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士)와 관련된 옛글
『조선시대(朝鮮時代) 선비연구(硏究)』중에서 발췌, 이장희(李章熙)지음
1. 선비의 참 벗
“선비의 이른바 벗은 셋으로 구분되니, 한묵(翰墨)의 자리에서 서로 즐겨하는 문우(文友)가 있고, 벼슬하여 친하게 지내는 관우(官友)가 있고, 성리서(性理書)를 서로 강(講)하는 도우(道友)가 있는데, 벗이라는 이름은 비록 하나이지만 벗이 되는 까닭은 같지 않다. 문우(文友)・관우(官友)는 꼭 상에 둘러앉아 악수하고 술잔을 나누며 친하다 하고, 반드시 허물과 부끄러움을 감추는가 하면, 재능(才能)을 포창(襃彰)하여 주는 것을 미덕(美德)으로 삼고 꼭 계약(契約)을 수결(修結)하여 지천화지(指天畵地)하여 믿음을 삼는데, 이 셋이 없으면 마음속으로 혐의가 있는가 하여 들떠서 서로 만나도 마침내 길가는 사람 같이 될 뿐이다. 도우(道友) 같으면 그렇지 않으니 그 친함이 낯이나 눈 맞대는 데 있지 않고, 그 미덕(美德)도 애써 추예(推譽)하는데 있지 않고, 그 믿음도 청하는 것을 들어주는데 있지 않으며, 동지(同志)로서 친하며 책선(責善)으로서 미덕(美德)을 삼고, 수도(守道)로서 믿음을 삼으니 뜻이 진실로 같다면 천년(千年) 전에 사람도 오히려 상우(尙友)로 대함이 가(可)하거늘 하물며 함께 한 때를 보내는 사람이랴.” (이이李珥 선생의『율곡전서栗谷全書』에서)
2. 선비의 가법(家法)
“몸을 닦아 행실을 깨끗이 하고 구차한 이득(利得)을 바라서는 안 되며, 정(情)을 다하고 실(實)을 다하여 남을 속이는 일을 하여서는 못쓰고, 의(義)롭지 못한 일을 마음으로 헤아리지 아니하며 사리(事理)에 어긋나는 이득을 집에 들여놓지 않는 것”(서경덕徐敬德 선생의『인수대비내훈仁粹大妃內訓』에서)
3. 선비의 처신(處身)
“선비가 거처함에는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어야 한다. 동작과 위엄 있는 의용(儀容)이 다른 사람의 감모(感慕)를 받아야 하며, 언사와 풍채(風彩)가 다른 사람을 계발(啓發)시키므로 행사(行事)의 조짐(兆朕)은 한가롭게 있을 때 나타나고, 도덕이 빛나는 것도 한가하게 지낼 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최한기(崔漢綺) 선생의『인정仁政』에서)
4. 선비의 수칙(守則)
“염치(廉恥)는 선비의 대절(大節)이라 염치(廉恥)가 길에 떨어지면 탐풍(貪風)이 날로 번성해서 이를 범하는 자는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
5. 선비의 직분(職分)
“선비가 벼슬을 구하는 것은, 그 도(道)를 행하고자 함이요, 도(道)를 행하지 않고 한갓 영리(營利)만을 탐내는 것은 선비가 아니다.” (허균許筠 선생의『성서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선비는 덕(德)이 닦아지지 않음을 걱정할 뿐이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으며, 학업(學業)이 넓지 못함을 걱정할 뿐이지 맡은 일이 없음을 근심하지 않는다.” (이익李瀷 선생의『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6. 선비가 거주지(居住地)
“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치(理致)를 논할 때 먼저 물과 불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오곡(五穀)이고, 그 다음은 풍속(風俗)이며 그 다음은 산천(山川)의 경치이다. 물과 나뭇길이 멀면 인력(人力)이 너무 소모하게 되며, 오곡(五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흉년을 자주 만나게 된다. 풍속이 문(文)을 숭상하면 말이 많고, 무(武)를 숭상하면 다툼이 많고, 이익을 숭상하면 백성들이 간사해지고, 경박한 무리가 농사만 힘써 지으면 고루하고 독살스러워지며, 산천(山川)이 탁하고 좋지 못하면 백성들 중에 뛰어난 자가 적고, 마음씨도 깨끗하지 않으니 이것이 그 대강이다.” (정약용丁若鏞 선생의『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7. 선비를 대하는 법
