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영남지역의 유교문화의 특징 (문목공 15대손 정우락 교수)

회기로 2010. 1. 24. 19:44

영남지역의 유교문화의 특징


정우락(경북대 교수)


1. 영남 유교의 개괄적 이해


  영남은 14세기 이후 경상도가 이렇게 불리었다. 이것은 충청도과 강원도의 경계에 있는 鳥嶺과 竹嶺, 그 이남 지방을 가리켜 부르는 말로, 嶠南이라 하기도 한다. 준령을 경계로 한 ‘嶺之南’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또한 낙동강이 중심부를 관류하고 있어 한 도로서의 통일성과 일체감을 가져 특색 있는 영남문화권을 형성하였다.1) 낙동강은 남한에서 가장 긴 강으로 그 총 길이가 525km이다. 이 강은 경상도에서 발원하여 경상도에서 끝나기 때문에 그야말로 영남의 문화는 이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상도에서의 경상은 경주와 상주를 합친 것이다. 이 명칭은 고려 충숙왕 원년(1314)에 확정되었으며 한말을 거쳐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쓰이고 있다. 조선 중종 14년(1519)에 낙동강을 동서로 양분해서 동쪽을 경상좌도, 서쪽을 경상우도로 구분하였으나 그해에 원래대로 환원했으며, 선조 25년(1592)과 28년(1595)에 다시 좌우도로 구분했으나 이듬해 거듭 환원하였다.2) 좌우도는 때로 상하도로 불리기도 했다. 이같이 영남은 좌도와 우도, 혹은 상도와 하도로 분리되기도 하고 이것이 다시 통합되기도 하지만, 보다 큰 영남문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영남지역에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그리고 그 문화는 종교와 깊은 상관관계를 지니면서 형성된다.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서 인간에게 어떤 삶의 방식과 기준을 제시해 준다. 이 때문에 ‘종교는 문화의 어머니’라고 한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은 설득력을 지닌다. 얼핏 종교는 정치․경제․심리․예술․놀이 등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하위분류로 이해된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의 우주관이나 인생관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보편적이면서 원초적이다.

  ‘문화’와 ‘종교’, 그리고 ‘영남’을 한 자리에 놓고 보면 구체적인 연구방향이 설정된다. 즉 영남이라는 특정한 지방의 무교, 유교, 불교, 도교, 신종교, 기독교 등이라는 일정한 범주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우리는 영남의 유교문화에 집중한다. 흔히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내세관이 설정되어 있지 않고,3) 인생과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전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는 ‘종교적(religious)’이다. 인간의 삶을 설명하면서 초월적 원리라고 할 수 있는 ‘天’이나 ‘理’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상숭배와 관련된 제사라는 종교의식을 철저하게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남의 유교문화는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특히 엄격한 골품제도 하의 육두품 출신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들은 유교를 바탕으로 행정의 말단 업무를 처리하면서, 당시 불교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진골 귀족의 횡포를 감내해야만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육두품 지식인들은 과거로 인재를 등용하는 당나라로 유학하고자 했고, 당나라에 가서 과거로 발신했던 신라의 賓貢諸子의 수가 58인에 이르렀다. 여기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바로 崔致遠(857-?)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관향을 영남 가운데서 경주로 하는 최치원은 영남을 훨씬 뛰어넘어 ‘東國의 文宗’으로 칭송받는다. 최치원은 유교에 인식의 거점을 마련해 두었으면서도, 결국은 儒彿仙 삼교를 아우르는 화랑도야말로 ‘나라의 현묘한 도’라고 하면서 삼교를 포섭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보다 앞서 같은 영남사람 强首(?-692)는 유교에 더욱 철저하였다. 학문을 시작하면서 불교보다는 유교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신라 중대의 유교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유학자였다. 신문왕 대에 설치한 ‘국학’에서의 경전 교육과 유교적 학술 문화 진흥은 薛聰(?-?) 등의 주목할 만한 유학자를 배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육두품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유교는, 고려조에 오면서 金富軾(1075-1151)을 배출할 수 있게 했다. 김부식은 신라 왕실의 후예로 증조인 魏英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면서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州長이 되고, 김부식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 그 생활의 기반을 영남지방인 경주에 두었다. 고려는 골품제가 철폐되고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문장과 유학으로 관리를 뽑았으며, 김부식은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죽은 뒤 中書令에 추증되고, 인종의 廟庭에 배향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특히 󰡔三國史記󰡕를 지어 당대의 시대이념을 정립하고자 했다.

