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헌(崔忠獻)이야말로 고려 중기 무신독재시대(武臣獨裁時代)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중부(鄭仲夫)와 이의방(李義方)이 시작하고, 경대승(慶大升)과 이의민(李義旼)이 굳혀놓은 토대 위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군사 독재 정치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아들 최우(崔瑀), 손자 최항(崔沆), 증손자 최의(崔竩)에 이르기까지 4대 62년에 걸친 최씨(崔氏) 가문의 무인시대를 개막했던 것이다.
최충헌은 아우 최충수(崔忠粹)와 더불어 1196년에 군사를 일으켜 당시의 실권자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자, 그 이듬해에는 명종(明宗)을 내쫓고 신종(神宗)을 내세우는 한편, 거사동지이기도 했던 친동생 최충수와 생질인 박진재(朴晋材)까지 잡아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독재자가 된 그는 늙어 죽을 때가지 다섯명의 황제를 모셨다기보다는 겪었는데, 그 가운데 명종과 희종(熙宗) 두명은 강제로 내쫓고 신종, 희종, 강종(康宗), 고종(高宗) 등 네명은 자기 마음대로 끌어다 앉혔으니, 최충헌이야말로 '황제 제조기'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는 일세의 괴걸이었다.
더군다나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최충헌은 1219년에 71세로 늙어 죽었으니 천수(天壽)까지 다 누린 셈이었다. 단지 정권안보를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쫓아낸 탓에 언제 누구 손에 죽을지 몰라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신변 경호를 강화하기 위해 육번도방(六番都房)이란 것을 설치했다.
도방(都房)이란 원래 경대승이 만든 것이었다. 정중부 일당을 숙청한 경대승이 자신의 경호를 위해 사병(私兵) 100여명을 자신의 집에 기숙시키며 그 숙소로 삼은 것이 도방이었다. 육번도방이란 최충헌이 이 도방을 부활시켜 무술과 담력이 뛰어난 장사들을 선발하여 자신의 가병(家兵)으로 삼고 여섯 패로 나누어 번갈아가며 경비토록 한 것이었다.
● 임금을 네명이나 갈아치운 '황제 제조기'
최충헌(崔忠獻)은 1149년에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난이며 본관은 우봉이다. 그의 외조부 유정선도 상장군을 지낸 전형적인 무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처럼 번듯한 가문 출신으로 글까지 배운 최충헌은 음직(蔭職)으로 문관(文官)이 되어 영온령과 도필리를 지냈다. 경인정변(庚寅政變)이 일어났을 때에 최충헌은 27세였다. 하루아침에 문신(文臣)들이 몰락하고 무신(武臣)들의 천하가 되자 두뇌회전이 빠른데다가 명예욕까지 강한 최충헌의 생각도 달라졌다. 그는 문관으로 출세할 생각을 팽개친 채 무관(武官)으로 변신하기로 작정했다.
1174년에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최충헌은 그가 용감하다는 말을 들은 부원수 기탁성(奇卓誠)에게 발탁되어 별초도령이 되었고 이어서 별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출세운이 따르지 않았는지 누구에게 잘못 보였는지 그 뒤 20년 동안이나 승진을 하지 못했다. 경대승(慶大升)이 군문(軍門)에 든 지 10년도 못 되어 장군이 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정중부(鄭仲夫)를 비롯하여 이의방(李義方)이나 이의민(李義旼)이나 모두 자신에 비해 형편없이 낮은 신분 출신이라는 점도 불만의 한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또 한때는 안찰사 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그의 벼슬은 부하 한명도 없고 명색만 장군인, 명예직이나 마찬가지인 섭장군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면 그 동안 경대승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벼락치기로 집권자가 된 이의민은 어떻게 하여 최충헌 형제에게 목숨을 빼앗기게 되었는가?
이의민은 경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가난하고 무식한 소금장수였고, 어머니는 영일현 옥령사라는 절의 여종이었다. 이의민은 키가 8척이나 되는 거구에 힘이 장사였다. 그는 3형제 가운데 막내로서 두형과 어울려 다니면서 못된 짓만 골라서 하던 건달이었다. 그러다가 안찰사 김자양(金慈量)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두형은 매에 못 이겨 죽고 이의민만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가 천부적 장사라는 사실을 안 김자양은 그 힘이 아까워 죽이지 않고 풀어준 뒤 도성인 개경을 방어하는 경군(京軍)으로 추천했다.
● 괴력을 밑천 삼아 출세한 이의민
그렇게 해서 개경으로 올라가 황궁 경호대인 견룡군(牽龍軍)에 들어간 이의민은 타고난 용력에 수박희(手搏戱) 실력도 뛰어나 곧 의종(毅宗)의 눈에 들었다. 그래서 대정에 이어 별장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정중부를 비롯하여 이의방, 이고(李高) 등이 정변을 일으킬 때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중랑장이 되었고, 의종을 죽인 뒤에는 대장군으로, 다시 조위총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는 상장군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그의 후견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이의방이 정중부에게 죽고,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살해당하니 이의민은 졸지에 설 땅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평소 그를 싫어하던 경대승은 황제를 시해한 이의민을 없애겠다고 공언했으니 이의민은 목숨부터 구하고 봐야만 했다. 그래서 고향인 경주로 내려가 죽은 척 엎드리고 있었는데, 천적 같던 경대승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권력을 거저먹기로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상경한 이의민은 중서성문하평장사(中書省門下平章事)가 되었는데, 조정에 들어가보니 군대에서 자기보다 서열이 아래였던 두경승(杜景升)이 재상인 중서령(中書令)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하루는 중서성에서 두경승을 만난 이의민이 "어떤 놈이 힘자랑을 하기에 내가 이렇게 때려눕혔지!" 하고 주먹으로 기둥을 내려치니 서까래가 내려앉았다. 두경승에게 겁을 주려고 자신의 힘자랑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두경승도 지지 않고 "그래? 나도 언젠가 이렇게 빈 주먹질을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더군!" 하고 주먹으로 벽을 치니 벽에 구멍이 뚫렸다. 또 한번은 중서성에서 회의 도중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때도 이의민은 두경승에게 "네가 무슨 공이 있다고 나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거냐?" 하고 주먹으로 기둥을 치는 등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이의민과 두경승이 이렇게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추밀원(樞密院)에서도 무장 출신인 추밀원사 김영존(金榮存)과 추밀원부사 손석(孫碩)이 걸핏하면 욕설을 퍼부으며 대판 싸우곤 했으므로 세간에 "중서성에서는 이가(李家)와 두가(杜家)요, 추밀원에서는 김가(金家)와 손가(孫家)로다." 하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또 어떤 문인은 이런 시를 지어 이들의 권력투쟁을 비웃기도 했다.
'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
위풍이 당당해서 정말 재상답거든
황각(皇閣)에 앉은 지 삼사년에
주먹바람이 만번도 넘게 불었네.'
