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풍산류씨 가학연원家學淵源 3--귀촌 류경심

회기로 2010. 1. 24. 20:16

류경심(柳景深) 1516(중종 11, 병자) ~ 1571(선조 4, 신미) 6월 2일 졸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풍산(豊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귀촌(龜村).

   지평(持平) 공권(公權)의 자.  겸암 서애의 종숙(從叔)이다.

   외조는 진사(進士) 남팔준(南八俊).

 

1544년(중종 39)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정자(正字)를 지내고,

1546년(명종 1)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서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51년(명종 6) 다시 기용되어 회인현감(懷仁縣監)이 되고, 이어 정주목사(定州牧使)․

회령부사(會寧府使)․함경북도절도사(咸鏡北道節度使)․종성부사(鐘城府使)․

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1568년(선조 1)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후 예조참판(禮曹參判)․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제수받고 부임했다가

     병을 얻어 돌아오던 중에 경기도 장단(長湍) 초현리에서 몰했다.

 

외향인 일직(一直) 귀미(龜尾)에 살았다. 묘소는 서후면 능동재사 뒤 합폄

풍천(豊川) 낙고사(洛皐祠)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귀촌집(龜村集)』이 있다.

 

■참고문헌 : 明宗․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2006. 1. 6   류현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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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면 고위; 현 선조 고 사헌부 대사헌 부군 신주 顯先祖考司憲府大司憲府君神主

 

배위: 성산배씨 교수 휘 관公의 따님 1520년 출생-1605년 7월 21일 졸 86세

신주면 : 현 선조 비 정부인 배씨 신주  顯先祖비貞夫人裵氏神主

 

귀촌 류경심 (龜村 柳景深) 불천위 기일 ( 음 6월 2일, 비위 7월 21일);-나는 날이므로 하루 전 入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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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심(柳景深):1516(중종 11, 병자)∼1571(선조 4, 신미). 본관 豐山. 자는 太浩. 호는 龜村.

                         河回에 定居한 從惠의 玄孫. 公權의 子.

                         1544년(중종 39) 문과 급제. 1547년(명종 2) 修撰으로서

               良才驛 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그 뒤 禮曹參判•大司憲 등을 지냄.

              저서:『龜村集』. ▣참고:「墓碣銘」(柳成龍 撰) 󰋫집필:김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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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중택(龜村古宅)

귀촌종택

귀촌중택(龜村古宅)

풍산류씨(豊山柳氏) 귀촌파(龜村派)의 종택(宗宅)이며, 사당에는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공의

불천위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귀촌공의 모부인(母夫人) 정부인(貞夫人) 영양남씨(英陽南氏,남팔준女)와

자부(子婦) 공인(恭人) 문소김씨(聞韶金氏,개암 김우굉女)는

2위 모두 열녀(烈女)로서 정려비(旌閭碑)가 마을 입구에 있다.

   

                   2006년 9월 15일  류현우

 

귀촌종택은 1970년대까지 임여재 류규公 주손이 살았던 집이다.

               07. 1. 13, 교관공 주손 훈하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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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심(柳景深)

성명(姓名)

 류경심(柳景深)

본관(本貫)

  풍산(豊山)

시대(時代)

1516(중종 11)∼1571(선조 4)

자(字)

태호(太浩)

호(號)

구촌(龜村)

이력(履歷)

류경심(柳景深)  1516(중종 11)∼1571(선조 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 정랑 공권(公權)의 아들이며, 유성룡(柳成龍)이 그의 족질이다.

1537년(중종 3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홍문관정자를 지냈고, 1546년(명종 1) 승정원주서로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1547년 예조좌랑·홍문관수찬이 되었다.

이해에 정미사화(文定王后와 李芭를 비방한 壁書가 전라도 良才驛에서 발견되어, 부제학 鄭彦懿의 고발로 20여명이 처형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51년 다시 기용되어 회인현감 등을 거쳐 1558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백성을 부역시켜 언전(堰田)을 개간하려는 윤원형(尹元衡)에 반대하다가 종성부사로 전출되었다.

1560년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고, 1568년(선조 1) 호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참판·대사헌을 거쳐 1571년 병조참판·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평안도관찰사 재직중 병으로 상경 도중 장단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구촌집》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李泰鎭〉

 

 

<국조 문과 방목>

유경심(柳景深) More Info.

       중종(中宗)39년(1544년), 별시(別試) 을과2(乙科2)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16년, 병자

  자(字)   태호(太浩)

  호(號)   귀촌(龜村)

  본관(本貫)   풍산(豊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유공권(柳公權)

  생부(生父)    

  조부(祖父)   유자온(柳子溫)

  증조부(曾祖父)   유소(柳沼)

  외조부(外祖父)   남팔준(南八俊)

  처부(妻父)   배관(裵寬)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37(정유)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대사헌&(大司憲&), 옥당&(玉堂&)

 

유경심(柳景深)   

       명종(明宗)1년(1546년), 중시(重試) 갑과1(甲科1)  

 

 갑진1544 별시방(甲辰1544 別試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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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류경심(柳景深) 풍산(豊山)

상현정(象賢亭)

1. 位置:安東市 一直面 明津2里

안동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의성 방향으로 19㎞ 쯤 가면 안동시와 의성군의 경계를 이루는 미천(眉川)이 나오고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기 직전에 미천의 제방을 따라 명진가는 길로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정자가 보인다.

