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암 류운룡의 학문과 현실대응 자세 [사상 철학 인물]
謙菴 柳雲龍의 學問과 現實對應 자세 1) 薛錫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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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論 Ⅱ. 柳雲龍의 學問과 現實認識 Ⅲ. 柳雲龍의 現實對應 자세 Ⅳ. 結論 |
Ⅰ. 序論
謙菴 柳雲龍(1539~1601)은 柳成龍의 형이자 李滉의 핵심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황이 은퇴하여 제자양성을 위해 陶山書堂을 열자 아버지의 권유로 곧바로 그를 찾아가 학문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河回와 陶山을 오가며 이황에게서 실제 수학한 기간은 10년 남짓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수학기간은 류성룡이 몇 개월에 지나지 않는 등 여타 제자들의 그것과는 극명하게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퇴계학파 내부에서 동생 류성룡을 비롯해 月川 趙穆․鶴峯 金誠一이 각기 系派를 구성한 것과는 달리 독자적 계파를 형성하지 못했다.
류운룡이 자신의 계파를 형성하지 못한 것은 그의 학문적 역량이 상대적으로 낮은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啓蒙傳疑․理學通錄 등 이황의 저술편찬에 참여해 직접 스승의 학문을 정리하고 계승할 정도로 남다른 학문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거기에는 학문적 요인이 아닌 자신의 현실판단에 따른 선택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사실 이황이 사망한 이후 학파 내부의 계파형성에 따른 분화양상은 학문적 견해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인식과 出處觀의 차이에서 야기되고 있었다.1) 그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계파를 형성하지 않은 것은 역설적으로 당시 그의 역할이 학파의 분화조짐을 차단하는데 있었던 때문으로 풀이될 수 있다.
퇴계학파가 내부적 분화양상을 극복하고 正體性을 확립하며 조선후기 士林의 학풍을 주도함과 동시에 강력한 정치세력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게 되는 점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그의 역할은 결코 과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거기에는 그가 학파의 결속을 추진할 수 있었던 독자적인 현실인식 체계와 대응자세를 마련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운룡의 학문을 비롯해 그의 현실인식과 현실대응 자세를 구체적으로 규명한 논고를 현재로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한 사정은 그의 遺稿가 임진왜란의 兵火의 과정에서 일부 散失된데다,2) 그의 사망 후 류성룡에 의해 수집된 것조차도 정리 중 1605년의 폭우로 적지 않게 수몰되어3) 불완전한 상태로 전해지고 있는데 기인한다.
현재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謙菴集에 수록된 書簡 및 論著 다수와 年譜 등이
있으나,4) 그의 학문의 내용과 삶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규명하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다.
그 외 그에 관한 설화가 단편적으로 전승되고 있기는5) 하지만, 그 대부분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괴리된 측면이 적지 않다.
본고는 그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16세기 퇴계학파 내부의 분화 및 결속양상을 柳雲龍의 대응자세를 통해 검토함으로써 그의 역할과 위상을 조명해 보고자 시도한 것이다. 먼저 제한된 자료에서나마 나타나는 그의 현실대응 자세를 규정하는 인품의 형성과 학문경향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그가 退溪集 편찬 등 학파 내부의 갈등과 분화양상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해 본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과 현실대응 자세가 퇴계학파 내부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규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Ⅱ. 柳雲龍의 學問과 現實認識
柳雲龍의 字는 而得, 應見이며 號는 謙菴으로 本貫은 豊山이다. 그의 가문의 원래 본관은 文化로 보여지지만 현재 이에 관해 전래하는 문서가 없다고 한다.6) 그리고 그의 가문이 언제부터 풍산에 移居하게 되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풍산 류씨의 호적 등 가계기록에 고려시대 조상들이 戶長職을 세습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에 비추어, 그의 가문이 일찍부터 풍산의 土豪로서 성장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가문은 9대조인 柳伯이 고려 忠烈王 당시 恩賜及第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면서 비로소 현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의 가문은 6대조 柳從惠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工曺典書를 지낸 이래 仕宦을 계속하게 됨으로써, 實職士族으로서의 위상과 함께 풍산의 土姓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게 되었다. 屛山書院의 전신인 豊岳書堂이 명종 18년 豊山縣內에 건립되어 學田과 書冊을 하사받았다7)는 기록을 통해서 보아도, 그의 가문이 일찍부터 풍산의 대표적 名家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류종혜가 말년에 豊山縣內에서 河回로 移居한8) 뒤로, 그의 아들 柳洪이 경제력을 배경으로 家勢를 크게 확대한 것을 계기로 이곳이 이후 그의 가문의 世居地가 되었다.9) 풍산 류씨가 하회에 정착하여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에 대해 류성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가 있다.
公(柳從惠)은 처음 풍산현 내에서 살았다. 뒤에 현의 서쪽 10여 리의 花山 아래 河回村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이곳은 산수의 경치가 좋았다. 이 때 공의 친구인 典書 裵尙恭이 또한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오자 공이 맞이하여 함께 살면서 田地와 農幕을 나누어주었다... 裵公의 아들 吏曺正郞 素와 그의 사위 權雍도 이곳에서 계속하여 살았다. 우리 高祖(柳沼)가 또 권옹의 사위가 되어 다시 돌아와 살았다. 류씨 자손이 이로 인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풍산의 舊居에는 公의 孫婿 金三友가 살았다.10)
류운룡은 1539년(중종 34) 柳仲郢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류중영은 그가 태어난 이듬해인 중종 35년 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황해도관찰사 및 禮曺參議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고 사망한 뒤에는 豊山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그는 평소 사람을 대할 때는 온후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公務의 경우 不義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반드시 是非를 가려 옳다고 믿으면 그대로 시행하고야 마는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11) 그리하여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권력을 배경으로 부정․비리를 일삼는 勳戚세력에 정면 대응하고, 尹元衡과 대립하여 소신을 꺾지 않다 파직되기도 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당시 勳戚政權에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던 李滉과 曺植 모두에게서 신망을 얻고 있었다. 명종 10년(1555) 乙卯倭變이 일어날 당시 그가 경상도의 방어를 위해 巡察使 從事官으로 파견되어 각종 조치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자, 이를 전해들은 曺植은 왜구를 토벌하고 국위를 선양할 수 있는 적절한 인물은 그 뿐이라12)며 그에 대한 남다른 기대를 표명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父親 柳公綽의 墓碣을 특별히 부탁할 정도로 이황과도 절친하게 지냈다.
