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복야파의 한갈래 - ** [출처 / "안동에 왔니껴"(류희걸 저) ** |
이곳은 영가(永嘉)의 거족(巨族) 안동 권씨 권태사(權太師)의 후예(後裔) 14개 파 중의 하나인 복야파(僕射派)의 한 갈래가 500년을 세거(世居)해 온 부락이다. 우선 마을의 생김새부터 예사롭지를 않다.
안동의 진산(鎭山)인 학가산(鶴駕山)]의 줄기가 서남으로 뻗다가 풍산(豊山)평야(平野)의 모서리에서 우뚝하니 정산(井山)을 이르켜 두 봉우리가 나란히 맞섰으니 곧 동은 좌청룡(左靑龍) 서는 우백호(右白虎)다. 뒤에는 정산의 암벽이 병풍처럼 둘렀고 앞에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동서로 누벼 흘러 웅혼가려(雄渾佳麗)한 풍광과 아울러 산수(山水)의 이(利)를 골고루 갖춘 천혜(天惠)의 마을이다.
여기는 일찍이 고려 때 왕씨에 이어 류씨가 살아 왔다는 이 마을에 권씨가 깃들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였다. 그 터전을 열기는 세종때 정랑(正郞)을 지낸 권항(權恒)이다. 그는 이 마을 호부(豪富)였던 장인 류서(柳湑)로부터 부근의 임야와 많은 전답을 물려받음으로써 이곳에 전거(奠居)하게 되었다.
인하여 그 후손들이 여기에 500년을 세거하면서 문한(文翰)이 연면(連綿)했으나 영달(榮達)을 탐하지 않고 맑은 기풍을 이어내려온, 주로 실천(實踐) 도덕(道德)의 선비들이었다.
구한말 구국(救國)운동(運動)에 이바지한 지사(志士)들이 여러 분 있고 그중 이역에서 광복대업에 생애를 바치면서 어쩌다 좌익에 가까이 했던 까닭으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아까운 분들도 있었다.
자연(自然) 환경(環境)이 이토록 아름다워 풍요로움 위에 풍속(風俗)이며 인정(人情)은 더욱 순후(淳厚)하고 두터운 가일의 지주(地主)집들은 추수(秋收) 때 곡수(穀數)를 아무리 박하게 가져오거나 혹 사정에 의하여 전혀 못내는 소작인(小作人)이 있어도 따지거나 독촉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몇몇 큰집들은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오가는 과객들을 맞이하여 몇 일씩 묵어 가도록 하였으며 떠날 때는 반드시 노자(路資)까지를 주면서 적선(積善)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항상 느긋하고 훈훈한 인정으로 온 이웃이 함께 화기(和氣)가 넘쳤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을 태양처럼 아름답다고 가일(佳日)이라 했음이 아닐는지?……
▣ 안동 권씨 14개 파(派)의 계보(系譜) 상고
1]수중파(守中派) : 수중(守中)을 파조(派祖)로 한다. 영주단산 등지에 사는데 복계군(福溪君) 권정(權貞)이 있다.
2]시중파(時中派) : 고려 부호장(副戶長) 시중(時中)을 파조로 한다. 신기도령(神騎都領) 권만기(權万紀) 등이 있다.
3]추밀파(樞密派)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수평(守平)을 파조로 한다. 고려와 조선에 걸처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고려 충렬왕 때 찬성사를 지낸 단(㫜),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를 지낸 보(溥), 찬성사(贊成事) 준(準), 적(適), 형(衡), 용(鏞), 호(鎬), 문하부사(門下府事) 균(鈞), 직제학(直提學) 주(鑄), 찬성사(贊成事) 충(衷) 외에도 고려시대에 충신이 많았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국초 문운에 크게 기여한 성리학자이며 문학의 대가인 양촌(陽村) 권근(權近),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은 권제(權踶), 우찬성(右贊成)에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지은 권람(權擥), 성종 때 판서를 지낸 찬(攢),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균(鈞), 명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철(轍), 임란 때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慄), 선조 때 대시인(大詩人) 필(韠), 판서(判書) 징(徵) 등 그 외에도 명인들은 혜아릴 수도 없이 많다. 시호(諡號)를 받은 분만도 26인이고 군(君)으로 봉(封)한 사람은 25인이나 된다.
