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호시비에 대하여
신석호(申奭鎬)
1. 서언(緖言)
조선 말기, 순조 5년 乙丑(서기 1805) 이후 약 80년간 영남(주로 지금의 경상북도)의 유림은 안동군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병론(屛論)․호론(虎論)의 두 파로 나누어져 굉장한 당론(黨論 *요사이 학자들은 향전이라 함)을 하였다. 이것이 소위 병호시비(屛虎是非)이다.
원래 경상도 특히 안동은 학자의 배출에 있어서 다른 곳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이며, 명종 시대의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해서 그 제자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및 그 학통을 계승한 영조 시대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같은 주자학의 거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 안동의 유자(儒者)는 그 지방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칭하고, 스스로를 추로의 선비라고 일컬었는데, 다른 곳에서도 또한 이를 인정할 정도이다. 그르므로 이 안동 땅은 유림이 가장 성하고, 동족 사람들은 모두 문호를 이루고 각각 그 조상의 지위와 명예를 안고 서로 할거하고 있었다. 아직도 양반개념이 뿌리 깊게, 그리고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전 조선을 통해 안동만한 곳은 없다.
그 가운데 군의 서쪽, 지금의 풍남면 하회에 뿌리를 둔 류성룡의 자손, 및 군의 북쪽 지금의 서후면 금계에 근거를 둔 김성일의 자손은 서로 영남의 명족으로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병호시비는 실로 이 류․김 양가 조상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며, 드디어는 영남 전체에 확산되어 서애와 학봉 양학파의 다툼이 되었다. 서애와 학봉은 서로 우정이 두터운 동향인이고, 같은 스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근본적으로 학설의 상위 등은 있을 수 없었으나, 그 제자들에 의해 학통이 갈라지게 되었다. 지금 두 사람의 학문을 전승한 사람의 계통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柳成龍--+--鄭經世--+-- 金應祖
| ↳ 李 埈 ↳ 申碩藩
李滉--+
+--金誠一 --- 張興孝 ---- 李玄逸 ---- 李 裁 ---- 李象靖 ---- 柳致明
그러나 병호시비는 위에 표기한 사람들의 싸움이 아니고 그 자손의 싸움이다. (단 柳致明은 아니다. *류치명 자손이 싸운 것이 아니라, 유치명 학파가 가장 치열하게 시비를 하였다는 뜻).
그리고 논쟁 문제는, 노론의 호락시비(湖洛是非)와 같은 학설의 다툼이 아니고, 그 선조의 우열의 다툼이며, 묘위(廟位 *사당의 위판)에 대한 다툼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는 일과 같지만, 조상을 숭배하고 사부를 존경하고, 예의를 존중하던 당시의 유림입장에 생각하면, 실로 중요한 문제이다. 이 논쟁은 서애, 학봉 양 학파의 다툼이므로, 말할 것도 없이 연관된 사람은 모두 남인들뿐이며, 그 장소도 영남 특히 경상북도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이외같이 이 논쟁은 한정된 지방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이에 관한 기록은 중앙에는 거의 없다. 다만 이 논쟁에 관계해서 가장 많이 활동한 사람의 자손이 이를 소장하고 있을 뿐이다.
작년 늦은 가을, 나는 우연히 조선사편수회에서 사료(史料) 수집을 위해 안동으로 출장을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안동군 임동면 수곡리 류동시(柳東蓍) 씨 집에서 그가 소장한, 이에 연관된 기록 ‘.여강전말(廬江顚末)’ 다섯 권을 볼 수 있었다. 이 류동시 씨 집은 호론 계통이며, 그의 고조부 회문(晦文) 이래 이 논쟁에 깊게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호론의 본종(本宗)이라고도 할 만한 집이다. 따라서 ‘여강전말’은 호론에 유리하도록 기록한 점을 여러 곳에서 엿볼 수 있으나, 공사를 불문하고 병호 모든 쪽, 이 논쟁에 관계있는 문서(통문, 정영장, 제사 등속)를 거의 모두 망라하고 있으며, 또한 이를 연대순으로 수록 기재하고 있으므로 그 전말을 아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병호시비에 관한 자료로서 이것 외에 병론의 본종(本宗)인 하회류씨(서애 자손)에서 출판한 ‘여강지’ 3책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직 이를 볼 기회가 없으므로, 지금 나는 ‘여강전말’을 중심으로 본고를 초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호론측 자료만을 보고 병호시비를 논한다는 것은 매우 경솔한 것 같지만, 이 ‘여강전말’에 수록된 양편의 문서를 비교 대조하며 비판을 가하면, 대략 그 진상을 알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문제가 된 호계서원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고종 8년 신미(명치4년, 1871)에 이미 철훼를 명령 받았고, 또한 당시 논쟁의 중심인물들은 모두 묘 속의 흙으로 변했으니, 시비를 논하는 것은 언뜻 보아 매우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논쟁의 자손들은, 지금은 밖으로는 이를 입에 담지 않으나 아직도 마음속에는 서로 전통적 반목을 품고 있다. 그르므로 이 문제를 말함에 있어,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라는 것은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르므로 본고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다만 어떤 문제를 놓고 어떻게 다투었는가를 말하고, 아울러 서원을 중심으로 조선유림의 생활을 살펴보려 한다.
2. 애학(厓鶴)․학애(鶴厓)론
병호시비는 순조 5년 을축(1805년) 겨울, 영남의 사림들이 서애 류성룡․학봉 김성일․한강 정구․여헌 장현광의 네 사람을 문묘(文廟)에 종사할 것을 청하는 상소에서, 서애․학봉을 종향하는 위차의 상하, 즉 소위 애학․학애 문제 때문에 폭발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이때 처음으로 일어난 문제가 아니고, 이미 광해군 12년 경오(1620년)에 서애․학봉을 그 스승인 퇴계 이황을 제향한 여강서원(廬江書院)에 종배(從配)하려 했을 때부터 일어난 문제이다. 여강서원은 병호시비의 중심이 된 호계서원의 옛 이름이며, 안동군의 동쪽 30리 여산 오로봉 밑, 낙동강 연안, 지금의 동후면 노산동에 있었으며, 선조 6년 경오(1573년)에 퇴계를 위해 창건하고 ‘여강’이라 이름 하였으나, 그 뒤 숙종 2년 병진(1676년) 3월, ‘호계’라는 액이 하사되어 그 뒤로 ‘호계서원’이라 이름하였다. 병호시비 사실을 기록한 기록물을 혹은 ‘여강지(廬江志)’라 하거나, 혹은 ‘여강전말(廬江顚末)’이라 하는 것은 이 자료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광해군 12년 경오(1812)에 서애․학봉을 여강서원에 종향하려 할 때, 두 분의 위판을 배치하는 문제에 대해 두 가지 문제가 제출되었다. 즉 퇴계의 위판을 중심으로 하여 이들은 동서벽에 분봉하느냐, 또는 동쪽 일렬로 봉안하느냐가 제1안인데, 만일 동서로 분봉한다면 어느 분을 동에, 어는 분을 서에 할 것인가. 또 만일 동쪽 일렬로 한다면 어느 분을 먼저, 어느 분을 뒤로 할 것인가가 제2안이다. 제1안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제2안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이것에 의해서 서애와 학봉의 지위와 선후가 결정된다. 두 사람의 학문과 도덕에는 서로 상하가 없지만, 연치에서는 학봉이 서애보다 4년 연장자이며, 작위 면으로 말한다면 서애는 일국의 수상인 의정부영의정까지 올랐고, 학봉은 겨우 경상도관찰사라는 한 지방장관에 불과했다. 서애의 자손은 작위를 갖고 서애를 위에 올리려 했고, 학봉의 자손은 연치를 갖고 학봉을 위에 두려 해서,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며 다툼은 끝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사림은 상주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에게 글로서 물었는데, 우복은 제1안에 대해서는 문묘의 예에 따라 동서로 분봉하라고 말하고, 제2안에 대해서는 두 선생의 연치가 서로 다른 것은 견수(肩隨)에 미치지 못하고, 작위(爵位)가 서로 다른 것은 절석(絶席)에 있다 ( *나이의 차는 5년에 미치지 않아서 기러기가 날아가듯 조금 뒤쳐져서 다니지 않아도 되고, 벼슬은 서로 멀어서 거리가 매우 떨어져 있다) 하였으며, 서애를 동, 학봉을 서로 하는 것이 옳다고 답하였다.
