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후(金允侯)는 승려의 신분으로 몽골군 원수 살례탑(撤禮塔)을 죽이는 등 여몽전쟁(麗蒙戰爭) 때에 전공(戰功)을 세움으로써 상장군에 이어 수사공(守使公)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가계와 생몰년도는 분명치 않으며, 다만 일찍부터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몽골의 침입 당시 백현원에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고려는 이자겸(李資謙)의 반란 이후 묘청(妙淸)의 서경(西京) 무장봉기(武裝蜂起)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김부식(金富軾) 등 개경파의 득세, 그 반대급부로 벌어진 무신정변(武臣政變) 등으로 급격한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특히 무인정권 시기의 치열한 권력 쟁탈전과 60년간 최씨 무인정권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다.
이러한 내부의 혼란으로 외부에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 중국 대륙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중원의 새 강자로 급부상한 것이다. 원나라는 중원 통일은 물론 유럽까지 정벌하는 등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 적장 살례탑(撤禮塔)을 사살하다.
고려가 몽골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1216년, 100여년만에 다시 침략해 온 거란족(契丹族) 때문이었다. 당시 금나라와 몽골에 쫓기고 있던 거란족은 자신들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려를 공격해 왔다. 거란이 개경 근처까지 밀려들어오자 고려는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를 보내 이들을 물리치게 하고 금나라, 몽골과 연합군을 구성하여 1219년에 거란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와중에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이 죽고 그의 아들 최우(崔瑀)가 권력을 잡았다.
그 후 1225년 몽골의 사신 착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도적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몽골과의 평화적 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몽골은 착고여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1231년 8월 고려를 칩입했는데, 이것이 제1차 여몽전쟁(麗蒙戰爭)의 시작이었다.
철주를 함락시킨 몽골군의 총사령관 살례탑은 누차, 대포차, 운제 등 갖가지 공성무기로 귀주(龜州)를 공격했으나, 서북면병마사 박서(朴犀)와 삭주분도장군 김중온(金仲溫), 정주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 등이 한달여에 걸친 공방전(攻防戰) 끝에 물리쳤다. 그러나 살례탑은 진격을 계속하여 그해 12월 개성을 포위하고 고려 조정의 항복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착고여를 죽인 것은 고려가 아니고 금나라의 소행이라는 주장과 함께 황금 등을 주며 몽골군을 달랬고, 결국 화의가 이루어졌다.
이때 몽골은 고려의 40여개의 성에 다루가치를 남겨두고 철군했는데, 이것은 계속해서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겠다는 것을 뜻했다. 이후 몽골은 막대한 물품과 사람들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요구하며 고려를 괴롭혔다. 그러자 집권자 최우는 몽골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결심하고 강화(江華)로 천도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몽골은 1232년 또 다시 살례탑을 원수(元帥)로 삼아 고려를 침략했는데, 이것이 제2차 여몽전쟁이었다.
몽골 측은 "너희는 교묘한 말로 우리를 설득하여 돌려보낸 뒤에 문득 마음이 변해 해중(海中)으로 들어갔으며, 불충한 송입장과 허공재 두사람이 와서 황당한 말을 하였는데, 너희는 그런 사람의 말을 믿은 것이니 어서 해중으로 나오라."며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살례탑이 이끄는 몽골군은 이미 고려 조정에 압력을 가해 박서를 비롯해 제1차 여몽전쟁 때 몽골군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무장들을 제거한 뒤였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과 남경을 지나 수원 쪽으로 진군하던 살례탑은 흙으로 쌓은 성을 하나 발견했다. 그 성은 처인성(處仁城)으로 주변의 백성들이 몽골군을 피해 들어가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살례탑은 즉시 공격을 명했다.
백현원의 승려로 당시 처인성으로 피난 와 있던 김윤후는 백성들을 독려하며 몽골군에게 화살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때 김윤후가 쏘아 날린 화살에 맞아 살례탑이 전사하고 말았다. 총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이 철수함으로써 몽골의 두번째 고려 침략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고종(高宗)은 김윤후의 전공(戰功)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상장군(上將軍)을 제수했다. 승려에서 일약 무반 최고 품계인 정3품을 제수한 이러한 조치는 기존의 절차를 뛰어넘은 파격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김윤후는 "한창 싸울 때에 나는 활과 화살조차 없었는데 어찌 감히 이 같은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라며 사양햤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공로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기까지 했다. 고종은 할 수 없이 그를 섭랑장(攝郞將)으로 임명했다.
● 몽골의 남진을 막다.
몽골은 이후에도 다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여 국토를 유린했다. 몽골의 침략이 계속되자 집권자 최우는 불력(佛力)으로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1236년,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해인사(海印寺)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다. 고려는 이전에도 대장경을 조판한 적이 있는데, 현종(顯宗) 때 요여전쟁(遼麗戰爭) 당시 만들었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선종(宣宗) 때 의천(義天)이 만든 속장경(續藏經)이 몽골의 침략으로 모두 불에 타 버려 다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강화(江華)에 들어간 귀족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음에도 날마다 잔치를 열어 향락을 벌였다. 그러한 가운데 1249년 최우가 죽고 그의 아들 최항(崔沆)이 새 집권자가 되었다. 최항이 집권하는 동안에도 몽골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몽골의 계속된 개경 환도(開京還都) 요구에 고려 조정은 약속만 하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국토는 점점 황폐해져 갔다.
1253년, 해전에 익숙하지 못해 강화를 공략할 수 없었던 몽골군은 대대적인 내륙 공략에 나섰다. 국토를 짓밟고 백성들을 유린하며 남진을 계속하던 몽골군은 삼남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인 충주성에 이르렀다. 이때 김윤후는 충주성 방호별감으로 있었는데, 성 안의 모든 사람들과 힘을 합쳐 몽골군에게 저항했다. 몽골군은 충주성을 포위한 지 70여일이 지나도록 이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몽골군에게 포위당해 있다 보니 군량이 보급되지 않아 식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격렬하게 항전하던 사람들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성이 함락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다급한 상황에 놓이자 김윤후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독려했다.
"힘을 다해 싸운다면 훗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벼슬을 내릴 것이다."
또한 김윤후는 관청에 보관된 노비 문서를 끄집어내어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말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에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있는 힘을 다해 싸우자 몽골군의 사기는 차츰 저하되었고, 마침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 전공(戰功)으로 김윤후는 이듬해 1254년 2월, 감문위 상장군에 올랐고 그와 함께 끝까지 충주성을 지켜낸 사람들은 관노와 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벼슬을 제수받았다. 김윤후는 자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켰던 것이다.
이어 김윤후는 1259년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미 동북면이 몽골군에 의해 함락된 뒤였기 때문에 부임하지 못했다. 그 뒤 1262년 추밀원부사 예부상서에 올랐고, 이듬해 수사공 상서우복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윤후는 승려의 신분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함으로써 재상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몽골에 투항하거나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국토를 유린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들에 비해 나라를 위해 온몸을 바친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김윤후가 사임한 지 7년 만인 1270년,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 돌아와 몽골에게 항복함으로써 뒷날 공민왕(恭愍王)이 철령위를 회복할 때까지 약 100여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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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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