어쨌든 이의민은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뒤 13년간 세도를 누렸는데, 권력의 맛에 취하자 천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 뇌물을 받는 것은 물론, 민가와 전답을 빼앗는 등 탐욕의 화신으로 변해갔다. 이의민의 처 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한번은 이의민이 여종을 건드리자 그녀를 때려죽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 자신도 음욕이 대단해서 자기 집 하인과 간통하다가 결국은 이의민에게 들켜 쫓겨나고 말았다. 본처를 쫓아낸 이의민은 마음놓고 여색을 밝혀 인물이 반반한 여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건드렸다. 양가의 규수도 마음에 들면 아내로 삼았다가 싫증이 나면 버리기를 밥 먹듯 했다.
이런 부모의 천한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아 이의민의 세 아들 지순(至純), 지영(至永), 지광(至廣)도 하나같은 망나니였다. 특히 지영과 지광의 횡포가 심해 사람들은 이 두 형제를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렀다. 이지영은 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아무 때나 죽이고, 여색을 밝히기를 아비보다 더해서 어디에 예쁜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처녀건 유부녀건 찾아가 겁탈했고, 길을 가다가도 눈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납치를 해서라도 겁탈하곤 했다. 심지어는 명종(明宗)의 총희까지 强姦했지만 명종도 이의민의 위세가 두려워 아무 말도 못했을 정도였다.
이의민의 딸도 음탕하기 그지없어 그녀의 남편이 너 같은 년과는 도저히 못 살겠다면서 갈라서고 말았다. 이러한 죄상이 쌓이고 쌓이니 누구 하나 손가락질하고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의민은 엉뚱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고려 황실을 뒤엎고 신라를 부활시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꿈이었다. 이를 위해 이의민은 당시 남쪽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자들 가운데 청도의 김사미(金沙彌)와 울산의 효심(孝心) 등과 내통했다.
1193년에 이의민의 맏아들 이지순이 대장군 전존걸(全存傑)과 함께 남적(南賊)을 토벌하러 내려갔는데 지순은 김사미, 효심과 내통하여 군수품을 보내주고 군사기밀까지 넘겨주었다. 이 사실을 안 전존걸이 "내가 지순을 처벌하면 그 아비가 나를 죽일 것이고, 이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도적들이 더욱 창궐할 것이니 이 죄를 누가 져야 옳단 말인가!" 하고 한탄하며 자살해 버렸다. 이의민은 이렇게 제 무덤을 파고 있었다.
● 이의민의 폭정 13년을 종식시킨 최충헌, 충수 형제
최충헌 형제가 이의민을 죽인 것은 1196년 4월이었다. 사건은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수(崔忠粹)의 비둘기를 강탈함으로써 일어났다. 당시 동부녹사라는 하급 무관직에 있던 최충수는 배짱은 있었지만 사납고 음흉하고 시기심과 욕심이 많았다. 어느 날 최충수가 기르던 비둘기를 이지영이 빼앗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최충수는 이지영의 집으로 찾아가 거칠게 항의하며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했다. 아비 덕에 장군 벼슬을 하고 있던 이지영은 일개 녹사 따위가 집으로 찾아와 거칠게 항의하자 화가 나서 종복들에게 소리쳤다.
"여봐라! 당장 저놈을 묶어서 가두어라."
하지만 최충수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장군 외에는 아무도 나를 묶을 수 없소이다!"
최충수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긴 이지영은 그를 풀어주라고 했다. 무사히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최충수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며칠 뒤 최충헌(崔忠獻)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형님, 이의민(李義旼) 4부자는 사실 역적이 아닙니까?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나서서 놈들의 목을 베려고 하는데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말도 맞지만 지금 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데, 어렵지 않겠는가?"
"제 뜻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이제 그 결심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아우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최충헌도 마침내 동조하고 기회만 엿보았다. 그런데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에 명종이 보제사에 행차하는데 이의민이 병을 핑계로 수행하지 않고 미타사에 있는 자기 별장으로 몰래 놀러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낸 최충헌 형제는 이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두 형제는 생질인 대정 박진재(朴晋材)와 친척인 노석숭(盧碩崇)을 데리고 미타사로 찾아가 별장 문 밖에 숨어 기다렸다. 이윽고 이의민이 돌아가려고 문 밖으로 나와 말을 타려는 순간 최충수가 앞장서 뛰쳐나가 칼을 빼어 내리쳤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최충헌이 뒤따라 나가 당황한 이의민을 찔러 죽이고 목을 베어 버렸다. 이것을 보고 이의민의 수하들이 모두 놀라 어지럽게 달아났다. 최충헌은 노석숭을 시켜 이의민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개경으로 돌아가 거리에 효수(梟首)하게 했다.
급보를 받은 명종(明宗)이 놀라 환궁을 재촉했고, 황제를 수행했던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과 이지광은 최충헌의 부하들과 맞서 싸우다가 불리하자 달아났다. 최충헌 형제는 장군 백존유(白存儒)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뒤 황궁으로 들어가 명종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적신(賊臣) 이의민이 일찍이 시역(弑逆)의 죄를 범했고, 백성을 포악하게 학대하며 역모를 꾀하므로 신 등이 미워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나라와 황실을 위해 역적을 토벌하였사오나 다만 일이 누설될까 두려워 감히 거사 전에 주청하지 못했습니다."
명종이 한두번 겪은 일이 아닌지라 잘했다고 치하할 수밖에 없었다. 명종의 허락을 받은 최충헌은 대장군 이경유(李景儒)와 최문청(崔文淸) 등과 함께 이의민의 잔당을 토벌할 것을 의논했다. 그들은 성문을 닫아걸고 이의민의 아들과 심복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아갔던 이지영은 그때 안서도호부(安石護府)에서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다가 장군 한휴(韓烋)에게 잡혀 죽었다. 얼마 뒤에 이지순과 이지광은 제 발로 걸어와 자수했으나 최충헌은 사정없이 그들을 참살해 버렸다. 그리고 이의민의 일가는 삼족을 멸하고 지방으로 흩어져 숨은 이의민의 집 종복까지 모두 잡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이의민의 집권시대 13년은 가고 최충헌의 집권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이의민열전(李義旼列傳)에 그의 몰락을 예고하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의민은 제 이름도 쓰지 못하는 까막눈인데다가 미신을 매우 깊이 믿었다. 그의 고향 경주에 나무로 만든 귀신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두두을(豆豆乙)'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은 자기 집에 사당을 지어 두두을을 모셔놓고 날마다 제사를 지내며 복을 빌었다. 하루는 사당 안에서 귀신의 곡성이 들려왔다. 괴상히 여긴 이의민이 들어가 까닭을 물으니 귀신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너의 집을 오랫동안 지켜주었는데 이제 하늘이 재앙을 내리려 하니 장차 내가 의탁할 곳이 없어지게 되어 우는 것이니라!"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은 장악했으나 아직도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최충헌 형제는 반대파를 찾아내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다시 광풍 같은 피바람이 불었다. 평장사 권절평(權節平)과 장군 권준(權準) 부자, 평장사 손석과 장군 손홍윤(孫洪胤) 부자, 거사에 동조했던 대장군 이경유, 장군 권윤(權允)과 유삼백(柳森栢), 어사중승 최혁윤(崔赫尹), 상장군 길인(吉仁), 장군 유광(兪光)과 박공습(朴公襲), 상장군 주광미(周光美), 대장군 김유신(金愈信)과 권연(權衍) 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또 참지정사 이인성(李仁珹)과 낭중 문홍분(文洪賁) 등 문관 36명을 붙잡아 가두었다가 죽였다.
