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東行記(成俔)1)
성현(1439-1504) 자는 磬叔. 호는 용재․浮休子․虛白堂이며 1462년(세조8년) 문과에 급제했고, 나중에 重試에도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글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이 글은 『용재총화』제8권에 실려 전한다. 이 글은 성현이 승지 직위에서 파직당하고 나서 동료인 채수, 회옹과 함께 관동 유람길에 나섰을 때 겪었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금화현, 창도역, 신안역, 화천현, 낙산사를 거치며 일어난 여러 가지 일화를 대화 중심으로 적고 있는데, 마치 한 편의 콩트를 읽는 느낌이다. 보통의 여행기에 흔히 보이게 마련인 절경에 대한 찬사나 전설 같은 것은 거의 없지만, 세 사람의 유머 넘치는 기지와 우의를 엿볼 수 있는 아주 재미있는 작품이다.
耆之 蔡壽와 磬叔 成俔이 1481년(辛丑年) 승지로 있을 때 죄를 지어 둘 다 파직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흰 옷과 짧은 도롱이를 걸치고 각각 어린 종 한 명씩을 데리고 관동 유람길에 나섰다. 무관 晦翁도 그 일행에 끼었다.
포천에 이르러 시냇가에서 저녁밥을 먹는데, 한 소년이 마을 집에서 나와 경숙의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永安道 司直이지요? 내가 소를 살까 합니다.”
“소가 없습니다.”
경숙의 답변에 모두 웃었다.
金化縣에 도착하니, 현감이 앞길까지 나와 우리를 현으로 맞아 들이려 했다. 경숙이 말했다.
“오늘은 이미 날이 저물었고, 金城까지는 아직도 길이 먼데 주변에 인가가 없으니 주인의 말대로 하시지요.”
“처음엔 足下를 믿음직하다고 여겼는데, 어찌 일처리가 이리 허술합니까?”
기지가 화를 냈다. 기지가 안색을 붉히면서 먼저 출발하니, 일행도 하는 수 없이 그대로 길을 더났다. 한 십여 리를 가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회옹이 말했다.
“영안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길가에서 노숙을 합니다. 내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활쏘기와 말타기가 본업이라 도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노상에서 하룻밤 머무시지요.”
이에 성현이 대답했다.
“영안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이 모여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노상에서 자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도적을 만나 물건을 잃는 일이 많은데, 족하가 아무리 무술이 뛰어나다 한들 어찌 한 몸으로 많은 무리를 상대하겠습니까?”
서쪽 골짜기의 어지러운 소나무숲에 좁은 길이 있으니 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둥, 무덤이 있을 것이라는 둥 의견이 분분하자, 경숙이 말했다.
“골짜기 깊숙한 곳이 오히려 큰 길가보다는 낫습니다. 집이 있으면 잠자리를 빌리고, 집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木柵을 만들어 자면 되니 무어 그리 해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침내 좁은 길을 찾아나서자 작은 집이 나왔다. 어떤 여자가 아이를 안은 채 문 밖으로 나오더니 집에 주인어른이 안 계시고 아녀자들만 있어 손님을 들일 수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모두 앞밭에 앉아 저녁을 먹는데, 산 속의 기운은 벌써 어두워져 주위를 분간할 수 없었다. 조금 있자 말을 탄 사람이 하나 오는데, 그 뒤에는 개도 한 마리 따르고 있었다. 어린 애가 주인 어른이 오신다고 소리치자 여자가 나와 맞이하며 말했다.
“밖에 손님들이 가득한데, 도적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늙은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밤늦게 왔으니 황당한 일임에는 틀림없구나.’ 하고 말에서 내려 기침을 내뱉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행장에 곰피와 호피가 있는 것이 士族임에 틀림없군.”
밭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갓을 기울여 쓰고 말이 없자, 늙은이는 경숙과 기지의 갓을 벗겨보더니 깜짝 놀라 물러서면서 말했다.
“이분은 成令公이시고 이분은 蔡令公이신데······. 두 영공께서 어쩐 일로 이곳엘 다 오셨습니까?”
늙은이는 서울의 일을 자세히 묻고는 방으로 맞아들여 병풍을 펴고 자리를 깔았다.
“내 집은 가난하여 있는 거라곤 좁쌀 막걸리뿐입니다.”
늙은이는 종을 불러 술을 걸러 동이에 넣으라 이르고, 두 딸을 불러 절하게 하니 모두들 칭찬을 늘어놓았다.
늙은이가, ‘본처는 자식이 없고, 이것들은 모두 종의 소생입니다.’ 하고 말하더니 딸들을 경숙과 기지의 옆에 앉혀 놓고 각각 술을 따르게 했으며, 기지의 종에게는 피리를 불도록 했다. 술이 어지간히 취하자 기지가 말했다.
“따님의 손을 잡아보고 싶은데, 어른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딸년들이 비록 촌티가 나고 아름답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옆에 모시게 한 까닭은 영공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늙은이가 대답하자, 기지는 그 손을 잡고 온갖 희롱을 다했다. 우리는 집이 낮아 일어설 수가 없었으므로 앉아서 춤추며 새벽까지 놀았다.
이 늙은이가 대답하자, 기지는 그 손을 잡고 온갖 희롱을 다했다. 우리는 집이 낮아 일어설 수가 없었으므로 앉아서 춤추며 새벽까지 놀았다.
이 늙은이의 성은 秦인데, 당시에 吏曺錄事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고향에 와 있었다.
昌道驛에 이르자, 회옹이 병이 나서 며칠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말들이 풀을 잔뜩 뜯고 똥을 많이 누자, 역졸은 안색을 심히 붉히면서 비로 쓸며 말했다.
“누구길래 우리 감사께서 앉는 마루를 더럽히는 거야?”
그러자, 경숙이 조용히 해명했다.
“화내지 말게. 우리 세 사람 가운데 만약 한 사람이 察訪이 되면 마땅히 자네에게 휴가를 주도록 하겠네.”
“어찌 흰 옷에 가는 실띠를 맨 사람이 찰방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大口를 싣고 영안도를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다 찰방이 되겠습니다.”
역졸의 말에 다들 抱腹絶倒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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