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金剛錄(鄭崑壽)1)
乙巳 8月 丁卯에 고성군을 떠나서 백천동에 이르니 유점사 중 10여 명이 남여를 갖고 기다리거늘 李大來와 柳海宗과 더불어 각각 타고 구령을 넘어서 유점사에 이르니 날이 벌써 저물었다. 그래 여기서 자다.
戊辰, 이른 아침에 남여를 타고 蹴水窟에 이르니 험한 바위 모서리가 어긋어긋한지라 남여를 버리고 나무 뿌리를 쥐고 절벽에 오르고 좁은 길을 찾아서 천천히 걸어서 언덕 밑에 남여를 놓고 은선대를 지나 푸른 돌에 올라 걸터 앉아서 12폭포를 바라보니 그 형상이 은하수를 꺼꾸로해서 긴 무지개를 이끄는 것 같다. 폭포 좌우에는 푸른 벽이 병풍 같고 돌은 세운 칼과도 같고 혹 창을 벌려 놓은 것 같다. 큰 자와 작은 자가 있고 푸른 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 잎사귀가 섞여 있고 폭포 위 돌 사이에 예전에는 청학이 있어 집을 지었더니 갑인년에 집을 버리고 간 후로는 다시 돌아 오지 않는다 하니 이것은 중이 서로 전하는 말이다. 해가 저물자 두려워 내려올 때 남여를 타고 내수점에 이르니 이것은 山水界 밖이라, 내산 중이 남여를 갖고 기다리거늘 내가 잠깐 쉬다가 아침을 먹고 남여를 타고 수곡을 내려 하늘 반을 바라보니 우뚝우뚝한 산봉이 구름 밖에 뻗혔거늘 마음에 장히 여겨 중한테 물으니 비로봉이라 한다. 인하여 許荷谷(篈)이 8월 16일 밤에 혼자 비로봉 정상에 섰다는 글귀를 읊고 李許臺에 이르니 썩은 나무다리가 있는지라 정신 차리며 건넜다. 남여를 타고 미륵대 가에 이르러 이름을 쓰고는 마하연 옛 암자에 이르니, 이는 義相師가 지었다고 한다. 섬 뜰에 오른 늙은 중 두 사람이 나와서 맞이하거늘 서로 더불어 말을 하고 또한 이름을 기둥에 쓰고는 암자 뒤를 바라보니 봉이 높고 높아 위로 하늘을 찌른다. 굽은 돌길을 올라 위태로운 바위 곁을 보니 한 동주를 세우고 이층 누각을 세웠다. 마음에 위태롭게 여기어 중에게 물으니 예전에 보덕대사가 세웠는데 수천 년을 지나도 넘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어찌 普德선사의 정령이 보호하여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만폭동에 이르니 그 반석이 혹 울뚱불뚱하여 그 샘 흐르는 것이 혹 얕고 혹 깊어서 폭포의 형상과 같지 않더라. 그러나 이 만폭의 이름을 얻은 것은 아지 못하겠구나! 어떤 사람이 이름했는지 실로 합당치 않다. 반석 위에 양봉래(사언)가 쓴 바 ‘蓬萊風樂元化洞天’ 여덟 자가 지금까지 서려 있어 흡사 蛟龍이 뛰어서 날아오는 형상 같으니 허균이 최간이에게 보낸 편지에 양봉래의 글자 획 장한 것이 이 산으로 더불어 쟁웅한다 하니 옳은 말이다.
만폭동으로부터 石門에 나가서 표훈사에 이르니 이것은 波崙보살이 창건한 바다. 유점사까지 50리. 저녁 밥을 재촉해서 빈 배를 채우고 또 장안사를 향해 갈 때 군수 李子喬와 더불어 서로 만나니 날이 장차 어두운지라 소주 한 잔을 마시며 승방에 돌아앉아 잡담을 하며 촛불을 밝히고 무릎을 대니 杜子美의 글에 “밤이 늦어 촛불을 잡고 서로 대하니 꿈 같구나”란 ㅁ라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구나.