“대저 임금이 총명하면 신하도 충직하기 마련이며, 임금이 아둔하면 아첨을 하게 됨은 자연스러운 이치이옵니다. 예전의 임금은 친히 신료(臣僚)를 만나되 친구 같은 느낌을 주어 그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익히고 밝혔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비록 그와 같이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정의(情意)만은 서로 통해서 상하(上下)가 서로 사귀고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명종실록明宗實錄』내 조식曹植 선생의 말씀 중에)
8. 선비의 포부(抱負)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을 업(業)으로 삼는 자는 그 회포를 펴서 백성에게 보탬을 주는 것을 바라고 있다. 맹자(孟子)는 아성(亞聖)으로 제(齊)와 양(梁)을 두루 다닌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단지 그 도를 행하려는 것뿐이었다.” (조광조趙光祖 선생의『정암집靜庵集』에서)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출세거취(出處去就)가 어찌 떳떳한가. 크게 쓰임을 당하면 크게 행하고, 작게 쓰이면 작게 행하는 것이요, 쓰임을 만나지 못하면 행할 수 없음이 이와 같은 뿐이다.” (정도전鄭道傳 선생의『삼봉집三峰集』에서)
9. 선비의 등용(登用)
“지금은 인심(人心)이 예전과 같지 않아서 선비의 습속(習俗)이 날로 낮아집니다. 학업에 종사한다는 사람이 겨우 20에 거업(擧業) 가운데 끼어들어 임판(仕版)에 들기에 분주하니 선비의 습속이 날로 비루(卑陋)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중종실록中宗實錄』내 원계채元繼蔡 선생 등이 계啓한 부분 중)
“옛날의 학자는 벼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성취하게 되면 위에서 들어 쓰는 것이니 대개 벼슬은 남을 위한 것이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닌데, 지금에 와서는 그렇지가 않다. 과거(科擧)로 사람을 뽑게 되므로 비록 통천(通天)한 학문과 절인(絶人)의 행실이 있어도 과거(科擧)가 아니면 출세하여 도(道)를 행할 수 없으므로 아비가 자식을 가르치고 형이 그 아우에게 권하는 것이 과거(科擧)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선비의 습속(習俗)이 버려짐이 그 까닭이다. 지금 선비가 부모(父母)의 희망과 문호(門戶)의 계책을 위하여 과거(科擧)를 하더라도 마땅히 자기의 포부(抱負)를 길러서 때를 기다려 득(得)과 실(失)은 천명(天命)에 맡길 것이요, 열중하여서 그 본뜻을 잃지 말 것이다.” (이이 선생의『율곡전서』,「처세장處世章」에서)
“요즘 사람들은 과업(科業)에 종사한다 하면서 공명(功名)도 못얻고, 성리학(性理學)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저술(著述)도 아니하여, 만일 과업(科業)을 책임지우면 ‘나는 성리학(性理學)에 뜻을 두어 여기에 급급할 수 없다’고 말하고, 만일 성리학(性理學)을 책임지우면 ‘나는 과업(科業)의 관계로 실제로 공부할 수 없다’고 하여, 이렇게 미루기만 하고 유유히 날짜만 보내어 마지막에 과업(科業)・성리학(性理學) 둘 모두 성취할 수 없으니 늙어서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아! 경계할 일이로다.” (이이 선생의『율곡전서』,「처세장」에서)
10. 선비와 언론・정치(言論・政治)
“나라를 위하는 길은 언로(言路)가 가장 급박한 것이옵니다. 언로(言路)가 열리면 하정(下情)이 위로 전달될 수 있고, 위의 은택(恩澤)이 아래로 흘러 상하(上下)가 교류하여 그 뜻이 같아지니, ‘태(泰)’라 하는 것이며, 언로(言路)가 닫히면 하정(下情)이 우울하여 펼 수 없으며 위의 은택(恩澤)이 막혀서 베풀 수가 없어서 상하(上下)가 교류할 수 없어 그 뜻이 같지 아니하니 이른바 부(否)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부태(否泰)의 거리가 어찌 멀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임금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좋아하지 아니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당하(堂下)가 천리(千里)보다 멀고, 군문(君門)이 만리(萬里)보다 멀다 하였으니 이는 하정(下情)이 상달(上達)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이옵니다. 