4] 복야파(僕射派) : 고려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수홍(守洪)을 파조로 한다. 고려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자여(子與), 우정승(右政丞)을 지낸 한공(漢功) 등 명신이 많으며 조선에 와서도 인(靷), 개(玠), 주(柱), 질(礩), 전(磌), 벌(橃), 호문(好文), 위(暐), 구(榘)등 명인 학행이 많았다. 복야파(僕射派)는 안동의 가일(佳日), 솟밤, 도촌, 길안의 송사, 요촌, 법곡, 봉화 닭실, 예천저곡, 용궁, 삼가, 안의, 단성, 진해, 상주, 정읍, 부여, 임천, 영천, 입암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5] 동정파(同正派) : 고려 호장동정(戶長同正)을 지낸 체달(棲達)을 파조로 한다. 화원군(花原君) 희학(喜學)등이 있다. 안동 법상, 남선과 길안 용계(龍溪)에 산다.
6] 좌윤파(佐尹派) : 고려 호장(戶長) 좌윤(佐尹)을 지낸 지정(至正)을 파조로 한다. 세종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진(軫), 단종(端宗)의 충신(忠臣) 산해(山海) 등이 있다. 경주 국동(菊洞), 비안 석정(石井), 감천 석남(石南) 등에 산다.
7] 별장파(別將派) : 고려 별장(別將)을 지낸 영정(英正)을 파조로 한다. 춘란(春蘭), 태일(泰一) 부자와 임난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전사한 희인(希仁) 등이 있다. 와룡, 의성 신평에 산다.
8] 부정파(副正派) : 고려 식록부정(食祿副正)을 지낸 통의(通義)를 파조로 한다. 고려 홍건적 난리에 공헌한 자형(子衡), 현덕왕후의 아버지 전(專), 자신(子愼), 명종때 판서를 지낸 예(輗) 등이 있다. 납곡, 군위, 영해에 산다.
9] 시중파(侍中派) : 고려 시중(侍中)을 지낸 인가(仁可)를 파조로 한다. 성종 때 판서를 지낸 함(瑊), 숙종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돈인(敦仁) 등이 있다.
10] 중윤파(中允派) : 고려 호장(戶長) 중윤(中允)을 지낸 숙원(叔元)을 파조로 한다. 진사와 군수 등이 있다.
11] 대의파(大宜派) : 고려 호장을 지낸 대의(大宜)[태사 권행의 9대손]를 파조로 한다.
12] 추파(樞派) : 고려 호장 추(樞)를 파조로 한다.
13] 검교파(檢校派) : 고려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척(倜)을 파조로 한다. 고려 절신 정(定), 중종때 대사헌(大司憲)인 민수(敏手) 등이 있다. 함창, 영주 등에 산다.
14] 군기감파(軍器監派) : 군기감(軍器監)을 지낸 사발(思拔)을 파조로 한다. 첨의평리(僉議評理), 윤명(允明) 등이 있다.
▣ 가일 입향조 권항(權恒
자는 변지(變之), 1403년에 나서 1461년에 졸했다. 144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거창현감(居昌縣監), 교서관(校書館) 교리(敎理), 공조(工曹), 호조(戶曹) 정랑(正郞),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 등을 역임하고 세조2년에는 영천군수(永川郡守)로 부임하여 임소(任所) 에서 몰하니 향년(享年) 59세이다.
공은 가일의 부호 류서(柳湑)의 사위로 처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로 인하여 가일로 옮겨 살게 되었으니 곧 가일(佳日)의 입향조 이다. 뒤에 손자 화산(花山)의 귀(貴)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으며 2남3녀(二男三女)를 두었으니 맏은 이(邇)로 종묘서령(宗廟署令)을 거쳐 이조참판(吏曺參判)에 증직 되었고, 둘째 건(建)은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냈다.
