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학의 3 대 학맥 ]
퇴계 이황의 강학은 많은 제자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황이 도산서원에서 강학한 시기는 10 년 남짓한 세월에 불과하지만, 그 이전 시기에도 그를 찾아와 배운 제자들이 있었으므로, 이황으로부터 배운 사람들은 만만치 않은 숫자에 이르는 것이다.
권오봉 교수에 의하면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을 열기 전에 온혜에서 운용하였던 ‘계상서당’에서 배운 제자들 중 수학년대가 확실한 사람만 하여도[ 권대기(1551년), 김수경(1551년), 김수일(1554년), 김명일(1556년), 김성일(1556년), 권대해(1556년), 남몽오(1557년), 김전(1557년), 이이(1558년), 이명홍(1558년), 이복홍(1558년), 김면(1559년), 김취려(1560년), 이국필(1560년), 김사원(1560년), 류운룡(1560년), 이요신(1560년) ]등, 17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이름과 래학년도가 드러난 사람만을 가려 뽑은 것이니,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은 숫자였을 것이다.
오석원 교수는 안동의 선비문화에 수록된 그의 논문에서
“퇴계의 제자들을 수록한 도산급문제현록.이나 전고대방에
나타난 퇴계 문인의 수를 보면 310명과 306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이는 역대 유학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문도를 길러낸 것이다.
조선 명종과 선조 대의 많은 현량들은 지역과 당파를 초월하여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 중에 영남 출신의 문도는 190 여명에 이르며, 또 안동 출신의 학자가 105명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당시 안동지방의 문흥을 짐작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희대 씨는 열화 4호의 94쪽에서
“퇴계선생의 문인 수는 급문제현록에 수록된 인사보다 훨씬 더 많다.
선조 임금 재위 때 등용된 대제학 17 인 중 선생 자신이 그 중의 한분이었고,
류성룡이양원 노수신 등, 선생의 제자 11 인이 학자로서는 가장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관직인 대제학을 역임…문인 중 100 인이 넘는 많은 제자들이 사마시를 거쳐서…
문과에 급제…이 중 생직으로 영의정 이나 좌우의정 등 정승을 역임한 이가 10 여명,
외국 사신으로 활약한 이가 10여명…임진왜란 중 의병장으로 무공을 세운 제자도 10 여명…
사후에 시호를 받은 제자가 37인…서원이나 향사에 이향되어 추존을 받은이 만도 80여인…
” 이라고 적시하여 준다.
이황의 학단은 조선 중기 이후의 역사와 문화, 사상, 정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황은 조선 전기의 정신사가 그 필연적 결과로써 조형하여 내는 사상적 결실이라고 하는 점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이의 철학 역시도 이러한 이황의 철학과 일정한 연계를 갖는 것이라는 점을 시인한다고 하면,
이러한 입장은 더욱 확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이를 이황과의 연원관계 속에 위치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은
많은 논란의 여지를 갖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영남계열 성리학자들 중에는 이이를 이황의 철학을 부분적으로 계승하는 사람으로
파악하는 시각을 갖는 이도 있음이 사실이다.
이를테면 김황 같은 사람은 이황의 ‘마음’에 대한 논의가
‘(1) 이치를 중심으로 하여 파악하는 측면,
(2) 이치와 기질을 함께하여 파악하는 측면,
(3) 기질을 중심으로 하여 파악하는 측면’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보고,
이중 세 번째 요소는 이이가 이어받아 이이 계열에서 그 학통이 이어져 내려간다고 본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시각이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이이를 이황 학파 속에 집어넣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을 터이다.
어떠한 측면에서 이이가 이황으로부터 영향받고 있음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총체적으로 조감하여 볼 때, 이이는 그의 학문세계를 독자적인 영역에 구축하고 있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이가 이황 학파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황이 조선 중기와 후기의 역사 속에서 갖는 위상과 그 영향력이
축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도 아니다.
어쨌든 이황 철학의 조형은 그 이후의 정신사의 흐름을 결정하는 나침반 역활을 하는 것이라
이야기 할 수 있다. 이 점은 특히 영남계열 학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거의 신앙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남계열 학문의 양태는, 그것이 갖는 정치사회적인 태도와 입장이 어떠하든,
끝까지 이황의 권위나 그 사상적 특징은 포기되지 않는다고 말하여도 크게 그릇된 것이라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일 것이리라는 말이다.
이황 학단의 흐름 속에서 이이 계열을 배제할 때,
이황의 학문적 입장은 크게 세 갈래의 흐름으로 계승되어 나간다고 말할 수 있다.
류성룡 계열, 김성일 계열, 정구 계열 등이 그것이다.
이 세 문파 중에서 정구 계열은 조금은 이질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정구는 원래 이황과 조식을 같이 스승으로 모셨던 사람이다.
“정구의 학문적 연원은 가학에서 출발하여 오건 에게 기초학문의 터전을 닦고,
이황에게 성현의 학문을 배우고, 조식에게 선비의 고고한 기절을 이어받았다.”고
말하여질 정도로 그의 학문은 다중의 연원관계 속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학문이 그 성취의 정도와는 무관하게 이황의 적통을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사상적 순도를 지켜내는 부담으로 부터
어느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입지를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학통이 근기지방으로 이어져나가 실학파를 형성하여 내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 점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 말 할 수는 없을 터이다.
이황의 학문적 입장과 내용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은
류성룡 계열과 김성일 계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양자는 이황의 학단 속에서 미묘한 경쟁적 관계를 갖는다고 하겠다.
이 두 사람 중 나이는 김성일이 4년 위이나, 출사는 류성룡이 3년 빠르다.
그리고 벼슬로서의 위상은 류성룡이 훨씬 높으나, 이황 문하에의 입문은 김성일이 6년 먼저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이황의 학단 내에서 이들 둘 중 누구를 높이느냐에 대한 미묘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러한 관계는 ‘노계서원’, 후의 ‘호계서원’에 류성룡과 김성일을 배향할 때
누구를 선위인 동쪽에 배향하느냐 하는 문제로 나타난다.
결국 류성룡 계열의 정경세의 입김이 작용하여 류성룡이 선위에 배향되지만,
이 문제는 류성룡 문파와 김성일 문파가 ‘병론’과 ‘호론’으로 대립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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