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의 문파]
류성룡은 이황의 직전제자들 중에서 가장 현달한 사람에 속한다.
이황의 제자들 중에서 현달한 사람을 들라면 우리는 대표적으로 류성룡, 김성일, 정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셋 중에 정구는 안동지방에 지역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이황에게만 수학하는 것이 아니라
오건, 조식 등에게도 배우므로, 이황과의 학파적 연계도 투명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퇴계학파 학맥 속에서는 김성일이나 류성룡 보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안동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퇴계학맥 속에서는, 류성룡 문파와 김성일 문파가 그 학파적
주류의 위치를 어느 쪽에서 차지하느냐를 두고 치열한 경쟁적 관계 속에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학파적 경쟁관계는 병호 논쟁을 통하여 첨예하게 드러난다.
병호 논쟁은 호계서원에 류성룡이 선위인 동쪽에 배향된 것에 대하여 김성일 계열이 반발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리하여 김성일 계열은 호계서원을 장악하여 이 문제에 대한 시비를 계속하여 나가고,
류성룡 계열은 병산서원에 모여서 그에 대한 응전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류성룡이 병산서원에, 김성일이 임천서원에 각각 주향됨으로써 형식상 종료되었지만,
이들 사이의 갈등관계는 조선 말기까지 이어져 나간다.
호계서원에 류성룡이 선위인 동쪽에 배향되도록 결정된 데에는 정경세가 큰 역할을 하였다.
정경세는 이황의 재전제자, 그러니까 이황의 제자들의 제자 중에서는 제일 현달한 사람에 속한다.
따라서 그의 입김이 논의 과정에서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결정된 이후에 호계서원이 김성일 사람들에 의하여 장악된다는 것은, 비록 정경세가
제일 현달하여서 퇴계 이황의 재전제자들을 대표하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안동지역에서의 세력은 김성일 문파가 더 강성하였음을 의미한다.
호계서원에서의 논의의 진행과정을 놓고 이러한 식의 해석을 하는 것은 어쩌면 상황을 너무 과장하여
보는 것이라는 혐의를 모면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을 터이다.
조선시대의 학맥은 지연, 혈연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이른바 통혼관계와 거주지역의 문제를 무시하고, 조선시대의 학맥을 따로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김성일은 이 점에서 류성룡보다 우월한 입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성일은 장흥효와 같은 지역에 살았다. 걸어서도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에 김성일과 장흥효는
이웃하여 살았고, 이 점은 장흥효가 김성일 문파로 분류될 수 있는 사제관계를 김성일과의 사이에 일찍이,
그리고 강도 높게 가설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다.
장흥효가 나중에 류성룡 등에게도 출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장흥효를 김성일 문파로 분류하고,
또 장흥효가 스스로 김성일의 제자라고 선언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장흥효가 어느 쪽 문파에 속하는 인물이냐 하는 것은 퇴계학파 학맥을 이야기 할 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장흥효의 외손으로 이현일이 출현하며, 이현일은 그 후의
퇴계학파 학맥의 주류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장흥효는 김성일 문파로 분류된다. 그리고 김성일 문파의 사람들은 안동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러나갔다. 이현일은 영해 사람이지만, 만년에는 안동으로 들어와 강학하였고,
이현일과 이재의 강학을 통하여 안동 일원의 많은 사람들이 이 학맥에 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김성일 학맥의 중심지는 안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류성룡의 학맥은 양상이 조금 다르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류성룡의 학맥은 류성룡 사후 정경세에 의하여 대표된다. 정경세는 상주에 칩거하였다.
따라서 류성룡 학맥은 상주 일원으로 중심지가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안동에서는 세가 약하여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호계서원을 김성일 계열의 인물들이 차지하여 버리는 것을 통하여 증명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류성룡의 문파는 안동을 중심으로 하여 볼 때에는 그 중심적 흐름을 포용할 수 없게 된다.
김성일의 문파보다 상대적으로 빈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동 일원의 류성룡 문파를 말하자면, 류성룡의 아들 수암 류진, 조카 졸재 류원지, 오미동의 김봉조,
류성룡의 제자 동리 김윤안, 김윤안의 아들 만기당 김기후, 김기후의 아들 추담 김여만,
정경세에게 배운 목재 홍여하, 역시 정경세에게 배운 석문 정영방, 그들보다 얼마쯤 후대에 속하는
삼소재 김영락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병도 선생은 그의 한국유학사에서 류성룡 계열의 학통을 ‘서애 류성룡-우복 정경세-수암 류진-
졸재 류원지’로 이어 놓는다. 가학의 전통을 중심으로 하여 류성룡의 학통을 이해한 것이라고 하겠다.
