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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32.고려왕조(高麗王朝)와 운명을 함께 한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

회기로 2010. 1. 26.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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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조는 고려 말기 무너져가는 고려왕조를 일으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고려의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이다.

 

정몽주는 고려왕조(高麗王朝) 500년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성리학을 연구한 유학자로서 당시 중원대륙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명나라와의 교류를 적극 주장하며 친원파(親元派)인 경복흥(慶復興), 이인임(李仁任) 등에 맞섰다. 또한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이성계,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등과 뜻을 같이하며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워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여 고려의 부흥에 앞장섰다.

 

그러나 고려왕조 안에서의 개혁을 꿈꾸었던 온건적 개혁운동가였던 정몽주는 급진개혁파인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여 무너져 가는 고려왕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결국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제거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500년 고려왕조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

 

정몽주(鄭夢周)는 1337년 경북 영천에서 정운관(鄭云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의종(毅宗)대에 추밀원지주사로 인종(仁宗)의 유지를 받들어 임금의 잘못을 간하다 간신들의 비방을 받고 자결한 정습명(鄭襲明)이다.

 

정몽주의 초명(初名)은 몽란(夢蘭)과 몽룡(夢龍)인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에 놀라 깨어나 그를 낳았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또 정몽주가 아홉살 땨 어머니가 낮에 검은 용이 뜰 가운데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는 꿈을 꾸다 깨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배나무에 그가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몽룡이라고 고쳤으며, 그가 성인이 된 디 다시 몽주(夢周)로 고쳤다. 정몽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재주가 남달랐고,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점이 일곱개나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던 정몽주는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수학하여 1362년에는 예문관이 수찬, 검열로 관직에 첫발을 내딛었고, 1364년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삼선(三善)·삼개(三介) 형제의 여진족(女眞族)을 화주에서 토벌할 때에 그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였다.

 

이후 정몽주는 여러 관직을 거쳐 전농시승(典農寺丞)에 올랐다. 이때 고려는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상제(喪祭)가 문란하고 해이해져 사대부들마저도 100일이 지나면 탈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몽주는 부모의 상을 당하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상례를 극진히 했다. 그러나 나라에서 그의 집 앞에 정문(旌門)을 세워 이를 표창하였다.

 

1367년, 정몽주는 예조정랑으로서 성균관 박사를 겸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고려에 들어온 경서는 주자집주(朱子集註)밖에 없었는데, 정몽주는 성균관 박사로서 유교 경전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하였으며 이를 설명함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그러나 정몽주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해석을 듣게 되자 그의 학문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후에 들어온 사서통(四書通)과 정몽주의 강의 내용이 일치하자 사람들은 그의 높은 학식에 탄복하며 오해를 풀었다.

 

이색은 "정몽주의 논리는 횡설수설하는 것 같아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면서 그를 '동방 이학의 시조', 즉 우리 나라 성리학의 원조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당대의 대학자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색으로부터 이와 같은 극찬을 받을 정도로 정몽주는 성리학에 통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듬해 성균관 사예가 되었고 1371년에는 잠시 태상소경으로 옮겼다가 곧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 1375년에는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제수되었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 위기를 기회로 바꾼 뛰어난 외교관

 

정몽주는 처음 명나라가 일어났을 때부터 그들과의 교류를 주장하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외교정책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철저히 원나라를 배척하고 개혁을 통해 고려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공민왕(恭愍王)의 뜻과 일치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었다.

 