己巳(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에 이자교는 작별하고 갔다. 우리들은 남여를 타고 표훈사에 돌아와서 柳海宗과 같이 정양사에 오르니 절은 麗 태조가 세웠다 한다. 그 절에 미치지 못하여 먼저 天逸臺에 올라 두루 살피니 그 산의 경치가 隱仙臺보다 낫다. 정양사에 이르러 헐성루에서 쉬고, 난간에 의지하여 눈을 뜨니 天逸, 隱仙에 비할 바 아니다. 모든 봉들이 벌려 서서 가히 헤아릴 수가 없다. 내가 중에게 묻기를 “여러 봉이 다 이름이 있느냐?” 대답하기를 각각 그 이름이 있다 하기에 대강을 말하는데 손으로 가리켜 가로되 저것은 사자봉이고 저것은 소향로봉이요, 저것은 금강대요, 저것은 혈망봉이요, 저것은 대향로봉이요, 저것은 망고대이요, 저것은 안양봉이요, 저것은 백마봉이요, 저것은 시왕봉이요, 저것은 관음봉이요, 저것은 장경봉, 저것은 석가봉이라 하니 이것이 헐성루에서 본 바의 대강이라. 이 산의 봉 수는 혹은 가로되 일만 이천 봉, 혹은 가로되 구만 육천 봉이라 하니 가히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여러 봉의 기괴한 형상을 사랑해서 두어 날 헐성루에 머물었다. 그 봉이 혹 큰 것도 있고, 혹 작은 것도 있고, 혹 둥근 것도 있고, 혹 뾰족한 것도 있고, 혹 나는 자도 있고 혹 춤추는 자도 있고, 혹 창처럼 선 자도 있고, 혹 사람처럼 선 자도 있고 혹 용이 서 있는 것 같은 자도 있고, 혹 호랑이가 걸터 앉은 자, 혹 떨어졌다 합한 자, 혹 종횡한 자도 있고, 혹 先後한 자 있고, 혹 돋고 오목한 자가 있고, 혹 東西南北한 자가 있어서 빽빽하게 서로 벌렸으되 이 산의 봉이 많지만 특히 사람 눈에 뜨인 것은 오직 헐성루뿐이다. 그런고로 이 산의 참 면목을 보려고 할진대 먼저 딴 곳에 가지 말고 반드시 여기를 먼저 보는 것은 대개 여러 봉의 형상을 다 보고자 함에서이다. 그 형상을 반드시 순서를 매길 때 헐성루가 제일이고, 은선대가 둘째, 마하연이 세째로 나머지는 눈 돌릴만한 곳이 없다. 이 세상이 승지라 말하는 것이 반드시 만폭동을 제일이라 하니 참으로 우습지 않을 수 없다.
李啓賢이 나보고 말하길 “금강산을 보고자 할진대 곧 정양사를 가야 한다. 헐성루에 올라 삼일만 머물면 오르고 내리는 수고 없이 가히 여러 봉을 볼 수 있다.”고 하니 그 말이 과연 옳구나!
이계현이 금강산에 드나들기 벌써 40여 년이다. 方伯의 비장인 任翊夏는 武半에 걸걸한 사람이다. 정양사 승경을 보고자 하여 어제 우리를 따라 함께 여기에 와서 한나절 구경을 하고 날이 저물기도 전에 돌아갔다. 방백이 관리 두어 사람을 머물러 두어 우리를 위해 그 남은 양식과 반찬으로서 먹이니 차리고 바온 바가 참으로 대단하다. 대개 槐州로부터 古城에 이르기까지 도로의 멀고 가까움과, 시내와 산의 깨끗함과, 고을과 고을의 살찌고 여윈 것과, 그리고 풍속의 좋고 나쁜 것은 버리고 기록하지 않는다.
금강산이 설악과 더불어 같으니 신 단속하고 오르니 푸른 안개도 걷히었다. 날이 鵬邊에 나매 위아래가 붉었다. 바다는 하늘 밖을 통하니 東南이 푸르다. 누가 지금 세상에 흥을 찾을 줄 아는고. 스스로 전 몸이 老聃(노자)를 지었도다. 두 다리가 이미 피곤했는데 높은 흥이 다하니 내일 아침엔 구룡담을 행하고자 하더라. 『臥遊錄, 卷8』
※최철(역), 동행산수기, 명문당, 1983.(금강록) pp.13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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