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23)성리학 몸으로 실천한 철인(哲人) | ||
입력: 2007년 12월 07일 15:14:42 | ||
노사 기정진(上)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 1798~1879)은 희대의 철학자이자 철학의 이론을 몸으로 실천했던 탁월한 성리학자였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이자 학문의 주조(主潮)이던 성리학은 높은 이론의 관념성 때문에 실천과 실행이 어려웠던 이유로 공리공론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말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몇몇 높은 수준의 성리학자들 때문에 성리학은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망국의 무렵에 나라사랑의 뜨거운 의병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런 운동의 사상과 철학을 제공한 대표적 성리학자가 바로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1792~1868)였다.
더구나 노사 기정진은 유리론(唯理論)이라는 최고수준의 주리론(主理論)에 근거하여 행위와 실천이 없는 관념적인 이론은 진리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학자였다. 자신이 밝혀내고 찾아낸 진리는 몸으로 실천해 보여야만 그 참뜻이 있다고 믿고, 82년의 평생 동안 가장 겸허하고, 가장 순수한 학자로서의 자세와 처신을 잃지 않았다. 마음과 몸으로 벼슬살이를 멀리하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일생을 바쳐, 참으로 높은 수준의 성리학 이론을 터득해낸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조선유학사’라는 저서로 유명한 현상윤(玄相允)은 그의 저서에서 몇백명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자 중에서 그래도 학자다운 학문을 이룩한 학자로 여섯 분을 꼽았는데, 퇴계·율곡·화담을 이은 학자로 녹문 임성주와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을 거명하였다. 그러면서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무렵에 진정한 세분의 성리학자로는 노사와 화서 및 한주를 들면서 그분들의 업적으로 성리학의 역할이 그런대로 마무리되었다는 주장을 폈었다. 대체로 옳은 판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화서는 경기도 출신이고, 노사는 전라도 출신이며 한주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화서는 노사보다 6년 연상이고 노사는 한주보다 20년 연상이지만,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무렵의 비슷한 시기가 세 학자들의 생존 기간이었다. 서로의 정보교환이나 연락도 없었으면서도, 주리(主理)라는 큰 틀의 이론에 뜻을 같이 하였고, 위정척사의 논리에도 큰 차이 없이 망해가던 나라에 우국(憂國)과 애국(愛國)의 불꽃을 피우게 하였던 점도 큰 차이가 없었으니, 바로 그 시대를 이끌던 진운(進運)에 세 학자들이 앞장선 셈이었다. -노사의 탄생- 노사 기정진은 정조22년인 1798년 지금의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 일명 조동(槽洞:구수동)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해 6월 3일 해가 질 무렵이었다. 본디는 아버지 기재우(奇在祐)가 장성군 하남에 거주했으나 임시로 살아가던 구수동에서 태어났으니, 탄생지야 순창군이지만 선대 때부터 살아가던 장성을 고향으로 여길 수 있다. 어린 시절에도 고향인 장성의 하남을 찾은 적이 많았고, 친족들이 대부분 하남에 있었기에 왕래가 잦았다. 더구나 18세에 양친을 잃고 외로운 신세가 되자, 바로 고향인 하남으로 돌아와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일생을 보냈으니 그곳이 고향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남은 지금의 지명으로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阿谷里)인데, 그때는 아치실, 즉 아곡(鵝谷)으로 불렀다. 그 아치실은 기씨 이전에 박씨의 마을인데,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는 ‘아치실 기씨’라는 호칭이 나도록 떵떵거리며 살던 기씨의 명촌이었다. 지금은 노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거의 폐허가 된 마을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선비의 생활에 넉넉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 노사는 아치실에서도 오래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그곳과 멀지 않은 맥동(麥洞), 매곡(梅谷), 탁곡(卓谷), 여의동(如意洞) 등지를 전전하면서 장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에도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산사인 관불암(觀佛菴), 남암(南菴), 백양사 등의 절에서 골똘히 독서하면서 학문연구에 여념이 없었다. -면암 최익현과 매천 황현이 찾았던 하사리- 노사가 가장 오래 거주하면서 저술활동과 강학을 했던 중심지는 하사리였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長山里)다. 65세 이후 20년이 넘도록 정착하면서 높은 학문과 사상으로 무장한 사상가 노사는 그곳에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래서 77세 때인 노경에야 노령산(蘆嶺山) 아래의 하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사(蘆沙)라는 자호로 부르고 ‘노사설(蘆沙說)’을 지어 저간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노문3자(蘆門三子)라 일컫는 대곡 김석귀, 일신재 정의림, 노백헌 정재규를 비롯하여 손자인 송사 기우만은 그들의 학문이 바로 하사리 노사의 문하에서 익어갔었다. 