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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충신당

회기로 2010. 1. 24.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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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1641(인조 19)~1721(경종 1)] 遂翁書
조선 후기의 학자.
 
권상하 /권상하 영정
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이은 노론 계열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지지하는 호론(湖論)의 입장을 취했다.
정치활동
본관은 안동.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아버지는 집의(執義)를 지낸 격(格)이다. 할아버지 성원(聖源)에게 배우다가 10세 때 사림파의 거두 유계(兪棨)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1661년(현종 2) 진사가 되었으며, 1663년에는 송시열을, 2년 뒤에는 송준길(宋浚吉)을 만나 두 사람을 스승으로 학문에 몰두했다.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金昌協) 등과 사귀었다.
1659년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제문제로 1674년(숙종 즉위)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청풍에서 학문에 힘썼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을 때 유품(遺品)을 받고, 그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를 세웠으며,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1703년 찬선(贊善), 이듬해 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한편 1715년(숙종 41) 가례원류(家禮源流) 사건에 연루되어 소론의 공격을 받아 파직당했다(→ 가례원류시말). 이 사건은 '회니시비'(懷尼是非)에 뿌리를 둔 노론·소론 간의 갈등이 이 책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표면화된 것이었다. 노론이 다시 집권하면서 우의정을 비롯해 여러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했다.
학문과 사상
송시열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고 만동묘를 세운 일로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렸다. 이러한 학문적 위치로 인해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하는데, 특히 송시열을 비판한 윤증(尹拯)을 비난하여 소론측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당쟁이 치열한 가운데서도 정치와는 일정하게 거리를 둔 채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로 이어진 주기파(主氣派)를 이끌었다. 그는 사단(四端)은 칠정(七情)에 포함되어 있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각각 감각적인 형기(形氣)와 본질적인 성명(性命)에 근거하는 차이는 있지만, 발하는 것은 기[心]이고 발하는 근거는 이[性]이므로 호발설을 부정하여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따르고 있다. 그의 문인들에 의해 호락논쟁(湖洛論爭)이 전개되었는데, 이간(李柬)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洛論)을 주장하였고, 한원진(韓元震)은 인물성이론(湖論)을 주장했다. 그는 '인성과 물성이 다른 것은 기의 국(局)이며, 인리와 물리가 통하는 것은 이의 통(通)'이라는 이이의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을 들어 한원진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논쟁은 더욱 확대되었고 기호학파는 마침내 양분되었다. 이 논쟁은 이황·이이 이래 조선 주자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하에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根)·현상벽(玄尙璧)·윤황(尹煌)·최징후(崔徵厚)·우세일(禹世一) 등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 三書輯疑〉 등이 있다. 글씨에도 능하여 〈기백이태연표 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 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 副司果李塾表〉·〈충신당 忠信堂〉·〈파계 巴溪〉등이 전한다. 충주 누암서원(樓巖書院), 청풍 황강서원(黃岡書院), 정읍 고암서원(考巖書院), 성주 노강서원(老江書院), 보은의 산앙사(山仰祠), 예산 집성사(集成祠), 송화(松禾) 영당(影堂)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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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백연서예사랑방
글쓴이 : 백연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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