당시 우복은 국가의 원로이며 한 고을의 장로로서 중망을 한 몸에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기에 학봉의 자손들도 여기에 반대는 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의 의견대로 봉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강전말’에 “당시의 사론은 이를 심히 바르다고 하지는 않았다”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일단 우복의 의견대로 결정은 되었지만, 학봉의 자손과 제자들은, 기꺼이 승복하지 않고 앙앙(怏怏 *원망할 앙)하였다고 한다. 그 뒤 수백 년 간 이 문제를 두고 논쟁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순조 5년(1805)에 이르러 이것이 다시 재연되어, 드디어 영남 남인의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순조 5년(1805) 을축 겨울, 안동지방의 서애․학봉 관계의 사림 및 대구 칠곡․인동 방면의 한강(寒崗)․여헌(旅軒)관계의 사림, 다시 말하면 영남의 사림인 서애․학봉․한강․여헌의 승무(陞廡 *문묘에 올려 합사함)를 상소하기 위해 경성에 모여 임시 소청을 마련하고, 상소의 절차를 의논할 때, 학봉학파 사람들은 4선생의 승무 순서는 연치의 순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서애학파 사람들은 여강서원의 위차가 이미 애학의 순이므로, 문묘의 승무도 역시 그 순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여, 의논은 결정되지 않았다.
이때 대구 지방의 유림은 학애론에 가담해서, 호계서원의 위차는 애․학 순으로 봉안했지만, 이번 네 분 선생을 병거(竝擧)하는 경우에는 연치 순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드디어 학봉․서애․한강․여헌의 순으로 할 것을 상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애의 자손이 이를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단독으로 상소해서 승무 순서의 전도를 꾀하였고, 또한 소수(疏首)(당시의 소수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구방면의 사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를 논박했으므로, 왕은 이 네 분의 승무를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애학․학애론 때문에 그들의 당초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향리에 돌아와서도 역시 이를 논하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의 다툼도 후세와 같이 격렬하지는 않았다. 이 논쟁이 일단 더 격렬하게 진행된 것은 다음 해 즉 순조 6년 병인(1806) 11월에 대구 이강서원(伊江書院 *달성군 다사면 이천동 소재. 미락재 서사원 배향)에서 발송한 통문이 온 뒤부터이다.
원래 대구, 칠곡, 인동 방면의 유림은, 이미 정조조(正祖朝)에 한강․여헌의 승무를 허락하는 비답(批答)을 받아놓은 지라 이때도 아무 일 없이 승무가 허락되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논쟁 때문에 일이 그릇되어 성사되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다음해 병인(1806) 11월 대구 이강서원에 모여 안동지방의 유림과 일을 같이하면 애학․학애론 때문에 한강․여헌의 승무까지도 윤허(允許)되지 않으므로, 이후로는 단독으로 상소할 것을 의논하고, 이 뜻을 도내에 통보했다.
이 통문이 안동에 도착하자, 안동의 유림은 그들이 단독으로 상소한다는 데 대해 크게 분개하고, 이를 논책하려 호계서원에 향회를 설치하고서 반박 통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하회류씨는 반박통문에, 처음에는 애․학이라 적혔던 것을 밤중에 몰래 학․애라고 고쳐 썼다고 말하며 이를 찢어버렸다. 이 통문을 기초한 사람은 ‘여강전말’의 소장자 류동시의 고조부 회문(晦文)이며, ‘여강전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다만 4선생이라고만 썼고, “학․애․한․여” 넉 자를 밝히지 아니했으나, 회석의 중론이 모두 명기하라 하므로 드디어 “학․애․한․여”라고 썼다라고 하였으며, 병산서원 통문에는 밤중에 몰래 고쳐 썼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어느 말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하회류씨가 이 통문을 파열한 것은 사실인데, 이 때문에 학․애를 주장하는 사림은, 이를 파열한 류형춘(柳享春) 등에 문자(文字)의 벌(罰)을 가했다. 동류 유생으로부터 문자벌을 받는 것은 유생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에 하회류씨는 호계서원에 절연(絶緣)을 고하고 이들과 단절(斷絶)했으며, 쟁론은 점점 더 격렬해져 갔다.
서원은 원래 배향자의 자손뿐만 아니고, 그 지방의 사림 등으로 관리되는 것이다. 호계서원은 사액서원으로 남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퇴계 서애․학봉 세 분을 배향한 곳이므로, 안동의 수선서원이라 일컬어졌으며, 안동의 사림뿐만 아니고 의성, 예천, 영주, 봉화 등 인접 여러 군의 사림도 역시 여기 통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임직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호계서원에 관계를 갖은 사람의 범위는 실로 넓었으나, 이에 이르러 하회류씨가 탈퇴한 것을 비롯, 애․학을 논하는 사림 ―서애학파의 사림은 이에 따라 모두 관계를 끊고, 서애를 배향한 병산의 병산서원에 모여 항상 일을 의논하게 되었다. 여기에 반해 학․애를 논하는 사림 ―학봉학파 사림은 호계서원을 독점해서 항상 호계서원에서 일을 의논했다. 병론․호론이라 말하는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다.
3. 대산 이상정의 추향(追享) 문제(問題)
병호시비의 주요 논점은 이상 애학․학애론에 있는 것이 아니고, 호계서원의 묘위 천불천(遷不遷) 문제에 있는데, 이것을 논하기 전에 먼저 이와 같은 문제를 초래하게 된 대산 이상정의 호계서원 추향 문제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정은 한산이씨이며, 고려 말 유명한 이색의 후예이고,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 영조 때에 벼슬길에 올라 관직은 형조참판에 그쳤으나, 그의 학문은 근대에 드문 귀한 것이었으며, 근세영남의 대학자라고 일컬어 졌다. 그는 밀암(密菴) 이재(李栽 *갈암의 아들)의 문인이며, 학봉학파의 정통을 이어받았다. 아니 퇴계학파의 적통을 전승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르므로 영남의 남인 특히 학봉학파 사람들은 모두 그를 숭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그를 한 고을의 수선서원인 호계서원에 추향하자는 논의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의논이 처음 일어난 것은 순조 12년 임신(1812년)이며, 같은 해 10월에 호유는 예안향교에서 도회를 열고 ―보통 이를 선성도회라 한다. 예안의 구호가 선성이기 때문이다.― 우선 도회에서 논의하여 이를 결정한 뒤, 추향의 상소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병유와의 의논일치를 볼 수 없어, 드디어 산회되고, 이후 4∼5년간, 이 문제는 지붕 밑의 사담이 되고 말았는데, 순조 16年 병자(1816) 12월에 이르러 호유는 다시 이를 관철하려고 청성서원(靑城書院 *안동 풍산 막곡. 권호문 배향)에서 도회를 열었으나 이때도 역시 병유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병유는 무엇 때문에 대산의 추향을 방해하게 되었는가.
우선 두 번의 ‘도회일기’와 병유가 호유에게 보낸 많은 ‘통문’을 참고로 하여 이를 살펴보면, 첫째는 호계서원에 추향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즉 병유는 호계서원의 사당 내부의 형상이 후공전착(後廣前窄 *뒤쪽은 너르고 앞쪽은 좁음)하여 만일 추향하려 하면, 원래 있던 위판을 전부 옮겨서 뒤로 물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 백 년 동안 편안히 모신 위판을 하루아침에 천동하는 것은 후배로서 심히 죄송한 일이라고 하며 대산의 추향을 방해하고 있다. 이 사당 내부가 후광전착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뒤에 문제가 된 묘위천동의 변란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된다. 이 일에 대해서는 다음절에 상세히 말하겠지만 병유는 이런 이유 때문에 대산의 추향을 방해했다.
둘째 이유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유훈이다. 즉 병유는 우복의 유훈에 호계서원의 문은 다시 열지 말라 하는 것이 있다 하여, 선배의 유훈이 있는 이상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주장이다. 지금 만일 대산을 추향하기 위해 문을 열면, 이는 그 유훈에 위배되는 것이며, 선배를 존경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호유는 이 유훈을 병유가 조작한 사실무근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이 문제는 전적으로 의심이 가는 문제이다. 우복은 서애․학봉의 자손이 서로 위차를 두고 다투는 것을 봤으므로, 후세를 경계하기 위해 혹 이와 같은 유훈을 남겼을지도 모르지만, 그 출처는 실로 애매하다. ‘우복집’에는 이와 같은 글은 없다.
