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4) 이이의 혼이 서려있는 자운산 자락(下)

회기로 2010. 1. 24. 19:40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4) 이이의 혼이 서려있는 자운산 자락(下)
입력: 2007년 07월 13일 15:11:45
-학문과 정치 모두 밝았던 ‘大賢’-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자락에 있는 율곡 이이의 묘소. 부인 노씨와 합장되어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 조선의 대표적 학자와 정치가

조선 500년을 회고해보면 학자도 많고 정치가도 많았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학문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수준 높은 정치가의 반열에 오른 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딱 한 사람이 그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바로 율곡 이이였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두려움 없이 군주에게 올바른 정책을 건의하여 국태민안의 세상을 만들기에 온 정력을 바쳤고, 전야(田野)에 물러나서는 학자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 조선 성리학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했던 최고 수준의 학자 지위에 올랐다.

학문과 정치를 함께 했던 율곡, 그의 학문적 저술은 한편으로는 학술논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의 방책을 열거한 정책대안서였다. 그가 20세에 금강산에서 돌아와 다시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문제를 타개하겠다던 튼실한 각오를 설파한 글이 다름 아닌 그의 ‘자경문’(自警文)이다. 11조항으로 된 그 글의 첫째 조항은 “먼저 뜻을 크게 세워 성인(聖人)의 행실을 본받기로 한다. 털끝 하나인들 미치지 못하면 내가 하려던 일을 마치지 못했다고 하겠다”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 뒤 벼슬하면서는 본격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문적 업적을 바탕에 깔고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을 올린다. 34세의 9월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임금께 올리는데 그 무렵에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시무’(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급선무의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밝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무’가 어떤 것인가를 계속하여 상소로도 올렸다. 39세에는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린다. 국가적 근심거리가 7종류에 이른다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사항을 열거하였다.

# 조선 학술사에 빛나는 ‘성학집요’

40세의 9월에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학집요’(聖學輯要)라는 평생의 대작인 저서를 임금께 바친다. 바로 이 책이야말로 율곡이 학자이자 정치가를 겸한 ‘대현’(大賢)임을 명확하게 증명해주는 저서다. 이 책은 율곡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서 학문과 정사(政事)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말들을 골라 뽑아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여 저작한 책이다. ‘학문과 정사’, 학자이면서도 정치가임을 증명해주는 말이다.

5편으로 구성된 그 책을 받아본 선조대왕은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고 말했다는 내용만 보아도 그 책이 지닌 내용과 가치가 어떤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조선 후기의 홍한주라는 학자는 그의 저서 ‘지수염필’(智水拈筆)이라는 책에서 조선의 3대저서로 ‘성학집요’ ‘동의보감’ ‘반계수록’을 열거한 바 있는데 타당한 견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는 교과서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있는 자운서원의 전경(위). 아래는 자운서원 묘정비로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
율곡의 저서에 ‘격몽요결’이 있다. 42세 때에 해주의 석담에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지은 책이다. 필자가 어려서 마을 서당에서 배웠던 책의 하나다. ‘격몽요결’은 바로 조선시대 어린이들이 배웠던 교과서의 대표적인 책이었다. 사서오경을 배우기 전의 초학입문서로서 그만한 영향을 미친 책도 많지 않았다. 율곡의 저서로 빼놓을 수 없는 책의 하나는 46세에 완성한 ‘경연일기’(經筵日記)다. 벼슬하던 시절에 조정에서 일어난 일이나 임금과의 대화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후인들이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서 지은 일종의 역사서였다. 이 책도 학문과 정치가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대제학의 지위에 있으면서 마친 저술이다.

