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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3) 이이의 혼이 서려있는 자운산 자락(上)

회기로 2010. 1. 24. 19:40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3) 이이의 혼이 서려있는 자운산 자락(上)
입력: 2007년 07월 06일 14:57:22
-지금은 분단의 아픔 흐느끼는가-
율곡의 고향인 경기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의 전경.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자운산자락에는 율곡 선생의 혼이 서려있다. 조선왕조 선조 17년이던 1584년 음력 정월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그해 3월 어느 날 자운산 기슭에 장사지낸 지 어언 423년, 이 긴긴 세월동안 학자이자 경세가이며 우국충정의 애국자이던 그의 혼백은 아직도 산자락을 휘돌며 살아계신 것만 같았다.

하지의 더위가 한창이던 주말, 우리는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분인 율곡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자운서원(紫雲書院) 일대를 돌아보면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면서 역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49세라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던 한 학자의 양심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임진강이라는 천연의 경계로 남북이 갈라진 이 조국, 그 강변인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는 율곡의 선향이자 영원한 고향이었다. 도도히 물이 흐르는 강변에는 오래된 수목들이 연륜을 자랑하는데 거기에 우뚝 서서 남북의 통일만 기원하는 듯,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가 숲속에 우람하게 떠있다. 율곡의 5대 할아버지 이명신(李明晨)이라는 분이 세워 병란 때에 소실되고 말았지만 후손들의 따뜻한 정은 다시 세우고 또 세웠다. 율곡이 어린 시절 이래 생을 마칠 때까지 틈만 나면 찾아가 시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회포를 풀었던 바로 그 정자가 ‘화석정’이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벌써 깊었으니
시인묵객의 회포 무궁하구려
길게 뻗은 강물은 하늘에 닿아 푸른데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받아 붉구나
산등성이에는 외로운 달이 떠오르고
강 위에는 만리의 바람이 흘러가네
변두리에서 나는 기러기 어디메로 가는고
울음소리 저문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화석정’이라는 제목으로 지은 이 시는 그야말로 인구에 회자되는 시로, 바로 율곡이 8세 때 공부하다가 바람 쏘이려고 정자에 올라 무심코 읊은 시다. 어린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나이에 그런 시를 읊겠는가. 가을에 지은 율곡의 시와는 다르게 한창 녹음이 짙은 여름의 경치는, 물도 푸르지 않고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기러기의 울음도 들리지 않으며, 남북의 분단을 서러워하는 강물만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화석정에서 보이는 임진강. 현판에는 율곡의 화석정시가 걸려있다.

# 율곡이 태어난 강릉의 몽룡실

율곡의 고향은 임진강변의 율곡리다. 이름에 걸맞게, 우리가 찾아간 그날도, 주변의 모든 산에는 밤꽃으로 하얗게 물들어 있었고, 우거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있어, 짙은 밤꽃의 향기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밤골’이라는 율곡의 이름이 거기서 나왔고 고향마을의 이름을 따라 ‘율곡’이라는 호가 나왔다고 한다. 율곡리는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벼슬은 감찰)의 고향이다. 율곡의 아버지는 강릉의 경포대 곁의 천하절경에 살던 사임당 신씨에게 장가들었다. 사임당 신씨의 친정어머니 이씨(李氏)가 기묘사화때의 의리를 지켰던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부인으로 거처하던 곳이 바로 그 유명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신씨네 별서였다. 율곡은 신사임당이 거처하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꿈에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이 ‘몽룡실’이고 아이 때의 이름이 ‘현룡(見龍)’이었다.

외할머니 이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낸 율곡은 그래서 태생지는 바로 강릉이었다. 강릉이라는 도시는 바닷가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그 중에서도 경포대 근처의 오죽헌 일대는 세상에 없는 경치 좋은 곳이다. 그런 산과 강의 기운을 타고 난 율곡, 그가 애초에 천재였음은 모든 기록이 증명해주고 있다. 더구나 시문과 서화에 뛰어난 사임당 신씨의 교육을 받고 자란 때문에, 8세 때의 시에서 보는 바처럼 그의 글 솜씨는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기에 넉넉하였다.

13세 이후로 29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에 나가기까지, 그는 아홉번의 시험에 모두 합격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벼슬길에 오른 이후로는 참으로 온 정성을 다 해 임금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일생이었다.

# 퇴계를 선학으로 모신 율곡

율곡의 영정.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학자로서야 퇴계와 율곡을 거명하는 일은 참으로 지당하다. 조선은 정치이념을 유교로 정하고 주자학의 다른 이름인 성리학을 학문의 가장 높은 위치에 놓았던 나라였다. 그렇다면 이런 학문의 대표자는 당연히 퇴계와 율곡이다. 이기론(理氣論)에서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던 퇴계와 율곡은 참으로 미묘한 견해의 차이로 퇴계는 영남학파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율곡은 기호학파의 종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두 학자의 인간적 신뢰나 상호간의 존경심은 요즘 세상의 인간관계와는 분명히 달랐다. 학문적 견해의 차이로 원수가 되고 당파로 나뉘어 싸우는 일은, 그들 두 분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요즘의 정파싸움이나 학자들 간의 싸움과는 본질을 달리했던 것이 그분들의 훌륭한 인간관계였다.

