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눌(知訥)은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의 후원을 받아 선종(禪宗)의 입장에서 교종(敎宗)을 통합하여 조계종(曹溪宗)을 開創한 승려이다. 건국 이래 숭불정책(崇佛政策)을 표방해 온 고려는 광종(光宗)대에 균여(均如) 등의 도움으로 처음 불교 통합을 시도한 데 이어, 숙종(肅宗)대에 의천(義天)의 천태종(天台宗) 開創과 함께 다시 한번 불교 통합을 시도했다. 그러나 황실과 문벌귀족의 후원 속에 불교 통합과 국정 개혁에 주도적 역할을 해온 교종은 고려 중기에 와서 크게 타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신정변(武臣政變)으로 권력을 잡은 무신들은 자신들의 정권을 뒷받침해 줄 새로운 사상을 찾게 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집권층을 비호해 온 교종이 아닌 선종을 후원하였고, 이로써 선종과 교종은 또 다시 극한 대립을 보이게 되었다.
이때 선종계 승려인 지눌이 조계종을 開創하여 당시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나뉘어 있던 선종을 통합하는 한편,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했다. 이것은 지눌이 당시 무인 세력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눌이 교종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무신정권이 기존의 정치 질서에 반발하여 일어섰다는 점과 그 궤를 같이 하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무신정권과 긴밀하게 엮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계종은 이후 고려 후기의 불교계를 이끌었으며, 의천의 천태종과 함께 불교 통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 불법에 정진하다.
지눌(知訥)은 1158년 황해도 서흥에서 국학(國學)의 학정을 지낸 정광우와 개흥군 출신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덟살 나던 해인 1165년에 부모의 뜻에 다라 구산선문 가운데 사굴산파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지눌은 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는데, 부모가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구해온 약도 그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병만 낳게 해주시면 아들을 부처에게 바치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자마자 희한하게도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리하여 약속대로 출가하게 된 것이다.
지눌이 활동했던 고려 중기는 나라 안팎으로 무척 혼란했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대륙의 새 주인으로 등장한 원나라가 끊임없이 압박을 가해왔으며 대내적으로는 황제와 문벌귀족에 의해 주도되어 왔던 정권이 1170년 무신정변을 계기로 무너지고 무신들이 새로운 집권 세력으로 등장했으며,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최씨(崔氏) 무신정권이 시작된 시기였다.
새롭게 등장한 무신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뒷받침해 줄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했고, 그대까지 황실과 문벌귀족의 비호 속에 성장해 온 교종과는 다른 새로운 불교를 원하게 되었다. 게다가 급변하는 국내외적 상황과는 달리 기성의 불교 교단은 그 본분을 망각한 채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참선과 수행을 통한 불교 개혁을 주장하는 선종이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눌은 여러 사찰을 떠돌며 학문에 전념했다.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그리하여 한 종파의 입장에서 다른 종파를 비판하고 배격하는 당시의 종파 대립적인 교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눌은 교종과 선종의 조화를 꾸준히 모색했고, 이것은 뒷날 불교를 통합하여 조계종을 開創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지눌은 1182년 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관직으로의 진출은 단념하고 여러 사찰을 다니며 불교 법회에 참여하는 등 수도에만 정진했다. 이때 청량사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던 지눌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 경계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서 문득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지눌은 평생 동안 육조혜능(六祖慧能)을 정신적인 스승으로 모셨으며, 만년에는 송광산 길상사를 중창한 뒤 송광산을 혜능이 머물렀던 조계 보림사의 이름을 따 조계산으로 고치기까지 했다.
● 선종과 교종은 둘이 아니라 하나
자신의 깨달음이 미진하다고 생각한 지눌은 더욱 더 용맹정진하기 위해 1185년 예천에 있는 하가산 보문사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는 선종의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하는 한편, 교종의 해탈 방법을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선종과 교종은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선종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심법(心法)을 주장하면서 교종이 내세우는 경전을 무시했고, 교종은 경전의 법문만이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며 선종을 정통 불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선종과 교종 모두 근본적으로는 부처의 가르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지눌로서는 그러한 현실이 무척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지눌은 선종과 교종의 근원이 하나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화엄종(華嚴宗)의 고승들을 찾아가 교종의 수행 방법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교종의 승려들은 모두 엉뚱한 대답만 해줄 뿐이었다.
이에 크게 실망한 지눌은 자신이 직접 교종과 선종의 합일점을 찾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지눌은 대장경을 열심히 읽은 지 3년만에 화엄경(華嚴經)의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움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과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의 "보살은 십신위(十信位)에서 자기 성품 중에 있는 근본부동지(根本不動智), 보광명지(普光明智)를 깨달아 십주초위(十住初位)에 들어간다."는 구절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또 "몸은 지혜의 그림자요, 국토 또한 그러하다. 지혜가 깨끗하면 그림자도 맑아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용납됨이 인타라망(因陀羅網)과 같다."는 구절을 읽다가 책을 덮고 탄식하기를, "부처의 말씀이 교가되고 조사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善)이 되었으니, 부처와 조사의 듯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각자의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허비할 것인가?"라고 했다. 이것은 선교일치(禪敎一致), 즉 불교를 통합할 수 있는 이치를 발견한 것으로 그의 두번째 큰 깨달음이었다.