또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천리만리(千里萬里)의 길은 멀다고는 하나 달을 보내고 해를 넘기면 혹 전해질 수 있으나, 당하(堂下)나 군문(君門)의 멀다 함은 죽을 때까지도 알릴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어찌 패가망국(敗家亡國)의 군주(君主)가 있사오리까. 언로(言路)의 통색(通塞)이 관계되는 것이 이러할진대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대저 그러하온 적 언로(言路)가 소통하면 나라가 태평하고 언로(言路)가 막히면 나라가 어지럽고 망한다는 것은 이미 뚜렷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인군으로서 오래토록 잘 다스려서 편안케 하고자 않음이 없을진대 언로(言路)를 통하지 않게 함은 무엇 때문이옵니까.” (『문종실록文宗實錄』의 사헌부司憲府의 상소上疏 내용 가운데)
“인주(人主)의 몸은, 신민(臣民)의 위에 처하여 시정득실(時政得失)과 민생(民生)의 병리(病利)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으면 들을 수 있는 방도가 없습니다. 대신(大臣)은 미움을 살까 감히 말하지 못하고 소신(小臣)들은 죄가 두려워 말하지 못하옵니다. 청하옵건대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서 옳은 것은 따르되 비록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어도 죄를 주지 마옵소서.” (『명종실록明宗實錄』에 기록된 양성지梁誠之 선생이 세조世祖에게 한 말)
"재상(宰相)은 옳다 하고 대간(臺諫)은 옳지 않다고 하며, 재상(宰相)은 실행하는 것이 가(可)하다 하고 대간(臺諫)은 행하는 것이 불가(不可)하다 하여, 가부(可否)가 서로 건너간 다음에 일이 바르게 돌아가며 조정(朝廷)이 화합(和合)한 뒤에 지치(至治)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임금과 대신(大臣)이 그 뜻이 다르고 대신(大臣)과 백료(百僚)가 그 마음이 둘로 갈라지면 기상(氣象)이 어그러지고 격리되어 어찌 선치(善治)를 이룰 수 있겠는가.” (조광조 선생의『정암문집』에서)
11. 선비가 실천(實踐)할 일
“당세(當世)에 뜻을 얻었거나 얻지 못했거나 막론하고, 죽은 후의 공명(功名)과 사람들의 기림은 천백 년 뒤에도 뚜렷한 것이고, 눈앞에 보이는 영화나 한 때의 부귀(富貴)는 겨우 십 수 년 간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연 할 만 한 일과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알 것이다. 천인운화(天人運化)의 기(氣)를 연구해서 후세 사람들의 총명(聰明)을 열어주고, 우주(宇宙) 안에 올바른 도(道)를 세워 만세태평의 터를 닦는 것은 선비가 해야 할 광대한 사업인데, 이것을 아는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는가.” (최한기 선생의『仁인정政』에서)
12. 선비의 유형(類型)과 참된 선비
[진사眞士]
“인의(仁義)의 부(府)의 침잠(沈潛)하고, 예법(禮法)의 장(場)에 종용(從容)하며, 천하(天下)의 부(富)도 그 뜻을 음란(淫亂)하게 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고, 루항(陋巷)의 근심도 그 낙(樂)을 고치는 것으로 할 수 없으며, 천자(天子)가 감히 신(臣)이라 못하고, 제후(諸侯)가 우(友)라 못하며, 통달하여 그것을 행하면 은택(恩澤)이 사해(四海)에 더해지고, 물러나서 감추고 있어도 그 도(道)가 천재(千載)에 밝힐 수 있는 연후에 이른바 선비라 할 수 있으니, 이것을 일러 가히 참된 선비(眞士)가 한다.” (홍대용(洪大容) 선생의『담헌전서湛軒全書』에서)