율곡은 23세 때에, 58세의 노학자 퇴계선생을 도산으로 찾아뵌 적이 있다. 이틀 동안을 묵으면서 희대의 두 학자는 가슴을 열고 학문과 철학을 논하고 시를 짓고 마음을 합하면서 인생을 토론하였다. 율곡은 먼저 퇴계의 높은 학문에 감탄하여 퇴계의 학문연원이 바로 공자와 주자에서 흘러왔다는 높은 찬사의 시를 올려 바치자, 퇴계가 답한 시를 보면 얼마나 돈독한 관계가 이룩되었나를 방증해주고 있다. 더구나 율곡은 19세의 1년 동안을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지내다 다시 환속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병이 들어 문을 닫아 봄이 옴을 몰랐는데
그대 오니 마음이 상쾌하게 열렸네
이름아래 헛된 선비 없음을 이제 알았으니
공경스럽게 몸가지지 못함이 부끄럽네
잘 자라는 곡식이야 피자람 용납지 않고
잘 닦은 거울에는 티끌쯤이야 묻지 못하네
분수에 넘는 칭찬이야 시에서 자르고
공부에 노력하여 친하게 지내보세

8세에 화석정시를 지어 온 세상에 알려진 율곡, 10세에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어 문명을 날렸고, 13세에 진사과 초시에 ‘천도책(天道策)’이라는 수준 높은 철학논문을 지어 합격했던 율곡의 명성은 퇴계도 이미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틀 동안 함께 자고 묵으면서 긴긴 토론을 계속해보고 사람됨을 제대로 알아본다.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배가 없음을 알았노라”라는 찬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이래로 율곡은 퇴계를 자주 뵙지는 못했으나 일이 있을 때마다 편지로 퇴계의 의견을 묻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퇴계는 친절한 답변을 해주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와 유교로 되돌아 온 용기를 높이 평가해주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한때 율곡이 불교와 관계했음을 뒷날의 당쟁파들은 트집잡아 온갖 비방을 했지만 퇴계 같은 대학자는 애초에 율곡의 반성을 그냥 수용하고 전혀 문제 삼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남을 해치고 헐뜯기 좋아하던 당파 사람들은 그 점을 율곡의 약점으로 여겨 시비를 끊지 않고 있었다.

# 우계 성혼과의 돈독한 우정

역사의 땅 파주에는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다. 파평은 지금으로는 파주시의 파평면이다. 그러나 파주의 옛 이름이 파평이다. 파평윤씨의 시조 윤관 장군은 파주가 낳은 고려 때의 최고 인물이다. 율곡은 물론 율곡과 버금가는 학자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또 파주 출신이다. 세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 황희정승이 노닐었던 반구정(伴鷗亭)도 파주에 있다. 율곡과 우계는 우계가 한살 위이지만 이들은 10대 때 사귀어 평생을 사귄 친구이자 도반(道伴)으로 영원한 학문토론의 훌륭한 상대자였다.

우계와 율곡은 동서분당으로 지식인들 사이에 비이성적인 알력이 계속되던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약간의 학문적 견해의 차이가 있어 수없이 많은 편지로 오랜 논쟁을 계속했지만 우정에는 한치의 차이 없이 돈독한 애정을 유지한 아름다운 만남을 이룩했다. 둘이 함께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했으며, 세상이 시끄러운 세태에 분개하면서 어떻게 해야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갈 것인가도 깊숙하게 토론하였다.

# 율곡의 일생

강릉에서 태어난 율곡의 생활 근거지는 고향인 파주의 율곡리였다. 22세에 곡산 노씨와 결혼한 율곡은 처가인 황해도 해주도 출입하는데 해주의 석담(石潭)에는 구곡(九曲)의 아름다운 경치의 명승지가 있다.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율곡이라서 그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그곳에 은병정사(隱屛精舍)라는 정자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칠 서재이자 만년에는 은퇴할 장소로 여겼다. 외조모가 계시던 강릉의 오죽헌, 화석정이 있던 고향 율곡리, 서재가 있던 해주의 석담구곡을 기회 있을 때마다 찾으며 살았던 것이 율곡의 일생이었다.

29세에 장원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이조, 호조, 병조판서에 대제학을 역임하고 정승 다음의 우찬성에 올랐으나 반대파들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을 펼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청주목사와 황해감사의 지방관도 지냈으나 경세의 경륜을 펼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다. 이전투구의 정치판보다는 고요한 ‘은병정사’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낼 욕심은 많았다. 그렇지만 49세라는 너무나 짧은 생애 때문에 그렇게도 경장(更張)하고 싶던 조선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타계하여 자운산자락에 혼백이 남아 맴돌고 있으리니, 천재의 짧은 삶을 무덤 앞에서 애통해 할 수밖에 없었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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