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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7)고산 윤선도-시인·풍류객·직신·예학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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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7)고산 윤선도-시인·풍류객·직신·예학자(上)
입력: 2008년 06월 27일 17:44:04

ㆍ곧은 절의에 깃든 섬세한 詩心

해남의 문풍(文風)과 절의정신

금남 최부(錦南 崔溥:1454~1504)의 학문과 사상의 영향은 조선의 땅 끝 벽지인 해남 땅에 유학(儒學)과 절의정신을 꽃피게 했던 결정적 단서를 마련해준다. ‘표해록’의 저자로, 나주 출신이면서 처가 고을인 해남에서 활동하며 살았던 이유로 그곳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해남에 어느 곳보다 뛰어난 유교문화를 전파하고 진리와 정의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높은 절의정신의 전통을 세워주었다.

 

 

 동촌석실에서 바라본 부용동. 사진작가 | 황헌만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서울에서 벼슬하던 최부는 호남 명문 집안인 해남 윤씨 가문에 혁혁한 제자를 두었으니 그가 바로 어초은 윤효정(漁樵隱 尹孝貞)이다. 갑자사화와 을사사화에 절의와 정도를 지키다 효수 당했던 스승인 금남의 정신을 이은 윤효정은 진사과에 합격한 뒤로 패악한 정치에 발을 끊고 고기 잡고 풀 베는 일에 숨어버리고 세상과 단절하는 의리를 지켰다. 윤효정의 아들 윤구(尹衢)는 호가 귤정(橘亭)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의 당당한 문신이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더 이상 벼슬을 하지 못하고 절의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다. 윤구의 증손자가 바로 고산 윤선도(1587~1671)다.

최부의 외손자에는 미암 유희춘이 있다. 미암도 사화에 연루되어 20년 넘게 귀양살이로 젊음을 바쳤다. 문인·학자에 절의정신이 높던 미암도 해남 출신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한 윤선도는 정의감과 절의정신이 몸에 배었고, 나라가 바르게 가지 못하거나 나라의 예(禮)에 어긋남이 있으면 곧바로 상소하고 항의하는 직신(直臣)의 정신을 올곧게 지켰다. 그래서 전후 16년이 넘는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 했다.


혁혁한 해남 윤씨 가문

윤효정·윤구의 정통을 이은 후손들도 만만찮은 존재가 많다. 윤구의 아들 윤의중(尹毅中)은 좌참찬이라는 고관을 역임하고 그 아들 윤유기(尹惟幾)는 강원도 관찰사이니 바로 고산의 백부이자 양아버지였다. 어머니 순흥 안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윤선도는 자가 약이(約而), 호는 고산, 해옹(海翁)으로 많이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명민했던 윤선도는 10여세의 나이에 경사(經史)는 물론 의약·복서·음양·지리 등의 서적을 두루 공부하여 문장과 식견이 남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올랐다고 한다. 17세에 남원 윤씨와 결혼하고 그해에 진사초시에 합격한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렸고 그 해에 생부의 상을 당하기도 했다. 태어나기는 서울의 동부 연화방이었지만 그의 생활 근거지는 선대의 고향인 해남이어서 서울과 해남을 오고가면서 일생을 보냈다.

예조판서 이이첨의 권력 농단을 비판

1616년은 광해군 8년으로 간신 이이첨의 권력 농단이 극에 이르고 왕비의 오빠 유희분, 척신 박승종 등의 권력 남용이 도를 벗어나자 30세의 젊고 당당한 윤선도는 비록 진사로 포의(布衣)의 신분이었으나 비분강개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들 모두를 비판하는 이른바 ‘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세상을 발칵 뒤집고 말았다. 이이첨은 죽여야 하고 나머지도 합당한 죄를 물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상소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런 이유로 권력의 탄압은 피할 수 없어 그 다음해에 윤선도는 서울에서 2000리가 넘는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귀양 가 안치되었다. 거기서 3년을 보내다가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옮겨 귀양 살다가 8년째인 해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마침내 해배되어 도사(都事) 벼슬에 오르게 된다.

37세의 장년 나이에 이른 윤선도는 벼슬에 뜻이 없어 주로 고향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의기가 뛰어난 그를 조정에서는 그냥 두지 않았다.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바로 사직하고 응하지 않았으나, 인조 6년 42세이던 고산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두 왕자를 가르치는 사부에 임명되어 성실한 왕가의 스승으로 충실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인조의 신임이 크고 대군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 다른 벼슬을 겸직하면서까지 5년의 세월을 사부로 보냈다.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사부직을 마친 윤선도는 고향에서 지내다, 기왕에 벼슬을 하려면 문과급제를 통해서 출사해야 한다는 뜻에서 47세의 나이인 인조 10년 1632년에야 증광시험에 장원급제의 명예를 안게 된다. 그래서 시강원의 문학(文學)이라는 벼슬에 제수된다. 48세에는 경상도 성산(星山)고을의 원님이 되어 목민관 생활을 한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있던 인조 14년은 1636년으로 고산의 나이 50세, 전대미문의 큰 난리인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가 온통 전운에 휩싸이고 만다. 의분에 못 견디던 고산은 의병과 노비들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강화도로 달려갔으나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남한산성은 임금이 계시지만 통로가 막혀 접근할 수가 없자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1637년 2월, 인조대왕은 마침내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이런 소식을 접한 고산은 육지에서 살아가는 것도 부끄러워, 제주도로 건너가 일생을 마칠 계획으로 해남에서 제주를 향해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가 좋고 산수가 아름다운 보길도를 발견하자 거기에 짐을 풀고 살아가려고 정착한다.

