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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22)화서 이항로의 삶과 사상(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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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22)화서 이항로의 삶과 사상(下)
입력: 2007년 11월 16일 16:56:38
-理를 중심에 두고 氣로써 이끌다-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철학

청화정사 주변에 비가 갠 달밤의 정취를 느끼려고 지어놓은 제월대(霽月臺)에 시를 짓고 노닐던 이항로, 젊은 날의 시심은 곱기만 했다.

면암 최익현이 지은 화서 이항로 신도비./사진작가 황헌만


시·서·예를 강습하다가 講習詩書禮
맑은 밤엔 때로 술을 마시네 淸夜時酌酒
술 마시며 밝은 달을 보노라면 酌酒對明月
밝은 달은 온 세상을 비추네 明月照九有

이는 제월대에 올라서 젊은 시절에 지은 시다. 갠 달처럼 밝고 맑은 마음을 지니자는 화서의 뜻이 담겨 있다.

‘명옥정’ 아래에 느티나무를 심고 지었다는 시도 보인다. 이렇게 경학과 문학을 함께 익히며 깊고 넓게 사색에 잠기던 화서는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 걸맞은 사유의 세계를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일생동안 끌고 가던 학문적 논리이자, 그곳 청화정사를 찾은 제제다사들의 제자들에게 전해준 그의 이론이었다. “이(理)가 주가 되고 기(氣)가 객이 되어야 한다.” 그가 깨달은 지혜이자 표방한 학문의 기치였다. 원리와 원칙에 충실하여 근원적인 주체성을 끝까지 지키자면 이를 중심에 두지 않을 수 없고, 중심의 뜻과 이론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이끌어주는 힘인 기가 객의 자리를 지켜주어야만 한다는 것이 화서의 핵심 사상이었다.

조선유학사에서 정설로 굳어진 주장의 하나가 한말 3대 성리학자가 경기와 호남, 영남에서 태어나 그들은 서로의 학문적 교류나 사승(師承)의 관계도 없었건만 동일하게 주리(主理)적인 성리학 체계로 같은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기호의 화서 이항로, 호남의 노사 기정진(奇正鎭:1798~1879), 영남의 한주 이진상(李震相:1818~1886)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 지역의 대표적 학자의 위치에 올랐는데, 동일하게 주기(主氣)를 배척하고 주리적 성리학 체계에 절대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화서와 노사는 서양의 세력이 물밀듯 몰려오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혼란한 시기를 살면서 강고하게 사(邪)인 서양을 물리치고 정통의 유교논리이자 공맹(孔孟)의 논리이면서 중화주의(中華主義)에 포괄된 논리만을 굳게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확고하게 주장한 학자였다.

척사위정의 확고한 논리 때문에 화서와 노사는 대원군의 뜻과 부합하여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이라는 높은 산림(山林)의 지위에 올랐고, 그런 산림의 영향 아래 수많은 제자들이 척사위정의 운동에 앞장서고 의병대장이 되어 망해가는 나라에 마지막 충성을 바치는 애국자들이 속출하였다. 화서의 제자로 척사운동의 효장은 중암 김평묵이며 의병대장은 면암 최익현과 의암 유린석이었다. 노사의 제자로는 손자 송사 기우만과 집안의 조카인 성재 기삼연이 호남의 의병장으로 스승의 뜻을 계승할 수 있었다.


애군여부(愛君如父) 우국약가(憂國若家)

화서 이항로의 정치사상은 간략하고 명확했다. 기묘사화에 정암 조광조가 억울한 누명으로 사약을 받고 유배지 호남의 능주에서 죽으면서 지은 유시(遺詩)에, “아버지처럼 임금을 사랑했고, 집안 걱정하듯 나라를 걱정했다”(愛君如愛父 憂國若憂家)라고 읊었는데, 화서 이항로는 언제나 그 시를 외우면서 나라의 신민(臣民)이라면 언제나 아버지처럼 임금을 섬기고, 집안 걱정하듯이 나라를 걱정해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지녔다고 한다. 그런 정신이 청화정사의 주변에 맴돌고 있었기에, 화서의 문하에서 최익현이나 유인석 같은 뛰어난 의병장이자 탁월한 애국자들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공자는 “나라가 위급한 상태임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見危授命), 맹자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다”(捨生取義)라고 했는데, 화서는 생활철학에서 언제나 그런 정신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가 병인양요 때 나라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들어가 올린 상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당시의 긴급한 대책을 말하고 백성의 질곡을 제대로 올려 바쳐, 100년 이래의 최고 명상소라는 찬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대원군의 위세에 눌려 어떤 고관대작도 나라의 문제점을 전혀 지적할 수 없을 때에, 73세 고령의 벽계산림은 감히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백성의 아픔을 당당하게 상소로 말했으니, 그의 용기와 실천력이 어느 정도였나를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주리(主理)이면서 이기(理氣)는 이물(二物)