# 나라를 잊지 못하던 애국자

49세의 1월에 세상을 떠나는 율곡, 바로 앞의 해인 48세의 한 해는 참으로 바쁘고 분주한 해였다. 병조판서의 임무로 시작된 그해 2월에는 ‘시무6조’(時務六條)의 상소를 올려 시급히 해결할 문제를 진언했다.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시오,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시오였다. 4월에는 또 ‘봉사’(封事)를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弊政)개혁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공안(貢案)의 개혁을 주장하고 군적(軍籍)을 고치며 군현을 합병하여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제대로 지방을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더 절실한 주장에는 서얼제도를 폐지하고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은 발탁해서 나라 일을 맡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무렵에는 또 ‘찬집청’(纂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서적 편찬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전에는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해서 국가경제의 전담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 이런 주장의 설명에는 ‘필무실학’(必務實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궁행심득’(躬行心得)해야 한다고 했다. 반드시 실학에 힘써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해야 한다는 실천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 무렵의 10만 양병설의 주장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이런 율곡의 높은 정치적 경륜은 후세의 많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산림에 숨어서 벼슬을 싫어했던 학자들에게도 경종을 울렸고, 아무런 능력 없이 과거에 급제하여 녹이나 받아먹는 벼슬아치들에게도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학자가 율곡이었다. 학문을 연구하고 성현을 배워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대업을 성취할 책임이 지식인들에게 있음을 충분하게 설파하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조선의 대표적 학자가 바로 율곡이었다. 그래서 먼 뒷날 위대한 실학자 성호 이익은 그의 논문 ‘논경장’(論更張)이라는 글에서, “근세의 이율곡 같은 분은 경장(更張:국가개혁)을 자주 말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옳게 여기지를 않았다. 지금 고찰해보니 명쾌하고 절실한 주장이어서 열에 8~9는 모두 실행이 가능한 주장이었다. 대체로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식무(識務:현실정치에서 가장 시급한 일)를 가장 잘 이해한 분은 율곡이었다”라는 말을 했다. 학문만 연구하던 서생이 아니라 높은 학식으로 세상을 경륜할 가장 큰 역량을 지닌 분이 율곡이었다는 것이다.

# 율곡에 대한 역사적 평가

조선 500년에 학파의 크기로야 70세로 세상을 마친 퇴계학파를 능가할 학파는 없다. 퇴계학파 다음으로 율곡학파도 대단했다. 제자들의 면면에서 그냥 학파의 성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 대단한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다. 특히 사계 김장생은 율곡의 가장 큰 제자로 율곡의 일대기인 ‘행장’을 저작하여 평생의 학문과 정사를 유감없이 서술하였다. 사계는 율곡행장에서 결론으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고 끝을 맺었다.

후배이던 당대의 문장가 월사 이정귀는 율곡의 시장(諡狀)을 지어 반백의 나이도 못된 49세에 세상을 떠나 당시에 본인의 뜻을 다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그 분이 설교입언(設敎立言)한 내용은 후학들을 계몽해주기에 충분했고 유풍여운은 쇠잔해지는 풍속을 용동시키기에 넉넉했으니 당시에 율곡의 도(道)가 제대로 행해지지는 못했으나 율곡의 은택은 무궁토록 후세에 미치리라고 글을 맺었다.

한음 이덕형의 비문에서 백사 이항복은 율곡,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이 세상을 떴을 때 가장 많은 백성들이 통곡했노라고 했는데, 학문과 정치에 모두 밝았던 이항복은 율곡의 신도비를 지었다. 자운산 일대를 둘러보면 율곡의 묘소와 자운서원 입구에 신도비가 비각 속에 늠름하게 서 있다. 풍우에 마모되어 글자야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렵지만 학문과 정치에 두루 밝았던 율곡의 일생을 넉넉하게 기술했음이 분명하다.

대원군 시절에 철폐되었다가 뒤에 복원되었으나 6·25에 소실되고 1970년에 다시 세워진 ‘자운서원’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우람하게 서 있다. 율곡-사계(김장생)의 기호학파를 확대개편하여 대학파를 이룩했던 사계의 제자 우암 송시열의 찬란한 학문과 문장이 그 묘정비에 옴소롬이 새겨져 있다. 율곡학파의 뛰어난 계승자로서 기호학파의 대세력을 이룩한 우암의 문장 솜씨는 여기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율곡의 위대함도 유감없이 기술된 글이 바로 그 묘정비문이다.

당파싸움 때문에 우여곡절이야 있었지만, 율곡은 뒤에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어 평생토록 사모하던 정몽주·조광조·이황 등의 혼백과 함께 조선팔도의 모든 고을의 향교인 공자 사당에 배향되어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출처 : 기산인의 발자취
글쓴이 : 기산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