특히 그는 이황이 편찬한 朱子書節要의 板刻을 도맡는 한편, 그것의 目錄을 간행하고 인물들의 出處도 포함할 것을 권유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막역한 관계에 있었다. 그는 이황이 도산서당을 열자 자신의 두 아들인 운룡․성룡 형제에게 神明과 같은 훌륭한 분이라13) 극찬하며 제자로서 받들어 모실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류운룡이 처음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게 되는 것은 그의 나이 16세 되던 해인 명종 9년(1554)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수시로 이황을 찾아가 大學을 비롯해 詩經․近思錄․史記 등 經書 및 性理書와 歷史書를 두루 배웠는데, 그가 문하에서 배운 기간이 10년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의심나는 부분이 있으나 스승을 찾아뵙기 어려울 경우에는 편지로 질의하는 등 학문적 검증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24세 되던 해 동생 류성룡과 함께 이황의 書齋에서 몇 달간 머물며 공부하는 과정에서, 학문의 요체란 성현의 言行을 통해 자신의 心身을 연마하는데 있는 것으로 字句의 해석에 매몰되어서는 안될 것임을 강조한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이를 평생동안 尊信하고자 결심하기도 했다.14) 그가 南致利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릇 학자라 일컫는 자들이 言語가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고 문장이 해박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결국에는 流俗의 무리에 휩쓸리게 되는 것은, 먼저 성현을 따르겠다는 큰 뜻을 세우지 않고 虛僞와 無實에 힘을 쏟기 때문이라15) 규정하며 마음을 수렴하는 공부가 眞實과 實用에 이르는 첩경임을 강조한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류운룡은 스스로도 자신의 교만함과 인색함이 사람들을 멀리하도록 했다16)고 실토할 정도로 젊었을 당시에는 직선적이면서도 비타협적인 기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盧景任은 그의 기질을 剛毅․明敏한 것으로17) 규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실제 류성룡도
형님은 天性이 깨끗하고 절개가 있었다. 善을 좋아하고 惡을 미워했다. 사람을 대할 때 구차하게 영합하지도 않았고 뜻에 맞지 않는다고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젊었을 때는 친구들 사이에 너무 고상하고 강직하다는 이유로 꺼리는 바가 있었다. 그러나 만년에는 道義의 문에 들어가 연마하고 詩書의 가르침에 몰입함으로써 和平과 溫厚함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어울려 종일토록 마시고 먹으며 담소를 나누면서 피곤함을 잊을 정도였다.18) 고 하여 그가 처음에는 가치분별에 투철한 이분법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류운룡의 젊은 시절 剛毅直方의 강고한 자세는 천부적인 성품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善․惡의 가치분별을 통해 君子지배의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趙光祖를
중심으로 한 己卯士林 이래 사림들의 보편적 성향을 계승하려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가 南致利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고한 인품을 갖추고자 노력했으나, 타성적 성격에다 잦은 질병과 집안의 우환 등으로 강인하고 과감한 기백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19)며 초조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도 그 같은 그의 의욕적인 자세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류성룡도 전하는 바와 같이 그는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마하며 인품의 감화를 받게 되면서 스스로 기질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황이 유운룡 형제에게 학문의 힘으로 氣質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지만, 학문을 통해 篤行할 경우 어느 정도의 변화는 가능할 것이라20) 설명한 것도 그의 경직된 기질의 변화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하겠다.
이황의 전반적인 인품은 剛과 柔를 겸비하면서도 내면으로는 확고한 신념을 견지하되 외형상으로는 포용적인 外柔內剛의 탄력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인품은 현실인식과 出處義理를 규정하는 토대가 되었지만, 그것은 理․氣를 상대적이면서도 가치우열의 불가분의 관계로 파악하는 그의 理氣隨乘論的 세계관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는 理․氣를 대립적 관계로 규정하는 理氣分對論을 토대로 善․惡의 확연한 분별을 지향하며 剛毅 일변도의 자세를 견지한 南冥 曺植(1501~1572)의 그것과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차별적 경향이 결과적으로 退溪學派와 南冥學派가 동질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분열하게 되는 주된 요인이 될21) 정도로, 이황의 탄력적인 인품과 현실대응 자세는 학파적 성격을 규정하는 전제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은 그의 성리학적 이기심성론에 입각한 현실대응 자세를 제자들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는 그가 도덕과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구현을 지향하면서도 방법상에 있어 다양성과 가변성을 인정하는 점에 비추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원칙과 현실이 상충하는 상황에서 어디에 비중을 두고 처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상 제자들의 자율적 판단의 몫이었던 것이다.
뒤에도 언급하는 바와 같이 그의 사망 후 官僚지향의 柳成龍系와 處士지향의 趙穆系가 불화를 빚게 되는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파악되는 것이었다. 이황의 탄력적인 학문과 현실대응 자세는 류운룡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지만, 특히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기질을 변화시키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서 科擧에만 집착하여 부귀영달에만 관심이 있다고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며, 經世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오로지 심성함양을 위한 공부에만 매진할 것임을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부모처자가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것을 보면 학자라 할지라도 마음이 동요하기 마련이라며 학문과 현실의 간격에서 오는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황은 자신도 젊었을 때 진정한 道를 구하고자 했지만 늦게서야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실토하면서, 정신이 어지럽고 흐려진다는 이유로 부모처자의 굶주림을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佛家에서 人倫을 단절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22)며 道를 구하는 방법에 있어 탄력성을 부여하도록 가르쳤다.
나아가 이황은 그에게 향촌에 머물며 학문연마에 정진하는 것과 관직에 나아가 經世에 참여하는 것은 가치구분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行․止를 선택하도록 함으로써23) 현실판단에 따른 탄력적 삶의 방식을 그에게 권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류운룡에게 近思錄과 함께 자신이 저술한 朱子書節要 등 性理書를 읽도록 당부하는 한편, 理氣說은 微妙하여 갑자기 깨닫기는 어렵지만 오래도록 반복하여 사유하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24)며 자신의 철학적 사유체계를 설명해 주기도 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류운룡이 剛毅 일변도의 경직된 사고와 자세에서 벗어나 剛柔를 겸비한 복합적이고 탄력적인 인품을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李植이 그가 젊었을 때에는 剛介한 뜻을 갖고 힘써 행하여 지나치게 모난 듯했으나, 중년 이후로는 和遜한 편으로 기울어 기질이 일변하였다25)고 평가하게 되는 것도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그의 전반적 성품은 화합을 도모하면서도 더러운 것과 함께 하지 않고 깨끗하게 살면서도 激濁揚淸의 자세를 갖지 않았다26)거나, 剛毅와 溫柔를 兼有하면서27) 그것을 體․用으로 삼았다28)고 규정될 정도로 복합적인 것으로 변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가 科擧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도 薦擧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그 같은 복합적 인품에 근거한 탄력적 세계관의 산물이라고 하겠다.