병유는 가가전송되는 것이라 하지만, 그래서는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 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우복이 이와 같은 유훈을 남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 것이 첫째의 중요한 목적이므로 춘추 제향을 올릴 때 사당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적어도 1년에 두 번은 반드시 여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의 두 가지 이유는 병유가 호유에게 통한 문서에 근거를 두고 정리한 것인데, 호유의 기록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모두 병유가 조작한 사실무근의 말이라는 것이다. 병유가 감이 이렇게 한 것은 당시 학․애가 공론이었으므로 대산을 추향할 때 서애․학봉의 위판 위치를 바꾸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과연 호유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하는 것은 지금 당장 말 할 수 없으나, 당시 병유는 호계서원에서의 서애․학봉의 위판 순서를 바꾸지 않을까 걱정한 것은 사실이다. 순조 5년 을축(1805) 겨울, 학․애론이 우세해졌을 때, 승무의 순서를 학․애라고 한다면, 호계서원의 위차도 역시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제창한 사람이 있다. 이 말을 꺼낸 사람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병유에서는 금계의 김완찬(金宛燦)이라 하고, 김완찬과 그의 아들 김진락(金鎭洛)은 자기가 말한 것이 아니고 을축(1805) 겨울, 경성 소청에서 하회의 류철조(柳喆祚)가 학(鶴)․애론이 우세한 것을 보고 성을 내며 발설한 것이라 하고 있다.
이 말은 병유의 말과 같이 호유쪽에서 먼저 발설했다고도, 또한 김진락이 말하는 것처럼 병유 쪽에서 성이 나서 말한 것으로도 생각되나, 이는 선배가 제정해서 수 백 년 동안 편안하게 모신 위판을 전환하는 큰 문제에 관여된 일이므로, 모두 그 발언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그래서 이는 누가 먼저 발설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호계서원의 서애․학봉의 위판을 전환하려는 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므로 병유가 이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병유는 추향을 방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즉 병유가 대산 추향 방해의 제3의 이유였다.
병유가 대산추향을 방해하는 소이는 오직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즉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에 관해서, 대산의 자손과 반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퇴계서절요’는 이상정이 퇴계가 저술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본을 따서 편찬한 것으로, 퇴계의 언행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이 문제가 된 것은 소호의 대산 본손가에 소장하는 ‘퇴계서절요’ 목록 중, 서애에 대한 각주에 오류가 있는 것과, 서애의 형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에는 각주도 달지 않고 성명만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다. 마침 순조 14년 갑술(1814) 9월에, 대산의 종손이 일반의 요청으로 ‘퇴계서절요’를 출간하려 할 때, 하회류씨는 이점을 지적하고 출판하지 말 것을 청했으나, 대산의 종손은, 비록 겸암의 각주가 누락되었고, 서애의 각주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퇴계서절요’는 대산 선생의 수필본이므로, 후배들이 감이 자의로 손을 대서 개정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서애의 각주에 어떠한 오류가 있었던가. 이것은 병산서원에서 고산서원으로 보낸 통문 속에 상세히 적혀 있다. 그것을 초록하면 다음과 같다.
復有仰質者 目錄中 文忠公 條題註所錄 叉有爽實 有曰 以壬辰中興功 錄扈聖 封豊山府院君云云 生等以爲 文忠公 以宗系辨誣事 萬曆庚寅 錄光國功 封豊原府院君 壬辰中興功 則至甲辰 錄扈聖勳 載任國乘與年譜 昭然可按 而今註中 乃以庚寅作壬辰 光國作扈聖 豊原作豊山 一則庚甲之勳相換 一則父子之封號相蒙
여기에 의하면 ‘퇴계서절요’ 목록 가운데 서애의 각주에는 만력경인광국의 공을 기록하지 않았고, 모든 훈공을 모두 임진의 일로 하고 있으며, 또한 풍원을 풍산이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다. 서애의 자손은 이 때문에 장문으로서 두세 번 논쟁을 한 일이 있었는데, 대산의 자손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으므로(다만 퇴계서절요의 간행을 정지停止하였지만) 대산 자손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자기 조상에 대해 유념해서 쓰지 않았던 대산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곧 병유가 대산을 호계서원에 추향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이로부터 5년 뒤, 즉 순조 19년 기묘(1819년) 7월에 이르러 하회류씨는 풍기 황언한(黃彦漢)의 집에서 ‘퇴계서절요’의 한 별본을 발견하고 다시 논쟁한 일이 있었다. 황씨 소장본도 또한 대산의 필사본이며 언한의 아버지가 대산의 제자였으므로, 이 책이 황씨집에 전하게 된 것이다. 보통 황씨의 소장인 ‘퇴계서절요’를 기본(基本 *풍기본이라는 뜻)이라 하는데 대해 소호 본가에 있는 것을 호본(湖本 *소호본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리고 기본은 그 목록 중에, ‘겸암의 각주에는 상세하게 적혀 있고 서애의 각주에는 앞에서와 같은 오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하회 류씨는 대산의 종손에게 기본으로서 호본의 결함을 보충할 것을 청했으나, 기본은 대산 초년의 초본이고, 호본은 만년의 정본이므로, 정본을 고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또 거절했다.
요컨대, 병유는 표면에는 호계서원에 추향의 여지가 없는 것과, 우복의 유훈이 있다고 하면서 대산의 추향을 방해했으나, 그 이면에는 대산 추향 시 서애․학봉의 위차가 전환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또 대산이 그 저서 ’퇴계서절요‘에 겸암․서애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호유는 그 뒤에도 자주 추향 문제로 도회를 열었으나 묘위 천동의 문제가 일어난 후, 병유가 적극적으로 방해하였으므로 대산의 추향은 실현시킬 수 없었다.
4. 묘위(廟位)의 천(遷)․불천(不遷)론
상술한 바와 같이 호유는 대산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추향하기 위해 예안향교, 청성서원에서 두 번 도회를 열었으나, 모두 병유 때문에 좌절되어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 대산의 추향문제는 병호시비의 중심인 호계서원의 원위(元位 *퇴계 선생 위판)가 옮겨졌느니 아니 옮겼느니 하는 문제를 유발해서 이후부터는 전적으로 이것을 가지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청성도회 다음 달, 즉 순조 16년 병자(1816) 12월이다. 이 달 말엽, 하회류씨는 의인의 이겸순(李謙淳) 등으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고, 이로 인해 묘위(廟位 *사당의 위판))의 천동이 있었음을 알고, 순조 6년(1806) 11월에 류향춘 등이 문자벌을 받은 이후, 발을 들어 놓지 않았던 호계서원에 가서, 조사한 결과 중당에 있었던 원위가 북벽 밑에 옮겨져 있다고 말하면서 병산서원에 모여 누군가가 움직여 옮긴 위판을 원래 장소에 환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의논하고, 환안의 도회를 다음 달인 정월 18일로 정해서 이 뜻을 도내에 통보했다.