류진은 1582년에 태어나서 1635년에 타계한다. 그는 서애 류성룡의 셋째아들이다.
그의 자는 계화이고, 호는 수암이다. 그는 류성룡이 조정에 출사하고 있을 때 임지인 서울에서 태어나며,
3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생애의 절반 가량을 하회에서 지낸다. 37세 때 상주의 가사리로 분가하여
나가기 전까지는, 하회에서 살았던 것이다.
류성룡의 진전을 이은 사람이 정경세라면, 정경세와 함께 아버지 류성룡의 학문을 이어받고,
또 정경세로부터 배우기도 한 류진이 상주로 거처를 옮겨서 생애의 후반부를 대부분
상주에서 지냈다는 것은, 류성룡의 학통이 안동에서는 얼마쯤 세력을 잃고 상주를 중심으로 하여
퍼져나갈 수밖에 없게 한 또 다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정경세, 류진, 이전 이준 전식 조익 등, 류성룡 학맥의 제 2세대 인물들이 모두 상주에
거주하였던 것이 이러한 현상을 필연적으로 결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류진은 10세에 김치중에게서 처음으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6세 때에는 경암 노경임의 문인이된다.
경암 노경임은 그의 백부 류운룡의 사위이다. 그러나 류진은 18세(1599) 때 쯤부터는 임진왜란 후 낙향한
부친 류성룡으로부터 직접 수학한다.
그는 1610년에 29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12년에 해서지방에서 일어난 김직재의 옥사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그에게 최초로 벼슬이 주어지는 것은 1616년의 일이다.
이 때 그는 유일로 추천되어 세자익위사세마로 임명되나, 출사하지 않았다.
그가 벼슬살이를 시작하는 것은 1623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봉화현감 직책을 맡으면서부터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후, 벼슬살이에 나가기 전에 그는 부친의 제자인 정경세에게 가 배우기도 하였다.
정경세는 명종 18년(1563)에 상주 율리에서 태어나서 인조 11년(1633)에 역시 상주 매호에서 기거한 사람이다. 그는 자가 경임이고, 본관은 진양이며, 호는 우복이다.
정경세는 18세에 당시 상주목사로 와 있던 류성룡의 문인이 된다.
상주목사 시절에 류성룡의 문하에 든 인물들로는 정경세 외에도 이전 이준 형제를 들 수 있다.
정경세는 24세에 벼슬살이를 시작하며, 임진왜란 후에 북인의 탄핵을 받아 류성룡과 함께 향리로 낙향한다.
정치적 진퇴를 류성룡과 함께 한 셈이다.
류진은 이렇게 아버지 류성룡의 분신과도 같았던 정경세에게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부친으로부터 전하여 받은 가학의 전통을 더욱 강화시켜 낼 수 있었다.
류진의 벼슬살이는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봉화현감, 형조정랑, 청도군수, 지평 등의 직책을 거치고,
증직으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의 벼슬살이 중 마지막 직책은 사헌부 지평이었는데, 이 때
장령의 직책에 있던 강학년 사건에 연루되어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게 된다.
강학년이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정권을 비난하여, 그를 비판하는 논의가 크게 일었는데,
류진이 그를 두둔하고 나서서 대간들의 공격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여 영남으로 돌아온다.
그 후 그는 영주 귀학정 따님댁에 머물던 중 갑자기 병을 얻어서 타계한다.
그는 특히 동리 김윤안의 아들 만기당 김기후와 친교를 맺어서, 두 가문이 아주 한 집안같이 지냈다고 한다.
수암 류진의 학문은 특별한 특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아버지 류성룡과 정경세 등 여러
학자들로부터 성리학적 이치를 충실히 학습한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줄 따름인 것이다.
수암 류진의 조카 류원지는 초명이 경현이고, 자가 장경이며, 호는 졸재이다.
그는 서애 류성룡의 손자로써, 류진의 형인 장령 유여의 아들이다. 그는 류성룡과 류진에게 학문을 베웠다.
황간현감, 진안현감 등을 역임하였고, 1637년의 병자호란 때는 안동 의병장 이홍조와 같이 활약하였다.