류운룡의 그러한 ‘體剛用柔’를 근간으로 한 복합적 성품은 그가 국가관에 있어 확고한 가치분별과 함께 처신에 있어 정확한 사리분별을 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예컨대 그는 仁同縣監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吉再의 墓를 수축하는 한편, 그를 제향한 吳山書院을 건립하고는 夷齊廟 앞에 있던 ‘砥柱中流’의 글자를 모사하여 그 앞에 세우도록 했다. 그러면서 그는 吉再의 추숭사업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주도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운룡이 선생보다 수백 년 뒤에 태어나 摳衣執鞭은 못하였지만 나태와 신병을 무릅쓰고 남의 눈치도 개의치 않으며 밤낮 없이 노력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선생은 몸소 道를 이루고 후세 사람들에게 가정에서는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도록 가르쳤다. 그 스스로 높은 벼슬을 탐내지 않았으며 義理를 길러 高麗가 망할 때 두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富貴를 탐내지 않고 不義에 결코 굴하지 않음으로써 그 정신이 금석을 뚫고 절개는 日月같이 밝았다. 그리하여 風俗을 바로잡고 民心을 장려한 공로가 태산같아 그것이 나라에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29)
이는 그가 재물과 명예를 탐하지 않고 忠義의 길을 걸었던 吉再를 자신의 삶의 자세를 규정하는 모범으로 삼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守令으로서의 단순한 치적을 의식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 같은 사실은 그의 范仲淹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해가 가능하다. 그는 범중엄이 지방관으로서 浙西지방을 다스릴 때 吳中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 여러 寺刹에 권고하여 대토목 공사를 일으켜 구제한 것은 功만 있는 것일 뿐 방법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군자란 업무처리에 있어 반드시 義理를 따져 光明正大해야지 功利에 치우쳐서는 안 되는 것으로, 救民이 급하다는 이유로 의리를 살피지 않을 경우 일시의 공이 있더라도 그것은 존중받을 수 없다30)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군자의 조건으로 학문의 공이 중요한 것으로 그 자질은 별개의 문제라 규정하며, 범중엄의 오류는 결과적으로 학문의 공이 부족하여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하지 못한 데 있는 것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평가는 원칙과 도리가 전제된 포용적 자세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는 그의 體剛用柔의 복합적 성품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였다.
류운룡의 그러한 體剛用柔的 성품은 氣質과 出處觀에 있어 일정한 차별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던 退溪學派와 南冥學派 모두에게 호감을 얻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曺植의 핵심제자들인 吳健을 비롯해31) 金宇顒 등과 절친하게 교유했던32)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남명학파와 기질적으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던 趙穆을 비롯한 李德弘․琴蘭秀․琴應壎․權好文․金富儀 등 禮安士林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며 긴밀하게 유대를 견지하게 되는 토대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15세 연상인 조목에게 편지를 보내 마음이 굳어있고 재주가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師友로서 극진하게 대우해 주는데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는 한편,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깊은 신뢰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師友의 道란 交遊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충고하는 가운데 의리를 취하는 것이라 전제한 뒤, 자신의 과오나 의심나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하며 자신도 薰陶에 감화된 은혜를 백발이 되도록 보답할 것임을 다짐했다.33)
나아가 그는 자신의 편벽된 기질을 고쳐줄 것을 부탁함과34) 동시에 자식들을 제자로 삼아 道德的 感化를 받을 수 있도록 요청할35) 정도로 權好文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예안사림들과의 폭넓은 교유도 주로 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류운룡의 그들과의 교유는 학문연마와 인격감화의 장소인 隴雲精舍에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퇴계학의 또 다른 산실이기도 한 淸凉精舍가 있는 淸凉山이 무대가 되기도 했다. 외형상으로는 평탄하고도 완만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 속에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을 숨기고 있는 청량산의 전반적인 모습은 外柔內剛한 이황의 복합적 성품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36) 이황이 이 산을 ‘吾家山’37)이라 부른 것도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철학적 사유에 매진하는 한편, 제자들과 함께 자주 이 산 곳곳을 유람하며 많은 詩를 남기기도 했다.38) 이에 따라 제자들도 청량산 유람의 과정을 통해 스승의 인품의 진면목을 확인하며 심신을 연마하고 우의를 다져 나갔다. 선조 3년(1570) 권호문이 혼자 청량산을 유람하는 과정에서 남긴 다음 일기는 류운룡과 예안사림의 각별한 관계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저녁에 烏川 後凋堂에 도착하니 주인(金富弼)이 문밖으로 나와 맞아들였다. 그 동생 愼仲(富儀)․惇敍(富倫) 및 柳應見(雲龍)이 먼저 와 있어서 만났다. 서로 끌며 寢堂에 들어가 술잔을 돌리며 마셨다. 밤 三鼓 때 달빛을 밟고 雪月堂으로 향하여 또 술잔을 기울였다. 아울러 紙筆을 펴 각자 떠오르는 감상을 하나씩 詩로 읊도록 했다. 後凋兄이 韻을 부르며 詩를 재촉했다. 내가 먼저 몇 구절 및 古風 한 首를 지으니 모든 사람들이 혹 화답하고 혹은 못했다. 닭이 울 때서야 각기 돌아가 잠을 청했다.39)
이러한 류운룡의 예안사림과의 교유는 남명학파나 그들이 지닌 원칙론적 사고가 갖는 善․惡의 이분법적 자세를 일정하게 순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權好文에게 선비가 때를 만나지 못할 경우 草野에 머물러야 하겠지만 事案이 합당한 지의 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한 번 가버린 뒤 돌아오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40) 是非는 분명하게 가릴 필요는 있지만 그것이 결별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천명한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의 이 같은 자세는 학파 내부에서 야기될 수 있는 갈등과 대립을 조정할 수 있는 접점에 위치하게 되는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류운룡의 면모는 이황의 장례를 둘러싼 제자들의 견해차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은 국가의 禮葬을 사양하라는 이황의 遺言에 따라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려는 遺族 및 대다수 제자들과, 조정의 명령을 받고 禮葬에 따라 성대하게 치르려는 加定官 金就礪와의 입장 차에서 비롯되었다.
