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崔茂宣)은 고려 말에 화약 무기를 개발해 왜구를 물리치고 우리 나라 전쟁사에 있어 군사무기의 역사를 바꾼 과학자요, 무장이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화약 무기의 아버지'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가 출전한 것은 오늘의 전북 군산 앞바다로 추정되는 금강 하구 진포(鎭浦)에서 왜구를 섬멸한 싸움 단 한번뿐이지만, 고려군은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 개발한 화포 등 신무기로 거의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벌이는 왜구(倭寇)의 무리를 격퇴시킬 수 있었다.
또 이 우세한 무기를 바탕으로 왜구 및 홍건적과의 싸움에서 계속 전공(戰功)을 세운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에 없어서는 안 될 장수로 급성장하여 정계의 거두가 되고, 마침내 야심을 드러내 고려왕조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개국할 수 있었으니, 최무선이야말로 역사를 바꾼 인물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을 통해 이어진 화약 무기의 발달은 조선왕조의 군사력 강화에도 크나큰 공헌을 했다.
뒷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23회의 주요 해상전투(海上戰鬪)에서 전승무패(全勝無敗)의 전공(戰功)을 세우며 재해권을 장악하고 권율(權慄) 장군과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각각 행주산성(幸州山城) 싸움과 제1차 진주성 전투(晉州城戰鬪)를 승리로 이끌며 왜적(倭敵)의 침략군을 패주(敗走)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천부적인 탁월한 전략과 출중한 통솔력뿐만 아니라 왜군보다 훨씬 강력한 화약 무기, 즉 우수한 중화기(重火器)를 갖춘 덕분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의 군사들이 육상전(陸上戰)에서 왜군에게 형편없이 밀린 것은 미리 전란에 대비하지 못한 조정의 책임도 크지만, 왜군이 서양에서 들여온 조총(鳥銃)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한 반면, 조선 관군의 무기라고는 창과 활 등 재래식 무기가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화약 하면 알프레드 노벨의 발명품 다이너마이트를 머리에 떠올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노벨의 다이너마이트가 고도의 현대식 과학기술적 연구에 따른 '인공 화약'이라면,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은 '자연 화약'이라고 할 수 있다.
●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화약 발명해
최무선이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의 화약을 발명한 1370년대까지 세계에서 화약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오로지 중국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화약 제조방법을 극비에 부쳐 절대로 나라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감시했다. 그런 화약을 최무선이 오랫동인 피땀어린 연구와 노력 끝에 발명해내 고려를 제2의 화약보유국으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최무선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 두 군데 나오고, 또 그의 집안인 영천(永川) 최씨(崔氏) 족보에 나온다.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은 우왕(禑王) 재위 3년(서기 1377년) 10월에 당시 판사였던 최무선의 건의에 따라 화통도감(火通都監)을 설치했다는 것과 우왕 재위 6년(서기 1380년) 8월에 해도원수 나세(羅世) 및 심덕부(沈德符)와 더불어 진포에서 왜구를 소탕했다는 것이다.
영천 최씨 족보에 따르면 최무선은 시조인 최한(崔漢)의 7세손으로서, 뒷날 조선시대로 접어들어 그가 세운 화약 발명의 공로에 따라 영성공(永城公)이란 시호를 받았기에 영성공파 시조로 나온다. 그러나 이밖에는 최무선이 언제 태어났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언제 벼슬길에 나아갔는지 등에 관한 것을 알려주는 정확한 기록이 전혀 없다.
최무선은 1320년대 중반에 현재 경북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촌에서 광흥창사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흥창이란 고려시대에 관리들의 녹봉을 담당하던 관청으로서 그 책임자인 광흥창사는 종 5품 벼슬이었다.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하여 노략질과 방화를 일삼는 왜구들을 혼내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왜구의 침범과 노략질 때문에 아버지가 고민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았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광흥창은 전국에서 조운선(漕運船)에 실려 수도 개경으로 들어오는 곡식을 관리하여 대소 벼슬아치들의 봉급을 주던 관청이므로 뱃길로 운반 도중에 바다에서 왜구에게 빼앗긴 적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최무선이 언제 어떻게 벼슬길에 나갔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과거를 보았는지, 아니면 음직으로 벼슬을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그가 관직에 나아갈 때에 그의 아버지 최동순은 이미 벼슬길에서 물러난 뒤라고 짐작될 뿐이다. 그가 관직에 나아간 때는 아마도 1346년부터 1356년 사이, 즉 그의 나이 20세에서 30세쯤으로 추측된다.