그는 성리서에만 치중하지 않고 폭 넓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히 예설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이황의 이기설을 옹호하여 ‘기운의 발용’만을 승인하는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기도 하고, 송시열의 1년 복상론을 비판하고 3년 복상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류원지의 입장과 태도는 류운룡 종파의 류세철에게 전하여진다. 류세철은 현감 유원리와
고창 오씨 사이에서 탄생한 5형제 중 넷째인데, 류운룡 종파로 양자 가서 류원식의 후사를 잇는다.
그리하여 류중영-류운룡-류주-류원식-류세철로 이어지는 풍산류씨 종파의 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류세철은 송와 류원정과 졸재 류원지로부터 배운다. 졸재 류원지는 류세철의 재종숙부이다.
류세철은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을 기년제로 하기로 한 것을 반대하는 영남 상소운동의 소두로 활약한다. 안동유림을 주축으로 하는 영남 유림은 병산소회를 통하여 류세철을 소두로 하는 상소운동을 의결하는 것이다. 류세철의 나이 40세 때의 일이다.
류세철이 소두가 된 영남 유림의 의례소는 기해예송의 결과를 폐기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현종 15년에 인선왕후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을 때,
남인이 승리하여 정국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하는 초석이 된다.
상소운동의 결과 유벌에 처해졌던 류세철은 나중에 갑인예송의 결과 재경남인이 주도하는
남인정권이 등장하자 천고로 내시교관으로부터 시작하여 공조좌랑에 이르는 벼슬살이 시기를 거친다.
그러나 그는 재경남인 주도의 남인정권에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며, 숙종 7년(1681)에 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나이 55세 때의 일이었다.
류세철이 특별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가학과 성리설로부터 전해받은
주자학적 이치를 실천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였던 평범한 지식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그의 삶의 지표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다.
“나의 일생은 사실 볼만한 것이 없지만 한번 옳다고 마음을 정하면 돌이키는 법이 없었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것은 없으며, 옳다는 것을 알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다행스럽게도 커다란 수치와 모욕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컨데 너희들은 하나의 심(마음)이라는 글자에 마음을 두어 욕됨을 당했다고 함부로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 가운데 무한히 좋은 일도 있으니 깊이 힘쓰도록 하여라.”
풍산류씨 일문에서 살펴볼 수 있는 가학양상을 제외하고, 안동 일원에서 류성룡의 학맥이 본격적으로
전하여진 것은 아마도 구담의 순천김씨 가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윤안은 정경세와 더불어 류성룡의 직전제자 중에서 가장 주목되어야 할 인물인 것이다.
벌써 여러대 동안 구담에서 세거하여 왔던 순천김씨 가문은 김윤안 시대에 이르러 걸출한
문학적 재능을 갖춘 인물을 배출하여 내는데, 그가 바로 김윤안이다.
김윤안이 서애 류성룡의 학맥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문이 세거하였던 구담으로부터
류성룡이 살았던 하회가 지척거리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윤안의 아버지는 김박인데, 건공장군을 역임한 사람으로, 배위가 진성이씨이다.
퇴계 이황의 제 3형인 이의의 따님이 김윤안의 어머니이다.
김윤안은 그 김박과 진성이씨 사이에서 5남 중 다섯째로 태어난다.
김윤안의 큰 아들?(형) 김윤흠은 성균생원으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든 사람이다.
그렇게 김윤안의 가문은 퇴계 이황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추고 있었다.
김윤안은 자가 이정이고, 호가 동리이며, 1560년에 출생하여 1622년에 타계하였다.
그는 4세에 모친을 따라 예안의 외가에 가서 퇴계 이황을 만난다.
“선생(김윤안)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태어났고, 기상이 범상치 않아서,
퇴계는 선생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서 훗날 뛰어난 사람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동리선생문집의 「년보」에 보이는 구절이다.
동리 김윤안의 기재는 일찍부터 드러났던 모양이다.
그의 기재는 10세에 지었다는 시를 통하여서도 확인된다.
“천지의 반을 뒤덮고
만고의 원기를 머금었네.
내 마음 속에도 바다가 살고 있으니
장부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리.”
10세의 나이에 지은 것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시라고 하겠다.
김윤안은 12세에 4형 송음공을 따라 소고 박승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리고 18세 되던 해에는 겸암 류운룡을 찾아가서 하회에 머물면서 배웠는데,
류운룡은 김윤안을 중히 여겨서 자식들과 같이 거처하게 하면서 가르쳤다.