● 권력 기반 다지기 무섭게 명종(明宗) 폐위, 신종(神宗) 옹립
이처럼 독재 기반을 굳히려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내쫓자 자연히 민심이 흉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최충헌 형제는 그 다음달인 5월에 신축한 궁궐을 사용할 것, 관원들을 감축할 것, 권신들의 토지를 환원시킬 것, 조세(租稅)를 함부로 걷지 말 것, 안찰사 등 외관들을 규찰할 것, 궁궐에 출입하는 승려들의 폐단을 금지할 것, 근검절약을 장려하고 사치를 금지할 것 등 이른바 개혁을 위한 봉사 10조를 건의했다.
이 같은 봉사 10조를 올린 뒤 최충헌은 본격적으로 국정개혁에 나섰다. 먼저 권세를 업고 부당하게 승진한 내시 호부시랑 이상돈(李尙敦), 군기소감 이분(李芬) 등 50여명을 모두 내쫓고, 또 왕자로서 중이 되어 소군(小君)이라고 불리는 홍기(洪機), 홍추(洪樞), 홍규(洪規) 등 6명은 대궐 안에서 정사(政事)에 간섭했다는 이유로 모두 절로 돌아가도록 했다. 또 명종이 총애하는 중 운미(雲美), 존도(存道) 등도 본래 속한 절로 쫓아버렸다.
명종은 최충헌의 공이 크다 하여 좌승선 벼슬을 내렸다. 그것으로도 불안했던지 그 이듬해인 1197년에는 조서를 내려 최충헌에게는 충선죄리공신을, 최충수에게는 수충찬화공신의 작호를 내리고 이들의 아버지 최원호에게도 봉의찬덕공신 작호에 수문하시중 벼슬을 증직하여 공신각에 화상을 걸도록 했다. 하지만 명종은 최충헌 형제가 권력 기반을 다지기가 무섭게 자신을 폐위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 형제는 명종이 자신들이 올린 봉사 10조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어느날 박진재를 데리고 최충헌을 찾은 최충수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황제는 제위에 오른 지 이미 28년이나 되다 보니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 소군이 늘 황제 곁에서 은혜와 위엄을 농간하고, 여러 소인배를 총애하여 황금과 비단을 마구 내려 국고가 텅 비어버렸으니 신민(臣民)을 거느릴 수 없습니다. 태자 숙(璹)은 여러 비첩에게서 아들 아홉을 낳았지만 모두 머리를 깎고 소군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품이 어리석고 빙충맞아 태자로서 마땅치 않으나, 사공 진(榛)은 경사에 널리 통하고 머리가 총명하여 도량이 있으니 만약 황제로 옹립하면 나라가 중흥할 것입니다."
최충수가 왕진을 제위에 올리고자 한 것은 당시 그의 여종과 정을 통했기 때문이라고 한ㄷ. 그러자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최충헌이 이렇게 말했다.
"평량공(平凉公) 민(旼)은 황제의 동복아우이고 넓은 지략과 제왕의 도량이 있으며, 또 그 아들 연(淵)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태자가 될 만하지 않은가?"
형제간의 의견이 갈리자 박진재가 이런 말로 최충헌의 편을 들고 나섰다.
"제가 생각하기에 진과 민이 모두 제위에 오를 만하나 금나라에서는 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진을 임금으로 세우면 금나라가 분명히 제위를 찬탈했다고 트집 잡을 것이니 차라리 민을 세우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니 전에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웠듯이 동생으로서 뒤를 이었다고 한다면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마침내 이들은 명종을 폐위하고 그의 아우인 왕민을 제위에 올리기로 합의했다. 1197년 9월 최충헌 형제는 사전조치로 명종 폐위에 반대할 만한 두경승, 유득의 등 중신 12명과 소군 20여명을 붙잡아 귀양 보낸뒤 마침내 명종을 내쫓고 신종(神宗)을 제위에 내세웠다. 신종은 인종(仁宗)의 다섯째 아들이며 의종의 막내아우로서 당시 이미 50세가 넘은 나이였다. 명종을 폐위한 두 형제는 그를 유폐하고 태자와 태자비는 강화도로 내쫓았다. 정중부와 이의방의 쿠데타로 제위에 오른 명종은 이렇게 28년간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하다가 쫓겨나 창락궁에 연금되었다. 그는 이후 6년을 더 살다가 1202년 9월에 이질에 걸려 72세로 죽었다.
신종은 자신을 제위에 올린 최충헌을 정국공신(政國功臣) 삼한대광(三韓大匡) 대중대부상장군(大中大夫上將) 주국(柱國)으로 삼고, 최충수는 수성제란공신(輸誠濟亂功臣) 삼한정광중대부(三韓正匡中大夫) 응양군군대장군(應揚軍大將軍) 위위경지도성사(衛尉卿知都省事) 주국(柱國)을 삼았으며, 박진재에게도 형부시랑 벼슬을 내렸다.
● 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고, 혈육도 모르는 비정한 것
하지만 이들 형제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권력이란 본래 부자, 형제간에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비정한 것이 아닌가? 그 일은 욕심 많은 최충수가 제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내려고 해서 빚어졌다. 태자비는 본래 창화백(昌化伯) 왕우(王祐)의 딸이었다. 그런데 굳이 최충수가 황제와 태자비를 위협하여 제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니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최충헌이 어느날 술을 가지고 아우를 찾아가 함께 마시다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듣건대 자네가 딸을 타재에게 바친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최충수가 그렇다고 시인하자 최충헌이 이렇게 타일렀다.
"여보게, 지금 우리 형제의 권세가 비록 나라를 흔들 정도라고는 하지만 본래 가계(家系)가 한미한데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낸다면 사람들이 어찌 흉보고 욕하지 않겠는가? 또한 부부 사이의 의리는 하늘이 정해준 것이거늘 태자가 하루아침에 짝을 잃는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옛 사람의 말에 '앞수레가 넘어지면 뒷수레가 경계한다.'고 했네. 전에 이의방이 제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냈다가 결국 남의 손에 죽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아우는 그 전철을 밟으려 하는가?"
최충수는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따르는 듯했으나 형이 돌아가자 이내 마음이 바뀌었다. 심지어는 이를 말리는 어머니를 떠밀어 땅바닥에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최충헌은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는데, 어머니를 욕보임이 이와 같으니 하물며 형인 내게는 어찌 대하겠는가? 말로는 도저히 타이를 수 없으니 힘으로 막을 수밖에는 없구나!" 하고 최충수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지만 권력에는 혈육도 없었다. 결국 욕심이 지나쳤던 최충수는 형 최충헌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나머지 그 이튿날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래도 최충헌은 마지막 양심이라고 남아 있었던지 부하들이 들고 온 최충수의 수급(首級)을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나는 산 채로 잡아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죽이고 말았구나!" 하고 시체를 찾아서 장사지내게 해주었다.