정몽주가 배원친명주의(排元親明主義)를 내세운 것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따른 선택이었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세우자 원나라는 북쪽으로 좇겨가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성리학을 연구한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은 원나라를 오랑캐라 하여 한족(漢族)이 세운 명나라를 중국의 정통적인 주인으로 인식했다. 또한 권문세족에 맞서 고려 조정을 개혁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들은 권문세족이 의지하고 있는 기존의 원나라보다는 신흥국인 명나라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공민왕이 환관 홍윤 등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명나라와의 외교에 문제가 발생했다. 공민왕이 살해된 뒤 친원파인 김의가 명나라 사신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고려 고정에서는 명나라의 보복이 두려워 감히 사신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정몽주는 대의를 내세워 "요사이의 변고는 마땅히 국왕께 자세히 아뢰어 명나라로 하여금 의혹함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 어찌 먼저 의심하여 백성들에게 화를 짓게 하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정몽주의 주장에 따라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민왕의 죽음을 알리고, 김의의 사건을 해명함으로써 관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명나라로서도 아직 원나라의 잔존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의 배후에 있는 고려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몽주가 학문뿐 아니라 국제 정세 또한 정확하게 궤뚫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때 명나라의 세력에 밀려 북쪽으로 쫓겨난 원나라, 즉 북원(北元)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다. 그러자 권신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나가 사신을 맞이하려 했다. 당시 고려의 지배층인 권문세족들은 원나라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의 개혁과 중흥을 위해서는 원나라보다는 명나라를 따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확신하고 있던 정몽주로서는 원나라 사신을 맞아들이는 것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곧 문신 10여명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지난번 원나라가 북방으로 쫓겨가고 명이 일어나 사해를 영유하자 공민왕께서는 분명히 천명을 알고 표문을 받아들여 신하라 일컬었습니다. 황제께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왕에 책봉하였고, 주는 것과 바치는 것이 서로 연속하여 이제 6년이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컨대 전하께서 영단을 내려 원의 사신을 잡고 원나라의 조서를 거두며 오계남과 장자온 및 김의가 데리고 갔던 자들을 모두 결박하여 명나라로 보내면 애써 변명하지 않아도 사실이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 다음 정요위와 약속하여 군사를 양성한 뒤 북쪽으로 향한다고 성명하면 원의 남은 무리들이 멀리 도망하여 나라의 복이 무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소로 인해 정몽주는 정치적으로 첫 시련을 맞게 된다. 친원파인 지윤과 이인임에 의해 언양으로 유배된 것이다. 정몽주는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관직을 제수받지 못한 채 곧바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여기에는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친원파 권신들의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었다.

 

당시 왜구의 찾은 약탈과 방화로 해안가 마을 대부분이 텅 비기에 이르자, 고려 조정은 1375년 나흥유(羅興儒)를 일본 패가대에 보내 화친을 꾀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나흥유를 첩자라 하여 잡아 가두고는 굶겨 죽이려고 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10월에야 겨우 풀어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지윤과 이인임은 왜구가 계속해서 창궐하자 1377년 정몽주를 패가대에 사신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패가대의 주장을 만나 뛰어난 말솜씨로 고금의 교린하는 예를 이해시켰다. 정몽주의 인품과 학식에 탄복한 패가대 주장은 그를 공경하며 후하게 대접했다. 또한 정몽주는 시를 써줌으로써 많은 승려들의 공경을 받았는데, 그들은 날마다 정몽주에게 경치 좋은 곳으로 구경가기를 청할 정도였다.

 

정몽주는 그해 7월 귀국하면서 일본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윤명과 안우세 등 수백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그를 죽이고자 했던 지윤과 이인임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정몽주는 오히려 이 공로로 승진하게 되었다. 정몽주는 일본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378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제수된 데 이어 전공, 예의, 전법, 판도의 판서를 차례로 역임했으며 1380년에는 이성계와 더불어 운봉에서 왜구를 격퇴시키고 돌아와 밀직제학으로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정몽주는 참서밀직시시에 올랐다가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 분쟁이 일어났다.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고려가 명나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세공(稅貢)을 늘리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또한 지난 5년 동안 고려가 바친 세공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다며 사신으로 간 홍상재(洪尙載), 김보생(金寶笙) 등을 먼 곳으로 유배보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에도 고려는 태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야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모두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밀직부사 진평중(眞平仲)을 사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진평중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권신 임견미(林堅味)에게 노비 수십명을 뇌물로 바치고 병을 핑계로 사퇴해 버렸다. 그러자 이견미는 정몽주를 천거하였다. 그 또한 지윤, 이인임 등과 같이 평소 정몽주를 눈에 든 가시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와 같은 음모에 전혀 개의치 않고 흔쾌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이때 정몽주는 우왕(禑王)에게 "왕명이라면 물불도 피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명에 가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남경까지는 무릇 8천리나 되어 발해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것을 빼면 실제로 90일의 일정입니다. 이제 성절까지의 날자가 겨우 6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또한 순풍을 기다리는 열흘을 빼고 나면 겨우 50일이 남을 뿐이니, 다만 이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왕명이 떨어지자 정몽주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출발했다. 그는 밤낮으로 길을 달려 가까스로 주원장의 생일에 맞춰 표문을 올릴 수 있었다. 명황(明皇) 태조(太祖)는 표문을 받고 날짜를 꼽으면서 "너희 나라 신하들이 서로 사신으로 오기를 미루니 날이 임박하여 이에 그대를 보낸 것이로다. 그대는 전날 촉의 평정을 축하하러 왔던 자가 아니냐?"하고 물었다. 예전에 정몽주는 촉의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듬해 겨우 돌아왔었다. 정몽주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얘기했다. 그러자 태조는 그를 위로하고 예부를 시켜 후히 대접해 보내게 하였으며, 홍상재 등을 석방해 주었다.