겸암 류운룡은 중종 34년, 서기 1539년에 하회에서 출생한다. 그의 자는 응현이고, 처음의 자는 이득이다.
그는 6세 때부터 학업을 시작하여 15세에 이르면 소학, 4서, 그 밖의 여러 경서와 역사서에 통달한다.
그는 17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성리학 수업을 시작한다.
29세때 그는 입암 위쪽 경치 좋은 곳에 겸암정사를 짓는데, 그 편액을 이황이 써 준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 겸암을 자신의 호로 사용하게 된다.
겸암 류운룡은 음직으로 벼슬길에 나서서 의금부 도사를 제수받는다. 이 때가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는 벼슬살이를 중단없이 계속하지는 않았다. 그의 벼슬살이는 간헐적으로 이어지며, 벼슬을 살기 위하여
하회를 떠나 있었던 때는 통털어서 몇 년 되지 않았다. 그의 벼슬은 통정대부 원주목사에 이르고,
그에게는 증직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 벼슬이 주어진다. 그가 타계한 때는 서기 1601년, 향년 63세였다.
겸암 류운룡은 벼슬길에 나가있던 몇 년을 빼 놓고는 생애의 대부분을 하회의 집을 지키면서 보냈다.
따라서 서애의 학맥은 우선 겸암과 무관할 수가 없었다. 서애는 대부분 하회에서 떠나 있었으므로,
서애에게 배우고자 하였던 학생들은 우선 겸암에게 배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윤안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김윤안도 류성룡에게 배우기 전에 먼저
류운룡에게 배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김윤안은 19세 되던 해에 서애 류성룡을 만나 배움을 청한다.
그 이후 류성룡이 여가를 얻어 하회로 돌아올 때에는 매양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22세 때에는 학봉 김성일에게 찾아가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렇게 여러 선생을 모시고 배우지만 아마도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은 서애 류성룡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동리선생문집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서애 문하에서 가장 오래 배웠고,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다.”
김윤안을 서애 류성룡의 문하로 분류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동리 김윤안은 뛰어난 문재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사회적 책임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국난의 시대에 떨치고 일어나 의병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임진년 병화가 일어나자 2형 안음공이 처음 의병을 일으켰고, 공도 그를 따랐다.
그러나 이미 강좌의 상류쪽 의병은 모두 내한 김해에게 다 속하여지게 되었으므로 처음서부터 끝까지
그 막하에 참여하여 문서를 쓰는 일을 다 주관하니, 모든 사람들이 그 재능에 탄복하였다.”
동리선생문집의 「행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김윤안이 김해의 의병진에 참여하여 있을 때 안주에 있던 서애 류성룡은 서찰을 보내 특히
김윤안을 격려하였다. 김윤안과 류성룡 사이의 관계를 알게 하여주는 부분이다.
김윤안은 1600년에는 류성룡의 명을 받아 하회에 있는 서애의 ‘옥연서당’에서 오동정 김태와 함께
「퇴계선생년보」를 편찬하는 일에 종사하며, 1604년에는 45세의 나이로 영남 유생들의 이언적을 변호하고
‘5현’의 문묘배향을 청하는 상소행위의 소두로써 활동한다.
그 때 이언적을 포함하는 5현을 문묘종사 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광범하게 일고 있었으나,
선조 임금은 1545년 ‘을사사화’ 때의 이언적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있어서 유림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영남 유생들은 김윤안을 소두로하여 이언적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이다.
“신들이 삼가 전후 성비를 살펴보건대, 이언적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시는 것은 어찌 이언적 같은
현명함으로 융숭하게 대우받는 때를 만났으면서도 나아감에 있어는 의연하게 우뚝 서서
화가 일어날 기미를 억제하지 못하였고, 물러감에 있어는 기미를 알아 용퇴하여 산림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지 못하였는가 하면, 죄 없는 이들이 무참한 화를 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입을 다문 채 반열을 따라만 다니면서 한 번도 바로잡거나 제지하지 않음으로써 선왕께서
의지하여 부탁하신 뜻을 저버렸다는 것으로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김윤안은 상소문 속에서 이렇게 임금의 생각을 측량하여 보고 나서 변론을 시도한다.
