹우당을 찾아서

해남하면 녹우당이다. 윤선도의 고조할아버지 윤효정 이래로 500년이 넘는 명승지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라는 윤선도의 고향 집이다. 녹우당(綠雨堂)이라는 현판은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의 글씨다. 이서는 고산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와 가까운 친구였다. 천하에 명필로 유명한 이서가 친구를 위해 써준 글씨가 지금의 현판으로 걸려있다. 본디 이 녹우당은 효종이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인데, 뒷날 바다를 통해 그대로 고향으로 옮겨서 지은 집이다. 고산과 공재를 비롯한 학자이자 문인이던 그들의 유품이 대체로 보관된 유물관도 덩실하게 서 있다. 그곳의 뒷동산에는 비자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고, 윤효정 등 고산 선조들의 묘소가 아름답게 가꿔져 있다. 윤선도의 묘소에는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가 서 있다. 비면이 마멸되어 글은 읽을 수 없으나, 문집에 수록되어 있으니 자료는 넉넉하다.

녹우당은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씨가 지키고 있다. 85세로 부용동에서 세상을 떠난 선조의 학문과 의혼, 풍류의 멋진 삶을 세상에 전하려고 종손으로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노인에 이르도록 희생한 그분의 삶도 멋지다. 사당·녹우당·묘소·종산(宗山) 등을 돌보고 보살펴서, 녹우당은 한국 최고 명승지의 하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윤선도의 수많은 가사(歌辭) 친필본이 그대로 전해지며, 예조참의 벼슬을 내린 임금 교지, ‘고산선생유고’,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등 천고에 빛나는 유품들이 그대로 보관된 유물관은 바로 우리 한국의 국보임에 분명하다. 불의에 맞서 굽히지 않고 싸웠던 직신, 여유 있는 가정이어서 언제나 가난한 이웃을 도왔던 의인, 당대의 예학이론으로 서인과 맞서 명쾌한 논리를 폈던 예학자, 고산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흠모의 정을 감출 수 없었음은 그의 삶이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묘소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남인의 거목 미수 허목이 지은 신도비의 명문(銘文)을 읽으면서 이렇게 곧은 선비가 조선 땅에서 살았던 것이 자랑스러웠다.

비간은 심장을 갈라 죽었고 比干剖心
백이는 굶어 죽었네 伯夷餓死
굴원은 강물에 빠져 죽었고 屈原沈江
고산은 궁색할수록 더욱 뜻이 굳어 翁窮且益堅
죽음에 이르도록 변치 않았으니 至死不改
의를 보고 목숨 걸기는 마찬가지였네 其見義守死一也

천하의 의인이자 직신들인 비간·백이·굴원 등과 같은 인물이었다는 고산에 대한 평이 얼마나 지당한가.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출처 : 기산인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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