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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6) 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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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6) 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下)

경향신문|기사입력 2007-08-10 14:51 |최종수정2007-08-10 14:57 기사원문보기

한백겸의 묘소에서 보이는 섬강. 섬강 뒷산 너머가 한백겸의 고향마을이다. <사진작가 황헌만>
한백겸의 묘소에서 보이는 섬강. 섬강 뒷산 너머가 한백겸의 고향마을이다. <사진작가 황헌만>

-비판·개혁적 학문 정신… 실학을 열다-

구암 한백겸은 색론에 관여하여 당파싸움에 뛰어든 적은 없었다. 다만 아우 한준겸은 고관대작이면서 인조대왕의 장인으로 남인계로 활동했기에 구암도 남인계로 분류되고 또 그 후손들은 대부분 남인으로 활동했다. 기호지방은 세력판도로 볼 때 대체로 서인계열에서 노론이나 소론으로 갈려 노론이나 소론으로 행세하는 집안은 많았으나 경상도 일대를 제외한 지역에서 남인이 크게 번성한 집안은 많지 않았다. 유독 구암과 유천(柳川) 한준겸의 후손들이 남인으로는 명망을 유지하면서 가문을 크게 현양시킨 집안이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칭하기를 원주의 노림리(魯林里·노숲) 한씨를 기호의 남인 명가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구암의 후손에는 정승과 판서가 즐비하게 배출돼 고관대작의 가문이 되었고 구암의 높은 학자적 명성으로 학문을 잇는 후손들도 많았다.

# 한백겸 후손들의 번창

구암의 후손 중에는 명가의 호칭을 들을 수 있는 높은 벼슬의 관리, 학자들도 많았다. 구암의 7대손 한치응(韓致應)은 다산 정약용의 막역한 친구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와 한성판윤에 이르렀고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 중에 세상을 떴다. 신유옥사로 다산의 동료들이 대부분 피해를 입고 벼슬에서 물러나거나 귀양살이를 했고, 아니면 참형을 당했지만, 한치응만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벼슬이 승승장구 올라 고관대작에 이르렀다. 그의 양자 진정(鎭庭)이 또 병조판서에 오르고, 그의 아들 돈원(敦源)이 병조판서에 올라 3대 병조판서의 전통을 세우기도 했다. 돈원의 아들과 손자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이름은 크게 얻었던 분들이다.

# 한백겸의 유적지

한치응의 7대 종손인 한민구 교수와 그의 종제인 한홍구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찾은 원주와 여주의 한백겸 유적지는 역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었다. 한백겸은 비록 서울에서 태어나 샛강과 한강이 만나는 어디쯤의 물이촌(오늘의 수색이나 상암동 어디쯤)에서 운명했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은거하며 살았던 원주의 부론면 노림리가 그의 고향이었다. 우리가 찾은 노림리는 어마어마했다던 한백겸 종가의 옛자취를 잃고, 옛터에 반한옥 반양옥의 종가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마을이 오래됨을 증명하듯 몇 그루의 당산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나는 한백겸을 아노라고 뽐냈지만 말을 못하니 무엇을 알아볼 수가 있겠는가.

한치응은 둘째 아들이어서 종가에서 조금 떨어진 부론면 흥호리(興湖里) 월봉(月峯)마을에 자신의 종가가 있었다. 종가라야 터만 남았고, 양옥 한 채가 종가 터와 주변의 산소들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사는 집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3대 병조판서가 살았던 집이건만 집의 빈터에는 후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월봉 한기악(韓基岳)의 기념비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바로 집 앞에는 한치응의 손자로 병조판서이던 한돈원의 묘소가 있었다. 한돈원은 한기악의 증조부가 되고 한민구·한홍구 교수는 바로 한기악의 손자들이다.

강원 원주와 경기도 여주를 경계해주는 섬강은 참으로 아름답다. 섬강 주변에 몇 집안의 남인 고가들이 있다. 흥호리에서 멀지 않는 우담(愚潭)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방계 선조인 우담 정시한(丁時翰)의 고향이다. 숙종 때 재야의 대학자 정시한은 다산의 학문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담의 현손(玄孫)이 바로 홍문제학에 형조판서를 지낸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다. 번암 채제공의 친구로 다산의 집안과는 가까운 일가이자 다산의 선학으로 정조의 치세에 큰 역할을 했던 학자 관인이었다. 바로 흥호리와 우담 마을이 남인의 명성을 높이 올린 마을이었다. 섬강의 아름다운 풍광과 지령(地靈)으로 인물을 배출한 곳이었으리라.

한백겸이 살았던 노림리에서 섬강을 건너면 여주 땅이고, 섬강에 가마솥 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섬강이 돌아서 흐르기 때문에 섬과 같이 보여 부도(釜島)라 칭하거나 우리말인 가마섬(佳麻島)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람한 신도비를 둘러본다. 풍수설에 의하여 거북의 머리를 틀어올렸고, 그 거북이 위에 거대한 비석이 바로 구암의 신도비다. 당대의 대제학 우복 정경세의 글에, 명필가이자 판서를 지낸 죽남(竹南)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고, 충신이자 전서(篆書)의 대가 선원 김상용(金尙容)의 당질인 참찬(參贊) 김광욱(金光煜)의 전서로 새긴 비였다. 빗돌도 질이 좋아 400년의 세월에도 글씨를 대부분 알아볼 수 있었으니 국보급의 유물이 아닐 수 없었다.