김취려는 이황을 가장 오랫동안 옆에서 보필했던 것으로 평가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족과 제자들의 견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의지대로 일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이에 따라 장례절차에서부터 石物을 조달하는 데 이르기까지 사안마다 견해차가 노출되었고, 급기야 유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울음을 터트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를 보다못한 류운룡이 나서 김취려에게 禮法에 따르되 스승의 遺志를 존중하여 평소 가르침대로 장례를 치르도록 촉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禮葬 자체가 非禮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모든 일은 유족과 제자들의 公論을 들어보고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강조했다.41) 이러한 그의 주장에 의해 결국 김취려가 물러서게 되었고, 모든 일은 이황의 遺言대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황의 장례를 둘러싼 그 같은 학파 내부의 갈등은 喪禮 및 祭禮에 대한 학파적 공감대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데 근원적인 원인이 있었다. 물론 사림들의 장례절차 등 제반 儀式은 禮記나 朱子家禮에 토대를 두고 있었지만, 그것이 조선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는 것으로 조항의 해석에 따른 일정한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황도 그 같은 현실적 요구에 따라 단편적인 사안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자신의 독자적
해석에 따른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이 과정에서 古今의 유교적 예법을 준수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장례 때 세속의 폐습으로 굳어질 것을 우려하여 油蜜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42) 등 화려한 의례를 간소화하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의 의례에 대한 해석과 견해는 종합적으로 정리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고, 그에 따라 학파의 입장을 규정하는 禮說도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과제는 자연 그를 계승하는 제자들의 몫으로 넘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류운룡이 상례에 대한 학파 내부의 견해차를 극복하고 이황의 장례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喪禮에 대한 남다른 폭넓은 이해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趙穆이 練服節目을 물어오고 權好文이 碁制節目을 질의해 올 때마다 禮記를 비롯해 朱子家禮 瓊山儀禮 등을 참조하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의견을 피력할43) 정도로 禮說에 관한 한 상당한 조예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그의 禮說도 “禮의 큰 줄기는 百世라도 변하지 않는다”44)고 하듯이 철저하게 古禮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朱子家禮가 禮記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禮가 무너진 뒤 새롭게 고쳐진 것인데다 현실적으로 행하기 어려운 것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라며 이를 준수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들을 현실에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안모색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도 했다. 예컨대 그는 初喪 때 입는 衰服을 練祭 때까지 입어야 하는 것이 예법상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 자신이 경험해 본 결과 최복이 그 동안 헤어지고 떨어져 갈아입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는 점을 들어 난처한 상황에서는 예법도 고칠 필요가 있다45)는 유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조상을 추모하는 각종 제사를 그림을 곁들여 그 儀節을 소상하게 설명한「追遠雜儀」를 저술한46) 것도, 古禮를 준수하면서도 현실적 여건에 맞는 祭禮를 확립하려는 그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고금을 관통하는 유교적 의례에 대한 관심과 해박한 지식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家學으로 정착되는 토대가 되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현종 7년(1666) 왕실의 服喪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통해 宋時烈의 禮說을 辨破한 영남유림 1,100명의 議禮疏를 그의 가문이 주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疏章과 함께「喪服考證」上․下篇이 첨부되는 등 전례없이 상세한 이 의례소는 南人 禮說의 결정판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으로,47) 이를 작성한 장본인은 류성룡의 손자인 柳元之였고 疏頭로서 이 상소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 바로 그의 증손 柳世哲이었던 것이다.48)
Ⅲ. 柳雲龍의 現實對應 자세
李滉의 장례를 둘러싼 제자들의 불화는 학파 내부의 집단적 갈등으로 표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배경에 학파적 위상문제에 대한 시각차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 각각의 입장에 따른 내부 불화의 여지는 잠복된 형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스승의 學問과 精神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여 거기에 충실함으로써 학파의 내면적 토대를 구축함과 동시에 향촌을 무대로 저변을 확대하며 독자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입장과, 사림세력이 정국주도권을 확보한 이후 학파를 매개로 분열할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이를 통해 학파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입장의 차이가 일정한 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입장차이는 학파 내부의 處士指向型 내지는 官僚指向型 인물들의 분화에 따른 것으로 그들의 현실인식에 따른 대응태도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도 했다. 따라서 그것은 퇴계학의 심화와 현실적용을 위한 역할분담을 가능하게 하는 측면도 있는 것이지만, 현실인식에 따른 학파 내부의 심대한 갈등을 초래할 여지도 없지 않는 것이었다. 趙穆系와 柳成龍系의 협력과 갈등의 교차는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것이라고 하겠다.49)
조목과 류성룡은 다같이 이황의 대표적 제자들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인품을 비롯한 학문방법 및 현실인식과 대응자세에 있어 현격한 차별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목은 陶山書院에 配享될 당시 ‘守志林泉’․‘篤志不懈’50)라 하여 평생동안 지조를 굳건히 지키며 山林으로서의 풍모를 지켰다고 평가될 정도로 內外를 관통하는 곧은 자세를 유지하며 剛毅의 인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류성룡은 온후하면서도 의연하여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기상을 갖추고, 엄하면서도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며 친근감을 유발했다51)고 하듯이 溫柔한 풍모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의 그 같은 인품상 차이는 학문자세에 있어서도 일정한 견해차를 유발하고 있었다. 특히 조목은 心經을 읽기를 좋아해 일생동안 勤苦․受用의 경지로 삼았고 經傳에서 유래한 諸儒의 說을 神明과 같이 믿고 嚴師와 같이 공경하여 晝誦夜讀으로 心을 이해하는 데 힘썼다52)고 할 정도로 心學의 탐구에 매진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이황이 초학자가 학문을 시작하는데 읽어야 할 책으로 심경만큼 적절한 것은 없다53)고 가르치며, 스스로도 心經을 四書와 近思錄의 아래에 두지 않을54) 정도로 그것을 尊信한 데 따른 영향이 작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나아가 거기에는 心이 궁극에 性情을 統攝하듯이 우주와 인성의 원리적 면보다는 근원적 면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이에 반해 柳成龍은 程․朱 이외의 글을 읽지 않는 학자들의 배타적 자세를 비판함과 동시에 心經․近思錄에만 집착하는 풍조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여기에 매진하는 학자의 경우 곧 나태해져 初心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명예를 구하는데 그것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55)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가 心이 비록 一身의 가운데 있으면서 천하의 이치를 관장하고 우주의 사이에 心의 境界가 아님이 없으나 근본적으로 出入이 없다56)고 주장하듯이, 그것이 성리학의 원론적 측면을 설명할 수 있을 뿐 현실의 다양한 현상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思를 학문의 근본으로 제시하며, 농부가 밭을 경작하는 심정으로 마음의 밭을 경작하고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법이라57)며 思의 실용적 측면을 강조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결국 조목이 성리학의 근원적 이해를 통한 원론적 측면에 매진한 것과는 달리 류성룡은 그것의 활용처를 염두에 둔 經世的 측면을 중시하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58) 그러한 그들의 학문적 차이는 두 사람의 出處觀에서 있어서도 견해차를 유발하는 근거가 되었다.
南宋代 학자로 높은 학문적 수준으로 元에서도 발탁된 적이 있는 魯齋 許衡의 인품과 처세에 대한 그들의 상반된 평가에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조목은 허형의 사람됨을 논하면서 그가 聰明博學하고 躬行實踐함이 있었으나 元에 벼슬하며 시류와 타협했던 점을 개탄하며 士君子의 出處의 어려움을 토로함으로써59) 상대적으로 出處義理에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려 했다.