 

2. 建築物의 構造와 配置

이곳은 미천이 굽이쳐 정자 앞에서 소를 이루고 있고 높은 돌산이 우뚝 솟아 있으며 또한 넓은 새들이 펼쳐져 있어서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이 정자는 귀봉(龜峰)&#8228;귀촌(龜村)&#8228;귀계(龜溪)&#8228;성남(星南) 선생 등이 학우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본래 귀담서당(龜潭書堂)이다.

 

이 건물은 반누각식 정자로 앞의 기둥은 기단(基壇) 없이 땅에 자연석 (自然石) 주초(柱礎)를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다. 이 원주에서 안쪽으로 25㎝ 들어가서 높이 92㎝의 시멘트 기단(원래는 자연석 기단이었으나 뒤에 시멘트를 바른 것 같음)을 사방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각주(角柱)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아담한 정자로 중앙의 마루가 1칸이고 좌우에 온돌방을 각각 1칸씩 두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고 상부는 오량가(五樑架)로 판대공(板臺工)을 사용했으며 천장(天障)은 연등천장이다. 마루 뒤편에는 쌍판문(雙板門)이 있고 벽은 판벽(板壁)이다.

 

 좌우에 온돌방은 각각 정면에 쌍띠살문이 있고 옆에는 띠살문이 있으며 마루 쪽으로도 쌍띠살문이 있다. 그리고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홑처마이며 벽체는 회칠을 했다.

 

3. 關聯人物

류경심(柳景深, 1516~1571)

선생의 자는 태호(太浩)이고 호는 귀촌(龜村)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선생은 공조전서(工曹典書) 류종혜(柳從惠)의 현손이며,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낸

류공권(柳公權)의 아들로 중종 11년(1516)에 태어났다.

 

중종 32년(1537)에 생원(生員)&#8228;진사(進士) 양시에 합격하고

중종 3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생은 검열(檢閱), 정자(正字)를 거쳐 명종 원년(1546)에 주서(主書)로

문과(文科)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에 취임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공조정랑(工曹正郞),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고

동 2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

 

명종 6년(1551) 회인현감(懷仁縣監), 호조정랑(戶曹正郞),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통정대부(通政大夫), 종성부사(鍾城府使), 정주목사(定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무소불능(無所不能)일 만큼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선생은 목민(牧民)에 있어서

뛰어난 역량을 지녔고, 극심히 피폐했던 회인 고을에선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백성들의 살림에 윤기를 되찾게 했다.

 

또 아전을 엄하게 단속하고 토호(土豪)를 억눌러 일경이 숙연해 졌다고 한다.

 

선생은 정주목사(定州牧使), 의주목사(義州牧使), 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처 동 22년(1567) 6월에 명종이 승하하매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겸했다. 이 해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올라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했고, 그 10월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어 해이한 기강을 바로 세움에 이바지했다.

 

선조 4년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처 평안감사(平安監司)로 부임했다가 병을 얻어 돌아오던 길에 장단(長湍)에서 몰하니 향년 56세였다.

 

입암(立巖) 류중영(柳仲&#37090;)이 행장을 짓고,

묘명은 서애(西厓) 류성용(柳成龍)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은 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가 지었다.

 

저서로 귀촌집(龜村集) 4권 2책이 있다.

 

http://www.shinjongwoo.co.kr/name/ah/azb/vndtks/vnd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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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58
이름: 류동주 (lew35@korea.com)
홈페이지: http://myhome.naver.com/lew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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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春 밤을 보내며  

 오늘은 봄으로 들어선다는 立春날이다.
옛날 입춘 날에는 어른 앞에서 입춘(立春) 방문(榜文)을 골라 쓰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시절을 입안주 삼아 희망의 덕담을 나누곤 하였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등 내가 주로 썼던 방(枋)이다. 선친은 아들이 쓴 글씨가 잘되었다고 이웃 어른이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 술을 더 내오라고 소리 높이시고, 놀러온 어른들은 곁에서 옛날 당신들이 썼던 입춘방문을 되뇌며 칭찬을 더 늘인다. 향기 높은 약주에 혀가 굳어지면 '슬슬 일나 볼가?' 말하며 일어나시곤 하였던 생각이 든다.

 지난 주말만 해도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추위였다. 지금은 영하 5도라지만 여간 따뜻하지 않다. 한강의 얼음도 다 녹았고 강 위에 33 55 새까맣게 떠있던 오리들도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고, 오늘은 한강 큰 다리 가까운 곳, 샛섬 북쪽에 두 마리가 정다이 자맥질을 한다. 나머지는 소상(瀟湘)땅을 찾아 귀성 길에 올랐는가?  그러나 동리에는 아직 꽃 소식은 없는 듯하다.