쿠데타 동지이며 심복이었던 조카 박진재도 예외가 아니었다. 1206년 대장군에 오른 박진재가 최충수를 제거하는데 자신의 공로가 컸건만 최충헌이 권력을 나누어주지 않고 독점한다며 걸핏하면 불평을 늘어놓자 그를 붙잡아 다리를 힘줄을 끊어버린 뒤 벽령도로 귀양을 보냈던 것이다. 박진재는 백령도에서 몇달 뒤에 울화병으로 죽어버렸다.
● 사상 최초의 노예반란 일으킨 최충헌의 종 만적(萬積)
이보다 앞서 1198년 5월에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노예반란인 만적(萬積)의 반란이 일어났다. 만적은 최충헌의 사노비였다. 만적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노비들을 불러모은 뒤, "무신들이 변란을 일으킨 이후에 천민 출신으로 고관대작이 많이 나왔으니 재상과 장군의 씨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우리도 권세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율학박사 한충유(韓忠兪)의 종인 순정(順貞)이 제 주인에게 고발함으로써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최충헌은 곧 군사를 풀어 만적 등 100여명을 잡아 죽여 강물에 던지고, 한충유에게는 합문지후 벼슬을 내렸으며, 밀고자 순정에게는 백금 80냥을 주고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최충헌이 비록 정적들을 가차없이 숙청하고 4대 62년에 걸쳐 군사 독재의 기반을 닦았다고는 하지만 그의 집권기 내내 반란과 암살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만적의 반란 이듬해인 신종(神宗) 재위 2년 2월에는 명주에서 도적이 일어나 울진과 삼척까지 함락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동경에서도 도적이 일어나 명주의 도적과 합세하여 여러 주와 군을 휩쓸며 약탈을 자행했다. 또 그해 8월에는 탐라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영주에서도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개경 부근 흥왕사, 흥원사, 경복사, 왕륜사, 수리사 등의 승려들이 모의하여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한 사건도 있었다. 또 황주목사 김준거가 최충헌을 토벌하려고 몰래 개경에 숨어들었다가 모두 잡혀 죽는 사건도 벌어졌다.
최충헌이 도방(都房)을 육번도방(六番都房)으로 바꾸어 자신의 경호를 강화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도방의 장사들은 여섯패로 나누어 번갈아 경비를 서다가 최충헌이 출입할 때에는 모두 호위하니 그 행렬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고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열전(崔忠獻列傳)은 전한다. 그렇게 해서 최충헌의 도방에 드나드는 문객과 사병의 수가 3천여명에 이르렀다.
● 육번도방(六番都房) 설치하고 신변 경호 강화
하지만 최충헌이 오로지 무력(武力)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선배 독재자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처럼 문신들을 싹 쓸어 없애는 미련한 전철을 밟지 않았다. 반대파는 인정사정없이 숙청했지만, 문신들도 회유하고 포섭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장기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그러면서 최충헌의 벼슬은 해가 갈수록 높아졌다. 1197년에 신종을 옹립하고 상장군, 추밀원지주사에 오른 이후 1199년에는 수태위상주국, 이듬해에는 태부참지정사, 이부상서, 1203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 및 이부상서 판어사대사 태자소사에 올랐다. 쉽게 말해서 최충헌이 조정의 인사권과 병권을 독차지한 것이다. 따라서 황제는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다. 그렇게 장기집권의 토대를 굳히는 사이에 허수아비 황제 신종이 재위 6년만인 그해 12월에 등창으로 병상에 누워 이듬해 1월에 태자에게 양위하고 61세로 죽었다.
신종에 이어 즉위한 희종(熙宗)은 최충헌을 중서문하평장사로 임명했다가 이금해에 문하시중, 곧 수상(首相)으로 승진시켰다. 모양새는 황제의 임명이지만 사실은 자기 벼슬을 자기가 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朴正熙)가 소장(少將)에서 금세 대장(大將)이 되고, 12.12 쿠데타 이후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祐)가 또한 소장에서 금세 대장이 된 것과 같았다. 최충헌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스스로 수상이 된 것이나 박정희, 전두환이 대통령을 바지저고리로 만들고 제 손으로 자기 어깨에 별을 단 것이나 똑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는 것이다. 문하시중에 진강후라는 작위까지 받은 최충헌은 관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황궁을 무상으로 출입했고, 행차할 때에는 일산(日傘)을 받치게 했으니 명색만 신하였지 실질적인 황제나 마찬가지였다. 또 무신들의 의결기구인 중방(重房)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교정도감(敎定都監)을 권력기구로 삼아 독재를 강화했다.
● 23년간 철권통치 끝에 권력 세습하고 죽어
그런데 희종도 불과 8년밖에 황제 노릇을 하지 못했다. 1211년 12월에 내시낭중 왕준명(王儁明)이 희종의 묵인 아래 최충헌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일어났다.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태자는 인주에 유폐시켰다. 31세에 폐위된 희종은 노년에 법천정사로 옴ㄹ겨져 1237년에 57세로 죽었다.
최충헌이 희종의 뒤를 이어 내세운 제22대 황제가 바로 강종(康宗)이다. 강종은 전에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하고 폐위시킨 명종의 태자였다. 명종이 폐위당할 때 강화도에 갇혀 14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난데없이 황제로 책립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이미 6-세였다. 그는 오랫동안 강화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병든 몸인데다가 고령인 탓에 황제 노릇도 제대로 못해보고 1년 8개월만인 1213년 8월에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62세로 죽었다.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황제는 고종(高宗)이다. 고종은 강종이 강화도에 유배당했을때 안악에 유배되어 있다가, 강종이 즉위한 이듬해에 개경으로 돌아와 태자로 책봉되어 곧 제위에 오르니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는 비록 최충헌 일가 4대의 무인시대에 황제 자리에 있었지만 고려왕조에서 45년간이라는 최장수 제위 기록을 남겼다. 이처럼 최충헌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23년 동안 다섯명의 황제 가운데 네명을 마음대로 갈아치우고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절대 권력을 휘둘러도 인간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최충헌은 1219년 9월에 71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그에 앞서 최충헌은 머지않아 죽음이 닥 쳐올 것을 예감하고 고종에게 궤장(几杖)을 반납하고 죄수들을 풀어주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그가 죽기 전에 달아 화성을 범하는 현상이 있었다. 일관(日官)이 이를 보고 '귀인이 죽을 징조'라고 보고했다. 최충헌은 악공 수십명을 불러 종일토록 음악을 연주하게 했는데, 그날 밤 죽고 말았다.