“아, 이언적이 만났던 시대가 과연 어떠한 때였습니까? 중종 때를 만났었으나 갑자기 임금이
승하하는 슬픔을 만났고, 다시 효릉 때를 만났으나 또 불운의 변을 당했습니다. 간사한 무리들이
수렴청정하는 때를 타고 참소가 행해지기 쉬운 …종사는 위기일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세속을 버리고 멀리 가버리기에는 시대가 그럴 수 없었으므로 위태로운 조정에서 부지런히 힘쓰고
사군을 보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중정의 도를 지키고 조용하게 유지시켜 가는 한편 임금의 마음을 계적하여 은밀히 화란의 기미를 해소시켜야만이 간신들의 음모를 저지시키고 종사를 부지해 갈 수 있었습니다.”
이 상소문을 통하여 볼 때 우리는 김윤안이 무조건 물러나 깨끗함을 지키는 것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 여건 속에서 어떻게 유학적 이상의 구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가를 생각하였던 사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윤안의 이러한 상소는 임금의 긍정적인 답변을 듣는다.
그리하여 김윤안은 다시 영남 유림의 소두로써 5현의 문묘배향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는 것이다.
“신들은 멀리 궁벽진 지방에 있으므로 소식이 서로 막혀 이미 반유들이 상소할 때에도 참여하지 못하였고,
또 따로 향유의 소장도 갖추지 못했으니, 30년이래 사문에 많은 죄를 졌습니다.
무릇 온 나라 사람들이 친절하게 훈목받아 온 것은 아조의 유선들 만한 이가 없는데, 이른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 곧 그들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존사하는 특전을 내리는 것은 곧 제왕이 공덕을 존숭하여 보답해 주고
다사들의 표준이 되게 함으로써 국가의 원기를 삼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남 유림이 상소를 접하고 선조는 정시를 보여 위로하게 하였다. 김윤안은 이 시험에서
장원에 뽑히나 급제로 간주되지는 못하였다.
이 때 이후로 김윤안은 여러번 천거를 받게 되고, 드디어 선조 38년(1605), 그의 나이 46세 되던 해에
소촌도 찰방이 된다. 찰방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가 1612년, 53세의 나이에 이르러 그는 문과에
갑과 2등으로 급제하고, 대구부사에 까지 이른다. 그러나 때는 광해군 시절이었다.
그는 소촌도 찰방 직책에도, 대구부사 직책에도 최선을 다하기는 하였지만, 불만스러운 사회를 앞에 두고
진퇴의 문제는 언제나 그를 괴롭혔던 모양이다. 하긴 중년에 현실비판적인 시를 쓰기도 하였다는 김윤안이다.
“필자는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안동의 선비 가운데서 동리만큼 격렬한 사회비판시를 쓴 사람은
별로 보지 못하였다.”
주승택 교수가 김윤안에 대한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김윤안은 문학적 재능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김윤안이니 현실 속에 참여하여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하였다고 하여도, 여전히 억눌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고, 진퇴에 대한 고민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충
분히 예측하여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김윤안은 1615년에 대구부사 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고, 1616년에는 10년 동안 지어오던 소우당을 완성시켜 칩거한다.
“…죽림화훼는 없고 오직 국화 두어떨기가 있을 뿐…당호는 진의 절개높은 선비 도연명의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근심을 달랜다’는 말에서 취한 것…당의 동쪽에 나즈막한 울타리가 있는데 그것을
동리라고 명명하고 자호로 삼았으니 또한 도연명의 ‘동쪽 울타리(동리)에서 국화를 꺾어들고 망연히
남산을 건너다본다’는 시귀에서 취한 것…”
이정섭이 동리선생문집의 「해제」에서 쓰고 있는 말이다. 만년의 김윤안은 이렇게 도연명에 취하여
자연에 묻혀 살면서도 세상에 대한 걱정의 끈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윤안은 숙부인 능주 구씨와 숙부인 영양 남씨를 배위로 두었다. 그는 세 아들을 낳았다.
김윤안의 큰아들 근후는 자가 덕무이고, 통덕랑을 지냈다.
김윤안의 둘째아들 기후는 김윤안의 첫째 형 윤문에게 양자 가 큰 집의 가계를 이었다.