부제학(副堤學) 류양춘(柳陽春)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지금에 그 후손들은 가일에 주로 사는데 남후 무릉, 일직 지곡, 풍산 매곡, 괴산, 문경 등 여러 군데서 살고 있다.
▣ 권주(權柱, 1457~1505)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 군수 항(恒)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덕산(德山) 송(宋)씨로 정랑(正郞)을 지낸 원창(元昌)의 딸이다.
세조3년(1457)에 가일(佳日)에서 태어나 8세부터 사서(四書)를 읽기 시작했다. 13세 때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보이는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壯元)을 하였다. <夏雲多奇峰>이란 제(題)에
< 有峰突起天之涯 峨峨嵂嵂多奇奇로 시작하여
....................................................................
側聞炎帝往彼峰 五色王氣橫依俙
我欲擊得仙獄圖 秦上上帝鳴天機
步筆熟視還閣筆 山耳雲耳遠莫知 로
끝을 맺는 14구로 지은 칠언시(七言詩)는 그 유려호방(流麗豪放)한 솜씨가 하도 뛰어나 소년의 작품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경상감사는 그를 불러 다시 시험을 했는데, 앵두가 담긴 소반을 앞에 놓고 갑자기 두드리면서 운(韻)자를 냈다. 그때 소년 화산은 이렇게 즉석 시를 읊었다.
團團佳果滿金盤 色奪西施醉後顔
[이하는 失傳]동실동실 예쁜 열매 금소반 가득, 서시얼굴 취한들 저리도 고울 가!
그러자 감사는 눈이 휘둥그래졌다는 일화가 있다. 그후 그는 위기실천(爲己實踐)학을 힘써 덕성을 기르고 닦았다.
18세에 진사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고, 그 해[1474]에 성종이 친히 보인 문과(文科)에 갑과(甲科) 2등으로 합격하여 출사(出仕)하게 되었다.
공은 이리하여 관계에 나아가 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성절사 강이생으로 연경에 다녀왔고 정언에 있을 때는 검관을 거쳤으며 공조정랑이 되어서는 한어질정관으로 차출되었다. 그로 인하여 명나라를 다녀왔다. 1489년 12월 제포(薺浦)에 왜인들이 우리의 관리를 구타한 사건이 있었다. 이때 임금이 <조관을 대마도에 보내어 도주에게 흉악의 무리를 당장 처벌하도록 하라>고 명을 했다.
그때 조신들이 화산을 대마도경차관으로 뽑아 대마도로 갔다.
간특한 대마도주를 경복(驚服)시켜 어려운 사명을 수행하고 6월에 돌아와 왕에게 복명 하고 곧 홍문관 교리에 승진되었다. 그때 화산이 대마도 사행의<동차록(東槎錄)>은 홍귀달의 글씨로 지금까지 종가에 남아있다.
12월에 성종이 승하(昇遐)하매 화산은 시책(諡冊)과 행장(行狀)을 지었다. 연산군 원년 8월에 사헌부 집의로 자리를 옮겨 숭유(崇儒)억불(抑佛)과 노사신(盧思愼)과 윤필상(尹弼商)을 탄핵하여 여러 차례 상소했으며 동년 4월에 직제학(直提學) 우부승지를 거쳐 편수관으로 성종실록을 편찬했다.
연산주가 온갖 비행을 자행(恣行)하면서 직간 하는 신하들을 꺼려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자신의 거동에 대한 참견을 막고자 바른 신하들을 승정원(承政院)에 모아 날마다 시를 지어 바치게 했다. 그때 화산은 따끔한 풍간(諷諫)의 뜻을지닌 글을 썼으니 곧 다음이 그것들이다.
<因讒親讐>, <非命被戳>, <不回頑風>, <天地不和>
이처럼 대 바른 신하들을 미워하는 연산은 그들을 모두 외직으로 보냈으니 화산도 역시 1503년 10월에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로 밀려났다.
