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24)성리학 몸으로 실천한 철인, 노사 기정진(下) | ||||
입력: 2007년 12월 14일 18:10:47 | ||||
최초의 척사위정 주장…국시로 세우다 노사 기정진은 성리학사에서도 독특한 이론을 전개하여 가장 철저한 주리론(主理論)의 제창자이자, 견고한 일원론으로 유리론의 체계를 세워,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학문영역을 개척한 학자였다.
-노사학파의 형성- 노사의 학문과 그 제자들을 노사학파라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노사 자신의 학문이 매우 독특한 데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걸출한 학자들이 집단을 형성하여 노사학문을 고수하고 전파하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때문이다. ‘고산서원’에는 노사를 주벽(主壁)으로 모신 신실(神室)인 고산사(高山祠)가 있고, 강당으로 담대헌이 있고, 동쪽으로 동재(東齋)인 집의재(集義齋)가 있고, 서쪽으로 서재(西齋)인 거경재(居敬齋)가 있다. 담대헌과 거경재 사이에는 노사문집의 목판본을 보관한 장판각(藏板閣)이 있다. 담대헌 남쪽에는 우람한 3간의 정문이 있으며 정문 밖 동편에는 서원의 관리사가 볼품있게 서 있다. 신실인 고산사에 배향(配享)된 제자 학자들의 면면이 바로 노사학파의 거장들이다. 우선 노문3자인 대곡 김석귀, 노백헌 정재규, 일신재 정의림 수제자 세 분에, 손자인 송사 기우만까지 네 분의 학자가 모셔져 있고, 또 다른 네 분의 학자들이 연달아 자리하고 있다. 월고 조성가, 석전 이최선, 신호 김녹휴, 동오 조의곤이 그들인데 모두가 당당한 학자들이었다. 1960년에 노사의 후학들에 의하여 간행된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에 의하면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명에 이르고, 그들 제자의 제자들까지 합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대학단이 형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배향된 8명은 그 중에서도 대표자였다. - ‘납량사의’와 ‘외필’-
죽음을 몇 달 앞둔 81세의 말년에 저작한 ‘외필’은 주기론(主氣論)을 철저히 배격하느라 율곡 이이의 학설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 이기론으로, 뒤에 큰 파란을 일으킨 논문인데, 기(氣)란 이(理)의 대칭일 수 없는, 이(理)의 예속물이라고 설명하여 새로운 이기론을 세운 학술이론이었다. 치밀했던 노사는 46세 때의 저술인 ‘납량사의’를 77세 때에 다시 수정하여 새로운 이론을 보강하였고, 81세 때의 ‘외필’은 죽음이 임박한 때에 저술하여 당대의 석학들인 김석귀, 정재규, 정의림 등 세 제자에게 보여준 뒤 그들도 의심 없이 독실하게 믿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야 세상에 내놓았던 글이었다. 80평생 가슴 속에 품고 있던 학문이론을 더 이상은 감출 수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참으로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던 모습이었다. -병인양요에 올린 상소- 공리공담의 성리학을 뛰어넘어 깊숙이 연구해낸 성리학의 높은 학문을 실천으로 옮긴 학자가 기정진이었다. 69세이던 병인년에는 병인양요라는 전대미문의 난리가 일어났던 해다. 서양의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면서 세상이 요동칠 때, 그런 소식을 들은 노사는 나라를 근심하고 걱정하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병환에 이를 지경이 되자, 견딜 수 없는 애국심에서 곧장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이름 하여 ‘병인소(丙寅疏)’라는 참신한 내용의 상소였다. 그해 7월의 일인데, 이른바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논리를 설파한 국내 최초의 상소였다. 같은 때에 화서 이항로도 비슷한 내용의 척사위정의 상소를 올리는데 그때는 9월의 일이었으니 노사보다는 2개월 뒤의 일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논의가 외적과 싸우지 말고 화의(和議)를 이루자며 전쟁을 피하자던 주장이 대세를 이루던 때에, 노사는 결사반대하고 전쟁을 위한 군비강화책을 열거하고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론을 폈다. 노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외적과 싸워 물리쳤고, 노사는 벼슬이 올라 공조참판이라는 고관이 내려지기도 했다. 바로 그 상소가 천하에 노사 기정진의 이름을 알린 상소였고, 최초로 척사위정의 이론을 온 국민에게 알린 글이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노사의 최후- 노사 기정진은 천재였다. 큰 선생 아래에서 글을 많이 배운 적도 없으나 4~5세에 이미 글을 해독하고 지을 줄을 알았으며, 7세에 지은 ‘하늘을 읊음(詠天)’이라는 시는 온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가 되었다. ‘사람들의 선악(善惡)에 따라 빠르게 보답한다네’(隨人善惡報施速)라는 글이 어떻게 7세 아동에게서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늘은 인간의 선과 악에 따라 지체없이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는 뜻이니, 7세에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가 11세에 지었다는 ‘춘추정기(春秋亭記)’라는 글은 노성의 학자도 짓기 어려울 만큼의 높은 수준의 글이었다. 15세에 일어난 평안도의 홍경래난에 대하여 예언했던 이야기도 그만큼 사리판단에 밝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명분이 없는 민란은 승리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난이 평정된다고 노사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학자로서의 학문이 대체로 이룩된 20대 후반인 29세에는 최초로 서울 나들이를 떠났다.