그러나 류성룡은 許衡이 元에서 벼슬을 버리지 않은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옹호하면서, 오히려 周 武王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首陽山에서 餓死한 伯夷의 행위가 반드시 仁이라고 볼 수 없다60)며 경직된 出處에 비판적 입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는 조목이 학자의 心事가 올바르고 出處가 분명해야 학문적 순수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성리학의 근원적 이해에 매진했다면, 류성룡이 현실적 상황을 반영하는 處事를 중시하여 성리학의 가변성을 전제로 한 현실적용의 탄력적이고 합리적 방안을 모색하는 입장차에서 야기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그들의 차이는 궁극적으로 현실적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퇴계학의 본질을 계승하려는 조목과, 퇴계학이 현실의 난국을 타개하는 효용성을 갖는다는 점을 전제로 현실적용의 방안을 모색하려는 류성룡의 현실대응 자세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이 예안사림의 處士지향적 출처관과 하회 및 안동사림의 官僚지향적 출처관과 맞물리게 됨으로써 퇴계학파 내부의 분화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외형상으로는 예안사림이 원칙에 충실한 剛毅 일변도의 경향을 보이는데 반해, 안동사림이 현실에 주목하는 溫柔에 치중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제반 요인들이 退溪集의 편찬을 둘러싸고 그들이 갈등을 보이게 되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류운룡이 그들의 갈등의 중간에 서있다는 사실은 그의 역할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것은 이황이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그가 趙穆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신 가운데 失色할 논의라는 것은 어떤 일을 두고 하시는 것입니까? 朋友간에 서로 규제하는 말은 진실로 공정하게 말하고 공정하게 들으면서 是非의 소재를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을 거칠게 하고 얼굴에 드러내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생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밝게 하기를 그쳤다는 소리를 어찌 朋友가 들어야 하겠습니까? 더욱이 우리의 道가 날로 외로워지고 우리 무리들이 날로 줄어들어 서로 조장하는 풍습이 날로 쇠미해지는 데다 서로 이기려는 마음만 날로 일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느 大人先生인들 다시 일어나 이를 정돈할 수 있겠습니까?61)
며 大賢도 쉽사리 해결하기 어려운 알력과 갈등이 온존하고 있음을 개탄하며 조정책을 제시하고 있는 데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퇴계집의 편찬을 위한 이황의 遺稿의 수집과 정리는 그의 장례가 마무리 된 뒤인 1571년(선조 4) 봄부터 趙穆을 비롯한 예안사림을 주축으로 易東書院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당시 류운룡도 여기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母親의 병환으로 직접 참가하지는 못하고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遺文을 필사하여 보내기만 했다.62)
나아가 그것의 수집․정리와는 별도로 柳成龍․金誠一 등 관료로 진출한 제자들의 노력으로 선조 6년에는 퇴계집을 校書館에서 印出하라는 왕의 명령을 얻어내는데63) 성공하기도 했다. 개인의 문집을 국가기관에서 公刊한다는 사실은 이황의 위상뿐만 아니라 학파의 정치적 위상을 제고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遺稿의 수집․정리작업은 더디게만 진척되고 있었다. 1579년(선조 12) 류운룡이 司圃署 別坐에 제수되어 한양에 있을 때 李安道가 가져온 遺稿의 編次를 논의할 당시에도 그것은 草稿에 불과할 뿐 定本은 아니었다.64) 작업이 그처럼 더디게 진척된 연유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일단 각지에 흩어져 있는 遺文을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던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遺稿의 첨삭여부에 대한 학파 내부의 심대한 견해차가 개재해 있었다. 물론 정리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측으로서는 스승의 글을 모두 모아 편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그것의 公刊을 추진하는 측으로서는 그것이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그들의 견해차를 유발했던 것은 이황이 생전에 鄭維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포함된 두 통의 別紙의 내용이었다.65) 여기에는 선조조 초반 신진사림들이 추진하고 있던 李芑․林百齡․鄭順鵬 등 乙巳士禍 주모자들 削勳에 대해 그의 부정적 견해를 표출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황은 당시 李浚慶 등 대신들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被禍된 尹任도 반역의 의도가 없지 않았다며 兩非論의 입장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선조 10년 12월 왕이 削勳敎書를 중외에 반포함으로써66) 신진사림의 요구대로 결정되었다. 나아가 선조는 盧守愼 등 대신들의 再考요구를 일축하고 더 이상의 논의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이황의 별지는 왕의 교서뿐만 아니라 사림의 삭훈공론에 반하는 셈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公刊을 추진하고 있던 류성룡이나 김성일로서는 그것이 수록된 문집을 만약 선조가 보았을 때 가져올 정치적 파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削勳의 공론화를 주도했던 李珥가 그 사실을 알았을 경우 西人의 공세로 인한 東人의 정치적 입지는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당시 류성룡이 교서관 인출을 지시했던 선조가 문인들이 편찬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67)고 趙穆에게 전하며 초고를 돌려보내게 되는 것도 그러한 사정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곧이어 한양에 있던 류운룡이 覲親을 이유로 휴직하고 안동으로 급거 내려오게 되는 것도 류성룡의 그러한 처사에 대해 조목을 비롯한 예안사림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던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로서는 그들의 동향을 파악함과 동시에 그것이 안동사림과 예안사림의 갈등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易東書院에 직접 가는 대신 病을 칭탁하며 편지를 보내 그들을 격려하는 한편, 大賢의 片言隻句라 할지라도 미묘한 道理와 정밀한 義理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하나도 빠뜨리지 말 것이며 스승의 語錄도 함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68)며 우회적 방법으로 그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실제 그는 權好文 등이 理學通錄의 교열본 편찬과정에서 이황이 말미에 붙였으나 淨寫本에 붙이지 않은 曺端과 羅欽順의 事蹟을 제외하려는 시도에 반대한 적이 있는69) 등 이황의 遺文을 삭제 없이 정리하려는 태도를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別紙에 대해서만은 동생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 동안 遺稿의 수집․정리에 협조하면서도 참여를 자제하고 있던 류운룡은 이듬해 편찬작업이 陶山書院으로 옮겨져 진행되는 것을 계기로 직접 교정에 참가했다. 그가 당시 그곳에 머문 기간은 한 달 정도였다.70) 이 과정에서 그의 예안사림들에 대한 설득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그 결과 그들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그가 南致利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내용에서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文集을 編次하는 일을 근래 逢原(李安道) 등과 의논하였으나 아직 두서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민망하고 탄식할 일입니다. 두 통의 別紙를 구하여 보니 선생께서 말씀하신 뜻이 세상의 公論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곧바로 출간하면 반드시 후회가 따를 것이라며 諸公들에게 간청하니 모두 제외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景善(禹性傳)과 而精(金就礪)가 굳이 고집하여 收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여 논의가 매우 많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반복하여 설명해도 듣지 않으니 참으로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71)
여기서 그는 별지의 제외를 반대하는 인물로 우성전과 김취려만을 꼽을 뿐, 그 외 조목 등 예안사림들은 모두 찬성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당시 조목이 거기에 동조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로써 보건대 최소한 조목과 류운룡은 유고의 편집에 있어 쌍방이 만족할만한 어떤 해결책을 찾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겠다.