김기후는 자가 덕유이고, 호가 만기당이다. 만기당은 어려서 ‘숙부 찰방공(김윤사)을 따라
겸암 류운룡을 만나 보았는데, 겸암이 시를 써 보게 하고 기특하게 여겼다’고 하며, 중부 부솔공이
매양 가문을 빛낼 기재로 여겼다는 기록이 만기당유고 속에 보인다.
김기후는 만년에는 주자의 책에 침잠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특히 류성룡의 아들
류진과 친교를 맺어서, 두 가문이 아주 한 집안같이 지냈다고 하는 점은 앞에서 밝힌 바이다.
“계유년 3월 25일, (김기후가) 집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52세였다. 수암 류진이 통곡하며 말하였다.
‘이 사람의 죽음은 어찌 고장의 불행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집안의 불행이기도 하다.’
양가가 서로를 생각하는 정을 이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만기당유고의 「묘지」에 보이는 글이다.
김기후는 영가 권씨와의 사이에서 여만을 낳았다. 김여만은 자가 회일이고, 호가 추담이며,
세칭 기산처사라고도 한다. 추담 김여만은 추담선생집을 남기고 있는데,
‘이유장의 「행장」’과 이성이에게 준 「인인설」이 취할 만하다.
순천김씨 동리공파는 김윤안으로부터 추만 김여만에 이르는 시기 동안 근동에 문명을 드날린다.
서애 류성룡의 8대 주손은 류상조이다. 그는 1763년에 출생하여 1838년에 타계하였다.
그는 17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풍안군에 봉하여졌다.
그는 가학의 전통을 이었으며, 삼소재 김영락은 그에게 수학하였다.
삼소재 김영락은 김종락이라고도 하는데, 그의 삼소재문집에는 풍안군 류상조를 애도하는 시가 있다.
“백년 부자(류성룡을 의미함) 집에 우리 당의 유종이 다시 나셨네.
청빈은 선생의 참 훈업이요 겸손은 진실로 덕으로 포용했네.
바다를 건너심은 사신을 따름이요. 변방의 봉화는 서울을 지킴일네.
영남의 쇠한 운이 어찌 됨인고? 학서선생 이 겨울에 또한 가셨네.”
이 시에 학서 류이좌의 죽음이 같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학서 류이좌가 죽은 후 풍안군 류상조가
또 타계하였던 사정을 반영한다.
풍안군 류상조는 졸재 류원지의 학통을 이었다. 류성룡-류진-류원지로 이어나온 서애 류성룡 가문의
가학이 다시 그 종손인 풍안군 류상조에게 전하여지는 것이다.
풍안군 류상조는 서애 류성룡의 주손으로, 졸재 류원지의 6대손이다.
그의 부친은 류종춘으로 호가 외재이다. 외재 류종춘은 의금부 도사를 지냈고,
이조판서가 증직으로 주어졌으며, 풍은군에 봉하여졌다.
류이좌는 서애 류성룡의 8대 손으로, 1763년에 나아서 1837년에 타계하였다.
그는 하회 북촌에 화경당을 창건한 사람이다. 그의 자는 사현이고, 호는 학서이다.
첨지 중추부사 류사춘과 연안 이씨를 부모로 하여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79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로부터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으며, 호조참판에 까지 이르는 벼슬생활을 30년 이상 계속하였다.
그는 예조참판을 역임한 다음에는 향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삼소재, 김영락(종락)과의 학문적 인연은 그 때 맺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삼소재문집에는 학서 류이좌가 쓴 「삼소재기」 한편이 전한다.
이 글 속에서 그는 ‘삼소재’의 ‘소’를 해석하며 반고의 시, 태극에 대한 논의,
논어, 시경 ,역경 등을 종횡으로 누비며 ‘흰색’에 대한 의미를 찾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사례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식견이 넓고 깊음을 알려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삼소재문집에는 김영락이 학서 류이좌에게 보낸 두 편의 편지글과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그의 추도시는 다음과 같다.
“학서 옹이 우리를 버리시니 병산의 많은 선비 문을 잃었네
마음의 요결은 이름난 조상에게서 이었고 가정의 명성은 후손에 부치네.
세곳 고을살이 동안에도 효성으로 부모를 모시었고 4대 임금의 조정에 충성을 다하였네.
우리 당의 대들보 부러진 슬픔 상여 잡고 저승에 눈물 뿌리네.”
김영락은 자가 기언이고, 호가 삼소재이며, 나중의 이름은 종락이다.