[대신大臣/충신忠臣/간신幹臣]
“선비가 겸선(兼善)한다는 것은 진실로 그 뜻이다. 물러나서 스스로 지킨다는 것이 어찌 본마음이겠는가. 때를 만나고 못 만나서 그럴 뿐이다. 때를 만나서 벼슬에 나가서 하는 일은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지니고 있는 도덕(道德)을 다른 사람에 미치게 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을 만들게 하는 것이며, 백성을 요순(堯舜) 시대의 백성과 같이 만드는 것이며, 임금을 정도(正道)로써 섬길 수 있으면 대신(大臣)이 되며, 항항우국(港港憂國)하여 일신(一身)을 돌보지 않고 진실로 임금을 존중하고 백성을 비호하여 위험(危險)을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그것을 행하여 비록 정도(正道)에서 다소 어긋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시종 사직(社稷)을 편안히 하는 데 마음을 쓰는 자는 충신(忠臣)이며, 그 위(位)에 있으면서 그 직무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임(任)을 받아서 열성을 다하겠다고 생각하면 비록 나라를 경영할만한 재주는 부족하다해도 일관(一官)을 위할 수 있는 자를 간신(幹臣)이라 한다.” (이이 선생의『율곡전서』에서)
[천민天民/학자學者/은자隱者]
“불세지보(不世之寶)를 품고 제시지구(濟時之具)를 익히며 도(道)를 즐기고 재능이 있어도 등용되지 않는 자는 천민(天民)이며, 스스로 배움이 부족한 것을 헤아려 배움을 구하고 재목이 넉넉하지 못함을 알고 그 부족한 것을 통달할 것을 구하며 닦은 것을 간직하고 때를 기다리며 가벼이 하지 않는 자를 학자(學者)라 하고, 고결청개(高潔凊介)하여 세상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마음에 두지 않으며 의젓하고 느긋하게 세상을 잊는 자를 은자(隱者)라 한다.” (이이 선생의『율곡전서』의「동호답서東湖問答」, ‘군신도君臣道’에서)
[산림山林/처사處士]
“대저 어린아이(孺子)는 이름이 없이 ‘영(嬰)’이라 부르며, 여자는 자(字)가 없어서 처자(處子)라 하는데, 영처자(嬰處子)란 대개 숨은 선비(隱士)들이 이름을 갖고자 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박지원朴趾源 선생의『연암집燕巖集』에서)
“신(臣)은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본시 산림(山林)의 선비는 아니옵니다. 일찍이 장실(場室)(科擧)을 일삼은 바 있으며, 늦게 음임(蔭任)에 나아갔으니 그 고상(高尙)한 뜻이 없음을 알만하지 않습니까.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니 또 어찌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하겠습니까.” (김집金集 선생의『신독재집愼獨齊集』에서)
“사대부(士大夫)들은 서로 교제할 때 서로 한 번 가면 한 번 오는 것은 예(禮)에 있어 당연한 것이다. 단 징사(徵士)같은 인물(人物)들은 이러한 예를 행하지 않는다.” (이황李滉 선생의『퇴계전서退溪全書』에서)
“신(臣)이 보건대 조식(曺植)은 ‘고항지사(高抗之士)’로, 본디 풍진중(風塵中)에 머리를 숙이고자 아니합니다.” (이황 선생의『퇴계전서』에서)
[정사正士/속사俗士]
“대저 임금이 허물이 있으면 그것을 다투어 밝히며, 다른 사람의 죄가 있으면 면전에서 윽박질러 낙낙부합(落落不合)하고 교교독립(矯矯獨立)해 다른 사람 의론을 겁내지 않는 자를 정사(正士)라 한다.” (정도전 선생의『삼봉집』에서)
속사(俗士는) “종적(縱迹)을 비밀에 부치고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며,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 말하지 않고, 독대(獨對)하여 조금씩 오랫동안 참소하는 자를 말한다.” (정도전 선생의『삼봉집』에서)
13. 국난(國難)의 선비정신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송백(松柏)이 늦게 마르는 것을 알게 되고, 세상이 혼탁해야 맑은 선비를 볼 수 있다.” (『사기史記 』)