연산의 꺼림을 받아오던 화산은 드디어 금부에 나포되어 태장 칠십을 받고 평해(平海)로 정배(定配) 되었으니 그 죄목은 앞서 성종13년(1482)에 성종비 윤씨가 사사될 때 주서(主書)로 참여했던 까닭이다.
그 이듬해 5월에 또다시 호된 국문(鞠問)을 치르고 태장(笞杖) 팔십을 받았다. 이의 죄목 또한 앞서 임승재(任崇載)[임사홍(任士洪)의아들 성종(成宗)의 사위], 남치원(南致元) 등의 가자(加資)를 미편하게 여긴 사실과 친제(親祭)때 이엄(耳掩)을 벗지 않았다는 죄목이다.
여기서 끝남이 아니고 그해 6월 17일 마침내 화산(花山)에게 사형(死刑) 명령(命令)이 내려지고 말았다. 연산(燕山)은 “회능(懷陵)[연산군의 어머니]이 사약을 받을 때 약그릇을 가지고 갔던 사람이 권주(權柱)이니 마땅히 중죄로 다스림이 어떠한가?” 함에 의정부(議政府)에서는 “교살(絞殺)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했다.
연산은 명하되 “회능(懷陵)이 죄를 받을 때 여러 신하들이 직간(直諫)했던들 선대왕(先大王)의 뜻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지를 않았으니 권주는 죽이고 그 아들은 절도(絶島)에 위리안치(圍離安置)하라” 하였다.
화산을 처형하고 그의 가산을 적몰하여 필동(筆洞)에 있는 장안의 갑류(甲流)라는 화산의 집은 남천군(南川君)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후 중종(中宗)이 즉위(卽位, 1506)하자 적몰(籍沒)되었던 가산(家産)과 관직(官職)을 돌려 받았다.
그해 10월에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겸 홍문관(弘文館) 예문관(禮文館) 대제학(大提學)에 증직(贈職)됨과 함께 그의 자손을 녹용(祿用)하라는 어명(御命)이 내렸고 11월에는 나라에서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묘는 가곡에 있는데 고산(孤山) 이유장(李惟樟)이 묘갈명(墓碣銘)을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은 신도비명(神道碑銘),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전액(篆額)을 썼다. 7대손 구(榘)가 일고(逸稿)를 엮었고 15대손 오근(五根)이 ꡔ입조실록(立朝實錄)ꡕ 1책을 편찬 간행하였다. 뒤에 퇴계는 장조(丈祖) 화산의 묘소를 참배하고 다음과 같이 소회를 읊었다.
明夷蒙難豈非天 茂栢深松鎖翠煙
節行他年應有史 文章千古恨無傳
▣ 사락정(四樂亭) 권질(權礩, 1483~1545)
자는 사안(士安)이며 호는 사락정(四樂亭)이다. 퇴계의 장인이다. 아버지 화산군(花山君)이 화(禍)를 입음에 이어 연산의 난정을 비난하는 궁중 투서(投書)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죄인[화산군]의 자손들의 소행이라고 여겨 공은 그 혐의(嫌疑)를 쓰고 체포되어 국문(鞠問)을 받고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병인(丙寅) 9월[1506]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아버지 화산이 신원(伸寃)됨과 함께 공은 그 음보(蔭補)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어 집경전(集慶殿), 순릉(順陵), 후릉(厚陵)참봉을 역임했다.
그 뒤 아우 권전(權磌)이 앞서 중종16년(1521)에 안처겸(安處謙)이 심정(沈貞), 남곤(南袞) 등의 숙청과 경명군(景明君)의 추대를 모의했다는 무고(誣告)를 입어 장살(杖殺)을 당하매 공 또한 그 일로 예안으로 유배되었다가 인종원년(1545)에 풀려나 병으로 몰(歿)했다.
