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뛰어난 정치인이자 천부적인 전략가이면서도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부정적인 존재로 치부된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건국 과정에서 수많은 개혁을 주도하고 새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앞장섰지만, 품고 있던 포부를 채 펼치지 못하고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 내내 반역의 원흉으로 매장되고 만다.
정도전이 고려 말의 혼란기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고 할 만큼 모든 방면에 소양이 깊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탁월한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의 이해에 따라 얼마든지 정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현실주의자였다. 고려 말기 우왕(禑王)이 추진했던 요동 정벌 당시에는 친명(親明)을 주장하며 반대했다가, 건국 후에 상황이 달라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했던 점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정도전은 천민 지역에서의 귀양 생활과 긴 유랑 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의 방향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윤리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정도전의 정치적 이상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이방원에게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 오랜 인고의 세월
정도전(鄭道傳)은 1342년, 경북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慶)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장성한 스는 부친의 친구이자 대유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밑에서 수학(修學)했는데, 정몽주(鄭夢周), 윤소종(尹紹宗),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이 당시 그와 함께 공부했던 동문들이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명석하여 주위의 주목을 바았고, 특히 유교 경전과 성리학에 능통했다.
정도전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못하는데다 날카롭고 불같은 일면이 있어 항상 주위로부터 공격을 받기 쉬웠는데, 그는 스스로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평생을 투지와 용기로 일관하며 살았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관철하는 강인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스승이었지만 훗날 정치적으로 그와 날카롭게 대립한 이색도 이 점을 높이 평가하여, "정도전은 항상 할 일을 다하지 못함이 없고, 어떤 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하고 칭찬했다.
정도전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362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375년에 명나라를 협공하자는 제안을 하러 북원(北元)에서 사절이 오자, "공민왕(恭愍王)이 사남[明]정책을 펼쳤으니 사북[元]은 불가하다." 하고 끝까지 반대하다가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친원파의 미움을 사 회진현으로 유대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공민왕의 유지를 이어받자는 뜻도 있지만, 원,명 교체기(元明交替期)의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본 일면이 강하다.
정도전은 이때부터 10여년 이상 불우한 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삼각산 아래 초막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절에 겪었던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자신의 호를 삼각산의 모양을 본떠 삼봉(三峰)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절치부심하던 정도전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강력히 지원해 줄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실세로 여겨지는 이성계(李成桂)의 밑으로 들어가서 재기를 모색하게 된다.
암중모색의 세월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정도전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1384년에 정몽주가 명나라에 사절로 가게 되면서 자신과 함께 갈 사람으로 정도전을 추천한 것이다.
외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 정도전은 얼마 동안 성균관 좨주로 있었다. 그러다가 스스로 외직을 청하여 남양 부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고 선정을 베풀기도 한다. 1388년에 드디어 이성계의 추천을 받아 성균관 대사성으로 중앙 관계에 복귀한 정도전은 그의 생애 중 가장 화려한 시기를 펼치게 된다. 일생일대의 최고 후원자인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 고려 말기 정치적 투쟁의 선봉에 서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후에 이성계와 그를 다르는 신진 세력들은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리로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국왕으로 옹립했다. 우왕(禑王)이 공민왕(恭愍王)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아들이므로 우왕의 아들 창왕 역시 왕씨(王氏)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 있어서 구세력들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정을 장악하기 위한 신진 세력과 구세력 간의 대결은 마지막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잇었다. 당시 고려 조정의 상황을 살펴보면 병권은 이성계가 완전히 장악하여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구신과 세족들은 고려 조정에 대부분 남아 수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두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는 묘한 대처 상황이 계속되었다.