 

이듬해 정몽주는 동지공거로서 과거시험을 주관하고, 1386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관복을 청하고 세공을 감면해 주기를 청했다. 이때 정몽주는 태조에게 고려의 사정을 상세히 알려 5년 동안 미납된 세공과 늘어난 세공을 면제받고 돌아왔다. 우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의대와 안마를 하사하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제수하였다.

 

◆ 명분과 의리를 지키는 원칙주의자

 

이렇듯 정몽주가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고려 내부에서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정몽주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원나라가 지배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해 왔는데, 이에 고려 조정은 최영(崔瑩) 등 강경파에 의한 군사적 대응, 즉 요동 정벌을 들고 나왔다. 그리하여 고려는 1388년, 최영의 주도 아래 요동 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처음부터 요동 정벌에 반대하고 나섰던 이성계가 그해 6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창왕을 옹립한 것이다. 이로써 친명파(親明派)가 득세하게 되었다.

 

그동안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앞장서왔던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했다. 1389년 예문관 대제학에 오른 정몽주는 이성계를 쫓아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리를 내세워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했다.

 

그해 11월 김저와 정득후가 비밀리에 여흥에 있던 우왕을 찾았는데, 이때 우왕이 울면서 "여기 있으면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다. 이성계를 제거하면 과인(寡人)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과인이 본래 예의판서 곽충보(郭忠輔)와 잘 지냈으니 네가 가서 만나보고 계획을 도모하라."는 말과 함께 팔관회 행사 때 거사하라며 구체적인 날짜까지 정해주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김저는 우왕의 말과 함께 우왕이 보낸 예검(銳劍)을 곽충보에게 전했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한 뒤 곧 이성계에개 그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우왕을 강릉으로 옮기고, "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 종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 마땅히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요(瑤)는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가장 가까우니 그를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때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정몽주도 이에 찬성했다. 그리하여 창왕을 폐하여 강화로 내쫓고 정창군 요를 군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다.

 

이 공로로 정몽주는 문하찬성사 동 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사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영서운관사로 승진하고,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책봉되었으며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의 작호를 하사받았다.

 

1390년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명나라에 간 윤이와 이초가 명황(明皇) 태조(太祖)에게 이성계가 고려의 종실이 아닌 왕요를 국왕으로 삼았으며, 이색, 조민수 등을 살해하고 우현보 등을 귀양보냈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 사실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왕방과 조반에 의해 고려 조정에 알려지자, 대간이 잇따라 상소를 올려 윤이와 이초를 국문할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우현보, 홍인계, 윤유린 등을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하고, 이색 등은 청주에서 국문하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사(明史)에서는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어 이성계를 비롯한 역성혁명 세력이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극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때 정몽주는 "이색, 권근 등을 사면하는 큰 은혜를 내리소서."라며 대사령(大赦令)을 내릴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공양왕이 정몽주의 건의에 의해 대사령을 내렸음에도 헌부와 형조에서는 다시 윤이와 이초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다. 이에 공양왕은 도당에서 그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정몽주는 또 다시 "윤이, 이초의 죄가 명맥하지 않으며 이미 사면을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습니다." 하고 주장했으나,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공양왕은 하는 수 없이 우현보 등을 귀양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윤이와 이초를 두둔한다며 정몽주를 탄핵하고 나섰다.

 

이에 정몽주는 두번이나 표문을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공양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불러 위로했다. 그리하여 공신각에 초상화가 걸리는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도평의사사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몽주는 사실상 이성계 일파와 결별하게 된다.