퇴계가 묘갈명(墓碣銘)에서 ‘아름다운 풍모에 담론에 능하며 들을수록 흥미로워 싫은 줄을 모르게 한다’고 말했듯이 공은 딸 셋중 둘째가 콩, 보리나 분간할 만큼 지능이 모자랐던 형편이어서 상배하고 혼자 있는 퇴계를 불러
“나한테 숙맥 딸이 있다는 건 군도 알 테지만, 당혼이 됐으나 보낼 만한 데가 마땅하지 않으니 뭣하지만 자네가 좀 맡아 주게나”
라고 청하여 할 수 없이 퇴계 선생은 후취(後娶)로 맞이하게 되었다 고 한다.
▣ 병곡(屛谷) 권구(權榘, 1672~1749)
자는 방숙(方叔), 호는 병곡(屛谷), 선교랑(宣敎郞) 징의 아들, 어머니는 풍산 류씨로 현감 원지(元之)의 딸이며 서애 선생의 증손녀이다.
화산[권주(權柱)]의 7대손으로 천품이 영민(潁敏)하여 6세에 벌써 글을 읽었고 때로는 서가의 책을 뽑아 생소한 글을 제법 읽고 해석하므로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섯 살 때 외가인 하회에 갔다가 자물쇄를 그만 거꾸로 잠구어 못쓰게 되었으므로 꾸중하는 외숙을 보고
“제가 고쳐 볼게요. 옛날 제갈공명은 팔진도(八陳圖)도 풀었다는데”라고 하여 너무도 어른스러워 외숙이 놀라게 되었다.
14세부터 선비의 할 일은 벼슬이 아니라 성현을 배우는데 있다하여 더욱 성학(聖學)에 전념했다.
19세 때는 갈암[이현일(李玄逸)]의 손녀와 결혼하여 곧 갈암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병곡의 심오한 학문의 경계는 거의 독학이었다고 한다. 꾸준한 독서와 사색으로 인간완성과 진리탐구의 길에 한결같이 정진하였다.
이렇게 학덕이 깊어감에 겨우 20세 안팎인 그를 사림에서는 우러러 보기 시작하였다. 40세 미만의 젊은 선비를 삼강서원[정포은, 이퇴게, 류서애를 모시는 곳]의 원장으로 추대하였으니 가히 인품과 덕망을 짐작할수 있다.
45세 때는 병산서원 서쪽 산수 좋은 골짜기를 찾아 천석을 즐기며 계곡 절경을 일러 병곡(屛谷)이라 이름하고 ‘병곡(屛谷)’이라 자호하였다. 공은 이곳에서 많은 시를 읊었으니 곧 병산 16절, 병산 21절, 하상 16경, 병산잡록, 병곡기 등이 그것이다.
영조4년(1728)에 조정에서 병곡의 학행을 우러러 천거했으나 이를 마다하였다. 그 무렵은 산적(山賊)들이 들끓어 인심이 흉흉하고 백성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변산의 도적과 영남의 몇몇 인사가 내통했으니 안동에는 제갈공명(諸葛孔明)같은 인물[병곡을 지칭함]이 있는데 그분을 포섭치 못하면 죽이기로 되어 있다>는 등 온갖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난무(亂舞)하였다.
바로 이런 시기에 당파싸움의 여파로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등이 반란(反亂)을 일으켜 청주 등지에서 고을을 짓밟고 드디어 이의 여파는 병곡에게까지 이른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3월 12일 저녁 무렵이었다. 말을 탄 5~6명의 사람이 졸개 5~60명을 거느리고 병곡의 집을 에워쌌다.
그중 한사람이 말에서 내려와 마루 위에 올라오면서 큰칼을 뽑아들고 위협하면서 자기는 문경에 사는 이능좌(李能佐)라고 성명을 대면서 <경종(景宗) 승하(昇遐)에 의혹이 있는데다가 발상(發喪) 전에 영조(英祖)가 등극(登極)한 불의(不義)를 참을 수 없다. 의기를 들었으니 동조(同調)하라>는 것이다.