최충헌이 죽자 맏아들 최우(崔瑀)가 반대파를 숙청하고 교정별감을 차지하여 권력을 세습했다. 최우에 이어서는 최항(崔沆)이, 그 뒤는 최의(崔竩)가 이어 정권을 좌지우지하다가 1259년 3월에 최의가 살해당하는 바람에 4대 62년에 걸친 최씨 무신정권은 막을 내렸다. 아울러 최씨 일가의 몰락과 더불어 88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친 고려 무인시대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최충헌은 아우 최충수(崔忠粹)와 더불어 1196년에 군사를 일으켜 당시의 실권자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자, 그 이듬해에는 명종(明宗)을 내쫓고 신종(神宗)을 내세우는 한편, 거사동지이기도 했던 친동생 최충수와 생질인 박진재(朴晋材)까지 잡아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독재자가 된 그는 늙어 죽을 때가지 다섯명의 황제를 모셨다기보다는 겪었는데, 그 가운데 명종과 희종(熙宗) 두명은 강제로 내쫓고 신종, 희종, 강종(康宗), 고종(高宗) 등 네명은 자기 마음대로 끌어다 앉혔으니, 최충헌이야말로 '황제 제조기'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는 일세의 괴걸이었다.
더군다나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최충헌은 1219년에 71세로 늙어 죽었으니 천수(天壽)까지 다 누린 셈이었다. 단지 정권안보를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쫓아낸 탓에 언제 누구 손에 죽을지 몰라 하루도 편히 살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신변 경호를 강화하기 위해 육번도방(六番都房)이란 것을 설치했다.
도방(都房)이란 원래 경대승이 만든 것이었다. 정중부 일당을 숙청한 경대승이 자신의 경호를 위해 사병(私兵) 100여명을 자신의 집에 기숙시키며 그 숙소로 삼은 것이 도방이었다. 육번도방이란 최충헌이 이 도방을 부활시켜 무술과 담력이 뛰어난 장사들을 선발하여 자신의 가병(家兵)으로 삼고 여섯 패로 나누어 번갈아가며 경비토록 한 것이었다.
● 임금을 네명이나 갈아치운 '황제 제조기'
최충헌(崔忠獻)은 1149년에 상장군 최원호(崔元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난이며 본관은 우봉이다. 그의 외조부 유정선도 상장군을 지낸 전형적인 무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처럼 번듯한 가문 출신으로 글까지 배운 최충헌은 음직(蔭職)으로 문관(文官)이 되어 영온령과 도필리를 지냈다. 경인정변(庚寅政變)이 일어났을 때에 최충헌은 27세였다. 하루아침에 문신(文臣)들이 몰락하고 무신(武臣)들의 천하가 되자 두뇌회전이 빠른데다가 명예욕까지 강한 최충헌의 생각도 달라졌다. 그는 문관으로 출세할 생각을 팽개친 채 무관(武官)으로 변신하기로 작정했다.
1174년에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최충헌은 그가 용감하다는 말을 들은 부원수 기탁성(奇卓誠)에게 발탁되어 별초도령이 되었고 이어서 별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출세운이 따르지 않았는지 누구에게 잘못 보였는지 그 뒤 20년 동안이나 승진을 하지 못했다. 경대승(慶大升)이 군문(軍門)에 든 지 10년도 못 되어 장군이 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정중부(鄭仲夫)를 비롯하여 이의방(李義方)이나 이의민(李義旼)이나 모두 자신에 비해 형편없이 낮은 신분 출신이라는 점도 불만의 한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또 한때는 안찰사 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그의 벼슬은 부하 한명도 없고 명색만 장군인, 명예직이나 마찬가지인 섭장군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면 그 동안 경대승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벼락치기로 집권자가 된 이의민은 어떻게 하여 최충헌 형제에게 목숨을 빼앗기게 되었는가?
이의민은 경주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가난하고 무식한 소금장수였고, 어머니는 영일현 옥령사라는 절의 여종이었다. 이의민은 키가 8척이나 되는 거구에 힘이 장사였다. 그는 3형제 가운데 막내로서 두형과 어울려 다니면서 못된 짓만 골라서 하던 건달이었다. 그러다가 안찰사 김자양(金慈量)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두형은 매에 못 이겨 죽고 이의민만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가 천부적 장사라는 사실을 안 김자양은 그 힘이 아까워 죽이지 않고 풀어준 뒤 도성인 개경을 방어하는 경군(京軍)으로 추천했다.
● 괴력을 밑천 삼아 출세한 이의민
그렇게 해서 개경으로 올라가 황궁 경호대인 견룡군(牽龍軍)에 들어간 이의민은 타고난 용력에 수박희(手搏戱) 실력도 뛰어나 곧 의종(毅宗)의 눈에 들었다. 그래서 대정에 이어 별장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정중부를 비롯하여 이의방, 이고(李高) 등이 정변을 일으킬 때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중랑장이 되었고, 의종을 죽인 뒤에는 대장군으로, 다시 조위총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는 상장군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그의 후견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이의방이 정중부에게 죽고,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살해당하니 이의민은 졸지에 설 땅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평소 그를 싫어하던 경대승은 황제를 시해한 이의민을 없애겠다고 공언했으니 이의민은 목숨부터 구하고 봐야만 했다. 그래서 고향인 경주로 내려가 죽은 척 엎드리고 있었는데, 천적 같던 경대승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권력을 거저먹기로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상경한 이의민은 중서성문하평장사(中書省門下平章事)가 되었는데, 조정에 들어가보니 군대에서 자기보다 서열이 아래였던 두경승(杜景升)이 재상인 중서령(中書令)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하루는 중서성에서 두경승을 만난 이의민이 "어떤 놈이 힘자랑을 하기에 내가 이렇게 때려눕혔지!" 하고 주먹으로 기둥을 내려치니 서까래가 내려앉았다. 두경승에게 겁을 주려고 자신의 힘자랑을 했던 것이다. 그러자 두경승도 지지 않고 "그래? 나도 언젠가 이렇게 빈 주먹질을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더군!" 하고 주먹으로 벽을 치니 벽에 구멍이 뚫렸다. 또 한번은 중서성에서 회의 도중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때도 이의민은 두경승에게 "네가 무슨 공이 있다고 나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거냐?" 하고 주먹으로 기둥을 치는 등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이의민과 두경승이 이렇게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추밀원(樞密院)에서도 무장 출신인 추밀원사 김영존(金榮存)과 추밀원부사 손석(孫碩)이 걸핏하면 욕설을 퍼부으며 대판 싸우곤 했으므로 세간에 "중서성에서는 이가(李家)와 두가(杜家)요, 추밀원에서는 김가(金家)와 손가(孫家)로다." 하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또 어떤 문인은 이런 시를 지어 이들의 권력투쟁을 비웃기도 했다.
'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
위풍이 당당해서 정말 재상답거든
황각(皇閣)에 앉은 지 삼사년에
주먹바람이 만번도 넘게 불었네.'
어쨌든 이의민은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뒤 13년간 세도를 누렸는데, 권력의 맛에 취하자 천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 뇌물을 받는 것은 물론, 민가와 전답을 빼앗는 등 탐욕의 화신으로 변해갔다. 이의민의 처 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한번은 이의민이 여종을 건드리자 그녀를 때려죽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 자신도 음욕이 대단해서 자기 집 하인과 간통하다가 결국은 이의민에게 들켜 쫓겨나고 말았다. 본처를 쫓아낸 이의민은 마음놓고 여색을 밝혀 인물이 반반한 여자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건드렸다. 양가의 규수도 마음에 들면 아내로 삼았다가 싫증이 나면 버리기를 밥 먹듯 했다.
