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溪 朴世采(1632∼1695)는 평소 한강의 학문과 유학사적 위치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東儒師友錄』에서 퇴계의 문인 72명을 소개하면서 유독 한강만은 제25권 1권 분량을 할애하여 풍부하게 다룬 반면, 柳成龍·金誠一과 같은 高弟도 卷27에서 여러 문인들과 함께 다루었을 뿐이다. 이것은 비록 한강을 퇴계의 문인으로만 인식한 흠은 있지만, 한강의 학문적 위치를 퇴계 다음 가는 第一高弟로 인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박세채의 견해대로라면 한강은 명실공히 영남학파에서 퇴계·남명 이후의 第一人인 셈이다.
박세채(朴世采)
1631(인조 9)∼1695(숙종 21).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1. 가계와 수학
홍문관교리 의(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동량(東亮)은 형조판서, 《사변록 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혈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7세 때인 1638년(인조 16)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1649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성균관생활 2년 만에 과거공부마저도 포기하였다. 원래 이이(李珥)의 《격몽요결 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으며, 이이를 존경하였다.
2. 이이의 문묘배향 주장
그 무렵 이이·성혼(成渾)의 문묘종사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에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으므로 이에 분개하여 과시(科試)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서 배웠는데, 그의 큰아버지 호(濠), 종부 미(瀰)그리고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한 연유로 하여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3. 관직과 유배생활
1659년 봄에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는데, 5월에 마침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크게 거론되게 되었다.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송준길(宋浚吉)의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여 서인측의 이론가적 인물이 되었다.
그가 지은 《복제사의 服制私議》는 남인 윤선도(尹善道)·윤휴(尹鑴)의 3년설의 부당성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글이다.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윤휴를 경책(警責)한 바 있는데, 이 서한을 계기로 두 사람의 교우관계가 단절되는 원인이 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기해복제 때에 기년설을 주장한 서인측의 여러 신하들이 다시 추죄(追罪)를 받게 되었다.
이때 박세채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양근(楊根)·지평(砥平)·원주·금곡(金谷)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4. 재등용
그러나 그가 다시 등용되던 1680년까지 6년간은 도리어 학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 기간에 《소학》·《근사록》·《대학》·《중용》을 중심으로 난해한 구절을 해설한 《독서기 讀書記》를 비롯하여 《춘추》에 대한 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해설을 토대로, 20여 문헌에서 보충자료를 수집, 추가한 《춘추보편 春秋補編》과 성리학의 수양론 가운데 가장 핵심개념인 경(敬)에 대한 선유(先儒)의 제설(諸說)을 뽑아 엮은 《심학지결 心學至訣》 등을 저술로 남겼다.
1680년 이른바 경신대출척이라는 집권층의 변화에 따라 그는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로부터 승정원동부승지·공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684년 회이(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 皇極蕩平論》을 발표하여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하였으나, 끝내는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다.
숙종 초기에 귀양에서 돌아와서는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였으나 노·소 분열 이후에는 윤증(尹拯)을 두둔하고 나아가 소론계 학자들과 학적 교류와 활동을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서 야인생활을 하였다.
이때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는 학구적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간중에 윤증·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하여, 이른바 소론계의 학자들과 서신내왕이 많았으며, 양명학(陽明學)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밝히려는 저술 경향을 보인다. 《양명학변 陽明學辨》·《천리양지설 天理良知說》을 비롯하여 《이학통록보집 理學通錄補集》·《이락연원속록 伊洛淵源續錄》·《동유사우록 東儒師友錄》·《삼선생유서 三先生遺書》·《신수자경편 新修自敬編》 등은 이 시기에 저술한 중요한 저서들이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에는 정계의 영수격인 송시열이 죽고, 서인 내부가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된 상태였으므로, 박세채는 우의정·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이른바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다.
그는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 등과 더불어 이이·성혼에 대한 문묘종사문제를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한 바 있다.
박세채는 위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내외로 다난한 시기에 태어나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당쟁이라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몸소 겪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라는 국제적 격동기였다.
다시 말하면 중화적(中華的)천하가 무너지고 이적(夷狄)의 국가 청나라가 천하를 호령하는 이른바 역천패리(逆天悖理)의 위기의식이 만연된 시기였다. 따라서 그의 공적인 활동이나 사적인 학구생활은 당시의 시대정신과 긴밀한 연관 속에 이룩된 측면을 볼 수 있다.