  영남지방의 유교는 고려말 성리학을 수용하면서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된다. 주지하듯이 조선의 성리학은 1289년 고려의 충렬왕 때 安珦(1243-1306)이 원나라를 왕래하면서 직접 朱子書를 베껴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안향이 수입한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켰던, 白文寶(?-1374, 영해), 李齊賢(1287-1367, 경주), 李穀(1298-1351, 영주), 李穡(1328-1396, 영해), 鄭夢周(1337-1392, 영천), 鄭道傳(1337-1398, 봉화) 등은 모두 영남사람들이다. 이들은 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를 내세우고, 주지적인 修養論의 특성을 지닌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전개․발전시켰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영남의 사림파 형성을 가능하게 했고, 이것은 도통연원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영남학파는 한국 성리학의 도통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東方理學之祖’로 불리는 영천의 鄭夢周(1337-1392)에게서 시작되어, 선산의 금오산 아래에 은거하고 있었던 吉再(1353-1419)로, 길재는 다시 같은 지방의 金叔滋(1389-1456)에게로, 김숙자는 그의 아들 金宗直(1431-1492)에게로, 김종직은 달성의 金宏弼(1454-1504)과 함양의 鄭汝昌(1450-1504)에게로 이어지게 했던 것이다. 김굉필이 경기지방의 趙光祖(1482-1519)에게 도통을 전하고, 이후 경주의 李彦迪(1491-1553)과 안동의 李滉(1501-1570)에게로 다시 이어져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형성하게 했다. 이황 이후로 노론 위주의 도맥이 형성되어 이것이 정치적 부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성리학의 수입과 완성에 영남의 지식인들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이로써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영남의 유교는 16세기 이황과 曺植(1501-1572)이 등장하면서 극치를 이룬다. 李瀷(1629-1690)은 이를 두고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았고, 우리의 문명은 여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4)라고 기술한 바 있거니와 이황과 조식은 각기 낙동강의 좌우에서 학단을 이끌면서 독특한 학문체계를 구축해갔다. 역시 이익의 말을 빌어보면, 이황이 仁을 숭상하였다면 조식은 義를 내세워 상보적 경쟁관계 하에서 역동적인 영남의 유교문화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들의 처세관과 현실관 등은 사뭇 대조적인 것이었다. 이황이 현실에 대하여 온건한 태도를 지니고 리기철학을 중심으로 한 심성론을 가다듬어갔다면, 조식은 현실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지니고 경의철학을 바탕으로 한 실천론을 형성해갔기 때문이다.

  사물인식의 방법적 측면에서 볼 때 이황은 이념적 인식에 철저하였다.5) 이념적 인식은 사물을 ‘이치’가 드러나서 유행하는 것으로 보고 대상 사물을 주체화하여 인식한다. 이념은 모든 경험에 통제를 부여하는, 즉 순수 이성에서 얻어진 최고의 개념이기 때문에 사물과 자아가 ‘理’로 통합될 수 있고 수양에 의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때문에 이황은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사물에 내재한 유가적 철리의 세계를 선험적으로 인식하고, 이것과의 합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천인합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조식은 사물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6) 이는 인식객체인 사물과 인식주체인 자아 사이에 탄력이 부여됨으로써 객관 사물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해 내는 것을 말한다. 즉 객관 사물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찾아내는 방향으로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조식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 범위는 전방위적이었다. 군주와 관리에 대한 비판이 특히 신랄했다. 이것은 그의 현실관이 민본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경험적 세계인식에 철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황과 그 학파를 강좌학파라 하고, 조식과 그 학파를 강우학파라 한다. 이들의 활동영역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황과 조식을 다같이 스승으로 삼으면서 낙동강 연안에서 주로 활동했던 일련의 문인군이다. 우리는 이를 江岸學派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7) 여기에는 상주․성주․고령․대구․영천․밀양․의령․창녕․김해 등의 지역이 속하며, 학문적으로 이황과 조식을 함께 스승으로 모셨던 문인들과 그 후예들이 주로 포진하고 있다. 鄭逑(1543-1620)와 寒岡學派는 그 대표적이라 할만하다.