지눌은 1190년 몽선화상(夢船和尙)과 함께 거조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승려들을 모아 더욱 불도에 정진하기로 결사를 맺고, 그 취지를 밝인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했다.
'우리들이 아침저녁으로 하는 행적을 돌이켜 본즉, 불법을 빙자하여 자기를 꾸며 남과 구별하고는 구차하게 이익을 탐하고 속세의 것에 골몰하여 도덕을 닦지 않고 의식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위로는 도를 넓히는 데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어긋나며, 사은(四恩)을 저버렸으니 실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 모임이 파한 후에는 마땅히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운둔하며, 동사(同社)를 결정하고 항상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연마하기에 힘쓰며, 예불과 독경에 정진하고 나아가서는 노동에도 힘을 쏟자. 각기 소임에 따라 경영하고 인연에 따라 심성을 수양하여 한평생을 자유롭게 지내며...'
위와 같이 시작하는 권수정혜결사문은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그 방법으로 선정(禪定)과 교학(敎學)을 같이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고 있다. 즉 정과 혜는 한마음에 통일되어 항상 균형을 지녀야 한다고 본 것이다.
지눌은 교단 내의 부패와 선종, 교종의 대립을 불식하고, 새로운 불교를 건설하고사 정혜결사운동(定慧結社運動)을 전개했다. 당시 무신 세력간의 끊임없는 권력 쟁탈전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혼란으로 곳곳에서 반란과 민중봉기가 그치지 않자 불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지눌의 결사운동은 정법 불교로 복귀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한 당시 불교계를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선언서였다.
●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다.
지눌의 정혜결사운동은 큰 호응을 얻어 결사(結社)를 시작한 지 8년째인 1197년에는 황족 및 조정 관리를 비롯해 수백명의 승려가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격하게 절제하는 생활을 기피하여 운동에 반대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지눌은 그들을 교화하여 끌어들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자신의 덕과 법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지눌은 모든 보살행을 멈추고 은거하여 선정(禪定)을 닦기로 결심했다.
지눌은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며 그곳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한 채 오직 생각도 없고 집착도 없는 해탈의 경지에 안주하여 마음의 근원을 연구했다. 이때 대혜어록(大慧語錄)의 "선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객관과 상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니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일상의 인연이 따르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 여의치 않고 오로지 참선을 통해 연구해야만 한다."는 문구에 이르어 세번째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지눌은 훗날 "내가 보문사 이래로 10여년 동안 일찍이 방심하지 않고 수행을 해왔건만 오히려 정견을 놓지 못한 채 물건이 가슴에 걸려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지리산에서 대혜어록을 보다 홀연히 눈이 열리니 즉시 편안해졌다."며 이때의 깨달음에 대해 회고했다.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큰 깨달음을 얻은 지눌은 운둔 생활을 벗어나 예전보다 더 적극적인 보살행을 통해 현실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들어가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하며,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했다.
또한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이때 지눌은 졸애의 구산선문을 통합하여 조계종을 開創하였는데,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모색했다면 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모색했다.
지눌이 주로 머물며 불법을 강설한 곳이 바로 송광산 길상사로, 1205년에 송광산은 조계산, 길상사는 수선사로 고쳐졌다. 이후 수선사는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하며 동방 제일의 도량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으며, 고려 후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선사는 원래 지눌이 1190년 팔공산 거조사에서 법회를 갖고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하며 정혜결사를 결성하고 개칭한 정혜사에서 비롯되었다. 당시에는 무신 세력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았지만, 지눌의 뒤를 이은 혜심(慧諶)대에 이르러 황실과 무신 귀족, 유학자 관료 등이 입사함으로써 중앙의 정치 세력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이로써 교단은 크게 발전하였고 이후 중앙 세력과 더욱 밀착되어 갔다. 이후 무신 정권이 붕괴되고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부터는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재추들의 후원을 받았다.
지눌은 조정의 뜻에 따라 120일 동안 대법회를 베풀며 불경을 강설하고 대중을 지도했다. 그 후 10여년 동안 계속해서 활동하다가 1210년 3월 27일, 선법당에서 문답을 끝낸 뒤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법어를 남긴 후 입적하였다. 불일보조(佛日普照)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죽은 뒤 국사(國師)로 추증되었다. 진심직설(眞心直說), 원동성불론(元頓成佛論),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법어(法語),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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