● 왜구의 노략질이 한창일 때 벼슬길에 나아간 듯
당시 고려의 사정을 살펴보자. 고려는 원종(元宗) 재위 14년(서기 1273년) 4월에 삼별초(三別抄)의 항몽투쟁(抗蒙鬪爭)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원나라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여, 이후 1352년에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여 반원정책(反元政策)으로 돌아설 때까지 자주성을 빼앗긴 채 죽어 지내야만 했다. 한마디로 해서 원나라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려의 국왕은 원나라 조정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또한 하나같이 원 황실의 부마(駙馬)가 되어야 했으며, 그나마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멋대로 갈아치웠다. 또한 묘호(廟號)에도 조(祖)와 종(宗)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원나라에 충성을 바치라는 뜻으로 충(忠)자를 붙이게 했으니 충렬왕(忠烈王), 충선왕(忠宣王), 충숙왕(忠肅王), 충혜왕(忠惠王),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王) 등이 그런 경우였다.
최무선은 이러한 원(元)의 간섭기인 충숙왕 때에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라나서 충목왕 또는 공민왕 즉위 초에 관직에 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 무렵은 원나라는 안으로는 제위쟁탈전으로 곪고 밖으로는 홍건적의 봉기로 멍들어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공민왕이 원의 압제에서 벗어나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나선 것도 원의 힘이 예전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려도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정에다 설상가상으로 그 전 임금인 충정왕 때부터 부쩍 잦아진 왜구의 침범과 노략질로 골치를 썩고 있었다. 왜구의 침범은 비단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멀리 삼국시대 초기, 정확히는 신라 건국 직후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고려 말기에 더욱 기승을 부려 결국은 고려 망국의 간접적 원인의 하나로 손꼽히기에 이르렀다.
충정왕(忠定王) 재위 2년(서기 1350년)에 왜구는 대규모로 바다를 건너와 경상도 남부 해안을 휩쓸며 노략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해 2월에 왜구가 고성, 거제 등에 상륙해 기승을 부리자 고려 조정은 오늘의 마산인 합포천호 최선과 도령 양관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무찌르게 하여 왜인 3백여명을 죽였다. 그러자 이에 보복이라도 하려는 듯 그 다음달인 3월에는 더 많은 왜구가 몰려와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순천, 남원, 구례, 영광, 장흥지방까지 휩쓸며 분탕질을 했다. 이에 따라 민심이 갈수록 흉흉해지고 조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버렸다.
또 그해 6월에는 왜구가 20여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몰려와 합포, 고성 등지의 관아와 민가를 닥치는 대로 약탈, 파괴, 방화했다. 고려 조정의 대응이 신통치 앉자 왜구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더욱 기승을 부리며 날뛰었다. 11월에는 동래를 휩쓸었고, 그 이듬해인 충정왕 재위 3년(서기 1351년) 8월에는 130척의 대선단으로 쳐들어와 곳곳에서 재물을 약탈하고 집들을 마구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붙잡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관리들은 군사가 없으니 여전히 속수무책이었다. 조정의 명령에도 나가서 싸울 생각은커녕 도망치기에 바빴으니,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나라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공민왕(恭愍王)의 원나라 배척, 자주성 회복, 국정 개혁 추진
이렇게 고려의 남쪽 지방이 온통 왜구들의 천지가 되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윤택, 이승로 등 대신들이 원나라에 이런 사정을 알리고 어린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王祺)를 새 임금으로 세워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원황(元皇) 혜종(惠宗)은 사위의 나라 고려를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해 10월에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공민왕을 내세웠다. 강화도로 유배당한 충정왕은 이듬해 3월에 15세의 나이로 숙부인 공민왕에 의해 독살되었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재 아들이며 충혜왕의 아우이다. 충숙왕 재위 17년(서기 1330년)에 태어났으니 최무선과 비슷한 나이였다. 원나라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에 연경에 들어가 줄곧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1348년에 조카 충목왕이 죽음에 따라 신하들이 그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원나라에서 겨우 12세 어린아이인 충목왕의 둘째 아들이요, 또 다른 조카인 충정왕을 내세우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다가 이때에 즉위하니 그해에 나이 22세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고려 국왕으로 옹립된 것은 그해 10월이지만 정작 귀국하여 즉위한 것은 그해 12월이었다. 고려로 돌아온 공민왕은 이듬해인 1352년 2월부터 전격적으로 내정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무신정권시대에 설치하여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던 정방(政房)을 폐지시키고, 토지와 노비 등 여러 문제의 해결을 지시했다. 이는 곧 국왕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원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독립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공민왕이 원의 수도 연경에서 10년이나 살면서 점점 몰락해가는 원나라의 실정을 너무나 똑똑히 알고 돌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고려의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 먼저 고려의 풍속을 되찾는 운동부터 펼쳐 변발과 호복 따위 몽골식 풍속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1356년에는 본격적으로 원나라에 대한 배척운동을 펼쳐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원의 내정간섭 기구인 정동행성(征東行省)도 폐지했으며, 관제를 문종(文宗) 때와 같이 북구토록 했다.