당대의 의기남아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을 탄핵하다 반대파에 밀려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해배하던 1875년 4월에 노사를 찾아뵙던 곳도 하사리이다. 또 15세의 어린 학동(學童)이던 뒷날의 유명한 지사(志士) 시인이던 매천 황현(黃玹)이 15세의 어린 나이로 노사를 찾아와 학문을 물었던 곳도 바로 하사리였다. 70이 넘은 노학자를 황현이 찾은 때는 1869년의 어느 날이니, 그때 노사는 신동이던 어린 황현을 보고 경계의 시 세편을 지어주었다. 보배로운 소년이 행전도 안 치고 찾아오니 놀랍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는구나 쉽게 얻은 것은 잃기도 쉬운 거니 연잎 위의 물방울 구슬 자세히 보라 (贈黃玹三首) 천재적인 시인 매천의 모습을 보고 재주만 믿고 경솔할까 걱정되어 경계의 시를 주었다. 그래서 매천도 그의 유명한 ‘매천야록’의 맨 끝 부분에 자신의 일생을 간략히 기술하면서 “15세에 노사선생을 찾아가 뵈었더니 기특한 소년이라고 칭찬해주었다”라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하사리는 지금 흔적이 없다. -중암 김평묵과 영재 이건창이 찾았던 고산리- 이유야 알 수 없으나, 78세의 노인 노사는 그해 겨울에 오늘의 ‘고산서원(高山書院)’이 있는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로 이사와 마지막으로 학문을 마무리하고 제자들에게 도를 전한 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노사는 1875년 겨울에 이사와 1879년 12월 29일 생을 마치던 날까지 4년이 넘도록 ‘담대헌(澹對軒)’이라는 강학소를 짓고 거기에서 거처하면서 학술서적을 저작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아치실이나 하사리는 노사의 흔적도 전해주지 못하지만, 이곳 ‘담대헌’의 건물은 덩실하게 솟아있고, ‘고산서원’이 우람하게 서 있어서, 노사의 유적지는 이곳에 이르러야만 명확하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고산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는 담대헌, 마루에 올라 앉아 있노라면 툭터진 남쪽으로 아스라이 광주의 무등산이 보이고, 무등산 자락의 장망봉도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곳에는 노사의 부모님 묘소가 있다. 노년에 성묘하기도 어려워, 불효막심한 자신을 책하던 무렵, 그곳으로 이사와 부모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기에, ‘담대헌’이라는 이름을 걸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노년기의 작품인 ‘담대헌기’에는 그의 간절한 부모님 생각이 은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곳 담대헌에도 명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병자수호조약(1876)을 결사반대했던 최익현은 흑산도로 귀양갔다가 1879년 3월 해배되어 귀경하던 때에 병중에 신음하던 노사를 담대헌으로 찾아뵈었다. 도를 듣지 못하고 얼굴만 뵙고 떠나던 면암은 시를 지었다. 도학(道學)이 남쪽 고을에 있어 성망이 무거운데 공자처럼 사모한 사람 누구이던가 두 번째 찾아왔으나 도 못 듣고 얼굴만 뵈오니 50 되도록 배움 없는 사람 후생이 부끄럽네 (‘拜蘆沙奇丈’) 노사에게 도를 얻어듣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 면암의 시는 노사의 학덕이 어느 정도로 높았나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노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담대헌은 적막하지 않았다. 노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소선생(少先生)인 노사의 손자 송사 기우만이 담대헌의 주인이 되어 학자들을 맞이하였다. 1884년 12월 척사위정운동을 주도하다 전남 무안의 지도(智島)로 귀양갔다 돌아가던 당대의 학자 중암 김평묵이 노사의 유촉을 찾아 담대헌을 방문하였다.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로 노사의 학문이 스승의 학문과 같은 내용이라며 극구 찬양하던 김평묵은 송사 기우만과 몇 밤을 새우며 ‘노사집’을 읽어가자 숭모의 정을 금치 못했다. 뒷날 노사의 주저(主著) ‘외필(猥筆)’이라는 글에 찬양의 발(跋)을 담았던 사람도 김평묵이었다. 그 뒤 1895년의 어느 날, 전남 보성으로 귀양갔다가 해배되어 돌아가던 희대의 문장가 영재 이건창(1852~1898)은 노사 학문의 보금자리인 담대헌을 찾았다. 송사 기우만과 함께 밤을 새우며 ‘노사집’을 읽어가던 영재는 노사의 깊은 학문에 탄복하면서 아낌없는 찬양의 시를 지었다. ‘납량사의’ 읽으며 마음 기울인 지 오래더니 담대헌에 오르자 사모의 정 새롭도다 사방을 둘러 싼 고산(高山)은 공경의 뜻 더 일고 성긴 대밭에서는 가난이 흐르는구나 정밀한 마음으로 얻어낸 도는 옛 사람을 능가하고 박학(樸學)으로 가문 이은 손자가 있네 탄식하노라 오늘의 만남 어이 쉽게 얻으리 돌아가서는 당연히 이야기 진진하리라. (노사선생 고택을 지나며 손자 송사와 함께) 예나 이제나 가난한 노사의 집안, 가난이 흐른다는 대밭만 지금도 성긴 모습으로 대바람 소리만 내고 있었다. 한말의 거유이자 의기의 사나이들인 면암 최익현, 중암 김평묵, 영재 이건창 등이 찬양해마지 않던 노사의 학문. 그들의 찬양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게 ‘고산서원’의 우람한 모습이 호남학을 상징해주고 있다.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출처 : 기산인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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