 

1392년 국왕이 경연관에게 "사람들이 중국의 고사는 알면서 우리 나라의 일은 알지 못함이 옳은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정몽주는 "근대사도 모두 편수하지 못하였고, 선대실록 또한 상세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편수관을 두어 통감강목(通鑑綱目)에 의거해 수찬하여 열람에 대비하소서." 하고 대답했다. 공양왕은 정몽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실록을 수찬하도록 지시했으나 반대파의 저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때 김주(金住)가 조민수(曺敏修)와 뜻을 같이하여 창왕을 세운 이색의 죄를 묻기를 청했다. 그러자 정몽주는 "조민수는 창의 근 친이니 창을 세우고자 한 것은 조민수의 뜻입니다. 이때에 이색이 비록 종실을 세우고자 할지라도 조민수의 뜻을 어길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이색의 죄는 응당 가벼이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이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공양왕은 정몽주의 주장에 따라 조민수 등만 처벌했다. 또한 정몽주는 "지금부터 이후에 이 일을 논핵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로써 논죄하게 하소서." 하고 쐐기를 박음으로써 더 이상 이색이 고통받는 것을 면하게 해주었다.

 

이어 정몽주는 대명률(大明律)과 지경조격(至正條格) 및 고려의 법령을 참작하고 수정하여 신율(新律)을 만들어 무너진 법질서를 확립하고자 힘썼다.

 

◆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라.

 

정몽주는 비밀리에 이성계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군정을 장악한 이성계의 위세가 갈수록 더해갈 뿐 아니라 그의 추종 세력인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새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의미했고 고려 5백년 사직의 끝을 의미했다. 고려의 사직을 계속 유지하려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정몽주에게 이성계와 그 추종 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왕명을 받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몽주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정몽주는 대간들에게 사람을 보내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일파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야 일을 도모할 수 있다."면서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이 기회에 조준, 정도전, 남은 등 이성계의 무리들을 제거해야만 장차 이성계를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준은 멀리 귀양가고, 남은, 윤소종, 조박 또한 관직을 삭탈당한 채 귀양보내졌으며, 봉화에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보주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던 이성계 일파에 대한 제거 노력은 의외의 사건으로 반전되고 말았다. 정몽주의 의도를 눈치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즉시 해주로 달려가 이성계에게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해칠 것"이라고 전한 뒤 그날 밤 비밀리에 개경으로 돌아온 것이다. 또한 이방원은 이성계의 동생 이화 및 사위 이제 등과 의논한 뒤 휘하의 군사들에게 "우리 이씨 집안이 왕실에 충성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는 바이다. 이제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아 악평을 받게 되었으니 후세에 누가 이를 알아주겠는가?"라며 억울함을 호소한 뒤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 또한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사위인 변중량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정몽주는 좀 더 사태를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때 평소 정몽주의 학식과 강직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이성계는 그를 반기며 후하게 대접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이방원은 돌아가려는 정몽주를 자신의 방으로 청해 하여가(何如歌)로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는 이에 대해 단심가(丹心歌)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에 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습격하게 하여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했다. 1392년 4월 4일의 일로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또한 이벙원 등은 정몽주의 지시에 따라 조준 등을 탄핵한 대간들을 국문하여 귀양보내고 그 일당을 유배시킨 뒤, 정몽주의 머리를 거리에 매달고 "거짓으로 일을 꾸미고 대간을 꾀어 대신을 모해하고 국정을 혼란시켰다."는 방을 붙였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정몽주의 가산을 몰수하였다.

 

고려 사직을 지키려던 정몽주의 마지막 몸부림이 이와 같이 물거품이 되어버림으로써 고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성계는 정몽주가 죽은 지 3개월 후인 1392년 7월 정도전, 조준 등의 추대를 받아 공양왕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으며, 이듬해 1393년 3월 15일 새 국호로 조선을 씀으로써 고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조선왕조 제3대 국왕으로 등극한 태종(太宗)은 정몽주가 죽은 지 13년만인 1405년 권근(權近)의 건의에 따라 그를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겸 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에 추층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여말충의열전(麗末忠義列傳)은 정몽주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정몽주는 타고난 자질이 지극히 높고 호탕하며 인품이 뛰어나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니 부지런히 성리학을 연구하여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평소 이성계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토벌할 때에 반드시 그와 같이 갔으며 여러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이 되었다. 이때 나라에 사고가 많아 정무가 번거로웠는데, 정몽주는 큰 일을 처리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하는데 있어 목소리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좌우에 응답하여 모두 그 적당함을 얻었다. 이때에 풍속이 오로지 불법(佛法)을 숭상하는지라 정몽주가 비로소 선비와 서민으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모방하여 가묘(家廟)를 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또 도성 내에 5부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유학을 일으켰다. 그밖에 의창을 세워 백성들을 진휼하고 수참을 두어 조운을 편리하게 한 것 등이 모두 그가 계획한 것이다. 그의 시문은 호방하면서도 엄숙하고 깨끗하며, 포은집(圃隱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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