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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28.정사(正史)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야사(野史)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 일연(一然)

회기로 2010. 1. 26. 20:20
일연(一然)은 무인정권과 여몽전쟁(麗蒙戰爭)의 혼란기를 살다간 고려 후기의 승려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이다. 그는 주로 산사에 운둔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선에 정진했다. 그러나 최씨(崔氏) 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는 중앙의 정치 무대에 뛰어들어 선종(禪宗)을 이끌며 왕정 복고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이후에는 몽골의 침략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보며 민족의 혼을 되살리기 위해 삼국유사를 썼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로, 우리나라 고대 역사와 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281년에 시작하여 1283년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일연의 독자적인 저술로서 사관(史官)이 쓴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와는 달리 야사(野史)에 속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빠져 있는 고조선, 부여, 가야 등의 역사를 비롯하여 고대 신화와 설화, 옛 승려들의 활동 및 향가를 집대성하고 있으며, 특히 국조(國祖)인 '단군신화(檀君神話)'를 기록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많은 의의를 갖고 있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연은 대몽항쟁(對蒙抗爭)이나 정치 개혁에 있어서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삼국유사라는 뛰어난 역사서를 저술함으로써 사적, 문학사적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임에 틀림없다.

● 선종(禪宗)으로 출가하여 참선(參禪)에 들어가다.

일연은 1206년 경주의 속현인 장산군에서 추증 좌복사 김언정(金彦鼎)과 낙랑군부인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지녔을 뿐 아니라 몸가짐이 단정했고 사물을 보는 눈빛이 남달랐다.

일연은 아홉살 때인 1214년 해양에 있는 무량사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열네살 때인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 출가하여 고승 대웅(大雄)의 재자가 되어 선학을 공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얻고 승려가 되었다. 진전사는 선종 구산문의 하나인 가지산문(加支山門)의 開創者 도의(道義)가 은거한 것으로 가지산문의 주요 사찰이었다. 이후 일연은 여러 선종 사찰들을 다니며 수행했는데, 이때 사람들의 추대로 구산문 사선의 으뜸이 되었다.

일연이 선종(禪宗)으로 출가한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연이 태어나서 구족계를 받고 불법에 정진하던 시기는 최씨(崔氏) 무인집권기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開創한 선종계의 조계종(曹溪宗)이 불교계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종(敎宗)인 천태종(天台宗)이 개경을 중심으로 융성했다면 선종은 구산문, 즉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해 왔다. 무인들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보조국사 지눌이 선종을 조계종으로 통합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구산문의 법맥은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지방 출신이었던 일연은 자연스럽게 선종에 귀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연은 1227년 승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으나, 세상의 명리를 쫓지 않고 비슬산 보당암에 들어가 수년 동안 머무르며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에 몰두했다. 그 후 1236년 몽골의 침입으로 그 피해가 고부 지방까지 미치자, 병화를 피하고자 문수보살의 오자주(五字呪)를 염하며 감응을 빌었다. 이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무주에 있다가 명년 여름에 이 산의 묘문암에 거처하라!"는 말을 남긴 뒤 사라졌다. 이에 일연은 곧 보당암 북쪽에 있는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일연은 무주암에 머물면서 '생계불감(生界不感) 불계불증(佛界不增)'이라는 구절을 탐구하다가 어느 날 문득 마음이 확 트이며 큰 깨달음을 얻어 "오늘 곧 상계가 꿈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작은 털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보았다."고 했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두살이었다. 이러한 깨달음과 함께 선승으로서의 명성을 얻은 일연은 1237년 나라로부터 삼중대사(三重大師), 1246년에는 선사(禪師)라는 승계를 받았다. 하지만 이때 일연은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현실에 참여하기보다는 산사에 머물며 오직 참선에만 몰두하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고 볼 수도 있다.

● 왕정 복고에 동참하다.

깨달음을 얻은 후 일연은 점차 현실 참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1249년 정안(鄭晏)의 요청을 받고 남해의 정림사로 옮기면서부터였는데, 정안은 경인정변(庚寅政變) 이후 등장한 정세유(鄭世裕)의 손자이며, 당시 집권지였던 최우(崔瑀)의 장인인 정숙첨(鄭叔瞻)의 아들이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정안은 전횡을 일삼는 최우를 보며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은퇴하고 남해에 머물고 있던 중 그곳으로 일연을 초청한 것이다.