여기 대해 호유는 사당 내부의 현상은 수 백 년이래 조금도 변함이 없고, 원위는 북벽 밑에 있다고 하면서 병유가 말하는 묘위(廟位 *사당의 위판) 천동설(遷動說 *남몰래 움직여서 옮김)은 대산의 추향을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망한 설이라고 하며, 병유보다 하루 앞서 도회를 열고 공론으로서 이 문제를 결정하려 한다고 그 뜻을 도내에 통보했다. 그리하여 이 병유와 호유의 도회는 예정대로 순조 17년 정묘(1817) 정월 17, 18 양일간에 걸쳐, 호계서원에서 열려 도내의 유림 700여명이 모여 묘내(廟內 *사당 내부)를 조사하며 돌아보았는데, 병유는 천동했다고 주장하고, 호유는 천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서, 말이 오고가는 사이에 감정의 격돌이 일어날 뿐 아무 해결도 못보고 산회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뒤로는 서로 증거를 들어, 혹은 말로, 혹은 글로서 묘위의 천 불천을 논쟁했지만, 문제의 해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각 대구 순찰사영(巡察使營 *경상감영)에 호소해서 이를 바꾸려 하였으며, 나아가서 조정에 상언(上言 *백성이 임금에게 글을 올림)하기에 이르렀으나 결국 결론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부수된 문제가 많이 파생하게 되었다. 거기 대해서는 다음에 말하기로 하고, 먼저 양자의 통문 및 정영장 등에 의해서 병유가 묘위를 천동했다고 주장하고, 호유가 천동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근거를 살펴보기로 한다. 각각 거론된 것을 세분하면 한이 없으나, 병론은 세 조목, 호론은 네 조목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병유가 천동했다고 주장하는 증거를 말하면, 제1은 사당모양의 후광전착설(後廣前窄說 *뒤는 넓고 앞은 좁다)의 공론이다. 그 주장하는 바는 중당에 있었던 원위를 북벽 밑으로 옮겼다고 하는 것이므로 원위가 중당에 있었다는 것, 즉 묘내의 후면이 넓다는 것을 밝히면 천동설은 성립된다. 그러므로 묘내의 후광전착은 영남 원근이목(遠近耳目)이 다 함께 보는 바라하며, 이것이 공론임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1) 李謙淳의 書
廬江事變證左 三從弟遇渟 去臘月間 往臨河權積仁家 歷路瞻謁奉審 則元位奉安於壁下 間不容手 與曾前後廣前窄之說 不啻丁寧相反 心甚訝惑 到權戚家 設問廟貌 則權以爲 後面一人恢恢往來云 … 遇渟歸傳所見與所聞 鄙鄕聽之者 亦皆驚惑 轉相探問于曾前瞻謁之人 則面面所言 皆與權戚之言相符 …
(2) 周溪 儒生의 聯連中의 文
廬江廟貌之後廣前窄, 鄙院章甫之曾所講熟 一道士林之所共見知矣
(3) 丁丑 正月 18일 도회에서 도의 유생 등이 중당봉안설을 한 것.
(4) 호유 김방철(金邦喆)이 병유 류철조(柳喆祚)에게 묘내는 후광전착이라고 말 한 점.
이상 이겸순 및 주계 유생들은 모두 본래 병론을 지지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말을 믿고 공론이라 할 수는 없다. 다음에 도유가 중당 봉안설을 말한데 대해서는, 병산답사빈문에 다만 막연하게 도유가 이런 말을 했다라고 적혀있어, 도유의 누가 말했다고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호유측과 그 도회기록에 의하면,
朴在璣曰 此院廟貌之中堂 十六歲時 聞於生曾大夫
金公員曰 虎溪廟貌之中堂 鄙家傳授 已四世矣
이라 하고 있는데 영주 박재기, 예안의 김공원이 중당 봉안설을 발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병론측 사람의 주장이므로, 이것을 갖고 공론이라고 할 수 없다. 다음에 호유인 김방철이 후광전착설을 말한 것에 대해, 김방철 자신이 이를 부정하므로, 이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요컨대 병유가 묘내의 후광전착이 공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병론들만 하는 말이고, 이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면 더 정확한 증거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제2는 선성도회에서의 양자의 수작이다. 즉 앞에 말한 대산추향을 위해 모인 순조 12년 壬申(1812) 10월의 선성도회 및 동 16년 병자 11월 청성도회에 있어서 병유 쪽에서, 만일 대산을 추향한다면, 수백 년 간 안치한 구위를 천동시키는 것과 같은 일은 없겠느냐는 물음을 제출했을 때에 호유는 만일 추향이 공론이라면 구위(舊位)의 천동은 그렇게 미안한 일이 아니라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이때는 아직 묘위 천, 불천의 분쟁이 일어나기 이전이므로 병유는, 만일 원위가 본래 북벽 밑에 봉안되고 있었다면, 이때 천동 운운하는 말은 나올 이가 없고, 또 호유는 천동이 미안하지 않다고 대답할 이가 없으므로, 이것은 원위가 중당에 있었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천동의 명확한 증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호유는 그때의 일은 가정적인 말이므로, 그것을 가지고 증거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변명하고 있으나, 묘위 천, 불천 논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호유에게 매우 불리한 일이며, 이는 천동의 한 증좌가 되기에 충분하다.
제3은 ‘우복집’에 “只依文廟坐次 豈容他說云云(*다만 문묘의 좌차에 의거해야지 어찌 다른 설을 용납하겠습니까)”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술한 광해군 12년(1620)에, 서애․학봉을 여강(호계)서원에 추향할 때 여강, 병산, 임천의 세 서원 유생이 두 분의 위판 배치에 대해 물었을 때 우복의 답이다.
병유는 이를 해석해서 문묘는 문선왕(공자)을 중심에 봉안하고, 사성 십철을 각각 문선왕의 남방, 동서에 분봉하고 있으니, 문묘는 묘내의 후방이 넓다고 주장했다. 우복집의 전문에 의하면 호계서원의 묘위의 좌차를 문묘의 예에 따랐다는 것이 분명하므로, 호계서원의 묘내의 후방이 넓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므로 천동한 증거라고 했다. 병유의 이 해석은 일견 타당한 듯하게 보이지만 이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오류가 있다. 원래 광해군 12년(1620)에 세 서원 유생이 우복에게 물었던 것은 서애․학봉의 위차이지 원위의 배치가 아니다. 즉 이것을 동서로 분봉하는가 또는 동일렬(東一列)에 봉안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복이 답한 것은 이것을 동서로 분봉할 것을 지시한 것이 결코 문묘의 좌차에 따라, 퇴계의 위판을 중당에 분안하라고 지시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를 갖고 천불천의 증거로 할 수는 없다.
병유가 천동했다고 하는 증거는 대략 이와 같은 것이지만, 다음에 호유의 천동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제1은 묘내의 천동 흔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순조 17년 丁丑(1817) 정월 18일의 호계도회 때, 병유 호유 및 도유 등이 묘내를 검사해서, 상탁(제상, 교의, 향안)의 다리 아래의 마룻바닥이 다른 곳 보다 희고 또한 움푹 들어간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즉 호유가 천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커다란 증거이지만, 병유는 다른 고서원(古書院)들의 상탁다리 밑에는 요면(凹面)도 없고 또한 희지도 않는데, 오직 호계서원에서만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은 묘위를 천동한 뒤 일부러 조작한 것이라 하며 일소에 붙이고 있다. 병유가 말하는 대로 호유가 일부러 조작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때 상탁다리 밑에는 흰 기미가 있었고, 요면이 있었던 것은 수백 년간의 긴 세월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정치한 제상(祭牀)이므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제2는 원위를 중당에, 배위를 협문 내에 봉안했다고 하는 병유의 설은 묘내의 척도 및 각 위의 교의, 제상, 향안이 차지하는 넓이에서 미루어 각각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호계서원의 사당은 합계 6칸이며 동서가 3칸 남북이 2칸이다. 그래서 동서는 23척 7촌, 남북은 15척 8촌이므로, 한 칸의 길이가 꼭 7척 9촌에 해당한다. 또 각 위판이 차지하는 곳은 교의, 제상, 향안을 합친 전후의 길이가 6척 남짓하며, 제상 좌우의 길이가 6척2촌이므로, 꼭 6평방척이다. 그러므로 만일 원위를 중당에 봉안했다고 한다면 그 남방, 양협문(정문 양측에 있는 소문) 내에는 배위를 봉안할 수가 없다. 비록 봉안할 수 있다고 해도 분향, 헌작을 하기에는 매우 불편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척도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같은 호유 가운데서도 한 칸의 길이를 혹은 6척, 혹은 7척 등 여러 가지 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유는 척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논박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생각해서 후면 무용의 땅을 넓게 하고, 전면 유용한 땅을 좁게 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제3은 여강서원은 도산서원과 같은 날에 그 위판을 봉안하고, 그 규모는 역동서원의 예를 따라서 서로 참작해서 제정했으므로, 역동과 도산이 이미 벽 밑 봉안인 이상, 오직 홀로 여강(호계)만이 중당 봉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역동서원은 지금은 폐철되였으나 한 때 예안에 있었고, 고려말 우탁(제주)을 제향하고, 도산서원은 지금 아직도 안동군 도산면에 있으며, 퇴계를 제향하고 있다. 그래서 두 서원이 모두 벽 밑 봉안임에는 의론이 없으나, 위판을 봉안할 때 역동, 도산의 규모를 참작하고 제정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즉 이 사실을 기록한 문안(文案)인데, 호유는 그것이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광산김씨)의 행장에 있다고 하지만,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으니, 여기서는 논하기를 피하기로 한다.