이때 병곡은 늠연(凜然)히 말하여 가라사대 “영조의 등극은 약간 급한감이 없지는 않으나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된 분이 왕위에 오름은 지극히 당연한 사리가 아니냐? 너희들이 오히려 역에 해당하는 짓을 하고 있다”고 크게 꾸짖어 쫓아 버렸다. 그런데도 병곡은 이인좌의 무리에 공초(供招)되었다고 하여 서울로 압송, 임금의 친국을 받게 되었다.
임금은 병곡의 신상을 파악키 위하여 그의 4대조까지를 물은 뒤
<인좌를 아느냐 ?>
예 압니다. 기사년[영조원년] 섣달에 정산서원(鼎山書院)
[이퇴계, 조월천 묘우]에서 단 한번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서로 무슨 얘기를 했는가?>
그가 육임점(六任占)을 묻기에 총명해 보이는 젊은이가
하필 잡술(雜術)을 배우려 하느냐?라고 대답했습니다.
<너는 인좌와 혐원(嫌怨)이 있느냐?>
혐원이란 별로 없습니다.
<너와 가까운 친구는 누구들이냐?>
이재[밀암(密庵)], 권덕수[포은(逋隱), 김성탁[제산(霽山)] 등입니다.
<개명(改名)한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안동에 너와 동명이 있느냐?>
안동은 넓은 지방이라 동성(同姓)이 많아 동명(同名)이 있을지도 모르나 제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임금 앞에서 국문에 임하는 병곡은 말이나 몸가짐이 너무도 태연하고 의젓하여 조금도 궁색하지 않았다.
임금은 병곡의 목에 씌운 큰칼과 족쇄를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병곡의 갑신록에서] 혐의가 없자 병곡을 즉시 석방했는데 “지금은 밤이 깊어 대궐문이 닫혔으니 나졸을 따라보내 그의 주인집까지 인도케 하라” 하였다.
원래 친국을 마친 혐의자는 그 즉석에서 석방하는 예가 없음에도 이번 일은 특별한 경우라고 분부하여 곧 시행하였다.
선생은 학덕(學德)과 성망(聲望)이 높아지자 원근에서 배우고자 하는 선비들이 많아 집에 따로 서실(書室)을 만들어 이름을 시습재(時習齋)라 하였다.
그의 학문은 경사(經史)며 성리(性理)를 주로 삼아 천문지리(天文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 병법(兵法) 음률(音律)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는 데 가없었다.
영조25년(1749) 정월 28일 서재인 환와재(丸窩齋)에서 몰(歿)하니 향년 78세였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행장을 짓고 성재(性齋)허전(許傳)이 비문을 지었으며 노동서사(魯東書社)에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있다.
▣ 안동시습재(安東時習齋)
화산(花山) 권주(權柱) 선생의 종택(宗宅)이다. 권 화산(花山)은 도승지(都承旨) 경상도 관찰사(觀察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연산군 갑자사화에 연루(連累)되어 세상을 떠났다.
중종(中宗)은 적몰되었던 가산과 관직을 복권시키고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겸 홍문관(弘文館), 예문관(禮文館) 대제학(大提學)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이 건물을 시습재(時習齋)라고 한 것은 화산의 7대손 병곡(屛谷) 구(榘)께서 학덕과 성망이 높아지자 선비들이 배우고자 원근에서 다투어 찾아오므로 서실을 만들어 시습재(時習齋)라 했던 까닭에 오늘날 화산구택(花山舊宅)을 ‘시습재’라고 부른다.
당초에 창건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건믈은 19세기 중엽에 중건 된 것으로 전한다. 본 채와 북쪽에 담으로 별도 구획된 지점에 있는 사당은 병곡[구(榘)]의 부조묘(不祧廟)이다. 대문간 오른 쪽에 사랑채가 있었으나 60년 전에 철거되고 지금은 없다.
종가 집에는 보물 제549호 <權柱宗家文書>와 보물 제1002호인 <權柱宗家文籍>이 보관되어 있다.
◉ 권주종가문서
2종 21장[재산양도문서]인데 권심(權深)의 처 손씨 분금문기(分衿文記)[세조연간], 화산 선생의 가사매매명문(家舍賣買明文)[연산군4년]이다.