“임진왜란 때 부녀로서 절개를 지킨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며, 효자가 그 다음이고, 충신이 그 다음이나 뚜렷이 칭찬할 만한 사람은 몇 사람 안된다. 아! 선비가 평화로운 날에 책을 읽고 의를 강론하며 그 누가 내가 장부가 아니라고 했던가. 그런데 막상 위급에 처하여 목숨을 바친 것이 부녀만도 못하니 얼굴이 두꺼운 것이 아닌가.” (이수광李睟光 선생의『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대저 선비가 순사(殉死)하는 데는 혹 강개(慷慨)하여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한다거나, 혹은 박절(迫切)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데, 마음이 편안할 수 없고 의(義)를 위하여 죽는다는 데서 안도할 수 있는 것이다.” (성해응成海應 선생의『연경재전서硏經齊全集』에서)
“아! 죽고 사는 것은 진실로 큰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 알기를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자가 있는데, 이는 명분(名分)과 의리(義理)를 위해서이다. 저 자중하는 선비들은 그 의리가 죽음만한 것을 당하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이 앞에 있고 칼과 톱이 뒤에 설치되었으며, 화살과 돌이 위에서 쏟아지고 예리한 칼날이 아래에 서리고 있을지라도 거기에 부딪치기를 사양하지 아니하고 피하려 하지 않는 것은, 어찌 의(義)를 중히 여기고 죽음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겠는가. 과연 글 잘하는 사람이 이것을 서술하여 서책(書冊)에 나타난다면 그 영웅스런 정성과 의열(義烈)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밝게 비치고 사람의 마음도 감동시킬 것이니, 그 사람은 비록 죽었으나 죽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한 번 죽는 것을 달게 여기고 후회하지 않는다.” (정도전 선생의『삼봉집』에서)
14. 선비의 농업관(農業觀)
“선왕(先王)이 상공세(工商稅)를 제정한 것은 말작(末作)(상공법工商業)을 억제하여 본실(本實)(農業)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전에는 상공(工商)에 관한 제도가 없어서 백성들 가운데서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공(工)과 상(商)에 종사하였으므로 농사를 짓는 백성이 날로 줄어들었으며 말작(末作)이 발달하고 본실(本實)이 피폐하였다. 이것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신(臣)은 공(工)과 상(商)에 대한 과세법(課稅法)을 자세히 열거하여 이편을 짓는다. 이것을 거행하는 것은 조정이 할 일이다.” (정도전 선생의『삼봉집』에서)
15. 선비의 무관(武觀)
“전체적으로 보면 (文武)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道理)라 경중(輕重)이 있을 수 없고 일신상(一身上)에 있어도 진실로 의당 겸비해야 되는 것이다. 문(文) 없는 무(武)는 쉽게 천박해지고 무(武) 없는 문(文)은 자못 유약(柔弱)한 경우가 많으니 어찌 겸비를 귀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리고 문(文)만을 숭상하면 날로 부화(浮華)하게 되어 무(武)가 있어야 함을 모르며, 무(武)만을 숭상하면 오로지 공벌(攻伐)을 일삼게 되어 문(文)이 있어야 함을 모르게 된다. 이는 치안(治安)의 대체(大體)를 보지 못하여 생각이 편벽되고 막혀서 그런 것이니 마치 동쪽을 향해 서서는 서쪽을 보지 못하고 남쪽을 향해 서서는 북쪽을 보지 못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최한기 선생의『인정仁政』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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