제4는 원임재석의 제사(題辭 *관청의 판결이나 지령, 비답)이다. 일찍이 호계서원의 재임을 거친 김희주(金熙주)등 16명이 호계서원의 사당 위판을 옮겼다는 말을 듣고 호계서원의 위판은 벽 밑에 봉안하고 있다고 하는 의미의 제사를 발한 일이 있다. 호유는 이것을 천동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로 삼고 있다. 그렇지만 김희주 등 16명은 모두 호론 측이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병유가 주계의 유생 및 이겸순 등의 서신을 후관전착의 증거로 삼은 것과 같은 것이다.
양자의 주장하는 바는 대개 이상과 같은 것이나 그것에는 각각 일장일단이 있어서 여기에서 경솔하게 단정할 수가 없다.
5. 정영(呈營) 사건
병호시비의 중요 논점은 앞에 이미 말한 것과 같이 호계서원의 위판 천․불천이라는 일, 즉 병유는 호유가 몰래 위판을 옮겼다고 말하고, 호유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만 고을 안에서 이와 같이 논쟁을 해도 해결할 수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그들은 대구 순영(巡營), 즉 관찰사에게 이를 소송하고 나아가 왕에게 상언하기에 이르렀으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따르는 시비의 묘위 천․불천 외에 또 새로운 문제가 제출되어 양편의 다툼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호론측에서 말하는 소위 위관문제(僞關問題 *문서위조 사건)인데, 이를 논하기 전에 먼저 정영사건(呈營事件)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일을 최초로 관찰사에게 소송한 사람은, 병유 김상공(金相恭) 등이며, 그것은 꼭 묘위문제가 있은 지 3개월째인, 즉 순조 17년 정축(1817) 2월 20일의 일이다. 그들의 정영장(呈營狀 *고발 또는 소장)에 의하면 먼저 호유가 묘위를 천동한 것을 논하였다. 다음에 호계서원의 묘직(사당지기)을 소환해서 범인을 구문하고, 범인을 법률에 따라 엄벌할 것을 청하였으며, 위판을 구 위치에 환안할 것을 청원하고 있다. 그때의 관찰사는 김노경(金魯敬)이었다. 그는 호를 원당 또는 추사라고 하는 유명한 김정희의 아버지이며, 뒤에 이조참판의 중직까지 이른 사람이다. 감영에 제출된 정영장에 대해 관찰사는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려 환안을 허락하였다.
… 苟有是也 誠不可不及早還奉是遺 其暗地還奉之儒生段 士林齋會 各別施罰事
다만 이 비답에 대해 여강전말은 “誠不可不及早還奉”이하의 불자(不字)는 병유의 삽입이라는 주석이 있으므로 만일 그렇다면 관찰사는 환안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전후의 관계에서 이를 살펴보면 이는 주석이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그렇고, 병유는 위와 같은 비답을 얻었으므로 의기가 크게 올라 안동에 돌아와서 관찰사의 명령이라 하여 묘위를 환안하려 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호유는 크게 놀라 한편 서원 주위의 경계를 엄히 하고, 다른 한 편으로 병유의 무망(誣罔 *남을 속임)을 논하는 진정서를 감영에 보내어, 관찰사가 친히 호계서원에 와서 사당 내부를 돌아보고 심사하여 진부를 경정해 주기를 바란다고 청원했다.
관찰사 김노경이 이 호유의 소장을 보자,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어, 이 논쟁은 진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먼저 병유에게 보낸 비답을 취소하고, 다시 사림의 일은 관청에서 처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병유는 환안을 허락한 먼저의 비답을 구실로 자주자주 환안을 거론하며 도회를 열고 호유에 압박하니, 호유는 그때마다 서원의 주위를 경계하며 이를 저지하는데 힘을 썼으며 그 사이에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다. 그 뒤 양편은 여러 번 경상감영에 소송해서 그 시비를 논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김노경는 관찰사가 결정지울 문제가 아니라는 제사만은 내려, 전여 무관심의 태도로서 싸우는 대로 방치해 두었다. 다만 김노경뿐만 아니고 그 뒤 모든 관찰사도 모두 같은 태도를 취했다.
만일 그때, 관찰사가 권력으로서 이를 처결했다면, 이 싸움은 혹은 진정되었을 지도 모른다. 사림 사이에 이러한 다툼이 있는 것은 심히 유감 된 일이며 불상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위정자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이를 통징할 일이었다. 그런데 김노경를 비롯한 모든 관찰사는 모두 일관되게 싸우는 대로 방치한 것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원래 조선에서는 유림의 세력이 매우 커서 그들이 의논하여 결정하는 바는 정부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싸움은 개인 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한 도의 유림 대 유림의 문제이며, 양편의 세력이 모두 매우 컸다. 그래서 관찰사가 일시적 공권력으로 이를 눌리려 해도 끝이 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잘못하면 관찰사 자신도 그 와중에 휘말려 들어가기 쉽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관찰사가 무관심의 태도를 취하게 된 소이이지만, 이보다도 더 중요한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시의 집권층이 서인이므로 관찰사 내지 안동부에 파견된 사람은 모두 그 당파 사람이며, 이 논쟁의 주인공인 남인과는 전연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자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인은 정치상으로는 아무런 권력도 없었지만 그들은 다시 정권을 잡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고, 서인은 남인의 재기를 겁내고 있었다. 그르므로 서인은 남인들 서로 간에 이러한 다툼이 있어 그 힘이 분열되는 것을 오히려 기화(奇貨 *못되게 이용하는 기회)로 생각할 정도였으며 이를 애써 진정시키려 하지 않았다. 아니 이로서 남인의 파멸을 기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뒤의 일이지만 헌종 원년 을미(1835) 9월에, 관찰사 조병상(趙秉相)이 안동 영호루에서 양반 유생을 회유하는 자리에서 한 그의 말에서도 이런 것이 잘 엿 보인다. ‘을미양조일기(乙未兩造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巡相曰, … 南人事不關西人, 嶺南之片片破碎, 固無關於吾輩, 且以心術言之, 則或有幸之者云云
관찰사 조병상이 이렇게 말한 것은 물론 반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이것으로 미루어 서인 일반들이 이 다툼을 보는 견해와 태도를 알 수 있다.
더욱 남인들 가운데에는 중앙정부에서 경상감사를 임명할 때 미리 병호시비에 관계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어 파견한다는 말도 있고, 또 서인이 이 싸움을 조장했다는 말도 있다. 거기 대한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나, 좌우간 서인은 이 사건을 조정(調停)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를 조정하려 한 자가 대원군이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뒤에 말하기로 하고, 다음에 위관 문제(僞關問題)를 살펴보기로 한다.
6. 위관 문제(僞關問題)
병․호 양측은 서로 경상감영에서 승패를 결정하려 했지만, 관찰사는 완고하게 이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병유는 왕에게 상언(上言)하기에 이르렀다. 병유가 이렇게 하기에 이른 것은 다만 관찰사가 자기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고, 호유가 대산 이상정의 추향상소를 올리려 하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앞에서도 말 한바와 같이 위판 문제는 호유가 대산을 호계서원에 추향하려 한 데서 생긴 것이므로, 만일 호유들 사이에 대산 추향문제를 거두어들인다면 위판을 움직여서 옮김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문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이 싸움은 스스로 사그라질 수 있으나, 그러나 호유는 끝까지 그 목적을 관철하려 하고, 또 순조 17년 정묘(1817) 5월에 같은 남인인 경기도 마전(麻田 *경기도 연천)의 미강서원(湄江書院 *미수 허목 배향서원)의 유생들로부터, 대산의 추향을 촉구하는 글이 왔으므로, 여기 한층 더 자극을 받고 드디어 같은 해 7월 2일, 타양서원(陀陽書院 *일직면 조탑리에 있는 서원)에 모여 이를 실행할 것을 의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병유는 아직 묘위문제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이런 일을 하려하는 것은 심히 옳지 않다고 말하며 주계서원(周溪書院 *와룡면 주계동, 구봉령 배향서원)에 모여 묘위환안을 상소할 것을 의결하고, 소수로서 김종규(金宗奎 *풍산김씨)를 선출했다.