일연은 정림사에 머물며 대장경 판각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했다. 대장경 판각은 강화에 천도해 항몽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최씨 정권이 불력으로 몽골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작업의 일환이었다. 이때 정안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당시 간행 중이던 대장경의 일부를 펴냈는데, 이에 참여함으로써 일연은 최씨 정권과 연계될 수 있었고, 보조국사 지눌에서 비롯된 수선사와 사상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후 일연은 1256년 여름 윤산의 길상암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지었다.

일연은 1259년 조정으로부터 대선사(大禪師)라는 승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것은 당시 실세였던 박송비(朴松庇)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박송비는 덕원 출신으로 장군이 된 뒤, 유경(柳璥), 김준(金俊) 등과 함께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최의(崔竩)를 제거하고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이후 일연의 활동은 박송비의 정치적 행적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일연은 몽골군이 경주 부근까지 내려와 국토를 유린하자 병화를 피해 남쪽 지방인 포산, 남해, 윤산 등지에서 수행하다가 1261년에 국왕의 부름을 받고 강화에 갔다. 당시 고려 조정은 몽골에 항거하기 위해 강화로 천도한 이후 계속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첫번째 침략 당시 몽골은 강화 조건으로 지나친 조건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다루가치를 남겨 끊임없이 고려 내정에 간섭하려 했다. 이와 같은 부당한 요구에 결코 응할 수 없었던 고려 조정은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강화에 들어가 대몽항쟁을 계속한 것이다.

일연은 강화에 머무는 동안 그곳 선월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불법을 가르쳤고, 보조국사 지눌의 법통을 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264년 가을에 일연은 국왕의 허락을 얻어 경북 영일군 운제산에 있는 오어사로 옮겼다. 그해 그를 후원하던 박송비가 김준에게 밀려 잠시 권력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비슬산 인홍사 주지 만회(萬恢)가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덕분에 일연은 그곳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 후 1266년 김준이 제거되고 박송비가 다시 정치 일선으로 복귀하자 일연은 왕명을 받아 개경에 있는 운해사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모아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주관하고 설법을 베풀었다. 일연은 물 흐르듯 매끄러운 강론과 설법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감화시켰는데, 이때 그의 나이 예순세살이었다.

그 즈음 무인정권이 무너지면서 1270년 마침내 40여년 동안 계속되었던 여몽전쟁(麗蒙戰爭)이 끝나고 고려 조정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했다. 일연은 안홍사에 머물면서 참선과 강론을 하며 지냈으며, 이때 삼국유사를 찬술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역대연표를 간행했다.

그 뒤 1274년, 일연은 인홍사를 중수하고 비좁은 경내를 크게 넓힌 뒤 조정에 보고했다. 원종(元宗)은 절 이름을 인흥(仁興)이라 고치고 친필로 쓴 액자를 하사했다. 또한 일연은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있던 용천사를 중창한 뒤 이름을 불일사로 고쳤는데, 이 때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 그 후 왕명에 따라 1277년부터 1281년까지 4년 동안 경북 청도에 있는 운문사 주지로 머물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이듬해 충렬왕(忠烈王)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입궐하여 대전에서 설법하고, 광명사에 머물면서 왕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하여 일연은 1283년 3월 국존으로 책봉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다. 그해 4월에는 국왕의 거처인 대내에서 구의례(柩衣禮)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일연은 이와 같은 극진한 예우에도 불구하고 나이 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몇 차례에 걸친 충렬왕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듬해인 1284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명에 따라 경북 군위에 있는 화산의 인각사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경을 주재하게 되었다. 이때 일연은 인각사에서 두차례에 걸쳐 선문을 모두 망라하는 구산문도회를 개최했다.

1289년 7월, 일연은 국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다음날 새벽 선상(禪床)에 앉아 평소와 다름없이 제자들과 문답을 나눈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손으로 금강인을 맺고 입적했다. 오늘날 일연의 탑과 비는 인각사에,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일연(一然)은 평생 화록(話錄), 계송잡저(偈頌雜著),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乘法數),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등 100여권이 넘는 책을 썼으나 현재 삼국유사만이 전해오고 있다.

