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30)천재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학문세계 下 | ||
입력: 2008년 03월 14일 16:58:27 원문바로가기 | ||
ㆍ부패한 조선, 실용학문 개척한 ‘호남의 천재’
존재 위백규가 태어나 일생을 살았던 방촌마을 전경. |사진작가 황헌만 율곡이 누구인가. 위백규보다는 한 세대 선배인 탁월한 실학자 성호 이익은 오래 전에 율곡의 위대함을 넉넉하게 설파하였다. “근세의 율곡 선생 같은 분은 법제개혁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당시의 집권자들은 옳지 않다고 말했지만, 지금 다시 고찰해보면 너무나 명쾌하고 절실한 대책이었다. 그러니 열에 여덟이나 아홉은 모두 실행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 대체로 조선왕조 이래로 현실적으로 처리할 일을 가장 잘 알던 분은 율곡이었다”라고 성호는 그의 글 ‘논경장’(論更張)에서 설파하고 있다. 위백규 역시 실학자답게 율곡의 경장(更張)이론에 영향을 받아 당시의 부패한 제도와 무너진 국가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펴고 있었다.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新我之舊邦)라고 외치며 국가개혁의 마스터플랜인 ‘경세유표’를 저작한 다산 정약용은 위백규의 한 세대 뒤의 후배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연면한 사상을 총정리하고 종합하여 실학을 집대성한다. 위백규의 유적지를 찾아서 전라도의 땅끝 마을 장흥. 장흥읍 입구에는 존재 위백규의 동상이 우람하게 서있다. 육지의 땅 끝에 가장 우람하게 서있는 산은 장흥의 천관산이다. 천관산 산자락을 제대로 이용하여 아름답게 자리한 마을이 장흥군 방촌(傍村)이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방촌마을은 수백년 동안 장흥위씨(長興魏氏)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했던 마을이다. 산이 좋고 물이 좋은 탓인지, 마을의 어느 구석에도 가난은 보이지 않고 부귀의 모습만 보이는 마을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고, 마을 앞의 넓은 들판을 건너 마주보는 천관산은 현인들의 거주지임에 의심을 지니지 못하게 하였다. 산자락에 쭉 이어져 벌려있는 기와집, 최상단에 위치한 우람한 기와집에 존재 위백규의 선조들이 살아왔으며, 거기서 존재가 태어나 오래도록 생활했던 가옥이다. 존재라는 호는 스승 윤봉구가 위백규에게 써준 ‘존존재’(存存齋)라는 세글자에서 따온 호이고, 마을이 계항산(桂港山) 아래의 계항(桂港)에 자리잡고 있어서 계항일민, 계항운민 등으로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지난해 추석 무렵 우리 일행은 위백규의 유적지를 찾아 존재의 생가를 들렀다. 땅끝 장흥의 관산 바닷가에서 충청도의 덕산(德山)에 살던 스승 윤봉구를 찾아다닐 수 있었다면 당시 위백규 집안의 살림 형편을 짐작할 만하다. 가세가 그만큼 넉넉하였기에 그만한 와가가 생존시부터 지금까지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강진의 다산초당과 장흥의 다산정사 장흥군과 강진군은 군청 소재지로 보면 불과 4~5㎞의 거리다. 장흥군 방촌 마을의 뒷산 자락 한 부분이 다산(茶山)인데, 강진의 만덕산 아래 산자락의 한줄기가 또 다산이다. 장흥의 다산에서는 존재 위백규가 다산정사(茶山精舍)를 짓고 학문에 힘쓰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강진의 다산초당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위백규는 전라도 출신의 큰 실학자였고, 정약용은 경기도 출신이지만 다산초당에서 학문을 완성하였다. 이런 우연도 있는 것인가. 세상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위백규는 노론계통의 학자였고, 정약용은 남인계열의 학자였다. 귀양오기 3년 전에 타계하여, 위백규의 학풍이 다산이 살아가던 곳에도 남아 있었겠지만, 다산의 저서에 위백규는 언급된 바가 없다. 이 점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계항 마을 출신으로 위백규에게는 방손(傍孫)인 위황량(魏滉良)씨의 안내로 생가도 둘러보고, 다산정사에도 올라가 위대한 학자, 천재학자의 흔적을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다산정사의 바로 곁 산등성이에는 위백규의 묘소가 있었고 선대의 묘소도 쭉 이어져 있었다. 1798년에 세상을 떠난 존재, 200년이 훨씬 넘게 그곳에 잠들어있으나, 묘역은 정말로 초라했다. 높은 학문에 비교하여 겨우 현감이라는 낮은 벼슬 때문에 신도비도 세울 수 없고, 화려하게 묘역을 치장할 신분이 되지도 못했다. 그래서 재야 선비의 묘소로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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