특히 양 세력 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토지와 군사 제도의 개혁은 실권의 향방이 결정되는 사안인 만큼 충돌이 심했지만 결국 병권을 쥐고 있던 이성계 측의 의도대로 관철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 세력간의 반목이 극에 달하였음은 물론, 군제 개편은 이성계 일파 내부에서도 시기와 반목을 싹트게 하였는데 특히 이방원이 정도전을 질시하고 의심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양 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구세력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못한 공양왕은 이성계가 휘하 세력들의 무리한 요구를 제압하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고 조장한다는 불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성계는 이성계대로 공양왕이 자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면서도 자신을 의심하기만 하고 개혁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양자 사이의 틈은 점점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성계는 이런 상황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사직하고 평주 온천으로 가서 운둔해 버린다. 하지만 이성계의 이러한 태도는 실제로 은퇴를 원했다기보다 자신의 정치 노선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임금과 구세력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신진 세력에게 있어 힘의 중심이었던 이성계가 사직하자, 구세력은 이성계 일파를 집중 탄핵하여 일시적으로 조정에서 몰아낼 수 있었는데, 이때 정도전도 봉화현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당시 구세력은 정도전 등 신진 세력들의 대부분이 사대부가 아닌 천한 신분 출신인 것을 집중 공격하여, 개혁 추진의 의도가 자기들의 천한 뿌리를 숨기기 위해 본래의 뿌리를 제거하려는 불순한 음모에서 출발했다고 몰아붙였다. 결국 정도전은 '가풍이 부정하고 주관이 확실하지 못하여 관리로 등용하기에 부적합한 인물' 이라는 이유로 탄핵되어 직첩(職牒)과 공신녹권(功臣錄券)이 회수되고 일가족이 서인으로 강등되는 화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힘의 중심은 이미 이성계에게 쏠려 있었고, 이성계가 실제로 운둔을 원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세력은 운둔하고 있던 이성계가 때마침 말에서 떨어져 당분간 돌아올 수 없게 되자, 이 기회에 눈에 든 가시 같은 이성계 휘하의 신진 세력들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 유배된 사람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계속해서 방관만 하다가는 자기 세력의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고 판단한 이성계 일파는 이방원이 선두에 나서서 구세력에 있어서 최후의 보루인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하는 등 구세력을 무력(武力)으로 제압하여 정국에 일대 반전을 불러온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은 이성계의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정도전도 유배에서 풀려나 정계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사지(死地)에서 정도전을 구해 냈던 이방원이 나중에 정도전을 죽이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성계 일파가 토지 제도 개혁을 통해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병권을장악한 후에 정권까지 틀어쥐게 되자 국왕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결국 대비의 명을 빌어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니, 이로써 고려의 역사는 막을 내리고 새 왕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 새 왕조의 기틀을 닦다.
1392년 7월, 마침내 34대 475년간 이어졌던 고려가 사라지고 조선왕조가 건국되었다. 급격한 변동으로 민심이 떠나는 것을 염려하여 얼마 동안은 고려의 국호와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으나,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각 분야에서 개혁이 잇달았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다재다능한 식견과 특유의 돌파력을 지닌 정도전이 있었는데, 이때가 정도전으로서는 최고의 절정기이며 자신의 경륜을 현실 정치에 펼칠 수 있었던 황금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정도전은 가난하고 권세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으며, 12년 동안 관직에 있었으나 주요 직책은 거의 맡지 못했다. 그나마 배원(排元)을 주장하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친원 세력에 의해 탄핵을 받고 유배되어 10여년간 유랑 생활을 하면서 보냈다. 42세 때인 1383년에 겨우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감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후에 구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항상 선두에 나서자 견제와 질시를 집중적으로 받아 또 다시 유배되는 등 청년, 장년기에는 결코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가 5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전에 살해되는 불행한 인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조선을 창건한 후 죽을 때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도저히 한 사람의 능력으로 ?肩獰? 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공로를 남겼는데, 실로 놀랍다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정도전은 우선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군사력을 확충하고자 중국 역대의 병법을 참고로 하여 오행진출기도, 강무도 등의 병서를 지어 군사훈련에 참고하도록 하였다. 