그런데 호유은 어떠한 사정인지 몰라도 그 결의를 실행하지 않았으나, 병유은 드디어 그 유명한 김종규 등이 상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상언의 주요한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호유가 묘위를 천동했다는 것을 논하고 이를 환안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를 상언한 것은 동년(1817) 9월 2일 순조왕이 경릉, 명릉, 홍릉의 삼릉에 참배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어가(御駕)막고 그 앞에서 상언을 하였다. 그래서 예조가 이를 왕에게 회계(回啓 *임금이 하문한 것을 심의하여 보고함)한 것은 같은 달 10일의 일이며, 그 보고서에는 ‘여강전말’에도 수록되어 있으나, 중앙의 기록인 ‘일성록’에도 역시 실려 있다. 다만 ‘순조실록’ 및 ‘승정원일기’를 뒤져봐도 이것이 보이지 않고, ‘비변사등록’에는 불행히도 순조 17~18연 부분이 훼손되어 있으므로 이를 살필 수가 없다. 그래서 ‘여강전말’과 ‘일성록’을 비교해 보면 뜻은 전적으로 같으나 자구에 있어서 다소의 차이가 있다. 특히 ‘여강전말’은 이두가 섞인 채이지만 ‘일성록’은 그것을 뺏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구를 생략하고 간략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여강전말’로서 그것에 대한 원래대로의 원문을 볼 수 있으므로 ‘여강전말’이 사료(史料)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알 수 있다.
또 ‘일성록’ 쪽은, 이 사건을 종합 정리해서 기록했으므로 전후의 관계를 보는데 좋다. 지금 여기 일성록의 기사를 실어본다.
禮曹啓 … 慶尙道生員金宗奎等 以安東虎溪書院三賢位版遷動 請行査本道 還安位次矣 按其狀辭 則虎溪書院 則文純公李滉尸祝之所 而以文忠公柳成龍․金誠一躋配矣 去年 安東進士柳晦文輩 將以贈參判李象靖 追配於該院 潛遷中堂奉安之位 貼於壁下後面云 而一則曰 三賢之外不當追配 一則曰 三賢之外又當追配 至以位次遷不遷 爲兩邊爭詰之端 而本院是宣額之所 則其配與否 一俟朝命而已 不命之前 奚以配不配爲爭 旣末及配 則先遷位版又何故也 請分付該道 兩造誨勉 明示可否 使許多縫掖 尊賢院而敦儒行 無敢以似此爭下之辭 更徹朝聞 … 並允之
여기에 의하면 예조는 김종규 등의 상언인 이 쟁론을 왕에게 아뢰고 그 처결방법으로서는 관찰사로 하여금 양쪽 유생을 한 곳에 모아 다시는 이런 일로 다투지 말 것을 회유하게 했다. 왕은 이를 윤허했다. 그래서 예조는 관찰사 김노경에게 다음과 같은 관문(關門 *하급기관에 보내는 문서)을 주어, 이를 실행하게 했다.
… 九月初十日 左副承旨臣韓耆裕次知 啓 依允事判下敎是置 判下內辭意奉審施行爲乎矣 到付日時 回移宜當向事 合行移關請 此亦中査實還安後回移次
이 문서는 매우 읽기 불편하지만, 그 요점은 앞에서 왕의 윤허가 있었던 일, 즉 양방 유생을 회유할 것을 명하고, 뒤에는 천동한 위판을 환안할 것을 명하고 있다. 이 뒤의 것, 즉 “此亦中査實還安後回移次”라는 말이 바로 호유가 주장하는 바의 위관(僞關 *위조 문서)인 것이다.
병유는 이상과 같은 문서가 관찰사에게 간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향리에 돌아가서 호유를 호령하고, 또한 묘위를 환안하려 했다. 그러나 호유는 예조가 왕에게 보고한 글에는, 다만 양쪽 유생을 회유하라는 말뿐이지, 아직 환안에는 언급이 없었는데, 관찰사에게 준 문서에서 돌연 이런 사실이 보이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같은 해(1817년) 11월에 이를 예조에 하소연했으므로 예조는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리고, 이것은 예조에서 쓴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今見單辭 乃有此亦中還安云云 若曰還安 乃是自決 又何行査 告君之辭所無者 何以別添一條 若非傳者之誤傳 必是中間之用奸 聞來不勝駭歎 往呈本道巡營 以下有無 以爲嚴處之宜當事
그래서 호유는 앞에 말한 문서 가운데 “合行移關請”까지를 예조의 원본문서라 하고 “此亦中” 이하를 병유가 첨가한 위조문서라 주장하며 병유 공문서의 위조죄를 논하였다. 그런데 병유는 이 문서는 동일인이 쓴 것이며. 또한 쓴 사람은 예조의 관리이고, 여기에 찍은 도장은 예조의 것이므로 위조문서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문제는 병호시비에 있어서 묘위 문제 다음으로 중대한 것이며, 이후 이 때문에 자주 충돌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어찌된 일일까 조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지금 만일 당시의 ‘예조등록’이 있다면, 이 문제는 쉽게 풀 수 있겠지만, 그 원본이 지금 전하지 않으므로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위 예조가 호유에 준 제사(題辭)에 “임금에게 고하는 보고서에 없는 것을, 무엇을 갖고 한 조항을 첨가했겠는가. 만일 전달한 자의 오전이 아니라면 반드시 중간에서 간계를 부린 것이다.”라고 쓴 것으로 보아 그것은 예조에서 쓴 것이 아니고 따라서 위조된 문서와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문서가 나온 이후, 호유는 자주 이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것을 경상도감영에 호소했으나, 관찰사는 한 번도 여기에 대해 위조라는 판결을 내린 일이 없고, 또 병유가 이 문서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사당 내부를 실사하고 위판을 환안할 것을 청해도 관찰사는 “此亦中者 乃是原關外 該曹之追書者 是不足援而爲重事”라는 판결을 내려, 이에 응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호유가 말하는 것과 같이 병유들이 첨서한 것이 아니고, 역시 예조에서 쓴 것이지만, 뒤에 추서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조에서 이를 추서한 자는 누구 일가. 순조 20년 경진(1820) 10월 2일, 관찰사 이재수(李在秀)가 안동군청에 양파의 유생을 모아서 위조문서의 진위를 조사했을 때, 병유 류가조(柳家祚)의 공사(供辭 *진술서)를 보면
柳家祚口呼供辭 大槩以謂 矣身卽柳璧祚之弟也 虎儒之以潛圖僞關掛書矣兄 盖以矣兄中庭試初試 獨留伴中 決科後 身往禮曹 問于曹吏曰 禮關辭意何如 曹吏答曰 以査以誘以飭以導云云 矣兄答曰 嶺外多士 千里跋涉 所望只在於還安二字 而原關中無還安字 心甚悵缺 曹吏曰 原關未盡之意 有此亦中揷入之例 小人當禀于堂上 以爲周旋云云 伊后數日 又往禮曹 更問曹吏 則果有此亦中還安 二字 其後虎儒執此爲僞 然矣身亦往營門 取見關辭 則書之者一人之筆也 該堂之署押與印跡班班 則虎儒僞關之設 甚險慝
라고 한 것이 있다. 이것에 따르면, “此亦中云”이라는 구절을 추서할만한 힘이 있는 자는 류가조와 조리(曹吏 *예조의 아전 관리)라고 생각이 된다. 但 이 기사는 호론측 기록이므로, 전체를 그대로 믿을 수 없으나 예조 관리가 이에 관여되었다는 것은 이런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종규 등이 위조문서는 병유가 아는 바 아니라고 예조에 올렸을 때, 예조 문서의 한 구절 “吏誡有罪”라고 쓰여 있는 점으로도 역시 알 수 있다. 또 순조 20년 경진(1820) 10월 11일, 금종규의 위조문서제작죄(호유는 항상 김종규를 위조문서 주범자로 보았다)를 논하는 호유의 소장에서 “曹吏裵光玉 卽蒙勘汰 而宗奎之至今假貸 寧可曰國有法乎”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예조관리는 배광옥(裵光玉)이며, 광옥은 이것으로 인해 관직을 면직 당한 사실까지도 분명히 밝힐 수가 있다.