그 결과 도산서원에서의 遺稿의 검토와 보완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4년 뒤인 선조 17년(1584) 9월 퇴계집 草本의 정리가 일단 마무리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최종 마무리 작업에는 趙穆․琴應壎․權宇․金澤龍․金垓․洪汝栗 등과 함께 류운룡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류운룡 형제가 요구한 별지의 제외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고 수집한 遺文 모두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류운룡이 류성룡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노력은 외형상 실패로 귀결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작업을 마치고 떠나올 때 조목은 그에게 送別詩를 지어주는72) 등 두 사람의 변함없는 우호적 관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는 그들 사이에 문집편찬의 방식에 대한 견해차가 극복되어 어떠한 방향으로든 가닥을 잡았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그 실체는 이 草本이 2년 뒤 도합 30卷 정도 분량으로 문집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음에도 본격적으로 반포를 위한 인쇄가 추진되지 않는 것에서73) 점차 드러나고 있었다.
이듬해 선조 20년(1587) 5월 柳雲龍․趙穆․金誠一이 廬江書院에 모였다. 그들이 모인 목적은 文集 草本의 校正을 위해서였다.74) 이미 인쇄를 위한 전단계 작업까지 완료되었음에도 다시 교정을 하고, 그것도 도산서원이 아닌 여강서원에서 회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아무래도 심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모인 목적은 文集의 字句를 수정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체제의 대폭적인 수정과 첨삭여부를 합의하기 위한 의도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자리에는 別紙의 제외 등 체제의 개편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류성룡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회합은 김성일의 중재로 서로 친분이 두터운 류운룡과 조목이 최종 담판을 통해 조목이 류성룡의 개편요구를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수순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회합이 있고 난 얼마 뒤 류성룡이 독자적으로 文集의 교정작업에 돌입하고 있는 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요컨대 여강서원에서의 회동은 草本과는 별도로 류성룡과 김성일 등 관료형 門人들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한 문집의 발간에 대해 조목의 묵인을 재차 확인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류성룡은 자신이 의도한 바대로 草本을 刪定․校閱하고 일일이 付標를 달아 일단 완성된 18권을 김성일에게 보냈다. 이를 검토한 김성일은 조목에게 그것의 정밀함을 전하는 한편, 김취려만이 여기에 크게 반발하고 있음을 들어 교열본이 완성되면 모두 모여 編輯을 다시 논의할 것을 제안함으로써75) 류성룡의 교정작업을 기정 사실화했다. 이 작업은 이듬해 완성되었는데, 이를 당시에는 中草本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6월에는 屛山에서 류성룡의 주관으로 이에 대한 편집․교정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과정에서 예안사림의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76) 그것은 퇴계집의 편찬이 완전히 류성룡의 주관 하에 그의 방침에 따라 편찬될 것임을 표방하는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中草本은 別紙의 제외뿐만 아니라 草本이 조목의 철학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편집된 것과는 달리 류성룡 자신의 기준에 따라 적지 않은 삭제가 가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류성룡은 그 동안 이를 위해 몇 차례나 관직을 사양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 일이 마무리되자 10월 刑曹判書에 제수된 것을 계기로 한양에서의 印刊을 위해 교정이 이루어진 中草本을 갖고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조목은 류운룡이 있는 仁同을 방문하여 “末路에 서로 알고 지내기를 몇 번을 더할 것인가/오래 술병을 기울이는 자리에서 깊은 정을 보겠네”77)라며 여전한 신뢰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양에서의 中草本 간행작업은 己丑獄事로 東人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 데다 東人의 분열조짐과 그에 이은 임진왜란 발발 등 잇따른 불리한 조건으로 인해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퇴계집 편찬을 둘러싸고 전문수록을 지향하는 趙穆과 발췌수록을 주장하는 柳成龍의 입장차이는 자신들이 각각 처한 현실적 상황에 따른 것이자, 원칙적 삶에 투철한 조목과 탄력적 삶을 지향하는 류성룡의 삶의 방식의 차이에 연유하는 측면이 강하였다. 그러한 차이는 그들에 국한하지 않고 예안사림과 안동사림의 경향성의 차이를 유발하여 학파 내부의 분화를 초래하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퇴계학파 내부의 심각한 갈등과 더불어 분열마저 초래할 소지를 안고 있는 것으로, 실제 퇴계집의 편찬과정에서 그러한 조짐이 표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양측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조정역을 담당할 인물이 당시로서는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고, 역설적으로 그 역할을 류운룡이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안동사림과 예안사림의 대립․갈등이 교차하는 접점에 위치해 있으면서 학파의 내부적 결속을 추구하는 조정자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류운룡은 동생 류성룡과 남다른 우애를 갖고 있었으나,78) 出處의 방식에 있어서는 오히려 예안사림의 일반적 경향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조목 등 예안사림과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폭넓게 교유하는 배경이 되었지만, 그는 예안사림의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이 가져올 수 있는 퇴계학의 폐쇄성을 경계하고 있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의 현실적용을 통한 확산을 추구하는 류성룡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일면 양면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가 형성한 體剛用柔의 삶의 철학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는 剛柔를 겸비하면서도 外柔內剛한 풍모를 보여주던 이황의 그것과 흡사한 것으로, 剛 또는 柔 일변도로 흐를 수 있는 퇴계학파 내부의 양극의 경향을 해소하는 방책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그 같은 퇴계학파 결속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목과 류성룡의 현실인식과 출처관의 차이에 근원하는 갈등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는 사실상 이황이 사망한 이후 그들을 정점으로 이원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인식 체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독자적 철학체계가 마련되지 못하고 있었던 데도 원인이 있었다. 임진왜란에 대응하는 두 사람의 시각차로 인한 심각한 대립이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곧 현실적 처세관을 형성하고 있는 류성룡은 전란에 탄력적인 대응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에 따라 그는 전란으로 인한 국가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각도의 외교적 방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처사는 領議政으로서 국난극복의 책임을 지고 있는 그로서는 현실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기는 했지만, 군자․소인의 가치분별적 사고를 견지하고 있는 남명학파의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倭를 소인배로 규정하며 일체의 타협을 배제한 채 활발한 義兵활동을 통해 국난극복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명분상 입지를 구축해가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그들에 의해 류성룡의 처사는 ‘主和誤國’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일로 그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정에서 倭와의 和議분위기가 조성되는데 대해 예안사림들도 부정적이었다. 특히 조목은 전란 중 軍資監 主簿에 발탁되자 사직하는 상소에서 선조에게 講和 움직임을 근원적으로 차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나아가 그는 그 논의를 주도하는 인물로 류성룡을 지목하고는 편지로 평생동안 聖賢의 글을 읽으면서 얻은 것이 ‘講和誤國’뿐인가79)며 노골적으로 따지기도 했다.
