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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 허목-은거당의 옛터를 찾아서(上)

회기로 2010. 1. 24. 19:42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 허목-은거당의 옛터를 찾아서(上)
입력: 2007년 01월 05일 15:06:09
미수 허목이 살았던 경기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의 마을. 집 한채 없이 들판으로 변한 모습이 쓸쓸하기만 하다. <사진작가 황헌만>

길을 나서는 날은 매우 추운 겨울 날씨였다. 동지가 지나 소한(小寒)의 추위가 다가오는 12월28일, 우리 일행은 안내자도 없이 길을 물어 역사의 땅을 찾았다. 그곳은 바로 역사의 비극을 그대로 안고 있는 민통선 안의 비무장지대인 허허로운 벌판이자 산등성이에 흩어져 누워있는 몇몇의 묘소가 을씨년스럽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라는 마을. 그곳은 양천 허씨들이 대대로 이어온 큰 집성촌(集姓村)으로 6·25 전만 해도 면소재지로 면사무소와 초등학교도 있었고 물산의 집산지인 시장(市場)까지 열리고 있어 상당히 번화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민족 상잔의 전화가 휩쓸고 가버린 지금,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라고는 없이 전답만이 질펀하게 널려 있을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거주할 수는 없지만, 그것도 최근에야 통제를 받는 민간인들이 출입하여 제한하는 시간 안에서만 농사를 짓도록 허용되어 출입증을 제시해야만 출입하는 곳이다. 아! 여기에 오면 민족분단의 비극이 무엇인가라는 아픔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는 바로 그곳이다. 어찌하여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인 이 마을이 이런 정도의 폐허로 변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 저리는 분단의 비극이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어주었다.

군남 면사무소 앞에서 기다리던 묘소관리인을 만나 별 어려움 없이 민통선의 초소에 신분증을 맡기고 강서리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을이래야 집이라고는 없는 질펀한 벌판, 주변의 야산에 듬성듬성 빗돌과 함께 고즈넉이 자리한 묘소들, 거기에 허씨들의 이름난 선조 묘소들이 대부분 자리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여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친 학자이자 벼슬아치로는 최소한 세분을 꼽을 수 있다. 우선 동애(東崖) 허자(1496~1551)라는 학자, 관인(官人)이다. 조선왕조 초기의 당대의 학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공조·이조판서와 좌·우찬성이라는 정승 다음의 벼슬을 지내다 끝내는 바르고 정직하며 강직한 주장을 펴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죄를 안고 죽었다가 뒤에 영의정에 추증된 저명한 사람이 바로 그 마을 출신으로 허씨의 이름을 크게 빛낸 분이다.

허자의 증손자로 관설(觀雪) 허후(許厚:1588~1611)와 미수(眉수) 허목(許穆:1595~1682)이 또 이 마을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니, 두 사람은 아버지들이 형제사이이던 사촌간의 형제였다. 관설, 미수는 허씨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조선왕조 중기 이후의 남인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의 지위에 오른 분들이다. 7세 위의 사촌형인 관설의 큰 영향 아래 유년시절을 보낸 미수 허목은 그 중에서도 더 뛰어나 효종 이후 크게 대립되던 서인과 남인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인의 종장(宗匠)으로 이른바 ‘근기실학파’의 개산조(開山祖)가 되는 분이다.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은 역시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는 것인가. 그런 잔혹한 6·25의 참화 속에서 어떻게 그들의 묘소가 온존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비록 빗돌에는 탄흔이 서려 군데군데 빗면을 할퀴었으나 그래도 통째로 비문을 알아볼 정도로 건실하게 서있고 묘소도 둥실하게 누워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랫동안 종적을 알 수 없이 폐허로 방치되던 곳, 후손들만이 민통선 안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를 받자 후손들이 힘을 모아 묘역을 단장하고 새롭게 치장하면서 미수와 그 선조 및 후손들의 묘역은 누가 보아도 손색없는 훌륭한 선산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은 단 한곳, 숙종대왕이 위대한 학자를 위로하기 위해 하사해준 집이 있던 곳. 그곳에서 미수 허목은 만년에 학문과 사상을 마무리짓고 거기에서 88세의 장수를 누리고 영면하였다. 임금이 은혜롭게 내려준 집에서 살아간다는 뜻으로 미수는 그 집의 이름을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고 화초와 괴석으로 정원을 꾸미고 운치있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제 그 집은 완전히 없어지고 최근에 후손들이 마련한 유적비와 알림판이 흘러간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광막한 들판의 변두리 야산 밑에 집터는 쓸쓸하지만 그곳에서 일세의 노학자가 평생을 마무리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그곳의 주변을 맴돌면서 깊은 사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 서인과 남인의 대결

‘우의정문정공미수허선생지묘(右議政文正公眉수許先生之墓)’라는 비문이 새겨있는 미수의 묘소 앞에서 우리 일행은 묵념을 올리며 큰 학자이자 정승이라는 높은 벼슬의 정치가의 위업을 기렸다. 미수의 묘소를 중심으로 오른쪽 등성이에는 미수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가 따로 빗돌과 함께 있었고 왼쪽 등성이에는 사촌형 관설 허후의 묘소와 증조부 동애 허자의 묘소도 있었다. 그야말로 한사람의 명성으로도 역사의 땅이 될 이곳에 이름만 대면 금방 알아보는 역사적 인물의 묘소가 즐비해 있었으니 대단한 장소가 아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임금으로 등극한 해가 1623년이다. 27년째에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둘째 아들 효종이 임금에 오른 해가 1650년이다. 서인세력의 힘으로 임금이 된 인조가 등극하면서 정치 주도권은 서인들의 손에 있었고 효종시대에도 역시 그들이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것이 사실이다.