  영남지역은 동서붕당 때에는 동인에 속했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고, 북인이 몰락하면서 노론화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남인이 강한 세력을 얻고 있었다. 조식의 제자들이 대체로 북인에 참여했고, 이황의 제자들이 남인에 참여했으므로, 북인세력의 몰락을 의미하는 인조반정, 그 이후의 영남은 퇴계학이 중심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조선후기로 가면서 남인들은 정치일선에서 소외되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향촌에서의 유가적 질서구축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의 선비들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면서 서원이나 서당을 통해 자제들을 교육시켜 나갔다.

  영남의 선비들이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서양종교의 유입에 따라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유교건설을 부르짖었던 산청출신 李炳憲(1870-1940)의 공자교 운동은 그 대표적이다. 그리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회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한 소위 파리장서사건, 그 중심에도 영남의 유학자 郭鍾錫(1864-1919)과 金昌淑(1879-1962)이 있었다. 이처럼 영남의 유교는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안으로 학문정신을 고양하는가 하면, 밖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위태로운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2. 영남 유교의 사적 전개에 따른 특징



  영남의 유교문화는 신라의 육두품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왔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특히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조에 들어 성리학을 발전시킨 중심체 역할을 했다. 이미 언급한 안향과 정몽주 등을 계승하여 이황과 조식이 각기 학파를 형성하며 영남의 유교문화는 정립되었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의 후예들이 때로는 시대에 맞는 유교문화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가 하면, 때로는 유교의 춘추대의정신으로 나라구하기에 앞장서면서 현실을 능동적으로 대처해왔다. 그렇다면 이같은 영남유교의 전개에 나타나는 특징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두자.

  첫째, 한국유교의 주맥을 이끌어왔다는 점이다. 신라에 유교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서 늦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문왕대에 ‘국학’을 설치하고, 유교로 무장한 육두품 출신들이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 일정한 한계가 있긴 했지만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려말선초의 성리학 유입기에는 안향과 정몽주 등이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의 성리학적 정신기반을 구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16세기를 거치면서 이황과 조식이 일련의 학단을 이끌면서 영남유교는 꽃을 피웠고, 이들의 제자 정구가 許穆(1595-1682)에게 실용학을 전수하면서 근기남인들의 실학을 성립할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기독교가 유입되자 이에 대한 능동적 대응을 위하여 이병헌은 공자교를 성립시켜 유교의 새로운 복원론을 제창하면서8) 근대유교의 개혁사상을 천명하고 나섰던 것이다.

  둘째, 강한 절의정신을 보인다는 점이다.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는 절의정신은 유교의 가장 기본정신이다. 이것은 고구려와 왜에 가서 신라왕의 동생을 구출하고 자신은 죽었던 영남의 충신 朴堤上에게서 비롯되지만, 구체적으로 절의정신이 형성된 것은 려말선초이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했던 이색․정몽주․이숭인․길재 등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같은 절의정신은 역사의 위기적 국면마다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영천의 李甫欽(?-1457)과 그의 사위 밀양의 孫敍倫(?-1457), 하빈의 朴彭年(1417-1456), 안동의 河緯地(1412-1456), 영해의 李塏(1417-1456) 등의 사육신, 사화기를 맞아 절의를 지키며 무참하게 죽었던 김굉필과 정여창, 그리고 한일합방을 맞아 단식을 하다 죽은 안동 사람 李晩燾(1842-1910), 항일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던 許蔿(1855-1908)․柳時淵(1873-1914)․金道和(1825-1912)․李相龍(1858-1932)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영남의 선비 사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영남 유림은 역사의 질곡마다 일어나 유교의 근본정신인 절의정신을 굳건히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셋째, 서원을 통한 교육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조선은 국초부터 ‘학교는 교화의 근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인륜을 밝히고 또한 인재를 이룬다’9)고 하면서 교육입국을 천명하였다. 이 때문에 서울에 成均館과 四學을, 지방에 향교 등의 교육기관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관은 교화적 성격보다 관리양성기구로 전락하고 교육의 본래 취지를 크게 망각하게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사림은 교학진흥책을 모색하게 되고, 급기야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영남지방에서 서원이 가장 먼저 생겼고, 또한 조선에서 가장 많은 수로 설립되었다. 가장 먼저 생긴 서원은 두루 알다시피 풍기군수 周世鵬(1495-1554)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며, 서원의 수는 전국 378개소 가운데 영남지방이 156개소로 이것은 41%를 상회하는 것이다. 156개소 가운데 조정에서 공인된 사액서원만 하더라도 57개소나 되니 영남지방의 사인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벌인 교육활동이 얼마나 적극적인 것이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10)