이런 부모의 천한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아 이의민의 세 아들 지순(至純), 지영(至永), 지광(至廣)도 하나같은 망나니였다. 특히 지영과 지광의 횡포가 심해 사람들은 이 두 형제를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렀다. 이지영은 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아무 때나 죽이고, 여색을 밝히기를 아비보다 더해서 어디에 예쁜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처녀건 유부녀건 찾아가 겁탈했고, 길을 가다가도 눈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납치를 해서라도 겁탈하곤 했다. 심지어는 명종(明宗)의 총희까지 强姦했지만 명종도 이의민의 위세가 두려워 아무 말도 못했을 정도였다.
이의민의 딸도 음탕하기 그지없어 그녀의 남편이 너 같은 년과는 도저히 못 살겠다면서 갈라서고 말았다. 이러한 죄상이 쌓이고 쌓이니 누구 하나 손가락질하고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의민은 엉뚱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고려 황실을 뒤엎고 신라를 부활시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꿈이었다. 이를 위해 이의민은 당시 남쪽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자들 가운데 청도의 김사미(金沙彌)와 울산의 효심(孝心) 등과 내통했다.
1193년에 이의민의 맏아들 이지순이 대장군 전존걸(全存傑)과 함께 남적(南賊)을 토벌하러 내려갔는데 지순은 김사미, 효심과 내통하여 군수품을 보내주고 군사기밀까지 넘겨주었다. 이 사실을 안 전존걸이 "내가 지순을 처벌하면 그 아비가 나를 죽일 것이고, 이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도적들이 더욱 창궐할 것이니 이 죄를 누가 져야 옳단 말인가!" 하고 한탄하며 자살해 버렸다. 이의민은 이렇게 제 무덤을 파고 있었다.
● 이의민의 폭정 13년을 종식시킨 최충헌, 충수 형제
최충헌 형제가 이의민을 죽인 것은 1196년 4월이었다. 사건은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수(崔忠粹)의 비둘기를 강탈함으로써 일어났다. 당시 동부녹사라는 하급 무관직에 있던 최충수는 배짱은 있었지만 사납고 음흉하고 시기심과 욕심이 많았다. 어느 날 최충수가 기르던 비둘기를 이지영이 빼앗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최충수는 이지영의 집으로 찾아가 거칠게 항의하며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했다. 아비 덕에 장군 벼슬을 하고 있던 이지영은 일개 녹사 따위가 집으로 찾아와 거칠게 항의하자 화가 나서 종복들에게 소리쳤다.
"여봐라! 당장 저놈을 묶어서 가두어라."
하지만 최충수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장군 외에는 아무도 나를 묶을 수 없소이다!"
최충수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긴 이지영은 그를 풀어주라고 했다. 무사히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지만 최충수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며칠 뒤 최충헌(崔忠獻)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형님, 이의민(李義旼) 4부자는 사실 역적이 아닙니까?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나서서 놈들의 목을 베려고 하는데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말도 맞지만 지금 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데, 어렵지 않겠는가?"
"제 뜻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이제 그 결심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아우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고 최충헌도 마침내 동조하고 기회만 엿보았다. 그런데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에 명종이 보제사에 행차하는데 이의민이 병을 핑계로 수행하지 않고 미타사에 있는 자기 별장으로 몰래 놀러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낸 최충헌 형제는 이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두 형제는 생질인 대정 박진재(朴晋材)와 친척인 노석숭(盧碩崇)을 데리고 미타사로 찾아가 별장 문 밖에 숨어 기다렸다. 이윽고 이의민이 돌아가려고 문 밖으로 나와 말을 타려는 순간 최충수가 앞장서 뛰쳐나가 칼을 빼어 내리쳤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최충헌이 뒤따라 나가 당황한 이의민을 찔러 죽이고 목을 베어 버렸다. 이것을 보고 이의민의 수하들이 모두 놀라 어지럽게 달아났다. 최충헌은 노석숭을 시켜 이의민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개경으로 돌아가 거리에 효수(梟首)하게 했다.
급보를 받은 명종(明宗)이 놀라 환궁을 재촉했고, 황제를 수행했던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과 이지광은 최충헌의 부하들과 맞서 싸우다가 불리하자 달아났다. 최충헌 형제는 장군 백존유(白存儒)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뒤 황궁으로 들어가 명종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적신(賊臣) 이의민이 일찍이 시역(弑逆)의 죄를 범했고, 백성을 포악하게 학대하며 역모를 꾀하므로 신 등이 미워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나라와 황실을 위해 역적을 토벌하였사오나 다만 일이 누설될까 두려워 감히 거사 전에 주청하지 못했습니다."
명종이 한두번 겪은 일이 아닌지라 잘했다고 치하할 수밖에 없었다. 명종의 허락을 받은 최충헌은 대장군 이경유(李景儒)와 최문청(崔文淸) 등과 함께 이의민의 잔당을 토벌할 것을 의논했다. 그들은 성문을 닫아걸고 이의민의 아들과 심복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아갔던 이지영은 그때 안서도호부(安石護府)에서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다가 장군 한휴(韓烋)에게 잡혀 죽었다. 얼마 뒤에 이지순과 이지광은 제 발로 걸어와 자수했으나 최충헌은 사정없이 그들을 참살해 버렸다. 그리고 이의민의 일가는 삼족을 멸하고 지방으로 흩어져 숨은 이의민의 집 종복까지 모두 잡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그렇게 해서 이의민의 집권시대 13년은 가고 최충헌의 집권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이의민열전(李義旼列傳)에 그의 몰락을 예고하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의민은 제 이름도 쓰지 못하는 까막눈인데다가 미신을 매우 깊이 믿었다. 그의 고향 경주에 나무로 만든 귀신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두두을(豆豆乙)'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은 자기 집에 사당을 지어 두두을을 모셔놓고 날마다 제사를 지내며 복을 빌었다. 하루는 사당 안에서 귀신의 곡성이 들려왔다. 괴상히 여긴 이의민이 들어가 까닭을 물으니 귀신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너의 집을 오랫동안 지켜주었는데 이제 하늘이 재앙을 내리려 하니 장차 내가 의탁할 곳이 없어지게 되어 우는 것이니라!"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은 장악했으나 아직도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최충헌 형제는 반대파를 찾아내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다시 광풍 같은 피바람이 불었다. 평장사 권절평(權節平)과 장군 권준(權準) 부자, 평장사 손석과 장군 손홍윤(孫洪胤) 부자, 거사에 동조했던 대장군 이경유, 장군 권윤(權允)과 유삼백(柳森栢), 어사중승 최혁윤(崔赫尹), 상장군 길인(吉仁), 장군 유광(兪光)과 박공습(朴公襲), 상장군 주광미(周光美), 대장군 김유신(金愈信)과 권연(權衍) 등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또 참지정사 이인성(李仁珹)과 낭중 문홍분(文洪賁) 등 문관 36명을 붙잡아 가두었다가 죽였다.
