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의 땅 가야산] (37)한강 정구와 무흘구곡 영남 남인의 실학.예학 선도
서애(류성룡).학봉(김성일)과 함께 '퇴계 3걸' 봉우리 모양이 하늘 향해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고 해서 '석화성(石火星)'으로 일컬어지는 가야산. 불의 기운이 왕성한 가야산을 식혀주는 것은 산을 따라 유유하게 흐르는 계곡과 하천들이다. 김천 수도산(修道山)에서 발원, 가야산 북사면을 따라 내려오다 잠시 성주댐에 갇힌 후 다시 동남으로 방향을 틀어 성주, 고령 땅을 적시며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대가천은 가야산을 대표하는 하천 중 하나다. 그 물줄기가 가야산을 감싸 돌고, 옛 가야 땅을 흐르기에 대가천(大伽川)이라고 불리는 이 하천에는 아름다운 비경은 물론 한강 정구의 삶과 자취, 그리고 혼이 서려 있다.
퇴계와 남명, 모두에게 가르침을 받다. 조선 중엽의 대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21세 때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에, 24세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문하에 나아가면서 유학자로 성장했다. 과거를 치르지 않고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로 지내던 한강은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37세 때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창녕현감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는 강원도 관찰사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골쇄신했다. 전란 후 향리인 성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그는 78세로 생을 마감했으며, 인조는 문목(文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한강은 출생부터 유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났다. 그 조부인 정응상은 대유학자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한강을 만나본 후 퇴계는 "일찍이 정곤수와 그의 아우 구를 만났는데, 대개 뜻이 선을 좋아하는 데 있는 선비이다. 한훤당 선생의 외손으로 어찌 여풍이 없으리오"라고 했다. 한강은 퇴계와 남명을 태산북두처럼 우러러 보았다.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門下삼걸'로 일컬어졌다.
홍원식 계명대 교수는 "한강 선생이 퇴계 학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낙동강 상류에서 일어난 퇴계학을 낙동강 중류 지역에다 퍼뜨린 것과 더불어 그의 학맥을 서울의 허목과 안산의 이익에게 이어지게 하여 근기 지역에서 일어난 경세치용의 실학 연원을 퇴계학에 닿게 한 점"이라고 했다. 또 한강은 한국철학사에서 예학(禮學)을 연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등 예와 관련된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영남 남인의 예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김장생의 기호 노론 예학과 함께 늘 거론되고 있다.
가야산 자락에서 후학 양성. 한강은 가야산과 그 아래를 흐르는 대가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젊은 시절부터 가야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관직에 나아가기 전 보름 동안이나 가야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치세의 지혜를 모으려 했다. 그가 창녕현감으로 나가기 전에 쓴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이 바로 그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 한강은 다시 가야산으로 되돌아왔다.
멀리 가야산 자락이 보이는 대가천 옆에 초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한강이 인재를 양성하던 회연초당은 그의 사후에 회연서원(檜淵書院)으로 바뀌었다. 성주군 가천면 소재지에서 수륜면 소재지로 가는 33번 국도. 대가천을 따라 길을 달리다 보면 왼쪽에 회연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유생들이 피해를 입고, 지방의 교육기관이 붕괴된 직후에 한강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제자를 키웠다. 초당 앞에 100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백매원'이라 불렀다. 겨울에도 지조를 잃지 않는 매화처럼 고고한 선비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도를 본다는 뜻의 누각인 '견도루(見道樓)' 앞에는 해마다 하얀 매화가 피고 있다. 그 당시의 심경을 한강은 시 한수에 담았다.
"작은 산 앞에 조그만 집을 지었네/ 뜰에 매화 국화 해마다 불어 가득 차고/ 시냇물과 구름이 그림처럼 둘러졌네/ 세상 사는 내 삶이 사치하기 그지없네."
무흘구곡에 어린 한강의 자취! 회연초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한강은 중국 송나라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떠올리며, 봉비암에서부터 용추폭포까지 대가천의 아홉 절경을 '무흘구곡(武屹九曲)'이라 정하고, 시로 읊었다. 무흘구곡의 1곡은 회연서원 바로 옆에 있는 봉비암(鳳飛岩). 푸른 물을 안고 우뚝 서 있는 바위에서 날아가는 봉황의 모습을 떠올리며 봉비암이란 이름을 붙였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대가천의 푸른 물이 흘러가는 봉비암은 보는 이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준다. 한강은 무흘구곡의 1곡인 봉비암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여울 어귀에 고깃배 띄우니/ 석양 부서지는 냇가에 실바람 감도네/ 뉘 알리오, 인간사 다 버리고/ 박달나무 삿대잡고 저문 연기 휘저을 줄을."
무흘구곡 가운데 가장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은 4곡에 해당하는 선바위, 입암(立岩)이다. 30번 국도를 따라 김천 증산면 쪽으로 달리다 무학리를 지나 계곡을 따라 한참 가다 보면 하천 건너편으로 30여m 높이의 우뚝 솟은 기암이 보인다. 바위의 상단 중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곳에 학이 집을 짓고 살았다 해서 소학봉(巢鶴峰)이라고도 한다.
"백척되는 바위에 구름이 걷히고/ 바위머리 화초들은 바람결에 살랑살랑/ 그 가운데 저렇듯이 맑은 경치 그 누가 알아주랴/ 갠 달 하늘 복판에 그림자 못에 지네." 물가에 우뚝 선 바위처럼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는 한강의 의지가 엿보인다.
글·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박노익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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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3월 2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2886&yy=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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