  넷째, 유교의 현대적 계승문제에 민감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이병헌의 공자교 운동은 고사의 위기에 직면한 유교를 새롭게 복원하기 위한 몸부림의 한 형태였다. 유교의 계승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영남지역에서는 현대적 계승문제를 고민하는 일련의 단체들이 활발하게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淡水會와 博約會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담수회는 1963년에 결성되어 지난 2003년 40주년을 맞이하였다.11) 이 회는 민족문화 창달과 민족주체성 확립 등에 기여하기 위하여 창립되었으며,12) 2004년 현재 기관지 󰡔淡水󰡕 33집을 냈다. 박약회는 1987년 이황의 정신을 계승하는 한편, 유교의 현대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결성되었으며,13) 2005년 현재 기관지 󰡔博約󰡕 13집을 냈다. 이 두 현대 유림회는 영남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서 모두 우리 시대의 심각한 도덕적 회의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그 극복방향을 전통사상에서 찾고 있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우리는 영남지역의 유교문화를 역사적 흐름에 따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또한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를 고찰해 보았다. 영남지역은 신라시대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조선시대의 이황과 조식이 출현하면서 소위 영남학파가 형성되고 이에 따라 조선의 유교문명은 극치에 달하였다. 여러 곡절이 있기는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영남의 유교문화는 발전해왔고 오늘날도 이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영남의 유교문화는 한국유교의 주맥을 이끌어 왔다는 점, 강한 절의정신을 보인다는 점, 서원을 통한 교육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는 점, 유교의 현대적 계승문제에 민감하다는 점 등의 특징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같은 영남지역 유교문화의 역사적 구도 속에서 이 지역의 수많은 유림들은 현장자료를 남기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다음 장에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과제이다.


3. 영남지역 유교문화의 현장론적 접근


  유교문화를 이해함에 있어 그 현장은 무엇 때문에 중요한가?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통합․연계교육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분화학문에서처럼 어떤 특정한 분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 정치, 경제, 종교, 민속 등 모든 학문이 통합되어 있다. 예컨대 어떤 선비의 삶이 녹아 있는 정자를 답사하고자 한다면, 그 선비의 학문을 이루는 다각적 접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정자의 건축학적 의미, 그 정자가 위치 한 풍수지리학적 의미, 이밖에도 정자주변의 다양한 문화풍토에 대한 파악을 선행할 때 어떤 선비가 남긴 현장자료는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장자료는 유학자의 실천적 면모를 살필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오늘날 강의실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지고 있는 이론 위주의 강의는 서적을 통한 지식전달의 특정 측면만 강조되어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빔 프로젝트 등 다양한 수업공구를 활용하여 보완한다고는 하나 일정한 한계가 없을 수 없다. 이같은 한계를 극복하면서 보다 통합적인 유교문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 유학자의 체취와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현장을 직접 답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현장에서 갖는 일련의 문제의식은 이론적이라기보다 실천적이고, 관념적이라기보다 현실적이다. ‘현장체험’은 무엇보다 실천적 측면에서 교육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현장자료는 정신적 계승의 문제를 고민해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유교적 현장은 대체로 후손들이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형식적 관리에 그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합당한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선조의 얼을 제대로 이어받기 위하여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는 문중도 있고, 그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과 그 인물의 정신을 홍보하기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돋보이는 곳도 있다. 그러나 계승과 홍보의 방법론이 개발되어 있지 않고, 오늘날 우리의 생활 속에 그 현장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개제되어 있지 않다. 현장은 이같은 문제의식을 탐방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각인시킨다.

  유교문화의 현장은 크게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답사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주제별 답사이고, 그 둘은 지역별 답사이며, 그 셋은 이 둘을 통합한 문화권 답사이다. 주제별 답사는 일정한 주제에 따라 지역에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을 말하고, 지역별 답사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를 같이 학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제별 답사와 지역별 답사를 절충하는 자리에 문화권 답사가 놓인다.14) 여기에는 모두 장단점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의 논의에서는 영남지역의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2장에서 언급한 이 지역의 ‘유교문화의 개괄적 이해’에 따라 중심인물을 염두에 두면서 주제별로 그 현장자료들을 정리하기로 한다.