● 권력 기반 다지기 무섭게 명종(明宗) 폐위, 신종(神宗) 옹립
이처럼 독재 기반을 굳히려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내쫓자 자연히 민심이 흉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최충헌 형제는 그 다음달인 5월에 신축한 궁궐을 사용할 것, 관원들을 감축할 것, 권신들의 토지를 환원시킬 것, 조세(租稅)를 함부로 걷지 말 것, 안찰사 등 외관들을 규찰할 것, 궁궐에 출입하는 승려들의 폐단을 금지할 것, 근검절약을 장려하고 사치를 금지할 것 등 이른바 개혁을 위한 봉사 10조를 건의했다.
이 같은 봉사 10조를 올린 뒤 최충헌은 본격적으로 국정개혁에 나섰다. 먼저 권세를 업고 부당하게 승진한 내시 호부시랑 이상돈(李尙敦), 군기소감 이분(李芬) 등 50여명을 모두 내쫓고, 또 왕자로서 중이 되어 소군(小君)이라고 불리는 홍기(洪機), 홍추(洪樞), 홍규(洪規) 등 6명은 대궐 안에서 정사(政事)에 간섭했다는 이유로 모두 절로 돌아가도록 했다. 또 명종이 총애하는 중 운미(雲美), 존도(存道) 등도 본래 속한 절로 쫓아버렸다.
명종은 최충헌의 공이 크다 하여 좌승선 벼슬을 내렸다. 그것으로도 불안했던지 그 이듬해인 1197년에는 조서를 내려 최충헌에게는 충선죄리공신을, 최충수에게는 수충찬화공신의 작호를 내리고 이들의 아버지 최원호에게도 봉의찬덕공신 작호에 수문하시중 벼슬을 증직하여 공신각에 화상을 걸도록 했다. 하지만 명종은 최충헌 형제가 권력 기반을 다지기가 무섭게 자신을 폐위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 형제는 명종이 자신들이 올린 봉사 10조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어느날 박진재를 데리고 최충헌을 찾은 최충수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황제는 제위에 오른 지 이미 28년이나 되다 보니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 소군이 늘 황제 곁에서 은혜와 위엄을 농간하고, 여러 소인배를 총애하여 황금과 비단을 마구 내려 국고가 텅 비어버렸으니 신민(臣民)을 거느릴 수 없습니다. 태자 숙(璹)은 여러 비첩에게서 아들 아홉을 낳았지만 모두 머리를 깎고 소군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품이 어리석고 빙충맞아 태자로서 마땅치 않으나, 사공 진(榛)은 경사에 널리 통하고 머리가 총명하여 도량이 있으니 만약 황제로 옹립하면 나라가 중흥할 것입니다."
최충수가 왕진을 제위에 올리고자 한 것은 당시 그의 여종과 정을 통했기 때문이라고 한ㄷ. 그러자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최충헌이 이렇게 말했다.
"평량공(平凉公) 민(旼)은 황제의 동복아우이고 넓은 지략과 제왕의 도량이 있으며, 또 그 아들 연(淵)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태자가 될 만하지 않은가?"
형제간의 의견이 갈리자 박진재가 이런 말로 최충헌의 편을 들고 나섰다.
"제가 생각하기에 진과 민이 모두 제위에 오를 만하나 금나라에서는 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진을 임금으로 세우면 금나라가 분명히 제위를 찬탈했다고 트집 잡을 것이니 차라리 민을 세우는 것만 못합니다. 그러니 전에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웠듯이 동생으로서 뒤를 이었다고 한다면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마침내 이들은 명종을 폐위하고 그의 아우인 왕민을 제위에 올리기로 합의했다. 1197년 9월 최충헌 형제는 사전조치로 명종 폐위에 반대할 만한 두경승, 유득의 등 중신 12명과 소군 20여명을 붙잡아 귀양 보낸뒤 마침내 명종을 내쫓고 신종(神宗)을 제위에 내세웠다. 신종은 인종(仁宗)의 다섯째 아들이며 의종의 막내아우로서 당시 이미 50세가 넘은 나이였다. 명종을 폐위한 두 형제는 그를 유폐하고 태자와 태자비는 강화도로 내쫓았다. 정중부와 이의방의 쿠데타로 제위에 오른 명종은 이렇게 28년간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하다가 쫓겨나 창락궁에 연금되었다. 그는 이후 6년을 더 살다가 1202년 9월에 이질에 걸려 72세로 죽었다.
신종은 자신을 제위에 올린 최충헌을 정국공신(政國功臣) 삼한대광(三韓大匡) 대중대부상장군(大中大夫上將) 주국(柱國)으로 삼고, 최충수는 수성제란공신(輸誠濟亂功臣) 삼한정광중대부(三韓正匡中大夫) 응양군군대장군(應揚軍大將軍) 위위경지도성사(衛尉卿知都省事) 주국(柱國)을 삼았으며, 박진재에게도 형부시랑 벼슬을 내렸다.
● 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고, 혈육도 모르는 비정한 것
하지만 이들 형제간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권력이란 본래 부자, 형제간에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비정한 것이 아닌가? 그 일은 욕심 많은 최충수가 제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내려고 해서 빚어졌다. 태자비는 본래 창화백(昌化伯) 왕우(王祐)의 딸이었다. 그런데 굳이 최충수가 황제와 태자비를 위협하여 제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니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최충헌이 어느날 술을 가지고 아우를 찾아가 함께 마시다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듣건대 자네가 딸을 타재에게 바친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
최충수가 그렇다고 시인하자 최충헌이 이렇게 타일렀다.
"여보게, 지금 우리 형제의 권세가 비록 나라를 흔들 정도라고는 하지만 본래 가계(家系)가 한미한데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낸다면 사람들이 어찌 흉보고 욕하지 않겠는가? 또한 부부 사이의 의리는 하늘이 정해준 것이거늘 태자가 하루아침에 짝을 잃는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옛 사람의 말에 '앞수레가 넘어지면 뒷수레가 경계한다.'고 했네. 전에 이의방이 제 딸을 태자비로 들여보냈다가 결국 남의 손에 죽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아우는 그 전철을 밟으려 하는가?"
최충수는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따르는 듯했으나 형이 돌아가자 이내 마음이 바뀌었다. 심지어는 이를 말리는 어머니를 떠밀어 땅바닥에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최충헌은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는데, 어머니를 욕보임이 이와 같으니 하물며 형인 내게는 어찌 대하겠는가? 말로는 도저히 타이를 수 없으니 힘으로 막을 수밖에는 없구나!" 하고 최충수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지만 권력에는 혈육도 없었다. 결국 욕심이 지나쳤던 최충수는 형 최충헌에게 기선을 제압당한 나머지 그 이튿날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래도 최충헌은 마지막 양심이라고 남아 있었던지 부하들이 들고 온 최충수의 수급(首級)을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나는 산 채로 잡아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죽이고 말았구나!" 하고 시체를 찾아서 장사지내게 해주었다.