 TV에서는 휴전선 근방의 전초지(前哨地)에선 이 아침도 추위를 견디며 휴전선과 바다의 경계에 눈귀를 곤두세우는 국군 장병들, 그리고 밤을 새며 뛰어다닌 소방관과 경찰관들의 활동 상황을 보도한다. 그들의 고생으로 우리는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지만 그 고마움을 표할 능력이 없음을 아쉽게 느낀다. 옛날 두만강 변경을 지키던 한 어른의 시를 보면 가족을 떠나 언제까지 있어야하는지 기약이 없는 기다림 속에서 외로움을 달래는 심경을 읊은 시가 있어 졸속으로 서투른 번역을 시도하였다.

[立春夜 (입춘날 밤)]
             
梅怨初伸雪欲花   매화는 눈 속에 꽃피워 답답함 달래려는데
春光莫道更無多   봄볕은 저물도록 소식을 보내지 않는구나
天機已轉鷄邊曉   하늘은 벌써 닭 시켜 새벽을 알리고
地脈潛回凍底波   땅속은 어름이 뒤채기기만 하네
子夜情懷驚歲律   그믐밤 해 바뀜에 내 가슴은 당황하고
平朝物色遍陽和   태평한 조정은 만물이 화기로 덮이겠지.
孤臣遠獻南山壽   외로운 신하는 멀리서 잔 들어 남산수 빌고
胡越千年祝一家   남북에 떨어진 일가는 건강만 축원하네

風雨孤燈半落花   풍우 속 외로운 등불은 반이나 탔는데
書灰不寐夜聞多   잠못 이루어 책 읽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네
暖生窮髮消殘雪   불모 땅에 찾은 봄기운 잔설을 녹이는데
凍海蠻河咽曉波   언 바다, 북쪽 강물은 새벽 파도에 목 메이네
袞袞天機來有信   곤곤히 천기는 소식을 전해 오는데
紛紛人事漸傷和   분분한 세상일은 마음을 산란케 하네
尺搖身世長東北   법도에 맡긴 몸 동북에 오래 있어  
梅把屠蘇不在家   매화나무 앞에 잔 잡고 타향에서 보내네

<주>
 胡越 ;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           窮髮 ; 불모의 땅.
 袞袞 ; 강물이 흐르는 모양, 연속하여 끊이지 않는 모양.
 紛紛 ; 뒤섞여 어수선한 모양
 屠蘇酒 ; 설날에 마시면 사기를 물리친다는 술(도라지 방풍 산초 육계 등을 넣어 빚은 술)

 시의 작자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공(1516-1571)은 명종(明宗) 때 중시(重試)에 장원(壯元)하여 장래가 촉망되었던 분이다.

 

옥당(玉堂)을 거치고 직임에 공정을 지키었던 어른은 명종 13년(1558) 정주(定州)목사로 부임할 때, 권신(權臣) 윤원형(尹元衡)이 바다를 매어 전장(田庄)을 만들던 치재(致財)에 협조를 부탁 받고 웃음으로 사절한 것이 미움이 되어, 그의 앞잡이 일당의 입방아로, 수일만에 동북 변경의 종성(鐘城)부사로 쫓겨갔다.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아, 종성에 간지 얼마 안되어 파직 당하고, 다시 동 17년에는 정주로, 18년에는 의주(義州)로 옮겨졌다.  

 

20년에는 회령(會寧)부사로 쫓겨가고 몇 달 안되어 함북도절도사(咸北道節度使)를 명 받았으니, 여러 해를 오랑캐와의 접경에서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명조 21년(1564)의 입춘을 맞은 날 밤, 나이들고 병든 외로운 변경의 수령은 이런 어려운 과정이 겨울을 더 더 춥게 한다. 이젠 지치고 노쇠한 몸이 되어, 따뜻한 곳이 그리운데 행여나 왕이 불러줄 가? 기대하며 남산수를 빌고, 고향에 남겨 놓은 가족을 생각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가슴을 달래었던 귀촌(龜村) 공의 시이다.  

 

몇 해 뒤 명종이 승하하자 대사헌(大司憲)으로 서울에 불리어 왔으나 그것도 잠시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발령이 났다. 폐를 앓고 있어 병을 이유로 부임을 사퇴하였지만 '그대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왕명에 따라, 부임 도중 장단(長湍) 객사(客舍)에서 생을 마쳤다.

 민속 마을 하회를 들어서서 중앙로를 따라 마을 한 가운데로 가면 십자로가 나온다. 바로 그곳 왼쪽의 사당이 담 넘어로 보이는 개와 집이 있는데, 그 집이 이 어른의 종택이다.

 

http://www.bakyak.co.kr/technote/read.cgi?board=newboard1&y_number=57&nnew=1

 

출처 : 풍류하회
글쓴이 : 이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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