  첫째, 최치원 유적을 중심으로 한 신라 유교문화의 현장자료이다. 최치원의 유적은 전국적으로 산포되어 있다. 최치원이 영남지역에서 나고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지역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유적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 유적은 西岳書院과 文昌祠와 같이 서원과 사우의 형태로, 眞鑑禪師大空塔碑 및 文昌侯崔先生神道碑와 같이 금석문의 형태로, 學士樓와 籠山亭과 같은 누각과 정자의 형태로, 가야산 홍류동 및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臨鏡臺와 같은 자연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등 그 형태적 측면이 매우 다양하다. 이들 유적이 대체로 후대인들의 추모에 의해 조성된 것이기는 하나, 그 유적들 주위로 최치원의 정신적 방황과 시대적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최치원과 직접 관련된 유적은 없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자연물에서 찾을 수 있다. 최치원은 문학작품을 통해 특정 자연을 읊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육안으로 보고 이에 대한 감흥을 작품을 남겼던 가야산의 홍류동 계곡 일대와 낙동강 하구의 임경대 유적 등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자연과 교섭하는 최치원의 정신경계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홍류동의 거센 물소리를 통해 세상에서의 시비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는 마음을 곡진히 폈고,15) 임경대에서는 낙동강 하구의 아름다운 풍경을 회화적으로 그려내고 있다.16) 이들 현장자료를 통해 우리는 신라말 최치원의 삶에 대한 고뇌와 지향정신을 밀도 있게 파악하게 된다. 다소 변화되었다고는 하나 최치원이 육안으로 보았을 그 자연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전달해 준다.

  둘째, 정몽주와 길재 등 절의파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 도입기 유교문화에 대한 현장자료이다. 東方理學之祖로 널리 알려진 정몽주의 유적은 고향인 영천시 임고면에 세워진 臨皐書院, ‘孝子里’비, 鄭夢周遺墟碑 등이 대표적이다. 이 뿐만 아니라 구미 금오산 기슭의 길재 유적인 採薇亭과 선산읍 원리 낙동강변에 세워진 金烏書院,17) 그리고 성주군에는 이숭인의 유적지인 鳳山齋18)와 安山書院19) 및 晴暉堂 등이 집중되어 있다. 영덕군 영해면20)은 이색의 출생지로 그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부산시 기장군의 일광해수욕장에는 고려말 정몽주, 이색, 이숭인 등 세 성인이 이곳을 유람해서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하는 三聖臺가 있다. 우리는 이들 유적지를 통해 영남지역 사람들이 이 시기의 유학자들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한다.

  정몽주의 위패를 모신 임고서원은 많은 고전적과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어 유명하기도 하다. 이 서원에는 200여책의 전적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10종 25책이 선별되어 보물 제1109호(지정일 : 1991년 12월 16일)로 지정된 바 있다. 이들 책에는 󰡔精忠錄󰡕 등과 같은 內賜本과 임진왜란 이전본 3종 12책을 비롯하여, 7종 13책의 筆寫本이 포함되어 있다. 임란 이전본은 조선전기 판본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며, 필사본은 서원의 창건과 운영 사적 및 이와 관련된 당대의 사회․경제적인 일국면을 살피는데 있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자료들은 유교문화 가운데 하나인 서원제도를 연구하는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기기도 한다.21)

  셋째,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영남사림파의 성장과 관련된 현장자료이다. 김종직은 영남 사림파의 영수이다. ‘사림’이란 지방 중소지주층 출신의 在野 知識人群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山中․林下란 뜻으로 조정이나 도시의 반대개념이다. 영남사림은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조정으로 나아가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로써 영남에 재지적 기반을 갖고 있었던 사림파와 그 유적은 이 지역에 광포될 수밖에 없었다. 김종직의 유적으로는 그의 위패를 모신 밀양시의 禮林書院과 생가, 다양한 수택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 고령군 소재의 종택,22) 함양군수 시절 경영하였던 함양의 관영 차밭과 기념비 등이 그 대표적이다.23)

  김종직의 제자들 유적 역시 영남지역에는 다양하게 있다. 대표적인 것만 몇 가지를 들어보기로 하자.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유적으로는 그가 어린 시절 독서하던 寒喧堂이 소실되자 이것을 복원하여 새로 세운 합천군의 小學堂과 그가 배향되어 있으며 그 강당은 보물 제350호 지정되어 있는 대구시 달성군의 道東書院이 있다. 정여창의 유적으로는 경남 濫溪書院․淸溪書院․정여창 묘소․昇安寺址․정여창종택과 개평마을 등인바 경남 함양군을 중심으로 산포되어 있다. 이밖에도 김일손을 배향한 청도군의 紫溪書院, 曺偉를 배향했던 김천시의 景廉書院址 등이 있고 이에 따른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있다. 이같은 유적 유물을 통해 우리는 사림파의 진출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훈구파들의 횡포를 다각도로 되새겨보게 된다.