후손들과 함께 돌아보는 한씨들의 선산, 한백겸의 묘소도 초라하지 않았다. 거대한 문인석에 선비의 묘소로는 부족함이 없게 잘 관리됐다.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이 우의정이었고, 아우 한준겸이 인조대왕의 국구였기에 그곳 일대는 대부분 한씨 소유의 사패지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토지제도의 변천으로 얼마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광활한 산야가 대부분 한씨들의 종중 소유라니 역시 대단했다.

한백겸의 종가. 옛 종가의 주춧돌 위에 양옥이 세워졌다.
한백겸의 종가. 옛 종가의 주춧돌 위에 양옥이 세워졌다.

세월은 흘렀고 세상도 변했다. 당시만 해도 노림리나 흥호리에서 가마섬 마을을 찾으려면 섬강의 나루를 건너면 됐다. 지금은 나루터나 나룻배는 없어졌어도 샛길까지 아무리 좁은 길도 모두 포장되어 차로 움직이는 데는 전혀 불편이 없었다. 이런 것이 바로 문명의 이기가 아니던가.

# 칠봉서원의 옛터는 흔적도 없었다

아들이 정승에 오르고 조카딸이 왕비에 오르자 한백겸은 뒷날 영의정에 증직되고 자신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세운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을 모신 칠봉서원(七峯書院)에 배향된다. 운곡 원천석은 원주의 치악산에 숨어살면서 조선 초기 선비들이 변절하던 시절에 절의를 끝까지 지킨 지조 높은 선비였다. 태종이 3번이나 원주의 치악산까지 찾아와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도를 지키고 학문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원주에 세운 서원이 바로 칠봉서원이다. 이 서원의 건립에는 한백겸의 공이 컸다. 뒷세상의 후학들이 구암의 학덕과 서원 세운 공을 기리려고 그 서원에 배향했으나 대원군 시절에 훼철된 이후 지금은 종적도 없어져 후손들도 찾을 길이 없다고 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 실학의 선구자

유적지를 돌아본 뒤 우리 일행은 구암의 학술사적 업적을 정리해야 했다. 구암은 ‘구암유고(久菴遺稿)’와 ‘동국지리지’라는 저서를 남겼다. 문집의 서문과 발문에 기록된 대로 병란을 거치며 대부분의 유고가 분실되고 없어져 겨우 남은 것을 수습하여 간행한 책이어서 분량도 적고 내용도 많지 않다.

문집과 지리서를 읽고 검토한 학자들의 평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구암을 실학자로 명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의 학문 내용은 분명히 실학사상의 발단을 마련한 점은 충분하다. 기자정전제에 대한 그림과 유제설을 통해 토지개혁사상의 기틀은 열었으나, 자신이 토지개혁사상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지리서를 통해 역사지리학의 단서를 열었고, 국가 경영에 국토와 나라의 강토, 국경과 지역의 경계 및 관방 시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밝혔지만 역사지리서로의 흠결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한 역사지리서를 소재로 해서 반계나 성호, 다산의 역사지리학이 본궤도에 오르도록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기전도에 비판을 가한 다산의 뜻으로도 구암을 실학자로 부르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구암은 당시의 학문 경향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자의 성리학이나 정전제의 논쟁에 비판을 가하면서 실증적 방법을 통한 새로운 학문 경향을 모색했으니 대단한 창의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암이 세속의 학자들 태도에 문제를 삼고 비판의식과 개혁적인 학문 경향을 나타낸 점은 구암 사후 학자들이 올바르게 평가해 준 기록이 있다. 당대의 문장가이자 학자이면서 대제학에 판서를 지낸 택당 이식(李植)은 구암의 후배였다. 그가 ‘구암유고’의 서문에서 명백하게 밝혔다. ‘다만 상수(象數)의 변화나 제도의 마땅함 여부에는 연구가 매우 깊어 옛 사람들의 학설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러한 견해는 비록 정자나 주자를 믿는 전통적 제자들과는 서로간에 동이(同異)가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하여 정자나 주자의 학설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뛰어난 재주와 가정의 온축된 학문과 예절에 능숙한 학자여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택당 이식이 참으로 올바르게 구암의 학문을 인정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래서 더욱 구암의 학문과 사상은 위대하다. 소론의 박세당, 남인의 윤휴 등이 뒷날 주자학의 문제점에 비판을 가하고, 먼 훗날 남인의 다산 정약용이 사서오경의 성리학적 해석에 문제점을 지적하여 새로운 경학체계를 세웠으니 구암의 학문태도와 비판정신은 조선 후기 학술사에서 역시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옳다. 그래서 반계나 성호의 학문 경향에도 자극을 주었던 구암의 학문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선구적 지위에 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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