외교에 있어서도 건국에 따른 사은사(謝恩使)로 직접 명나라에 다녀왔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명나라 조정에 해명하는 표문(表文)을 작성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문덕곡(文德曲), 수보록(受寶麓), 몽금척(夢金尺) 등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우는 악곡을 지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교휸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국가의 제도와 운영의 근본이 되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었는데 이것은 이후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바탕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역사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편찬하였고, 지방 행정 방법을 기술한 감사요약(監査要約)을 만들어 지방 행정의 근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앙 관료들의 임무와 경비 및 감사 제도에 이르기까지의 행정 지침을 정한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썼고, 무학대사와 함께 새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실제로 궁궐을 설계한 후,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까지 지어 바쳤다 하니, 정도전의 무소불능(無所不能)한 능력은 찬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당시 명망가들의 필적과 시문을 채집하여 만든 국초군영진적과 배불정책(排불政策)의 정당성을 역설한 불씨잡변도 그의 작품이었으므로 그의 학문적 소양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국방 정책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동북면 도선무순찰사 시절에 군(郡), 현(縣)의 지계를 정하고 성곽을 수리하게 하는 것은 물론, 참호까지 파게 하여 국경 지대의 안보를 강화했다. 그리고 진법(陳法)까지 창안한 것으로 보아 군사 전략가로서의 자질 또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도무지 그 한계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분야에 걸쳐 건국의 기초 작업을 이끈 셈인데, 정도전이 없었다면 조선왕조가 과연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정도전의 이러한 업적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명민함이 주효했지만 그보다는 불우했던 시절 자학에 빠지지 않고 독서와 사색으로 능력을 다져 나간 덕분이다. 이런 정도전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인간의 질곡에서 그것을 오히려 자기 연마의 시간으로 활용하여 인생의 성취를 이루어 낸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삶의 태도였을 뿐더러, 더 나아가 뿌리 깊은 우리 민족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일은 양면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정도전이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각 방면에서 대단한 공훈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독단적인 업무 수행으로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빼앗게 되어 이에 대해 질시하고 견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역사는 천재 한 사람의 독주를 용납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타고난 성품이 날카롭고 도전적이었으며 타협적이지 못했다. 이와 같은 천성은 스승인 이색과 반목하고 대립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도전이 처음 유배하게 된 이유도 원,명 교체기(元明交替期)의 외교적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정에서 그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책임을 맡기려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버리든지 아니면 붙잡아서 명나라로 보내 버리겠다." 하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이었던 그의 성품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그는 구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항상 선두에 나섰으니 당연히 주위에 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 허무한 최후
건국 후 조선은 명나라와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1396년에 표전문(表錢文) 사건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명(明)의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에서 보내 온 표문 중에 예의에 벗어나는 문장이 있다면서 작성자로 정도전(鄭道傳)을 지목하여 그를 명나라로 끌고 오라고 요구했는데, 명나라는 주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이 문제를 가지고 조선을 괴롭혔다.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십 명의 사신들을 명나라에 보냈지만 명나라는 사신을 구속하거나 유배시키는 등 계속해서 횡포를 부렸다. 당시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10명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명나라와의 갈등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악화되자, 마침내 정도전은 과거에 자신이 그렇게도 반대했던 요동 정벌을 건의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군관뿐 아니라 문관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만든 병서인 오진도를 기본으로 중앙 관료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고, 지방에도 군사훈련을 관리, 감독할 훈도관을 파견했다. 또 이를 감찰하기 위하여 순군 천호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진법에 무능한 사람은 아무리 직위가 높은 무관이라 할지라도 처벌하는 등 출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자 그동안 정도전의 독주로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불만이 겉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들은 정도전이 자신들의 힘의 배경인 사병(私兵)을 관군으로 편입시켜 지휘체계를 통일하려고 하자 극도의 반감을 표출했다. 그 중에서도 이방원(李芳遠)의 위기 의식이 가장 컸다. 사실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개국의 최대 공로자인 자신을 제쳐 두고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해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배경에는 재상정치를 꿈꾸는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에 대한 경계심과 감정의 골이 깊은 상태였다. 이것은 결국 제1차 왕자의 변란을 불러온다.
태조실록(太祖實錄)은 제1차 왕자의 변란에 대해 정도전 일파가 국왕의 사후에 어린 세자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복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것을 눈치 챈 이방원이 먼저 기습 공격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긴박했던 순간을 실록이 전하는 대로 살펴보자.