조목이 당시 남명학파를 비롯한 北人들과 접촉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의 주장은 사실상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측면이 강하였다. 이에 따라 李爾瞻 등 北人들의 공세가 류성룡에게 집중되었고, 심지어 成均館 生員 李好信 등은 그가 秦檜보다 더한 奸人이며 鄭仁弘․趙穆과 같은 인재의 등용을 막은 주역이라80)며 극언하기도 했다. 결국 류성룡은 北人의 집중 탄핵을 받아 削奪官職 당하고 말았다.
류운룡은 이미 예안사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될 조짐을 보일 때 사태의 악화와 학파의 분열을 우려하여 몇 차례에 걸쳐 류성룡에게 사임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목에게도
엎드려 생각하니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가 이미 29년이 지났습니다. 게다가 同志들도 늙거나 사망함으로써 德業을 들을 수 없게 되어 敦厚한 풍속이 날로 쇠퇴해지고 浮薄한 습성이 점차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공자의 70제자가 죽기를 기다리지 않아서 大義가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으로 선생께서 살아생전 가장 우려하던 바였습니다.
며 그것이 학파의 분열을 촉진하는 것임을 경고하는 한편, 和議는 명나라가 주도하는 것으로
국력이 약한 조선으로서는 항의를 할 수 없는 형편에 있기 때문에 류성룡도 좌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점을 들어 主和 주장에 강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조목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이미 예안사림의 분위기는 그의 해명조차 수용하지 않을 정도로 타협의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81)
그러한 그의 판단은 杞憂가 아니었다. 그와 류성룡에 대한 예안사림의 노골적인 반감의 표현은 그 동안 그의 중재와 류성룡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보류했던 퇴계집 草本의 본격적인 간행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예안사림들은 전쟁 직후인 선조 32년(1599) 봄부터 그와 류성룡을 배제한 가운데 그것의 간행작업에 돌입했던 것이다.82)
물론 류성룡이 실각한 이상 그가 재편집한 中草本은 그 의미가 반감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그들의 처사는 아무래도 고의성이 짙은 것이었다. 더욱이 간행작업이 北人세력이 정국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는 점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학파의 완전한 분열을 초래할 빌미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예안사림이나
안동사림 양측에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비록 류성룡이 실각했다고는 하나 그의 정치적 위상은 여전히 남아 있는 데다, 류운룡과의 관계도 완전히 청산할 정도로 그들이 향촌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문집간행은 류운룡 형제를 완전히 배제하고 진행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草稿의 간행작업 당시 류운룡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전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삭탈관작 당한 류성룡이 피난처인 道心村으로 오자 함께 지내다가 전쟁이 끝난 뒤 河回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류운룡의 謙菴亭과 류성룡의 玉淵書堂을 오가며 세상일을 잊고 소일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퇴계집이 完刊된 뒤 류운룡이 도산서원 원장 金圻의 文集 新刊韻에 次韻하고,83) 류성룡이 年譜를 작성하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그들과 예안사림 사이에 모종의 조정이 이루어졌던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 조정의 주역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에는 예안사림의 입장에서 최소한 그들의 류운룡과의 관계나 향촌에서의 그의 위상을 무시할 수 없었던 사정이 개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次韻詩에서
시작한 지 30여 년만에서야 지금이 있게 되었으니
諸公들의 用功이 깊었음을 가히 보겠네
그대들은 道가 없고 찾을 곳이 없다고 빙자하지만
뭇 성현들이 서로 전해온 것이 이 마음뿐일세
밝고 밝은 지극한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어찌 賢․愚를 따르고 淺․深의 구분이 있겠는가
만약 이 가운데에서 힘을 기울이고 쏟는다면
先賢들이 잇달아 마음을 열게 된 비결을 알게 될 걸세84)
三十餘年 始有今
諸公可見 用功深
憑君莫道 無尋處
千聖相傳 只此心
昭昭至理 古猶今
豈逐賢愚 有淺深
若使此中 勤著力
應知先正 繼開心
라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도 선생의 가르침이 賢․愚, 深․淺의 구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임을 지적함으로써 善․惡의 가치분별에 치중하는 예안사림의 경향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우회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가치분별적 자세에 대한 불편한 심기는 그로 인한 퇴계학파의 분열과 정치적 오류를 우려한 것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光海君代 大北政權의 討逆論, 廢母論을 앞세운 배타적이고 파행적인 정국운영과 仁祖反正으로 그들이 西人勢力에 의해 철저한 정치적 보복을 받는 과정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에서 대북정권과 성향상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들에게 일정하게 동조하고 있던 예안사림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인의 집권체제에서 鄭經世를 비롯한 퇴계학파가 발탁되어 중앙정계에서 일정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현실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인물들이 여전히 온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퇴계학파를 표방한 南人勢力이 영남의 향촌공론을 결집하여 牛栗 文廟從祀 反對運動이나 服喪論爭에 참여하며 서인정권에 대응한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다시 부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들을 아우르는 포용적 체세관을 지닌 류운룡과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류운룡의 현실대응 자세의 의미가 여기에서 찾아지는 것이라 하겠다. 향촌사림들이 그의 諡號를 청하는 상소에서
만년에는 덕의 보람이 渾然히 團和해져서 일상의 威儀와 言行이 文純公과 많이도 유사하였습니다. 氣味와 觀感․體認이 그 덕을 이룬 것이 특히 그랬습니다. 문순공이 ‘退’자로 일생동안 守用하는데 착력해서 이미 退溪라고 自號하였고, 뒤에는 ‘謙’자를 써서 류운룡에게 주었으니 정녕 衣鉢의 單傳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退․謙은 동방 心學淵源의 적통이라 하겠습니다.85)
고 규정한 것도 그 같은 맥락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그의 위패는 花川書院과 愚谷書院에 안치되었으며, 뒤에 그는 조정으로부터 文敬의 諡號를 받았다.
Ⅳ. 結論
이상 류운룡의 학문과 현실대응 자세를 16세기 퇴계학파의 분화양상과 연관하여 검토해 보았다. 여기서 밝혀진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6세기 훈척정치로 인해 초래된 제반 모순은 士林의 학문자세와 出處觀의 형성에 다양한 분화를 가져오게 되었지만, 그러한 조짐은 퇴계학파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이황의 복합적이고 탄력적인 학문 및 삶의 철학에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였다. 곧 이황은 우주와 인성의 근원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그것들의 운영원리를 파악함으로써 근원에서 현상에 이르는 일관된 철학체계를 수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관념적 사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한 현실상황에 투영하여 자신의 삶의 철학과 出處義理를 규정하는 가운데 확립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원칙과 현실을 관통하는 합리성을 갖는 것이면서도, 원칙을 지향하는 剛과 현실에 비중을 두는 柔를 겸비한 복합적이고도 탄력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황의 그 같은 학문체계는 제자들에게 일관된 형태로 전승되지 못하고, 剛과 柔가 부각되는 형태로 수용되는 이원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에는 退溪學의 근원적 이해에 치중하거나 그것의 현실적용 방안을 모색하는 處士型 사림과 官僚型 사림의 입장차가 개재해 있기도 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趙穆을 중심으로 한 예안사림과 柳成龍을 정점으로 하는 안동사림의 불화를 초래하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이는 자칫 퇴계학파 내부의 분열까지 불러올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조율할 수 있는 중도적 인물의 등장이 무엇보다 시급한 실정이었다. 그러한 학파적 요구를 반영하며 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柳雲龍이었다.