또한 공녀(貢女) 출신으로 원나라 황제 혜종의 비가 된 기황후(奇皇后)의 오라비로서 원나라와 누이의 권세를 업고 권력을 남용하던 기철(奇轍) 일당을 숙청했다.
공민왕은 또 여진족이 되었다가 다시 고려로 내조한 이자춘(李子春)의 공로에 힘입어 원나라 복속 이후 100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함으로써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했다. 이 이자춘이 바로 이성계의 아버지이다.
● 신돈 처형, 공민왕 시해로 물거품이 된 개혁
이처럼 공민왕이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내걸고 배원정책을 펼치자 분노한 원나라는 대군을 공격해 고려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원나라도 더는 예전 같지 않았다. 중국의 원주민인 한족(漢族)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특히 하북성에서 일어난 홍건적의 세력이 갈수록 강해졌다. 만주까지 진출한 이 홍건적 가운데 4만명이 원의 반격에 말려 1359년에 고려를 침략했다가 최영(崔瑩),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에게 패배를 당했고, 2년 뒤에는 10만 대군이 침범하여 개경까지 함락되었는데, 공민왕은 개경을 벗어나 경상도 안동까지 피란했다. 공민왕은 그 이듬해인 1363년에 정세운(鄭世雲), 최영, 이성계 등이 이끈 고려군이 이들을 개경에서 몰아내고 압록강 건너로 쫓아버린 뒤에야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환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미처 환궁도 하기 전에 김용(金鏞)의 반란사건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 다음해에는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 왕해(王解)를 새 고려 국왕으로 책봉하여 군사 1만명과 함께 고려로 보냈다. 이때에도 최영과 이성계의 분전으로 원나라의 기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1365년 2월에는 만삭이던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산고 끝에 죽고 말았다. 계속된 전쟁과 반란으로 지친데다 사랑하던 왕비까지 잃어버린 공민왕은 만사가 귀찮았다. 그는 왕사 신돈(辛旽)에게 정권을 맡긴 채 왕비의 명복을 비는 불사에만 전념했다. 공민왕을 대신하여 획기적인 개혁정책을 펼치던 신돈은 결국 집권 6년만인 1371년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고, 집권 초부터 펼치던 개혁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재위 23년만에 45세로 암살당하자 그 뒤는 불과 10세의 우왕(禑王)이 이었다. 당시 원은 북쪽의 근거지 몽골 초원으로 쫓겨 갔지만 고려에 대해서 아직도 종주국 행세를 하고 있었고, 새로운 대륙의 주인이 된 명나라도 고려의 복속을 강요하고 있었다. 고려는 두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여야만 했는데, 왜구의 침범은 해가 갈수록 심해져 남쪽 해안지방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고, 이제는 서해를 북상하여 충청도와 경기도 해안까지 노략질하는 형편이었다.