5. 학문과 저술
그의 학문은 이러한 17세기의 국내외의 상황과 관련하여 네가지 특성으로 구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정치적으로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붕당의 탕평론(蕩平論)이며, 둘째는 학문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수호하는 일, 셋째는 이단(異端)을 비판하고 나아가 배척하는 일, 넷째는 사회규범으로서 예학(禮學)을 일으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대외정치면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복명반청(復明反淸)의 거사를 알고 이를 적극 지지하여 존주대의라는 정책과제를 제시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파당적 대립의 폐단을 깊이 깨닫고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禍)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라고 우려하여 그 나름의 탕평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
존주대의의 정책과제는 김상헌과 관련할 때 그의 스승에게서 전수된 대외관(對外觀)이라 할 수 있으며, 중화적 세계가 무너지는 위기의식 속에서 도통수호(道統守護)라는 학적 과제에 대한 간접적인 인과관계성을 유추할 수 있다.
그의 도통수호의식은 그가 이미 《이학통록보집》을 저술하여 중국 유학의 학통을 밝혔고, 그와 아울러 방대한 《동유사우록》을 써서 동방의 도학연원을 밝혔던 것이다. 그의 공적은 수제자 김간(金幹)의 평과 같이 “계개(繼開)의 공과 찬술의 풍부함은 참으로 근대 유현(儒賢)에는 없다.”라고 자랑할만한 업적이다.
또한 그가 이단을 비판하고 배척한 태도는 《양명학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고본대학 古本大學》·《대학문 大學問》·《치양지 致良知》·《주자만년정론 朱子晩年定論》 등 양명의 이론을 낱낱이 비판하였다.
양명에 대한 비판은 도통수호라는 입장에 근거한 것이나 현실적으로는 그의 제자 정제두가 양명설(陽明說)을 신봉함으로써 사우(師友)사이에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제두는 이보다 8년 전에 이미 《의고결남계서 擬古訣南溪書》를 써서 “양명의 심설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고, 그뒤 여러 사우간에 논변이 있었던 만큼 그들의 스승으로서 논변을 질정(質定)하는 뜻에서 이러한 저술이 불가피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6. 예학사상과 저술
박세채의 많은 저술 가운데 예학에 관한 저술은 학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 ‘예학의 대가’라고 칭할만하다. 《남계선생예설 南溪先生禮說》·《육례의집 六禮疑輯》 등은 예의 구체적 실천문제를 다룬 서술로서 과거에 보지 못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식절차까지 문제삼고 있다.
이러한 예학의 변용은 17세기 성리학의 예학적 전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며 예학의 구현이라는 오륜적 근거를 밝히는 학적 과제가 된다.
여말선초의 사상적 전환기에 제기되었던 불교의 멸륜성(滅倫性)을 극복하고 예에 의한 실천방법으로서 오륜은 매우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가례 家禮》를 권장하고 《삼강행실도》·《국조의례》 등의 간행은 일종의 범국민적 규범원리로서 예의식을 광역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비의 복(服)에 대하여 기년복·삼년복을 주장하거나 또는 대공(大功)·기년이어야 한다는 이른바 예송(禮訟)은 파당적 대립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으나 문제는 대립의 성격이 예에 대한 기본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대립적 성격은 분명히 예학의 구현이라는 유학의 기본과제에 대한 새로운 검토이며 예학적 전개라는 차원이 이해된다.
그의 예학적 전개는 《육례의집》·《변례질문 變禮質問》 등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그의 견해는 역시 문인 김간의 《동방예설 東方禮說》에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정제두의 글에서 고례(古禮)를 존중하고 간례(簡禮)를 강조하면서 이이·성혼과 더불어 박세채의 예설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예설은 위의 학적 계통의 선상에서 정제두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 저술로는 《범학전편 範學全編》·《시경요의 詩經要義》·《춘추보편》·《남계독서기》·《대학보유변 大學補遺辨》·《심경요해 心經要解》·《학법총설 學法總說》·《양명학변》·《남계수필록 南溪隨筆錄》·《심학지결》·《신수자경편》·《육례의집》·《삼례의 三禮儀》·《사례변절 四禮變節》·《가례요해 家禮要解》·《가례외편 家禮外編》·《남계예설 南溪禮說》·《남계시무만언봉사 南溪時務萬言封事》·《남계연중강계 南溪筵中講啓》·《남계기문 南溪記聞》·《동유사우록》·《주자대전습유 朱子大全拾遺》 등이 있는데, 단행본으로 유포되고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http://cafe.daum.net/CHEONGJU/2mRJ/156?docid=viN6|2mRJ|156|20090518222959&q=%BC%AD%
C0%CE%B0%FA%20%B3%B2%C0%CE%C0%C7%20%BF%B9%C7%D0%C0%FB%20%B1%D9%B0%C5%
20%5B1%5D&srchid=CCBviN6|2mRJ|156|20090518222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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