그는 안동김씨(상락김씨)로 아버지 김도언과 어머니 청주 정씨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김도언의 호는 금산자로, 서애 류성룡의 6대 손인 임여재 류규의 제자이다.
임여재 류규는 천거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돈녕부 도정을 역임하였다.
김영락은 정조 22년(1796)에 출생하였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8세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고독한 초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27세 경에 풍안군 유상조와 학서 류이좌의 문화에 들어 학문에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집에 ‘삼소재’란 현판을 내걸고 소박하게 일생을 살았다.
‘삼소’란 ‘세 가지 깨끗함’, ‘세 가지 소박함’을 뜻하는 것으로,
김영락이 용천거사 김기원에게 스스로 밝힌 ‘삼소’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소산에 사니 사는데 소박함이 그 하나요, 소찬을 먹으니 먹는데 소박함이 그 하나요,
소리를 행하니 행실의 소박함이 그 하나로, 합하여 ‘삼소’라고 이름함이다.”
위의 말은 이 세 가지의 소박함이 바로 그의 인생의 좌우명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생의 지표를 집약하여
그는 ‘삼소재’라는 당호를 지었고, 그것을 자신의 자호로 쓰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삼소재 김영락은 41세에 의흥의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문과 급제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정자와 주자의 글과 심경, 근사록을 즐겨 읽었다고 하며, 65세 때부터는 지곡서당을 지어
인근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았다. 그는 1875년, 80세의 나이로 타계한다.
“을해년 유월 사일 정침에서 졸하니 향년 팔십이다. …그 해 4월 수직으로 통정에 올랐는데,
직첩이 늦게 도착하였으므로 예조에 반납하였으나, 임명은 이미 생존 시에 이루어졌으니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하므로, 사당에 고유하고 분황하였으므로 귀신과 사람의 한이 조금은 풀렸으리라 여기지만,
공의 본성에 맞지 않는 바이니 어찌 족하다 하리오.”
완산 류만식이 그의 「묘갈명」에서 적고 있는 말이다.
그의 문집에는 ‘백성’들을 착취하는 ‘3정’의 폐단에 대한 관심이 보이고, 성리학적 덕목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살펴진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나 손님을 맞는 법 등에 대해서 까지
가문의 생활규범을 만들어 두고 스스로도 지키고, 집안 사람들에게도 지키도록 하였다는 것이나,
다른 사람보다 특히 ‘열부’를 찬양하는 글을 많이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가 성리학적 덕목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증거하여 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그에게 있어서 또 하나 특징적으로 살펴지는 것은 생업을 중시한 점이다. 그는 성현들의 이치를 담고 있는
책 중, 특히 유학의 중심 경전인 ‘7서’ 중에 농업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책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주역, 상서, 대학, 논어, 맹자,시경 등에서 일일이 농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을 하나씩 찾아 적어놓고는 ‘농업이 백성들에게 있어서 어찌 중요하고 큰 일이 아니겠는가’하는 식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명문거족이 성가를 유지해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생업의 토대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인데, 자신들의 가문은 생업을 도모하지 못하여 가문의 성가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생업의 문제에 유념하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후손들을 경계하기도 한다.
이렇게 김영락의 삶과 사상은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생활 주변에서 도덕을 구현하고 삶의 소박한 품격을
갖추어내는 것을 중시하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안동지역의 류성룡 문파는 크게 현달한 사람이나 대 사상가를 배출하여 내지는 못하였다.
안동지역 류성룡 문파의 중요한 자원들은 류성룡의 가문에서 대대로 배출되었고, 그 밖의 사람들로는
중요한 인물들을 많이 양성하여 낼 수 없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안동지역에서 배출된 사상사적 중요성을 띠는 인물들이 대개 김성일의 학맥과 연결된다는
점과도 무관할 수 없는 일이다.
안동지역에서 살펴볼 수 있는 류성룡 문파의 사람들은 퇴계 이황의 입장과 학설,
서애 류성룡의 입장과 학설을 성실히 이어받고 있는 사람들이고, 특별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자학적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활과 행위를 통하여 주자학적 세계를 펼쳐내는 기본적 원칙에 충실하며, 개인적 삶과 사회적 삶에
주목하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 점에서 그들은 이황 학설의 특정을 이론적으로 심화시켜 내는 학술적 태도를 만들어 나갔던
김성일 문파의 사람들과는 어느 만큼 다른 자리에 놓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하겠다.
<윤천근 : 안동대 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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