  넷째, 이황을 중심으로 한 퇴계학파의 유적을 들 수 있다. 16세기에 들어 영남의 유교문화는 뚜렷한 학파적 경향을 보이며 발전하였으며 이황은 그 중심에 있었다. 이황의 유적은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陶山書院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이황이 태어난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태실을 비롯해서, 도산서원에서 북쪽 방향으로 3km쯤에 자리 잡고 있는 토계리 상계동의 종택,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km의 거리에 있는 토계리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에 있는 묘소와 신도비 등이 대체로 그것이다. 이밖에도 그의 문학적 상상력을 촉발시켰던 청량산 등 다양한 곳에 유적이 남아 있어 이황의 정신경계와 인간적 풍모를 느끼게 한다.

  퇴계 제자들의 유적으로는 金誠一(1538-1593) 관련 유적과 柳成龍(1542-1607) 관련 유적이 대표적이다. 김성일의 유적은 그를 배향하고 있는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의 虎溪書院과 서후면 금계리의 김성일 종택을 비롯해서 다양하게 존재하며 雲章閣에는 많은 유물과 고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류성룡 대한 유적으로는 그를 배향하고 있는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의 屛山書院과 그 종택인 忠孝堂, 그리고 그 후손들이 모여살고 있는 하회마을이 대표적이다. 특히 충효당의 永慕閣에는 국보132호인 󰡔懲毖錄󰡕을 비롯해서 류성룡의 유물이 일괄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이 영남지역에는 김성일의 제자인 張興孝(1564-1634), 류성룡의 제자인 鄭經世(1563-1633)의 유적 역시 즐비하게 있어서 퇴계학파의 왕성함을 실감하게 한다.

  다섯째, 조식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의 유적을 들 수 있다. 16세기 중후기의 조식은 강우지역에서 이황과는 변별되는 敬義에 입각한 실천정신을 내세우며 학단을 이끌고 있었다. 그의 유적은 김해시 탄동에 위치한 山海亭을 비롯해서, 합천군에 위치한 생가와 雷龍亭, 만년에 살았던 지리산하 덕산의 山天齋 및 사후의 유적인 德川書院과 묘소 등이 존재한다. 이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력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양산의 雙碧樓, 영천의 玩龜亭, 합천의 涵碧樓 등 다양한 문학현장이 있어 그의 현실에 대한 초월과 참여의 고뇌를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남명학파는 인조반정과 정인홍의 실각으로 몰락하지만 이 학파의 중요 인물들의 유적은 그대로 남아 있다. 鄭仁弘(1535-1623)의 유적으로는 합천군 가야면의 浮飮亭과 묘소를 들 수 있으며, 조식의 외손서인 金宇顒(1540-1603)의 유적으로는 그를 배향한 성주군 대가면의 晴川書院과 묘소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홍의장군으로 널리 알려진 郭再祐(1552-1617)의 유적으로는 그 유물이 일괄 보관되어 있는 의령군 의령읍의 忠翼祠와 곽재우가 배향되어 있는 대구시 달성군의 禮淵書院도 있다. 이밖에도 崔永慶(1529-1590)이나 趙宗道(1537-1597), 金沔(1541-1593) 등의 유적이 영남우도를 중심으로 늘어서 있어 남명학파의 의병활동의 깊이와 넓이를 확인하게 한다.

  여섯째, 정구를 중심으로 한 한강학파의 유적을 들 수 있다. 정구는 21세에 이황을, 24세에 조식을 그 스승으로 모시면서 영남유교의 양대산맥을 집대성하는 한편, 그의 제자 허목에게 그 학문적 맥락을 이어줌으로써 근기 남인의 성립을 가능케 한 인물이다. 그의 유적으로는 탄생지인 성주군 대가면 柳東書堂을 비롯해서 그를 배향하고 있는 성주군 수륜면의 檜淵書院24) 등 다양하다. 특히 회연서원 뒤 鳳飛巖에서 시작하여 김천시 수도산 龍沼瀑布까지 이어지는 武屹九曲은 정구의 주자학적 정신경계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남지역 선비들의 주자시 수용의 한 양상을 확인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현장자료가 된다.