효종시대 특징의 하나가 이른바 ‘산림(山林)’이라는 재야학자들을 고관대작으로 등용하여 ‘산림정치’라는 새로운 스타일이 활발하게 전개된 일이다. 비록 출사는 하지 않았지만 스승을 찾아가 학문을 연마하고 전국의 명승지를 돌면서 심신의 수양에만 힘쓰던 재야 학자이던 허목에게도 최초의 벼슬이 내렸으니 효종 1년이던 1659년의 일이자 허목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다. 조선왕조 벼슬의 위계로는 최하위인 종9품인 참봉이라는 벼슬이었다. 물론 허목은 잠깐 응하고는 바로 사양하고 말았다. 요즘으로 보면 은퇴할 나이에 첫벼슬이 내려졌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러나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학자에게 능참봉의 벼슬을 내리는 것 자체도 대단한 영광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래도 학자에 걸맞은 벼슬을 내린 것은 효종8년 허목 63세인 1657년의 일이니 지평(持平)이라는 벼슬이었다. 지평은 언관(言官)의 지위이기 때문에 허목은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곧바로 고향인 연천으로 하향하고 말았다. 1659년인 65세 때는 바로 효종재위의 마지막 해이자 효종의 붕어로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는 전대미문의 당쟁이 발단한 해였다. 이 해에 허목은 장령(掌令)이라는 더 높은 언관의 지위에 오르고, ‘임금의 덕(君德)’에 관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 무렵이면 동춘 송준길(1606~1672)과 우암 송시열(1607~1689) 등 서인계의 인물들이 산림으로 발탁되어 고위직에 올라 허목을 비롯한 고산 윤선도(1587~1671), 탄옹 권시(權시:1604~1672), 백호 윤휴(1617~1680) 등 남인계 학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당쟁의 와중으로 빠져들었다.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가 인조의 둘째 아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효종의 상사(喪事)에 기년(朞年)복이냐 3년복이냐의 문제로 격화된 당쟁은 정권의 향방을 좌우하는 권력쟁취로 변화하여 편안할 날이 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한 중간에 남인의 정치적 권력자인 영의정 허적(許積:1610~1682)과 허목과의 분열도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허적은 허목의 12촌의 집안 아우되는 사람으로 애초에 과거를 통해 벼슬에 나오고 영의정이라는 최고지위에 올라 권력자가 되었으나 원칙을 중시하는 허목과는 견해가 달라 결국은 탁남
(濁南)으로 청남(淸南)에 속하던 허목과는 불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허목의 3년 설에 허적도 동조하여 같은 남인계의 주장을 폈으나 권력 남용의 우려를 버리지 못한 허목의 지혜가 그를 멀리하였고, 같은 3년 상의 주창자이던 남인계 윤휴도 마찬가지로 허목의 주장을 옹호하고 응원했지만 견해의 차가 벌어져 큰 화란에 휩싸여 참혹한 비극을 맞았던 점도 허목의 지혜가 높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미수 허목의 연보>

미수 허목의 82세때 초상화.
1595 서울 창선방(彰善坊)에서 태어나다.

본관은 양천. 자는 문보(文父), 화보(和甫), 호는 미수(眉수), 대령노인(台領老人)

아버지는 포천현감을 지낸 허교(許喬), 할아버지는 별제(別提) 허강(許강), 증조부는 찬성허자(許磁), 어머니는 예조정랑 백호 임제(林悌)의 따님인 임씨(林氏), 부인은 영의정, 문충공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인 전주이씨

10세 동몽교관으로부터 글을 배움

19세 전주이씨와 결혼

20세 재야학자 총산(蔥山) 정언옹에 학문을 익힘. 때부터 학자관인이던 용주(龍州)조경(趙絅)과 교류하기 시작. 평생의 학문적인 벗이 됨.

23세 아버지의 근무지인 거창(居昌)에서 생활하면서 스승 한강(寒崗) 정구(鄭逑)의 제자가 됨. 그 때 종형(從兄) 허후와 동행 이 무렵 모계(茅溪) 문위(文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도 출입.

56세 효종원년에 처음으로 참봉의 벼슬이 내림.

63세 지평(持平)에 임명, 사양하고 나가지 않음.

64세 다시 지평에 임명. 나아가지 않음.

80세 현종이 붕어하고 숙종이 임금에 오르면서 대사헌으로 부름.

81세 다시 대사원,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에 오름

88세 고향인 연천 은거당(恩居堂)에서 별세.

1688년 복관

1689년 고향 연천 근처인 마전(麻田)에 미강서원(嵋江書院) 세움.

1692년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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