쿠데타 동지이며 심복이었던 조카 박진재도 예외가 아니었다. 1206년 대장군에 오른 박진재가 최충수를 제거하는데 자신의 공로가 컸건만 최충헌이 권력을 나누어주지 않고 독점한다며 걸핏하면 불평을 늘어놓자 그를 붙잡아 다리를 힘줄을 끊어버린 뒤 벽령도로 귀양을 보냈던 것이다. 박진재는 백령도에서 몇달 뒤에 울화병으로 죽어버렸다.
● 사상 최초의 노예반란 일으킨 최충헌의 종 만적(萬積)
이보다 앞서 1198년 5월에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노예반란인 만적(萬積)의 반란이 일어났다. 만적은 최충헌의 사노비였다. 만적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노비들을 불러모은 뒤, "무신들이 변란을 일으킨 이후에 천민 출신으로 고관대작이 많이 나왔으니 재상과 장군의 씨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우리도 권세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율학박사 한충유(韓忠兪)의 종인 순정(順貞)이 제 주인에게 고발함으로써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최충헌은 곧 군사를 풀어 만적 등 100여명을 잡아 죽여 강물에 던지고, 한충유에게는 합문지후 벼슬을 내렸으며, 밀고자 순정에게는 백금 80냥을 주고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최충헌이 비록 정적들을 가차없이 숙청하고 4대 62년에 걸쳐 군사 독재의 기반을 닦았다고는 하지만 그의 집권기 내내 반란과 암살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만적의 반란 이듬해인 신종(神宗) 재위 2년 2월에는 명주에서 도적이 일어나 울진과 삼척까지 함락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동경에서도 도적이 일어나 명주의 도적과 합세하여 여러 주와 군을 휩쓸며 약탈을 자행했다. 또 그해 8월에는 탐라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영주에서도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개경 부근 흥왕사, 흥원사, 경복사, 왕륜사, 수리사 등의 승려들이 모의하여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한 사건도 있었다. 또 황주목사 김준거가 최충헌을 토벌하려고 몰래 개경에 숨어들었다가 모두 잡혀 죽는 사건도 벌어졌다.
최충헌이 도방(都房)을 육번도방(六番都房)으로 바꾸어 자신의 경호를 강화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도방의 장사들은 여섯패로 나누어 번갈아 경비를 서다가 최충헌이 출입할 때에는 모두 호위하니 그 행렬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고 고려사(高麗史) 최충헌열전(崔忠獻列傳)은 전한다. 그렇게 해서 최충헌의 도방에 드나드는 문객과 사병의 수가 3천여명에 이르렀다.
● 육번도방(六番都房) 설치하고 신변 경호 강화
하지만 최충헌이 오로지 무력(武力)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선배 독재자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처럼 문신들을 싹 쓸어 없애는 미련한 전철을 밟지 않았다. 반대파는 인정사정없이 숙청했지만, 문신들도 회유하고 포섭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장기 독재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그러면서 최충헌의 벼슬은 해가 갈수록 높아졌다. 1197년에 신종을 옹립하고 상장군, 추밀원지주사에 오른 이후 1199년에는 수태위상주국, 이듬해에는 태부참지정사, 이부상서, 1203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 및 이부상서 판어사대사 태자소사에 올랐다. 쉽게 말해서 최충헌이 조정의 인사권과 병권을 독차지한 것이다. 따라서 황제는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했다. 그렇게 장기집권의 토대를 굳히는 사이에 허수아비 황제 신종이 재위 6년만인 그해 12월에 등창으로 병상에 누워 이듬해 1월에 태자에게 양위하고 61세로 죽었다.
신종에 이어 즉위한 희종(熙宗)은 최충헌을 중서문하평장사로 임명했다가 이금해에 문하시중, 곧 수상(首相)으로 승진시켰다. 모양새는 황제의 임명이지만 사실은 자기 벼슬을 자기가 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朴正熙)가 소장(少將)에서 금세 대장(大將)이 되고, 12.12 쿠데타 이후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祐)가 또한 소장에서 금세 대장이 된 것과 같았다. 최충헌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스스로 수상이 된 것이나 박정희, 전두환이 대통령을 바지저고리로 만들고 제 손으로 자기 어깨에 별을 단 것이나 똑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는 것이다. 문하시중에 진강후라는 작위까지 받은 최충헌은 관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황궁을 무상으로 출입했고, 행차할 때에는 일산(日傘)을 받치게 했으니 명색만 신하였지 실질적인 황제나 마찬가지였다. 또 무신들의 의결기구인 중방(重房)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교정도감(敎定都監)을 권력기구로 삼아 독재를 강화했다.
● 23년간 철권통치 끝에 권력 세습하고 죽어
그런데 희종도 불과 8년밖에 황제 노릇을 하지 못했다. 1211년 12월에 내시낭중 왕준명(王儁明)이 희종의 묵인 아래 최충헌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일어났다.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태자는 인주에 유폐시켰다. 31세에 폐위된 희종은 노년에 법천정사로 옴ㄹ겨져 1237년에 57세로 죽었다.
최충헌이 희종의 뒤를 이어 내세운 제22대 황제가 바로 강종(康宗)이다. 강종은 전에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하고 폐위시킨 명종의 태자였다. 명종이 폐위당할 때 강화도에 갇혀 14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난데없이 황제로 책립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 이미 6-세였다. 그는 오랫동안 강화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병든 몸인데다가 고령인 탓에 황제 노릇도 제대로 못해보고 1년 8개월만인 1213년 8월에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62세로 죽었다.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황제는 고종(高宗)이다. 고종은 강종이 강화도에 유배당했을때 안악에 유배되어 있다가, 강종이 즉위한 이듬해에 개경으로 돌아와 태자로 책봉되어 곧 제위에 오르니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는 비록 최충헌 일가 4대의 무인시대에 황제 자리에 있었지만 고려왕조에서 45년간이라는 최장수 제위 기록을 남겼다. 이처럼 최충헌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23년 동안 다섯명의 황제 가운데 네명을 마음대로 갈아치우고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절대 권력을 휘둘러도 인간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최충헌은 1219년 9월에 71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그에 앞서 최충헌은 머지않아 죽음이 닥 쳐올 것을 예감하고 고종에게 궤장(几杖)을 반납하고 죄수들을 풀어주는 등 선행을 베풀었다. 그가 죽기 전에 달아 화성을 범하는 현상이 있었다. 일관(日官)이 이를 보고 '귀인이 죽을 징조'라고 보고했다. 최충헌은 악공 수십명을 불러 종일토록 음악을 연주하게 했는데, 그날 밤 죽고 말았다.
최충헌이 죽자 맏아들 최우(崔瑀)가 반대파를 숙청하고 교정별감을 차지하여 권력을 세습했다. 최우에 이어서는 최항(崔沆)이, 그 뒤는 최의(崔竩)가 이어 정권을 좌지우지하다가 1259년 3월에 최의가 살해당하는 바람에 4대 62년에 걸친 최씨 무신정권은 막을 내렸다. 아울러 최씨 일가의 몰락과 더불어 88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친 고려 무인시대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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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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