●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火通都監) 설치
우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왜구가 충청도 내륙의 부여와 공주까지 쳐들어와 마구 노략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대대적인 왜구토벌작전에 나섰다. 최무선의 화약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조정이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을 설치한 것은 우왕 재위 3년(서기 1377년)이었다. 그 동안 최무선이 무슨 관직을 맡아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의 건의로 설치된 화통도감은 화약을 제조하고, 그 화약을 사용하는 무기를 만드는 부서라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군사 부문, 특히 무기를 연구 개발하는 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머리에서도 말했지만 최무선은 소년 시절부터 걸핏하면 쳐들어와 노략질하는 왜구들에 대해 혼을 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키웠고, 그런 생각은 자연히 화약을 이용한 무기 개발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지 처음부터 쉬운 것은 없는 법이다. 최무선의 화약 발명도 여러가지 어려운 일에 부닥쳤을 것이 틀림없다. 당시 화약은 중국에서 수입해다 썼는데, 무기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로 불꽃놀이에 쓰기 위한 것이었다. 최무선이 우리 고려도 화약을 만들어야 한다, 화약을 폭죽으로 쓸 것이 아니라 무기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이 웃어넘겼을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화약 제조비법을 가르쳐주지도 않는데 어떻게 만든단 말이냐, 또 필요한 만큼 중국에서 사다 쓰면 되지 무엇 때문에 인력과 비용을 들여 굳이 만들 필요가 있으랴, 또 우리가 화약을 만든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이냐 하는 따위로 반대했을 것이다. 선구자는 늘 그래서 외로운 법이다.
그래도 최무선은 꾸준히 사람들을 설득했다. 특히 조정에서 영향력 있는 높은 벼슬아치들과 실전에서 적과 마주쳐 싸워야 하는 장수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만든 화약의 성능을 시험도 해서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 같은 최무선의 진지한 설득과 시범 끝에 결국 사람들은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최무선의 충성심에 대한 감동이기도 했으리라. 최무선이 자신이 입신양명을 위해 오로지 화약 발명에만 전심전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온갖 어려움과, 때로는 목숨의 위험가지 감내하며 최무선은 화약을 발명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가 만든 화약은 오늘날 총포류에 쓰이는 화약이나 다이너마이트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요즘 화약은 연기가 나지 않지만,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은 유황과 염초와 숯 등을 배합해서 만든 것이므로 한번 터뜨리면 총포의 구멍이 시커멓게 그을리고 연기도 많이 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기라고는 칼과 창, 그리고 원거리에서 적에게 살상을 입할 수 있는 것은 활이 고작이었던 당시에 화약을 사용한 화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를테면 현대전에서 개인화기와 공용화기, 소화기와 중화기의 대결과 같은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최무선과 한 동네에 원나라에서 귀화한 염초장 이원(李元)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최무선은 이원과 친하게 사귀면서 그에게 화약을 만드는 비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최무선이 그때까지 중국에서 수입하여 쓰던 화약을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하여 이를 국산화하는데 성공했으리라는 추측이다.
최무선(崔茂宣)은 고려 말에 화약 무기를 개발해 왜구를 물리치고 우리 나라 전쟁사에 있어 군사무기의 역사를 바꾼 과학자요, 무장이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화약 무기의 아버지'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가 출전한 것은 오늘의 전북 군산 앞바다로 추정되는 금강 하구 진포(鎭浦)에서 왜구를 섬멸한 싸움 단 한번뿐이지만, 고려군은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 개발한 화포 등 신무기로 거의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벌이는 왜구(倭寇)의 무리를 격퇴시킬 수 있었다.
또 이 우세한 무기를 바탕으로 왜구 및 홍건적과의 싸움에서 계속 전공(戰功)을 세운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에 없어서는 안 될 장수로 급성장하여 정계의 거두가 되고, 마침내 야심을 드러내 고려왕조를 뒤엎고 조선왕조를 개국할 수 있었으니, 최무선이야말로 역사를 바꾼 인물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을 통해 이어진 화약 무기의 발달은 조선왕조의 군사력 강화에도 크나큰 공헌을 했다.
뒷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23회의 주요 해상전투(海上戰鬪)에서 전승무패(全勝無敗)의 전공(戰功)을 세우며 재해권을 장악하고 권율(權慄) 장군과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각각 행주산성(幸州山城) 싸움과 제1차 진주성 전투(晉州城戰鬪)를 승리로 이끌며 왜적(倭敵)의 침략군을 패주(敗走)시킬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천부적인 탁월한 전략과 출중한 통솔력뿐만 아니라 왜군보다 훨씬 강력한 화약 무기, 즉 우수한 중화기(重火器)를 갖춘 덕분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의 군사들이 육상전(陸上戰)에서 왜군에게 형편없이 밀린 것은 미리 전란에 대비하지 못한 조정의 책임도 크지만, 왜군이 서양에서 들여온 조총(鳥銃)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한 반면, 조선 관군의 무기라고는 창과 활 등 재래식 무기가 고작이었기 때문이었다.
화약 하면 알프레드 노벨의 발명품 다이너마이트를 머리에 떠올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노벨의 다이너마이트가 고도의 현대식 과학기술적 연구에 따른 '인공 화약'이라면,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은 '자연 화약'이라고 할 수 있다.