'태조(太祖)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심효생(沈孝生) 등은 군왕의 병이 위급함을 기회로 삼아 왕자들을 궐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을 죽이기로 도모했다. 드디어 운명의 8월 26일, 군왕의 안위가 걱정이 된 왕자와 根親들은 근정전(勤政殿) 밖의 한 별채에 모였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의 계략을 미이 알아차린 이방원(李芳遠)은 부인 민씨가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잠시 사저로 나갔다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후 다시 궐 안으로 들어왔다. 군왕의 병세가 급박하니 왕자들은 시종을 두지 말고 혼자 몸으로 입궐해 태조를 알현하라는 전갈을 받은 직후였다. 이미 밤이 깊었는데 궁문이 불이 없는 곳이 여러 군데 있어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어렵자 이방원의 의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방원은 형들을 불러내어 자신이 파악한 사태를 설명하고 급히 궁을 빠져 나와 미리 연락이 되었던 이숙번(李叔蕃)과 조영무(趙英茂), 처남인 민무질(閔無疾), 민무구(閔無咎) 형제 등과 합류했다. 전체 병력 수는 기병 10명, 보병 9명에 불과했는데 이때에는 이미 개인이 가지고 있던 군권을 회수한 뒤라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사전에 충분히 준비된 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병장기도 부인인 민씨가 숨겨 놓았던 것들로 겨우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리자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빼어 든 이방원 일행은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일단 이숙번의 제의로 정도전 일행이 모여 있는 남은의 소실 집으로 몰려갔다. 그곳에서 이웃집 세 채에 불을 지르고 매복해 있다가 정도전 일행이 놀라서 뛰쳐나오자 바로 척살해 버렸다. 심효생, 정지화 등은 현장에서 칼에 맞아 죽었고 정도전은 이웃집에 숨어 있다가 목이 잘려 죽었다. 남은은 간신히 도망쳤으나 나중에 잡혀서 주살되었다. 그 날 이방원은 자신의 적이 될 만한 인물들을 모두 제거하였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방번과 방석 형제까지 참살하였다.'
실제로 정도전이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神懿王后)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권문세가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과정을 통해 실제적인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이 그렇게 허망하게 이방원에게 당한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더구나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점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다. 지나친 자신감으로 방심한 탓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할 뿐이다.
평소에 정도전은 한(漢) 고조(高祖)가 장량(張良)을 이용한 것이 아니고, 장량이 고조를 통하여 천하를 얻은 것이라고 얘기하며 자신을 장량에 비유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자기 과신이 결국 화를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당시에는 개인의 군사력이 혁파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공격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그의 죽음에 있어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하겠다.
정도전은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에 있어서도 군신관계라기보다는 내심 혁명동지로 생각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점에 대해서는 평소 정도전을 전폭적으로 신임한 이성계의 태도로 보아 이성계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전폭적인 신임으로 인해 이성계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던 것이 결국 역설적으로 정도전에게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 좌절된 이상
정도전은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왕 제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으나, 그가 생각한 정치의 본질은 윤리적 규범을 전제로 하고 근본적으로 백성들의 안정을 도모하는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였다. 즉, 군왕이 전권을 행사하지 않고 재상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각 조직이 자기 역할을 해 나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 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러한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도전은 대간(臺諫)의 전제 기능을 강화하고,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 기본 체계를 잡기 위한 노력을 밤낮으로 기울였다.
정도전의 의도대로 되었다면 더 발전되고 진보한 조선왕조를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허망한 죽음은 자신은 물론 조선의 불운이며 우리나라 전체의 불행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정도전의 갑작스런 죽음은 역사가 언제나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때로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의외의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는 것이다.
만일 이방원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충분한 준비를 갖춘 후에 정도전을 공격하려 했다면, 오히려 상황은 역으로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거하는 쪽으로 바뀌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정도전 등보다 서둘러 움직였던 것이 오히려 목적을 달성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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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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