노사 기정진은 이(理)가 절대적이라는 유리론(唯理論)을 폈으나 화서는 이기(理氣)는 단정적으로 이물(二物), 즉 두 존재임을 역설했다. 그러나 화서의 이기이물(理氣二物)은 이기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고 반드시 차등이 있다고 하여, 이는 높고 기는 낮다는 이존기비(理尊氣卑)이고, 이는 명령하고 기는 명령을 받는 입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가 주(主)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이는 순수해지고 기는 올바르게 되어 만 가지 일이 제대로 다스려지고 온 세상은 편안해진다”(理爲主 氣爲役 則理純氣正 萬事治而天下安矣)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주리론을 통해 중화문물(中華文物)의 정통사상을 고수해야 하고, 중화주의와 반대되는 왜양, 즉 서양이나 일본은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와 결합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척사위정의 논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외세의 침입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급한 시기에 유교적 조선의 정통을 고수하는 논리가 주리(主理)와 연결되고 그러기 위한 행동강령은 왜와 양을 배척하는 주전론(主戰論)으로 이행될 수밖에 없었다. 병인양요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화이론(和夷論)을 배척하며 싸움을 독려했던 이유가 거기서 나왔다.

요즘의 논리로야 세계정세에 어두운 보수주의로 매도할 수 있고, 반세계화의 퇴영적인 논리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부터 150년 전의 유교주의 국가로서의 대응은 그런 점을 정통의 논리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일 수 있었다. 만약 그 무렵 척사위정의 논리조차 없었다면, 개항과 교역의 준비가 전혀 없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척사위정의 논리와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이 한다는 논리가 합해져 의병운동과 직접투쟁의 실천이 가능하여 애국운동과 구국운동이 망해가는 나라의 민족혼을 불태우는 역사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 않을까. 화서의 제자들이 이끈 의병운동은 그래서 한말의 마지막 역사의식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서의 친필 글씨./사진작가 황헌만

낙지암(樂志巖)은 그대로 있네

다시 벽계리의 아름다운 경치로 돌아가 보자. 송나라의 주자는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경영했다. 퇴계는 도산구곡(陶山九曲), 율곡은 고산구곡(高山九曲), 우암 송시열은 화양구곡(華陽九曲)을 경영했듯이, 화서는 벽계구곡을 경영하였다.

굽이굽이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며 도도히 흐르는 벽계수는 현인군자가 세상을 잊고 학문연마에만 마음을 기울일 수 있도록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조선중기의 시인이자 학자이며 영의정이던 사암 박순이 이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으며 이제신(李濟臣), 남언경(南彦經), 김창흡(金昌翕) 등 당대의 명인들이 또 이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만큼 백계구곡의 아름다운 경치는 어진 이들이 살아갈 흥취를 일게 했던 곳이다. 수천년을 흐르는 물에도 한 치의 변화 없이 화서가 뜻을 즐기면서 노닐었던 ‘낙지암’은 오늘도 그대로 있었다.


책을 덮고 말없이 앉았다가는 斂卷無言坐
문을 열고 가고 또 가보네 出門時復行
지는 꽃이 세상의 적막 잊게 하는데 落花忘世寂
흐르는 물이야 사람 마음 맑게 해주네 流水逼人淸
만 가지 나무에 봄빛이 퍼지는데 萬樹春心發
온 전답에는 빗물에 곡식 자라네 千畦雨澤生
한가롭게 살면서 세월을 붙잡으니 閒居留歲月
괜스레 옛사람의 정취가 떠오르네 聊得古人情


‘낙지암’이라는 제목의 시다. 흐르는 물속에 솟아 있는 바위를 ‘뜻을 즐기는 바위’라고 이름하고 때때로 올라가 시를 짓고 마음을 맑게 하는 수양의 장소로 삼았다. 지금도 물은 흐르지만 바위는 굳게 버티면서 화서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었다.


넉넉한 제자들의 훈훈한 정

한말의 비슷한 시기에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고산 임헌회(鼓山 任憲晦)-간재 전우(艮齋 田愚)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맥이 있었고, 화서-중암 김평묵-성재 유중교-의암 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학맥이 같은 노론에서 대립하였다. 면암 최익현은 화서 학맥이다. 전우 일파가 나라가 망해가도 선비는 도(道)만 지키면 된다고 은둔의 생활로 일생을 마칠 때, 화서학맥의 많은 제자들은 의병운동과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다. 역사는 누구 편을 들어줄 것인지 자명한 일이 아닌가.

중암 김평묵은 화서의 사상과 철학을 계승한 철저한 척사위정파로 화서의 수제자였다. 그는 화서의 행장(行狀)을 지어 선생의 일생을 유감없이 기록했고 화서어록(華西語錄)을 저술하여 그의 철학사상을 소상하게 밝혔다. 성재 유중교도 선생의 사상을 남김없이 추출하여 어록으로 정리했으니 부족함이 없는 기록이다. 면암 최익현은 화서의 신도비명을 저작하여 화서의 삶과 사상을 넉넉하게 서술해놓았다. 그 이외의 수많은 제자들이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정리하고 기록하여 문하의 번성함으로는 화서를 당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화서의 철학과 사상은 원집 32권, 부록 9권으로 22책인 ‘화서선생문집’으로 간행되어 온전히 전해지고, 그의 일생은 ‘연보’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화서가 세상을 떠난 30년 뒤인 1899년에 문집은 간행되었는데, 후학들의 연구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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