● 위험 무릅쓰고 화약 무기 개발, 숱한 왜구 섬멸
어쨌든 갖은 비웃음과 반대 속에서도 최무선은 마침내 화통도감(火通都監)을 설치하는데 성공하고,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 이를 실전에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국산 화약을 총포에 사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렇게 만든 신무기로는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火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을 비롯하여 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疾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촉천화(觸天火)·주화(走火) 등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무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방법으로 발사를 했는지,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같은 점을 알 수가 없다. 다만 대장군, 이장군, 삼장군 같은 무기는 그 이름으로 미루어보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사용되었던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총통(地字銃筒), 현자총통(玄字銃筒), 황자총통(黃字銃筒) 등의 원형이 아닐까 짐작되고, 철탄자는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유화와 주화 등은 신기전(神機箭)으로 발견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이러한 신무기를 전함에 장착할 수 있도록 연구하는 한편, 조정의 명령에 따라 화포를 장착한 전함 건조를 지휘하고 감독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차례 왜구와의 싸움에 나가 어린 시절부터 열망하던 대로 이 땅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여지없이 쳐부수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가 출전했던 전투는 오직 진포해전(鎭浦海戰) 하나만 기록에 남아 전할뿐이다.
진포해전(鎭浦海戰)은 최영(崔瑩) 장군의 홍산대첩(鴻山大捷), 이성계(李成桂) 장군의 황산대첩(荒山大捷), 정지(鄭地) 장군의 남해도전투(南海島戰鬪)와 더불어 고려 말기 왜구를 토벌한 4대 승전(勝戰)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진포해전은 우왕 재위 6년(서기 1380년) 8월에 벌어졌다. 왜구가 진포에 침입한 것은 그곳이 조운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전라남북도 지방과 충청남도 일대의 곡창지대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수도 개경으로 올려보내는 중요한 거점이었으므로, 왜구들이 눈독을 들이고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으로 침범했던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나세열전(羅世列傳)에는 진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또 심덕부(沈德符), 최무선(崔茂宣) 등과 함께 병선(兵船) 100척을 거느리고 왜적(倭敵)을 추격하여 포로로 삼았다. 이때 왜선(倭船) 5백척이 진포 어귀에 들어와 배를 매어두고 일부 병력으로 수비하면서 상륙하여 분산되어서 각 주(州), 군(郡)으로 들어가 함부로 방화, 약탈하였다.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고, 곡식을 그 배로 운반하였는데 땅에 흩어진 쌀이 한 자 두께가 되었다.
나세(羅世) 등이 진포로 가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소각하였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고, 배를 지키던 적졍은 거의 다 타죽었으며,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자도 역시 많았다.
나세 등이 진무(鎭撫)를 보내 전승(戰勝)을 보고하니 우왕이 기뻐하여 진무에게 각기 은 50냥을 주었으며, 백관이 축하하였다. 나세 등이 돌아오자 가무를 갖추어 환영하고 나세 등에게는 각기 금 50냥을, 비장 정용(鄭龍), 윤송(尹松), 최칠석(崔七夕) 등에게도 각기 은 50냥을 주었다.'
● 세계 역사상 최초로 군선에 함포를 장착하여 포격전(砲擊戰)으로 승리를 거둔 진포해전(鎭浦海戰)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투의 최고사령관은 해도원수 나세(羅世)였다. 나세는 본래 원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장수가 되어 왜구와의 전투에서 여러차례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진포해전에서 으뜸가는 전공(戰功)을 세운 장수는 단연 최무선이었다. 그가 만든 화포(火砲)의 위력에 힘입어 왜구의 선박 3백척을 격침시키고 수많은 왜군을 죽였으며,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 백성들도 구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약을 발명하고 이를 무기로 만들어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선박에 화포를 장착해 해상전투를 치르는 복안을 실행에 옮긴 최무선이야말로, 위대한 과학기술자요, 발명가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전쟁사를 바꾼 위대한 장군이라고 할 수 있다. 전북 군산시 은파유원지에는 최무선의 진포해전 승리를 기리는 진포대첩비(鎭浦大捷碑)가 세워져 있다.
진포해전(鎭浦海戰)이 있은 뒤에 당대의 대표적 학자요, 문인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은 이런 시를 지어 최무선의 공로를 찬양했다.