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대산 김매순(臺山 金邁淳)을 찾아 보았고 충청도로 내려오면서는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를 찾았다. 당시에 가장 큰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유다. 마침내 34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장원한다. 연천 홍석주(淵泉 洪奭周) 같은 높은 수준의 학자가 시관(試官)이던 때문에 그래도 노사가 진사에 장원으로 합격을 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진사과에 합격하자 그는 끝내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중단했으나, 노사에게는 그때부터 벼슬길이 열렸다. 35세 때부터 나라의 부름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45세에 내린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에 겨우 6일 동안 근무했던 것이 그의 벼슬살이의 전부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60세에 내린 고향 근처의 무장(茂長)현감이라는 벼슬도 완곡하게 거절하였고 산림(山林)의 벼슬인 장령(掌令)이나 집의(執義)는 물론 69세 때의 동부승지나 호조참의 등도 모두 거절하였고 재신(宰臣)의 지위인 공조참판이 내려졌고, 79세에는 호조참판에 임명되었어도 모두를 사양하고 학문연구에만 생애를 바치고 말았다. 노사의 생애에 말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골의 노학자로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했지만 승지·참의·참판의 벼슬이 내려져도 전혀 응하지 않고, 77세에는 그의 대표적 논문인 ‘납량사의’를 수정하여 다시 쓰고, 81세에는 ‘외필’이라는 독특한 유리론의 이기철학을 완성하였다. 79세에 병자수호조약이 이룩되자 병이 나도록 우국충정을 이기지 못했으나 면암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반대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쁜 표정을 지으며,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받지 않겠다”고 말하며 부끄러움을 이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79세 때의 시조가 전해진다.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호걸도 나 싫으며, 문 닫으니 심산(深山)이요 책 펴니 사우(師友)로다. 오라는 곳 없건마는 흥 다하면 갈까 하노라”라는 시조 한 수는 그의 마지막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웠나를 반증해주고 있다. 학문의 높은 수준에, 아무런 미련 없이 아름답게 생을 마치겠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81세, 죽기 1년 전에야 생애의 대작인 대표적 논문을 저작한 그의 삶이 너무나 멋지지 않는가. -노사의 묘소와 척사위정탑- 노사의 학문과 사상을 이으며 학문이 강해지던 곳이 ‘고산서원’이라면, 노사의 가장 뚜렷한 유적지는 그의 묘소다. 당시의 행정구역은 영광군 지역이었으나, 지금의 행정구역은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의 황산(凰山)마을이다. 몇 년 전에는 전국의 유림들이 성금을 바쳐 세운 ‘노사선생 신도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학자이자 의병대장으로 생전에 가장 노사를 숭앙했던 면암 최익현이 지은 글에 근래의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쓴 글씨다. 14세에 결혼하여 세상을 떠난 뒤 함께 합장으로 계시는 부인은 울산김씨로 하서 김인후 선생의 후손이다. 노사의 제자 중에 영남의 학자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던 노백헌 정재규가 지은 묘갈명이 새겨진 비가 우뚝 서 있다. “하늘이 우리의 도(道)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正氣)를 모아 진실로 대성(大成)하셨네”(天相斯道 正氣之會 展也大成)라는 찬사로 정재규는 선생의 높은 학문의 완성을 찬양하였다. 고산서원에는 노사의 학문이 살아서 강해진다면 묘소에는 노사의 혼이 잠겨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이 나라에서 최초로 척사위정의 논리를 주창한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묘소 곁에 척사위정탑이 장엄하게 세워져 후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으니,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은 지나는 행인들의 마음을 되살아나게 해주고 있다.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출처 : 기산인의 발자취
글쓴이 : 기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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