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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30.요승(妖僧)과 개혁운동가의 두 얼굴 신돈(辛旽)

회기로 2010. 1. 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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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풍운아 신돈(辛旽)은 흔히 첩 반야(般若)를 둔 요승(妖僧)으로 표현되어 있고 괴승(塊僧), 걸승(乞僧)으로도 불렸으나 한때는 힘없는 서민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이고 법명(法名)이 편조(遍照)였으며 청한거사(淸閑居士)라는 법호(法號)를 갖고 있었던 신돈은 고려 제31대 국왕인 공민왕(恭愍王)과는 깊은 인연이 있었다. 공민왕의 총애와 의촉(依囑)으로 그의 야망이 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원래 총명관후(聰明寬厚)하며 지혜와 정력이 넘친 위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 후기 망국의 징후가 감돌고 있을 때 친원파를 몰아내고 원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는 등 위기가 어느 정도 극복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愛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죽자 애통해 한 나머지 정사(政事)를 그르치고 휘청거렸다고 전해진다.

신돈은 원래 지금의 창녕군 계성면에 있는 왕천사(王川寺)에서 종살이를 하는 노비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언어구사에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이 그의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출세의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이며, 거기에 큰 야망이 더해져 위민개혁운동(爲民改革運動)의 선구자와 요승이라는 극단적인 두가지 평가를 받으면서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였던 것이다.

전해지는 말로는 김원명(金元命)이라는 자가 창녕 시골 구석에 박혀있던 신돈을 공민왕에게 천거함으로써 두사람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신돈을 발탁했던 김원명은 높은 벼슬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 사관(史官)은 그를 간신(奸臣)으로 평가했다.

공민왕은 처음에는 신변 잡담이나 가벼운 이야기 상대로 신돈을 대했으나 그의 달변과 기국(器局)의 비범함에 감탄하여 터놓고 정사(政事)를 논할 상대가 생겼다고 기뻐하였다.

미천한 사비(寺婢)의 아들이었던 그가 그 동안 귀족들로부터 당했던 갖은 수모와 냉대를 이제는 갚아줄 차례가 되었던 것이다. 편조(遍照)라는 승명(僧名)에서 벗어나 신돈(辛旽)이라 부르게 한 것도 승려가 아닌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린다는 뜻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먼저 공민왕에게 "전하(殿下)께서는 모함하는 말을 믿지 말아야 이 세상 일이 순조롭게 돌아갈 것입니다." 라고 간곡히 말했다. 자기 자신의 말 이외의 진언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준 셈이었다. 공민왕도 "교활한 말에 속지 않음은 부처와 하늘이 증명할 것이다." 고 응수하였으니 국왕이 얼마나 신돈을 신임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신돈은 당시 백성들이 가장 원망하는 것이 농지(農地) 문제라고 판단하고 전대미문의 대농지개혁(對農地改革)을 단행할 만반의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 1366년에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새로 설치하고 토지 분배의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세운 명분을 이렇게 역설했다.

"농지 분배제도가 기강이 흐트러져서 탈취해 가는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도다. 따라서 종묘, 학교, 창고, 사원과 농민의 토지는 권세 있는 가문에서 거의 독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돌려보내기로 한 토지도 권문세가에서 독점하고 있다. 토지를 잃은 백성들은 노예로 전락하였으니 주현(州縣)의 역졸이나 관청의 노비나 백성들은 공역(公役)을 도피하여 귀족의 농지로 흘러 들어가는 수가 많다. 세도가는 농장을 이루지만 백성은 병들고 국가는 멸망한다. 여기 도감을 두어 그 병폐를 일신시키고자 한다. 송도(松都)는 15일, 지방은 40일의 여유를 주노니, 점유한 농지를 즉각 토지 주인에게 돌려주면 죄를 묻지 않겠다..."

신돈의 개혁정치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그의 입지는 더욱 높아졌다.

"농노나 여비로서 양민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자유롭게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게 하겠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실시 이후 이처럼 백성들에게 절실한 복음이 또 있었을까? 노비들이 그를 성인(聖人)으로까지 칭송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노비 출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백성들의 권익에 대해서는 다소 소흘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백성들에게는 하늘 같은 존재였던 신돈도 실은 귀족이나 호족에게는 철천지 원수같이 여겨졌다. 귀족사회의 전통과 기득권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돈과 귀족들 사이의 갈등과 암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산승(山僧)으로서 정치에 전혀 경험이 없던 그가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반발은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돈의 정치적 수완은 노비와 농민의 권익 옹호라는 측면에서는 유감없이 발휘된 셈이었다.

신돈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자 오인택(吳仁澤)은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신돈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고 원로 중신인 이제현(李齊賢)도 "신돈의 골상은 옛날의 흉인과 유사하니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라고 국왕에게 간청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인택은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죽임을 당했고 이제현은 간신히 죽음을 모면했지만 그의 문도들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는 타격을 입었다. 당시 신돈은 이제현의 문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과거제 자체를 아예 폐지시켜 버렸는데, 이 때문에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소축문 한 잔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무튼 자신을 배척하려는 귀족들의 움직임이 일자 신돈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그들을 큰 장애물로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신돈은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천도(遷都)해야 한다고 자꾸 국왕에게 권유하였다. 그런데 이렇듯 허물없는 사이였던 공민왕과 신돈에게도 마침내 관계가 멀어지는 날이 왔다.

공민왕은 사람을 잘 의심하는 성질이 있어 자기의 심복이라 할지라도 그 세력이 너무 강해지면 제거해 버리는 성향이 있었다. 신돈이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를 부활시켜 자신이 5도 사심관이 되려는 야망을 키우자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공민왕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민왕이 자신을 견제하기 시작하자 신돈은 자기가 먼저 손을 써서 국왕을 제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반역 음모는 발각되고 말았다. 그는 역모를 도모한 대역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참살당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신돈이 누린 권력의 황금기 7년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고려사(高麗史) 역신열전(逆臣列傳) 신돈(辛旽) 편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사람됨을 평했다.

'신돈은 사냥개를 무서워했으며 활 쏘며 사냥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호색하고 음탕하여 매일 검정 닭과 흰 말을 잡아 먹고 양기를 돋구웠다.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신돈을 늙은 여우의 요정(妖精)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려사가 조선을 건국한 공신세력에 의해 쓰여진 역사서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신돈전(辛旽傳)에 쓰여진 갖은 그의 횡포는 어느 정도 각색되고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요승으로 불리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신돈(辛旽)이었으나 그도 한때는 소외당한 민중의 권익 옹호를 위해 신명을 바친 박명과 형극의 일생을 살다 간 인물이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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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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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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