'명공(明公)의 재략이 때맞추어 태어나니 30년 왜란(倭亂)이 하루만에 평정되었네. 바람 실은 전선은 새들도 못 따라가고 화차는 뇌성을 울리며 진을 재촉하네. 주유(周瑜)가 갈대에 불 놓은 일 가소롭고 한신(韓信)이 배다리 만들어 건넌 일도 자랑거리 아니네. 이제 공의 업적은 만세에 전해지고 능연각에 초상화 걸려 공경 가운데 으뜸일세. 공의 화포 제작은 하늘의 도움이니 누선(樓船) 끌고 일전 벌여 흉적을 소탕했네. 하늘에 찬 적의 기세 연기와 더불어 사라지고 세상을 덮은 공명(功名) 해처럼 영원하리. 긴 맹세가 어찌 오랜 세월 뒤까지 기다리랴. 마땅히 군사의 대권을 맡게 되리라. 종묘사직이 편하고 나라가 안정을 되찾으니 억만창생의 목숨이 다시 소생한 듯하구나.'
그런데 고려사에 따르면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했던 화통도감이 창왕 재위시에 폐지되고 그 업무가 군기시에 통합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는 최무선이 이성계의 야심을 알고 그에게 협력하지 않자 화통도감을 없앴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때 최무선이 이미 65세 안팎의 노인이 되었거나 뒤를 이을 재목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무선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뒤인 태조(太祖) 재위 4년(서기 1395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떴다. 당시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은 겨우 15세였다. 해산이 태어난 것이 바로 진포해전이 있던 해였다. 전설에 따르면 최무선에게는 해산 위로 맏아들이 있었는데 화약 실험을 하다가 폭발사고로 일찍 죽었다고 한다. 또 해산이 태어난 뒤에도 최무선이 부인 이씨에게 아들이 장성한 뒤에 주라면서 화약 제조비법을 적은 화포법(火砲法)이라는 책자를 남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어쨌든 최무선은 죽었지만 화약 기술은 그의 아들에 의해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최해산이 태종(太宗) 재위 1년(서기 1401년) 3월에 군기시 주부로 특채되었던 것이다. 이는 권근이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과 목화씨를 몰래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후손을 채용하라고 건의한 것을 태종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문익점의 아들 문중용(文中庸)은 사헌부감찰, 최해산은 군기시주부로 특채되었다.
이렇게 아버지의 뒤를 이은 최해산은 그 뒤 경기우도 별감으로서 병기와 전함을 관리하다가 태종 재위 9년(서기 1409년)에 군기감승으로 승진했다. 그는 그해 10월에 태종이 임석한 가운데 자신이 개발한 화차의 시험발사에 성공해 임금으로부터 말 한마리를 상으로 받았다. 이에 앞서 2년 전에는 새로 개발한 고성능 화약 폭발실험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함께 구경하던 일본 사신 일행이 모두 기절할 듯이 놀라 자 빠졌다고 한다. 이에 기분이 좋은 태종이 화약장 33명에게 쌀 한섬씩을 상으로 주고, 다른 기술자들에게도 포목을 상으로 내렸다. 최해산은 이렇게 화포와 화차의 개량을 거듭하여 세종(世宗) 재위 6년(서기 1424년)에도 같은 시험발사를 했다.
최해산은 세종 재위 15년(서기 1433년)에는 좌군절제사로서 도원수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여진족정벌전(女眞族征伐戰)에서 전공을 세웠다. 어쩌면 이에 앞서 세종 재위 1년에 있었던 대마도 정벌에도 출정했을지 모른다. 대마도정벌전(對馬島征伐戰)은 왜구의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해 당시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앉았으나 여전히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이 세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행했던 원정이었다. 이종무(李從茂)가 삼도제찰사, 최윤덕이 삼군도제사가 되어 1만 7천여명의 군사와 200여척의 군선을 거느리고 원정한 대마도 정벌은 숱한 왜구를 죽이고 대마도주(對馬島主)의 항복을 받아내는 성공을 거두었다.
거듭 말하지만 최무선 장군은 고려 말기에 화약을 발명하여 우리 나라를 세계에서 두번째 화약 제조국으로 만든 출중한 과학기술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 화약을 화포 등에 사용해 수많은 왜구를 일시에 섬멸한 탁월한 명장이기도 했다. 그의 무덤은 개성 교외에 있다고 전한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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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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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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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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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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