  정구의 제자들은 도합 345명으로 강안지역을 중심으로 일련의 학단을 이루고 있었다. 포항시 죽장면의 立巖書院에는 張顯光(1554-1637)이 배향되어 있는데, 그는 특히 이 지역을 사랑하여 「立巖十三詠」을 읊은 바 있다. 정구는 만년에 대구 근교에 泗陽精舍를 지어놓고 강학을 했으므로, 이 시기 대구지방의 많은 선비들은 그의 제자가 된다. 이 때문에 금호강변에 정구와 徐思遠(1550-1615)의 강학소인 伊洛書堂이 있을 수 있었으며, 都應兪(?-?)와 慶兪(1596-1636) 형제를 배향하고 있는 대구시 달서구 소재의 屛巖書院이나 徐時立(1578-1665)을 배향하고 있는 대구시 동구 소재의 百源書院, 崔東㠍(1578-1665)과 그 후손들이 사는 동구 둔산동의 옻골마을 등도 주요 유적이 된다. 이밖에도 정구의 제자 成安義(1561-1629)의 유적인 창녕의 芙蓉亭을 비롯해서, 정구의 다른 유적인 창원의 檜原書院이나 마산의 觀海亭 등 낙동강 연안을 따라 한강학파는 일정한 유교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곱째, 한말 영남지역의 유교문화의 현장자료를 들 수 있다. 한말의 영남지역 유교문화에 대한 이해는 유교가 어떻게 계승되고 혁신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어 중요하다. 특히 유교의 개혁운동이 이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데 주목할만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李承熙(1847-1916), 柳寅植 (1865-1928), 李炳憲(1870-1940), 宋基植(1878-1949)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격동기를 맞아 유교를 다각도로 개혁하려고 했는데,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즉 이승희가 새시대에 맞게 유교를 절충해보려 했다면, 유인식은 정치․사회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개혁하려고 했고, 이병헌은 종교적 측면에서 유교를 재구성하려했다. 그리고 송기식은 사회교화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면을 지니고 있었다.25) 문묘를 지어 공자의 영정을 모신 培山書院 등 이에 따른 유적지 역시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어 한말 영남유교의 현주소를 알게 한다.

  이 시기 영남지역에서 활동한 유림들 가운데 의병활동을 전개한 선비들도 많았다. 金道和, 金道鉉, 許蔿, 李康秊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의 유적은 안동시 일직면 김도화의 강학처인 泥山亭, 영양군 청귀면의 김도현 생가, 경북 선산시 금오산 입구에 있는 허위의 유허비와 대구시 중구 달성공원 내에 있는 그의 순국기념비, 경북 문경시 가은읍의 이강년 영정각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파리장서사건을 주도한 곽종석의 유적이 경남 거창군 가조면에 茶川書堂과 신도비 등으로 남아 있으며, 김창숙의 유적은 경북 성주군에 심산유물관과 종택 등으로 남아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영남의 유교문화사에 따라 대표적인 유적지가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밖에도 오늘날 이 지역 유교문화의 계승적 측면을 살펴볼 수도 있다. 하나는 지역문화축제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안동의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유교문화축제가 매년 열리고, 산청의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선비문화축제가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이 일은 주도하고 있으며 영남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전통마을을 중심으로 계승되고 있다. 안동의 하회마을, 안강의 양동마을, 성주의 한개마을, 대구의 옻골마을, 고령의 개실마을 등이 그것이다. 이들 마을은 전통적 양식의 가옥을 보존하면서 유교적 분위기를 오늘날 우리에게 전한다. 이제 이들 현장자료를 어떻게 대학의 교육과정에 수용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 남아 있다.

 

http://cafe.daum.net/CHEONGJU/2mRJ/156?docid=viN6|2mRJ|156|20090518222959&q=%BC%AD%C0%CE%B0%FA%20%B3%B2%C0%CE%C0%C7%20%BF%B9%C7%D0%C0%FB%20%B1%D9%B0%C5%20%5B1%5D&srchid=CCBviN6|2mRJ|156|2009051822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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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
글쓴이 : 松河22翰邦5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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