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金剛山 紀行(南孝溫)1)
백두산은 여진(女眞)의 경계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우리 나라 해변 수천 리에 걸쳐 뻗쳤다. 그중 큰 산으로는 영안도(永安道)의 오도산(五道山), 강원도의 금강산, 경상도의 지리산이 있는데 수석이 가장 아름답기로는 금강산을 첫째로 친다.
금강산은 이름이 여섯 가지다. 그 하나는 개골산(皆骨山)이요, 둘째는 풍악산(楓岳山)이요, 셋째는 열반산(涅槃山)인데 이는 방언이며, 넷째는 지단산(枳柦山)이요, 다섯째가 금강산인데 이는 『화엄경(華嚴經)』에서 나온 이름이며, 여섯째는 중향성(衆香城)인데 이는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에서 나온 이름으로 신라 법흥왕(法興王) 이후부터 부른 이름이다.
내가 조사해보니, 부처란 서융(西戎)의 태자(太子)이다. 그 나라는 중국 함양(咸陽)에서 9천여 리나 떨어져서 유사(流沙 · 흑수(黑水)의 먼 곳과 용퇴(龍堆) · 총령(葱嶺) 험한 산을 한계로 하고 있어 중국과 교통이 통하지 못했으니 어찌 중국을 넘어서 우리 나라에 이런 산이 있음을 알았겠는가? 이 산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 아니라, 조선이란 나라가 있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사서에서 자세하게 참고하거나 조사해보면 주소왕(周昭王) 때는 우리 나라 기자조선2) 중엽에 해당되는데, 이때 부처는 서방의 사위국(舍衛國)에서 태어났다.
그 많은 불설(佛說) 가운데 무한히 많은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으나 조선국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부처가 우리 나라나 금강산을 몰랐던 것이 확실하다. 이는 부처가 설법할 때 과장하여 바다 가운데 금강산 · 지단산 · 중향산 등 여러 산이 있는데 억만의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그 식구들을 거느리고 있다 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를 마치 장자의 곤붕(鯤鵬) · 천지(天池)의 설과 고야(姑射) · 구자(具茨)의 비유처럼 해서 우언(寓言)을 까마득한 데 붙여 아득한 옛날의 지경으로 말해 세속을 놀라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이는 무식한 대중을 놀라게 해서 꾀는 수단에 불과하다. 어찌 금강 · 지단이 이렇게 괴이한 것이겠는가? 부처의 우언이 이럴 뿐인 것을 부처를 배우던 신라의 중들 역시 망령되이 자기 나라를 높이려고 풍악을 금강산이라 하여 담무갈상(曇無竭像)을 뒤쫓아 만들어 망령된 말을 실제화했단 말인가?
또 부처가 말한 바다가 어찌 동해를 지칭했다고 하겠는가? 동서남북이 바다 아닌 곳이 없는데 유독 동해만을 바다라 하여 풍악을 금강산이라 한단 말인가? 또 우리 나라를 중국에서 비록 해외라고는 하지만 서북쪽은 육지가 요동에 접해 있고, 그 가운데 압록강이 끼어 있지만 압록강은 바다가 아니니 우리 나라가 어찌 바닷속에 있는 나라이겠는가? 이는 매우 잘못된 말이다. 그러나 금강이란 명칭이 생긴 지 오래여서 갑자기 고치기 어려워 나 역시 금강산이라 부르기로 한다.
금강산은 하늘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솟은 큰 땅덩어리인데 서른여섯 개의 큰 봉우리와 1만3천 개의 작은 봉우리로 되어 있다. 한 줄기는 남쪽으로 2백여 리를 뻗쳐 높고 뾰족한 게 금강산을 닮은 설악산이 있으며, 그 남쪽에 몇 개의 산을 거느리고 있다. 동쪽의 한 줄기는 또 다른 작은 산을 이루었으니 바로 천보산(天寶山)으로, 눈이나 비가 오려는 날이면 산이 저절로 운다고하여 일명 읍산(泣山)이라 한다.
읍산이 다시 양양(襄陽) 후면을 돌아 바닷가로 뻗쳐 다섯 봉우리를 이룬 것이 낙산이다. 금강산의 한 지맥이 다시 북쪽으로 1백여 리를 뻗쳐 재를 이룬 것을 추지(湫池)라 하며, 추지가 다시 통천(通川) 후면에서 잔산(殘山)과 만나 실낱처럼 끊어질 듯 말 듯하면서 북쪽으로 돌아 바다로 들어간 것이 총석정이다.
금강산의 동쪽은 통천군 · 고성군 · 간성군이며, 서쪽은 금성현(金城縣)과 회양부(淮陽府)이다. 산 아래에 1부 · 3군 · 1현이 있다.
을사년(1485) 4월 15일, 서울을 출발 보제원(普濟院)에서 자다.
16일(정묘), 90리를 가 입암(笠巖)에서 자다.
17일(무진), 소요산(逍遙山)을 지나 큰 여울을 건너 60리를 가 연천 거인(居仁)의 집에서 자다.
18일(기사), 보개산(寶盖山)을 지나 다시 철원 고동주(古東州) 평야를 지나서 남으로 1백여 리를 가 금화(金化)의 갑사(甲士) 정시성(鄭時成) 집에서 자다.
19일(정오), 금화현을 지나 60리를 가 금성(金城) 향교에서 자다.
20일(신미), 창도역(昌道驛)을 지나 보리진(菩提津)을 건너 78리를 가 신안역(新安驛)에서 자다.
21일(임신), 비에 갇혀 신안역 뒷마을 심달중(沈達中) 집에서 자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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