● 고대사를 복원하여 민족혼을 일깨우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유사를 모아 지은 역사서로, 정확한 편찬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청도 운문사에 머물고 있던 1281년~83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1281년 일연은 일본 원정에 나서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을 격려하기 위해 국왕의 부름을 받아 경주에 갔다가 뇌물을 주고 승직을 구하는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황룡사의 황폐한 모습, 그리고 몽골의 과대한 물품 요구로 인한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목격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일연으로 하여금 삼국유사를 집필하게 한 것이다.

삼별초(三別抄)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대몽항쟁(對蒙抗爭)이 막을 내린 이후 몽골은 그동안 숨겨왔던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몽골은 일본 정벌을 위해 여몽연합군을 편성하고, 이에 필요한 물자와 군사를 고려로부터 징발했다. 몽골과의 오랜 전쟁으로 전국이 피폐해지고 나라의 재정이 고갈된 상태에서 이러한 요구는 고려에 큰 부담이 되었고,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할 대로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불교 신앙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참선과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의 승려였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선 사상을 기본 축으로 하여 불교 신앙적 측면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것은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여 불력으로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일연 또한 불교를 통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것이다.

또한 일연은 삼국유사에 단군신화와 함께 우리의 상고사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 점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구별된다. 일연은 우리의 고대사를 복원하여 후세에 남김으로써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들에 의해 쓰여진 정사로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것에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한사람의 손으로 씌여진 야사로서 체제나 문장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우리나라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라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로 받드는 근거가 되었다. 그 외에도 삼국유사에는 많은 설화와 신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향찰로 표기된 혜성가(彗星歌) 등 14수의 향가가 수록되어 있어 우리나라 고대 문학사를 시릉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는 총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1은 왕력(王歷)·기이(紀異), 권2는 권1 기이의 후속편이며, 권3은 흥법(興法)·탑상(塔像), 권4는 의해(義解), 권5는 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을 수록하고 있다.

왕력은 연표로서, 중국의 연표와 함께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 등의 순서로 연대를 표시하고 있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역대 제왕의 출생 및 즉위와 치세를 비롯하여 중요한 역사적 사실 등을 간략히 기록하고, 일연 자신의 의견도 간간이 덧붙여 놓고 있다.

기이는 고조선 이하 삼한, 부여, 고구려와 통일 이전의 신라 등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성쇠 및 신화, 전설, 신앙 등에 관한 유사 36편, 문무대왕(文武大王)부터 경순왕(敬順王)까지의 기사와 백제, 후백제, 가락국에 관한 유사를 다루고 있다.

홍법과 탑상은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전래 과정과 고승들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 7편과 사기(寺紀), 탑, 불상 등의 유래에 관한 기록 30편을 싣고 있다.

의해는 신라 때 고승들의 행적에 관한 14편의 설화, 신주는 밀교의 이적과 이승(異僧)들의 전기 3편, 감통은 부처와의 영적 감응을 이룬 일반 신도들의 영험 등을 다룬 10편의 설화, 피은은 숨어사는 승려들의 이적 10편, 효선은 뛰어난 효행 및 선행에 대한 미담 5편을 수록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는 당시의 민속이나 옛 어휘, 성씨록, 지명의 기원, 사상, 신앙 및 일화 등을 대부분 금석 및 옛 기록에서 인용하거나 직접 현장을 돌아보고 확인한 것을 집대성해 놓아 고대의 정치, 사회, 문화, 생활 상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저자인 일연이 일개 승려에 불과했고, 그의 주요 활동지가 영남지방이었다는 한계 때문에 불교와 신라 중심적인 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북쪽 지방에 대한 기록이 소흘하고, 간혹 인용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며, 잘못된 서적을 확인이나 여과 없이 그대로 수록한 점도 눈에 거슬린다. 유사(遺事)라는 책명이 말해주듯 일상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대한 기록으로서 어쩌면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일연의 삼국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비해 야사라는 점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지만, 김부식이 유교적 사관과 사대주의 사상에 의해 누락시킨 고대의 기록들을 온전히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가치를 지니며, 그런 의미에서는 정사인 삼국사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민족사의 보고(寶庫)라 일컬을 수 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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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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