보길도 부용동(芙蓉洞) 생활

51세의 고산은 보길도에서 살아갈 마을 이름을 부용동이라 짓고, 격자봉이라는 산 아래에 낙서재(樂書齋)라는 서실을 짓고, 천하에 아름다운 세연정을 짓고 연못을 파 경관이 뛰어난 정원을 꾸미고 한 세월을 보냈다. 여기에서 시가 있고 노래가 있으며 풍류의 격이 높은 고산의 삶이 전개된다.

조선시대 정원의 대표적인 명승지, 재력도 있었고 미의식도 뛰어난 고산이었기에, 그런 아름답고 격조 높은 정원을 꾸며 선비문화의 정형을 보여주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직하고 정의롭던 고산에게는 적이 많았다. 병자호란 뒤에 신하로서 임금에게 안후를 살피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시골에 은거하던 고산에게 귀양살이의 명령이 내려진다. 경상도 영덕(盈德)으로 유배되어 53세의 봄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부터 해남 고향의 가까운 지역인 수정동·금쇄동에 명승지를 개발하여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며 아름다운 경관을 꾸몄다.

56세에는 세상에 유명한 ‘산중신곡(山中新曲)’이라는 16장의 한글 시조를 짓는다. 그 뒤 보길도에서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편과 ‘오우가’ 등의 시조로 조선 시조의 백미를 저작하기에 이른다.

장가에는 송강, 단가에는 고산

조선 가곡(歌曲)의 명인으로는 대체로 3인을 꼽는 것이 정설이다.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가 그들이다. 그러나 위당 정인보는 송강과 고산에 주목하여 수준 높은 평가를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우리나라의 가곡으로 보록이 남아있는 것은 대개 조선시대 이후요, 그 중에서 특출한 명인을 고르면, 몇 분 속에도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 두 분은 500년을 통틀어 그를 당할 이가 없다”라고 평했다. 이어서 “고산은 대체로 담아(淡雅:담박하고 우아함)한 길로 나아가 저 강호연파(江湖煙波)와 배합되는데 좋다”라고 고산 단가의 독특한 경지와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였다.(‘담원국학산고’, ‘정송강과 국문학’) 또 위당은 ‘어부사시사’에 대해서도 “고산은 ‘어부사시사’에 ‘우는 것이 뻐꾸기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같은 것은 물외한인(物外閒人)의 우유(優游)하는 심경을 흔적 없이 나타냈고 ‘하마 밤들거냐 자규소리 맑게 난다’와 같은 것은 호남 산수 간의 밤경치를 귀신같이 그려냈다”라고 평하여 신필(神筆)에 가까운 고산문학의 경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한글 시조나 단가에 있어서 고산의 솜씨는 당대 제1인자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포의의 신분으로 이이첨의 권력남용을 통쾌하게 비판하여 8년의 귀양살이를 했던 과격한 정의파에게 어찌하여 그런 섬세한 문학의 혼이 깃들었을까. 대단한 일임에 분명하다.


효종의 등극으로 벼슬이 오르다

고산의 나이 64세, 인조가 붕어하고 고산의 제자인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임금 보위에 오른다. 1652년 효종 3년, 66세이던 고산은 효종의 사부였다는 덕택에 성균관 사예 벼슬에 올라 임금을 인견하게 되고, 곧바로 동부승지라는 당상관에 올라 한 나라의 대부(大夫) 직위에 오른다. 그해 8월에는 그의 마지막 벼슬인 예조참의에 제수된다. 5년이나 글을 가르친 군왕의 사부로 조금만 고분고분 벼슬살이를 했다면 더 높은 고관의 벼슬도 어렵지 않게 제수 받을 수 있었건만, 직신이자 과격한 정의파 윤선도는 곧바로 ‘시무8조소’라는 상소를 올려 시급한 해결책을 열거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임금을 채찍질하였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바로 당대 세력가이던 원평부원군 원두표(元斗杓)의 부당한 처신을 비판하는 강력한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벼슬에서 쫓겨나 고향인 해남으로 하향하고 말았다. 69세에는 벼슬길이 다시 열렸으나, 곧바로 ‘시무4조’라는 상소를 올려 조정의 문제점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글 잘하고 한글 단가에 능했던 고산, 문인이자 학자로서의 훌륭한 역량이 있었지만, 그의 정책적 건의와 주장은 정치에 실현되거나 반영되지 못하고 당파싸움에 휘말리면서 70이 넘은 노인에게는 더 큰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고 있었다.

효종 만년인 1658년, 고산의 나이 72세에 이르자 격화되던 당쟁은 갈수록 치열해 서인과 남인의 대결은 그칠 줄 몰랐다. 시인이자 문인이고 학자이던 고산은 당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자리잡게 된다.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출처 : 기산인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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