요컨대, 이 문제는 호유가 말 하는 대로 병유들이 첨가한 것이 아니고, 역시 예조에서 첨가해 넣은 글귀이며, 이것을 추서한 것은 예조아전 배광옥이었다고 생각된다.
7. 묘위(廟位) 잠천(潛遷) 범인(犯人) 문제(問題)
논쟁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발전하고 복잡해져서 진상을 규명하기는 매우 곤란해 졌으나, 또 서로의 감정을 격앙시키는 일이 순조 20년 신사(1820) 8월에 돌발했다. 그것은 병론이 주장하는 묘위잠천(廟位潛遷 *사당에 몰래 들어와서 위판을 옮김)에 대한 범인 문제이다. 지금까지 병유는 묘위 천동설을 할 때, 다만 막연하게 호유가 했다고 만 주장했을 뿐, 언제 누가 어떻게 천동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러 호유의 한 사람인 이현주(李顯周)라는 자가 이것을 병유에게 통고했으므로, 그들은 묘위 천동의 진상을 알고 있다고 하고, 또 환안하라고 호유를 윽박질렀다.
그런데 이현주(*진성이씨 17세손으로 두루파 지파인 아호파로서 월곡면 구계리 세거)가 병산서원에 통고한 글을 보면 언제 누가 이를 천동했다고는 하지 않았으나, 일의 출처에 대해 당시 호계서원 재임인 박겸중(朴謙中)으로부터 듣고 알았다고 쓰여 있다. 이현주 혼자만이 아니고 현주의 일가인 아호이씨들이 함께 이 사실을 병유에게 통고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박겸중은 자명(自明) 단자(單子)를 내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변명하고 있다. 그 단자에 의하면 이현주는 전에 병유의 돈 300량을 받고 이 사건을 지어내려하다가 이루지 못했다고 하였다. 마치 이현주가 병유로부터 뇌물을 받고 이런 일을 꾸며서 만든 것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또 ‘여강전말’에는 병유가 이현주를 매수해서 이와 같은 사실무근의 말을 꾸몄다고 쓰여 있으나 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병유는 이현주의 글에 의해 묘위 천동은 확실하다고 주장하며, 이 기회에 환안하려고 도내 각처에 도회 개최를 통고했다. 그리하여 도회는 예정대로 9월 27일, 호계서원에서 열려 그 석상에서 이현주는 순조 16년 丙子(1816) 12월 3일 밤, 소호의 이병운(李秉運), 삼현 류치직(柳致直), 사당지기 막삼(莫三)이 위판을 움직여 옮겼다고 말했다. 이에 묘위천동의 일시 및 범인을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병운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이를 부정했으나 병유는 그들을 그 진범이라 보고, 이미 범인이 나타난 이상 5년간이나 천동되었던 위판을 환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위판의 환안을 실행하려 했다. 그러나 호유의 필사적 대항 때문에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다음달 2일 도회를 파하고 해산했다. 이때의 ‘도회일기’를 보면, 회의는 공전의 대혼란을 일으켰으며, 서로 격노하고 욕설과 억설로서 일관했다고 쓰여 있다. 추태백출하여 예의를 존중하는 유림회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주의할 일은 이현주가 병산에 알린 이후, 병유는 그 말을 절대로 믿고, 이병운, 류치직 등을 묘위 천동의 진범으로 단정했는데, 과연 그 말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닐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이현주가 전한 말을 상술할 수는 없으나, 그는 호계서원의 근처인 아호에 살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호론 편에 서 있었고, 이 논쟁이 일어난 뒤 호계서원의 원임을 거친 사람 같다. 그러므로 그는 상당히 유력한 호유라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사람이 진범을 말했다면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을 발설할 때의 그는 호론 사람이 아니고 병론 사람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말하는 것은 호론으로서의 발언이 아니고 병론으로서의 말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전적으로 믿기가 어렵다.
다음에 호론은 이현주가 매수되어서 거짓말을 꾸며냈다고 하나 과연 그러할까? 여기에 대해 박겸중의 자명단자에 이현주는 전에 이것을 거짓꾸며내기 위해, 병유의 돈 300량을 갖고 자기와 사당지기 막삼을 유혹하다가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도회일기’를 보면 박겸중과 이현주의 문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齋席朴謙中曰 兄之誘我曰 本院是非 已成疑案 此時 君以院村之人 善誘廟直 使人證成遷動之 誰某與日月 則屛院錢三百兩 方在府中 當以二百兩償廟直 百金則君與我當分食云云 此言兄果不爲耶 李顯周徐曰 爲之
마치 이현주 자신이 호유 앞에서 그 수뢰사건을 폭로한 것 같이 되어 있으나 이들은 모두 호유 쪽의 기록이므로 또한 전적으로 믿기 어려운 것이다. 요컨대 이것도 묘위문제와 같이 그 진상은 밝힐 수 없지만 이 사건이 있은 이후 병유는 이병운, 류치직을 그 진범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8. 대산실기(大山實記)의 논난(論難)
병호시비는 한 시대로 끝마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자자손손 전해져서 전통적 논쟁이 되어 오래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해를 거듭할수록 서로의 질시반목은 더욱 그 도를 더해서 사소한 일에도 흠을 찾아 서로 공격하며 그치질 않았다. 그 가운데서 특히 기록할 만한 것이 ‘대산실기(大山實記)’에 관한 문제이다. ‘대산실기’는 말할 것도 없이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실기지만 ‘대산실기’는 헌종 13년 정미(1847) 가을, 이상정의 자손 및 제자와 호유들이 고산서당(高山書堂)에서 간행한 책이다. 그것이 간행되자마자 병유는 ‘대산실기’ 속에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기록 두 세 곳을 찾아 호론을 공격하기 위해 순조 21년 신사(1821) 호계도회 이래 약 30여 년 간 겉으로는 별로 다투지 않았던(물론 이 사이에 논쟁을 중지한 것은 아니다) 쌍방 유림은 이를 두고 다시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병유가 문제 삼는 것은 ‘대산실기’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병산서원, 영천향교, 상주 도남서원 등 세 곳에서 각각 호유에 통고한 글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들면 제1은 대산을 실기에 찬양하여 “퇴계 이황 이후 오직 일인뿐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었다. 병유가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퇴계 이후 서애․학봉․우복․갈암 등 다수의 명유가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산만을 일인자로 한다는 것은 선배를 능멸하는 심히 과도한 기술법이라고 이것을 공격했다. 특히 병산서원으로부터 발송한 글에는 “어찌 주자 이후 일인뿐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퇴계 이후 일인이라고만 하는가”라고 비꼬면서 매도하고 있다. 생각건대 이상정은, 그 학문의 해박함과 실천궁행이라는 점에서는 퇴계 이후 영남의 학자로서는 아무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 실기에서 말하는 바는 지나친 과언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2는 대산의 문인록을 편찬하고 성명을 열기하며, 그 밑에 분주로서 충재(冲齋)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서애(西厓) 문충공(文忠公) 류성룡(柳成龍)․학봉(鶴峰)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한강(寒岡)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우복(愚伏)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후라고 한 것같이 명현의 성함을 직필하고 있는 데에 있다. 조선에서 선현 또는 조상을 칭할 때는 절대로 휘로 하지 않고, 그 호 또는 시호, 혹은 관명으로 나타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존현 존조의 도라고 한 것은 모두가 상식화된 일이므로 병유가 이를 공격하는 소이는 새삼스럽게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제3은 김종규 등의 상언을 칭해서 무고라고 한 것이다. 병유가 ‘대산실기’를 갖고 호유를 공격하는 주안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이미 30년 전에 범인까지 나타나서 묘위 천동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김종규 등의 상언은 조금도 무고가 아니며 꾸며낸 말이 아닌데, 지금 이것을 무고 상언이라 하고 있고, 그것을 ‘실기’에 까지 쓴다는 것을 심히 합당하지 않다고 논하고 있다.