류운룡의 그러한 역할의 배경에는 그가 류성룡과 형제로서 남다른 우애를 갖고 있는 데다 예안사림과도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의 원칙과 현실을 융합하는 ‘體剛用柔’한 성품과 삶의 철학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편벽되고 교만한 기질의 소유자로까지 평가될 정도로 善․惡의 분별에 투철한 剛毅 일변도의 성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확고한 철학적 논리를 토대로 剛․柔를 겸비하고 있던 이황에게 감화를 받게 되면서 그것들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가 喪禮․祭禮 등 家禮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그의 기질적 순화를 위한 방안모색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剛 또는 柔 일변도로 흐를 수 있는 양극의 경향을 해소하는 방책이 되는 것으로,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가 퇴계학파는 물론 남명학파와도 폭넓은 교유를 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가 剛柔를 겸하며 剛毅 일변도의 경향을 보이는 예안사림과 溫柔에 치중하는 안동사림의 사이에서 야기될 수 있는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는 접점에 설 수 있게 되는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의 조정자로의 역할은 退溪集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그 방식을 두고 예안사림과 안동사림이 견해차로 불화를 빚게 될 때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조목을 중심으로 한 예안의 처사형 사림들은 문집발간을 계기로 퇴계학을 집대성할 계획을 갖고 가능한 모든 遺稿를 수집․정리하여 편찬하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유고의 전문수록은 문집의 公刊을 추진하고 이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퇴계학파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관료형 사림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그들은 乙巳削勳에 대한 사림의 공론과 군주의 결정에 배치되는 이황의 편지가 수록될 경우 그것이 가져올 정치적 파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류성룡은 조목에게 발췌수록을 요구하게 되었고, 조목이 여기에 부정적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한 예안사림과 안동사림의 갈등의 골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류운룡은 예안사림의 편찬원칙에 동조하며 그들과 함께 遺稿의 수집․정리작업에 적극 참여하는 등 신뢰를 축적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안사림에게 유고의 발췌수록의 당위와 함께 문집이 가져다줄 정치적 효용성에 대해 집요한 설득작업을 계속했다.
그 결과 조목 등 예안사림이 편집한 草本의 印刊은 일단 유보되고, 류성룡의 주도로 草本에 첨삭을 가한 中草本을 만들게 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작업은 예안사림의 묵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으로, 이는 류운룡이 그 동안 전개해왔던 설득노력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류성룡과 조목의 갈등이 완전히 봉합된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들은 전란에 대응하는 방식에 현격한 입장차를 드러내게 되었고, 조목이 류성룡의 처사를 ‘講和誤國’으로 규정하면서 학파의 내분은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예안사림은 류성룡이 北人세력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작 당하자 말자 도산서원에서 退溪集 草本의 간행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그들이 류성룡 등 안동사림과의 결별도 불사하겠다는 선언적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양상은 궁극적으로 학파 내부의 양극화되어 가는 경향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한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류운룡의 조정노력도 당시로서는 미봉책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퇴계집의 新刊韻에 스스로 次韻하고 류성룡에게 年譜작성 제의를 수용하도록 권유하는 등 학파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퇴계학파가 현실대응 자세에 있어 시각차가 온존함에도 불구하고 자체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고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퇴계학파에서 류운룡이 차지하는 위상이 여기에서 찾아진다고 하겠다.
▶參考文獻
宣祖實錄
慶尙道邑誌
永嘉誌
永慕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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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菴集(1990, 민족문화추진회)
國譯 謙菴集(1997, 新興印刷所)
退溪集
退溪全書
西厓集(柳成龍)
月川集(趙穆)
鶴峰集(金誠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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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Kyoumam Ryu Woon Ryoung’s learning and
attitude toward the confrontation with reality Sul, Suk-kyu
After Toigye’s death, the Toigye school seemed to spilt into petty clique. The subdivide was not due to the divergence of opinion about learning but to the recognition of reality and the concept of official life. Under such conditions, Kyoumam Ryu Woon Ryoung could keep his balance among the Literati’s trouble and antagonism. In fact, he did not make his own clique. This was mainly due to his personality and philosophy on life. Kyoumam was a man of toughness and moderateness. His flexible personality made him as a mediator.
Kyoumam’s efforts could be as a stepping-stone for overcoming split crisis and maintaining life force of the Toigye school. These are what to focus on Kyoumam.
http://blog.naver.com/cadline?Redirect=Log&logNo=11689464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문관인 겸암 류운룡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에 앞장 선
서애 류성룡선생의 친형이자 관찰사를 지낸 입암 류중영 선생의 장남이다.
겸암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아우 서애에 비해 그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 역시
격동의 16세기를 풍미한 풍운아적인 선비였다.
그는 유학을 습득한 지식이면서도 한민족 고유의 현묘한 도를 공부한 도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호가 겸암謙唵이듯이 자신을 늘 드러내지 않았으며 겸손을 으뜸으로 하였다.
겸암은 당숙인 파산 류중엄선생과 아우 서애와 함께 퇴계 이황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학문의 대의를 깨쳐 그 비범함이 매우 돋보였다.
또한 그는 주역에도 정통해 자까지도 주역에서 취해 응현應見라 하였다.
겸암은 풍수지리에도 밝았고 늘 단아한 선비의 풍모를 지녔다.
하지만 그는 학행으로 명성을 떨쳤음에도 과거에는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음보에 의해 1572년 전함사 별좌를 시작으로 사복첨정,
인동현감(오산서원, 야은 묘 수축,지중중류비), 풍기군수 등을 거쳐 원주목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외직으로 관직을 전전하면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늘 효와 예와 의에 대한 모범을 보였다.
또한 토적을 없애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임진왜란때는 모친을 모시고 집안일을 다스렸으며, 한편으로는 조정에 출사하여
정승에 이른 아우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어 국란에 대처토록 하였다.
유능한 관리로도 명성이 자자하여 선조임금이 그를 아꼈지만 동생이
정승으로 있어 끝내 조정의 요직은 맡지 않았다.
그는 선비의 기개와 의로움을 늘 가지고 있으면서 많은 전설을 남겼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생전에 아우와 함께 저녁 먹기 이전에
명나라에 다녀와 저녁을 먹었다고도 한다.
그의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그의 종택 양진당이 있고
늘 해마다 겸암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낙동강의 밝은 달은 천하를 두루 비추며....
도경당 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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