◉ 권주종가문적
9종 14점[고문서와 전적]인데 고문서로는 권항(權恒) 선생의 문과급제 교지(敎旨)를 비롯하여 충청관찰사 권주 공에게 발급한 교서(敎書) 등 4종 7점이고, 전적(典籍)으로는 성종12년[1481]에 작성된 성균관(成均館)동방록(同榜錄), 화산의 필첩인 경수첩(敬守帖)등 5종 7책이다.
▣ 가일 수곡종택(樹谷宗宅)[중요민속자료 제176호]
이 건물은 조선 정조(正祖)16년(1792) 권조(權眺)공이 조부 권보(權補, 호 樹谷)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세운 종가집이다. 수곡(樹谷)선생은 권 화산의 8대 손으로 권구[병곡] 선생의 셋째 아들로 평생을 도학에 전념했던 분이다.
건물은 ‘ㄷ’자형 안채와 ‘ㅡ’자형 사랑채 그리고 그옆에 또 ‘ㅡ’자형 별당 채와 대문간을 두루 갖춘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별당의 일지재(一枝齋)는 자손들로 하여금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 기타 지정문화재
1] 권태흥 가옥[중요민속자료 제202호]
2] 선원강당[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5호]
3] 화산 신도비[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65호]
▣ 거부 조수만의 전설
풍천면 가곡 동에는 큰못 하나가 있다. 이 못터가 옛날 거부 조수만의 집터라고 한다. 조수만 이란 사람은 옛날에 아주 부자였는데 1년에 겨자 천석을 수확하고 그가 가진 황소는 얼마나 많았던지 수천명의 군사의 막사를 황소껍질로 포장해도 남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조수만은 욕심이 많아 그 재산으론 만족하지 않고 항상 엉뚱한 생각을 품었다.
나라에 반역을 꽤하여 정권을 잡아 보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엉뚱하게도 역적모의를 품고 문경새재에서 행동을 개시 하다가 관군의 습격으로 그의 아들 삼형제와 함께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가 어느 시절이고 또 어느 임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전설은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이렇게 되어 가일 마을 앞을 들어가다가 왼쪽에 있는 커다란 못이 조수만의 집터였다는 말과 함께 풍산읍 서미리 중대 바위에 가면 조수만의 조상 묘가 있다고 전한다.
조수만이 역적 모의를 하게 된 것은 선대의 묘터와 그의 집터에서 양기가 넘쳐흘렀기 때문이라 한다. 이 말을 들은 조정에서는 조수만이 살던 집터에는 큰못을 만들었고 선대의 묘소는 파혜쳐 버리고 그곳에 무쇠를 끓어 부어 다시는 묘터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듯이 요즘도 그 지역의 땅을 파면 쇠붙이가 출토된다고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수만 이가 역적모의를 하려고 할 때 며느리와 딸의 의견을 물었더니 며느리는 “아침에 메물을 갈아 낮에는 꽃이 피고 저녁에 수확할 수 있거든 거사하자”고 말하였고, 딸은 쓸데없는 소리라고 반대하였다.
며느리는 또 말하기를 “우리 집 주초 옆에 달걀을 아침에 두었다가 낮에 알이 까고 저녁에 수탉이 울거든 거사하자”고 하니 딸은 역시 반대하였다. 그러나 조수만은 며느리의 말은 듣지 않고 딸의 주장에 따라 거사에 나섰음으로 실패하여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전술한 자부의 말을 되새겨 보면 메물이 하루에 열매를 맺을 리 없고 아침에 품은 달걀이 저녁에 장닭으로 될 수도 없다. 그러니 이는 거사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욕심이 많고 엉뚱한 생각을 자주 하는 조수만에게는 바른 말이 귀에 들릴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이 전설의 교훈은 욕심을 버리고 매사에 주어진 일에만 만족할 것이지 안될 일을 경거망동하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이다.
출처 : 송하 (김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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