요컨대 병유는 ‘대산실기’에서 대산을 퇴계 후 제일인자로 하고, 명유의 이름을 휘로 하지 않았고, 김종규의 상언을 무고로 치부한다는 것 등을 들어 호유를 공격하고, ‘주자서절요’가 이미 배포된 것은 회수하고, 그 판목을 파쇄 없애버릴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호유는 이에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혹은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많은 반박문을 발송하여 이를 변명하였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병유의 논박에 대해 적당한 반박은 되지 못했다. 여기서 앞의 제2항에 대해서는 쉽게 그 잘못을 사과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김종규의 상언을 무고라고 하는 것과 묘위 문제에 대해서는 30여 년 전 그들의 부조(父祖)가 주장한 바를 조금도 굽히지 아니했으므로, 이것을 중심으로 한 때 심한 논쟁이 전개되었었다.
9. 대원군의 조정(調停)과 호계서원의 철폐(撤廢)
병호시비 논쟁은 대체로 상술한 바와 같으나 마지막 결론으로서 이태왕(고종) 7년 경오(1870)에 대원군이 이 논쟁을 조정하려하다가 이루지 못하자, 드디어 다음 해(1871) 4월 논쟁의 초점인 호계서원의 철폐를 명하게 된 것에 대해 알아본다.
병․호 논쟁이 영남남인의 대 폐해인 것을 묵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위정자로서는 당연히 이것을 없애는 방법을 취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집권자인 서인 등이 조금도 이런 뜻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던 것은, 그들은 모두 남인의 힘이 분산되는 것을 속으로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제6절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이에 대원군은 무엇 때문에 이 사건을 조정하려 했을까? 우선 그가 당시 안동부사 박재관(朴齋寬)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嶺南之諭安東爲宗 而午人京鄕之論 曰蔡(蔡濟公) 曰洪(洪良浩) 曰屛 曰虎 此是不吉之事 … 京而蔡洪已合相好 又結陳晋之誼矣 擲而屛虎 渠誰言重 我則至易也 今此京鄕之和協 卽欲導迎吉祥 歸福聖躬之計也 書到後 令須躬進該院 招致兩邊之人 出視此紙後 屛虎初次起鬧之往復文蹟 一一搜得上送 其中相相不言之地 期日相會 曰是曰非 歸之先天 縱今以後更結式相好矣 則此爲人和之本 人和然後 可以望元誕生也 …
이라 한 것을 보면 이 논쟁을 조정함으로서 길상을 맞이하고, 성궁(聖躬 *임금의 몸)에 복을 빌고, 원자를 탄생하게 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서신뿐만 아니고 앞서 그가 등용해서 판중추부사를 임명한 하회 류후조(柳厚祚)에게 답한 서신에도 역시 이런 사실을 말하고 있었고, 또 양편 유생에게 보낸 서신에도 쓰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표면상 구실에 불과하다. 이 싸움을 조정하려하는 참 뜻은, 분립된 남인의 힘을 통일해서 당시 가장 세력이 강한 노론과 소론에 대항하게 하여 한 쪽으로 치우친 정국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대원군이 시정에 있을 때 노론, 소론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잡자, 그 예봉을 노소론에 들이대고, 미약한 남인, 북인을 등용한 것은 세인이 다 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대원군을 남인이라고 하는 사람조차 있었으나, 왕족은 당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므로 이렇게 말 할 수는 없다.
아무튼 대원군은 남인 북인을 등용해서 노소론의 세력을 눌린 것은 사실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 남인에게 해로운 폐단인 이 싸움을 조정할 필요를 느껴서 조정을 시작하게 된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대원군은 이 싸움을 조정하려고 안동부사 박재관에게 앞에 말한 글을 내렸고 쌍방 유생을 보합(保合 *화합, 화해)시킬 것을 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박관용은 이태왕 7년 경오(1870) 8월 27일, 양쪽 유생을 호계서원에 불러서 이를 보합시키려 했다. 그러나 양편의 보합문제는 여기서 처음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이미 묘위 문제가 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제기되어 추로지향의 한 골 안에서 살고 있는 유림들 사이에 이와 같이 창칼을 맞대고 사림의 품격을 타락시키는 것은 개탄할 일이라고 말하며, 다시 자리를 같이하며 과거의 분쟁을 씻고, 미풍에 찬 옛 영남으로 돌아가자는 설은 양편에서 제출한 내용이 통문가운데 자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때문에 자주 도회를 열기도 했는데, 단 보합하는 데는 각각 서로가 달리 주장하는 한 가지의 조건이 있었다.
한 쪽은 묘위를 환안하기를 말하고 있고, 또 한 쪽은 현상대로 그냥 두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요컨대 지금까지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쟁론의 폐해를 논하면서, 보합할 것을 제창한 일은 자주 있었지만, 각각 묘위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름다운 결과를 맺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기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들은 태도를 고치지 아니하였고 병유는 묘위를 환안하지 않으면 보합할 수 없다고 하고, 호유는 묘위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면 보합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안동부사 박재관은 양측의 쟁론을 조정할 길이 없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만 묵묵히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대원군은 매우 노하고, 안동부사에게 다시 서신을 보내 양 유생가운데 우두머리를 엄벌하고, 또 문제가 된 ‘대산실기’ 및 기타 여기에 관계있는 서류를 모두 수색해서 보내줄 것을 명령하고, 다음해 신미(1871) 3월에는 논쟁의 초점인 호계서원의 철폐를 명했다. 호계서원의 철폐 명령을 받은 것은 이것이 병호시비의 원인의 인자가 될 때문만이 아니라 대원군의 서원에 대한 정책의 일환에 의해 철폐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때가 대원군이 전 조선에 걸쳐 서원 철폐를 단행했을 때이었다.
그런데 서원은 호계서원의 한 예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거기에서는 양반 유생들이 지기들의 기반으로 점거하여 서원 본래의 목적인 독서와 강학 등의 일은 전연 여사의 일로 삼고, 시끄럽게 정치를 의론하거나, 당쟁을 음모하거나, 천민을 학대하는 등, 여러 가지 폐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또 서원은 많은 전토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으므로 대원군은 이와 같이 서원의 철폐를 단행한 것이었다.
요컨대, 호계서원은 이것이 병호시비 문제의 중심이었으므로 철폐되었는데, 대원군이 서원에 대한 정책에서 보더라도 역시 철폐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호계서원 철폐에 즈음하여 호유들은 비상한 반대를 시도하여 철폐의 명령을 회수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하기 위해 상경하였지만 대원군에게 몰리어 쫓겨나고, 유생들이 투옥되는 등 한바탕 비극을 야기 시켰을 뿐만 아니라 호계서원의 원사(院舍)은 마침내 1871년 9월 9일에 훼철되고 말았다. 그래서 병호시비 문제의 중심은 완전히 제거되었지만 오히려 이들은 잠시 동안 만이라도 선린관계를 맺지 못하고 서로 시비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병호시비는 이상과 같이 위차 문제를 주제로 삼고 그것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파생하여 다투었던 것이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늘 서애․학봉의 위차 문제가 잠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애․학봉을 호계서원에 종향하고, 그리고 문묘에 승무함에 있어서 서애를 선위로 하느냐 또는 학봉을 선위로 하느냐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퇴계학파의 정통을 정하는 데에도 서애로서 할 것이냐 또는 학봉으로 할 것이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병유는 서애를, 호유는 학봉으로서 내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병유의 통문 중에 여러 차례 “도산의 도통을 바르게 하렴”이라는 것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퇴계학통의 정통을 정하려고 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여러 번 도회를 개최한 일까지 있으나 각각 그들의 사부(師父)로서 퇴계의 정통으로 삼으려 한 까닭에 이것도 역시 논쟁의 씨앗이 되었다. 서애․학봉 두 분은 다 같이 퇴계의 고제로서 학문․도덕 또한 백중지간(伯仲之間)이었기 때문에 누구를 퇴계학파의 정통으로 삼느냐 하는 것은 실로 곤란한 문제이다. 그것은 어쨌든 간에 병호시비는 외면으로부터 보면 다만 위차문제의 싸움뿐인 것같이 생각되지만 내면으로 보면 애학․학애의 문제 즉 퇴계학파의 정통문제가 잠재하고 있고, 이것이 싸움을 더 한층 심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청구학총’ 1․3권. 193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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