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의 문신(文臣) 윤관(尹瓘)은 여진족(女眞族)을 정벌하여 9성(城)을 축조한 장수(將帥)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전전하다가 숙종(肅宗)의 즉위 사실을 알리기 위해 요나라에 파견되면서부터 신임을 얻어 요직에 발탁되었다.
그후 여진족과의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배한 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동북 지방에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던 여진족을 정벌했다. 그러나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반환하는 과정에서 패전지장(敗戰之將)이라는 억울한 모함을 받고 관직과 공신작호(功臣爵號)를 빼앗긴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관은 무장(武將)으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학자로 '장수가 됨에 이르러 진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오경(五經)을 지니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학문에 열중했던 문신(文臣)이기도 하다.
● 요나라에 숙종(肅宗)의 즉위를 알리다.
윤관(尹瓘)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삼한공신 윤신달(尹莘達)의 고손으로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윤집형(尹執衡)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습유, 보궐 등을 거쳐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으며 1018년애는 황명을 받고 광주, 충주, 청주를 시찰하기도 했다.
윤관이 관직에 크게 등용된 것은 숙종(肅宗)이 즉위한 후였다. 1094년 선종(宣宗)이 세상을 떠나자 열한살의 나이로 헌종(獻宗)이 제위에 올랐으나 어리고 병약하여 어머니 사숙태후(思肅太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1095년 정월 초하루, 해 옆에 혜성이 나타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것을 보고 일관(日觀)이 해석하기를, "해 곁에 혜성이 있음은 가까이에 있는 신하가 반란을 일으킬 징조이니, 장차 신하들 가운데 반역을 도모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그해 7월 이자의(李資義)가 역모(逆謀)를 일으켰다. 이때 이자의의 음모를 눈치챈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가 평장사 소태보(邵台輔)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소태보는 상장군 왕국모와 의논한 끝에 수하들을 시켜 이자의를 주살하고, 그의 아들을 비롯한 잔당 17명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어 원신궁주(元神宮主)와 한신후(漢新侯) 등 이자의를 따르는 무리 50여명을 귀양보냄으로써 반란을 일단락지었다. 이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계림공 왕희가 선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15대 황제인 숙종(肅宗)이다.
이때 좌시낭중으로 있던 윤관은 형부시랑 임의(任懿)와 함께 숙종과 헌종의 표문을 가지고 요나라에 가서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이어 1098년 태자시강학사(太子侍講學士)에 오른 윤관은 조규와 함께 송나라에 가서 숙종의 즉위 사실을 알리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받아왔다. 두차례에 걸친 파견으로 숙종의 신임을 얻게 된 윤관은 이듬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에 임명되었으나, 그와 인척지간인 임의가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임명됨으로써 일가가 간원에 같이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건의에 따라 사임하게 되었다.
1101년에 추밀원지주사에 오른 윤관은 황명을 받아 최사추(崔思諏), 임의 등과 함께 남경(南京)의 지세를 답사했다. 숙종은 즉위 후 운이 다한 개경(開京)을 대신할 새 황도(皇都)를 물색했는데, 재신, 일관들과 함께 양주에 남경이 건설할 것을 의논한 데 이어 그해 남경개 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천도(遷都)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윤관과 최사추는 삼각산의 산세가 새 궁궐터로 마땅하다고 보고했다.
숙종의 이와 같은 천도계획은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제위에 오른 부담감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즉위와 함께 여기저기서 심상치 않은 이변이 일어났다. 1096년 4월, 갑자기 서리와 우박이 쏟아진데 이어 이듬해에는 후궁으로 물러나 있던 헌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이어 숙종이 가장 아끼던 둘째아들 왕필(王弼)마저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그러자 숙종은 상서롭지 못한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명분 아래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려 했던 것이다.
그 뒤 윤관은 추밀원부사, 어사대부 등을 거치며, 숙종의 이력과 정치적 역량을 대외에 알리는 홍보사절의 역할을 충실히 해냄으로써 숙종의 큰 신임을 받았다.
● 패전(敗戰)의 치욕을 씻기 위해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다.
1104년 3월, 추밀원사로 동북행영도통사에 오른 윤관은 왕명을 받아 여진족 정벌에 나섰다. 여진족은 원래 만주의 동쪽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으로 숙신(肅愼), 읍루(?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다가 송나라 때부터 여진(女眞)으로 불렸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옛 땅에 자리잡게 됨으로써 우리 나라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처음 고려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정착하게 하는 교린정책을 취했으나, 1080년에는 군사 3만명을 파견하여 당시 국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던 여진족을 응징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고려의 화전양면정책(和戰兩面政策)에 따라 처음에는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숙종 때에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북간도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했고, 그 뒤를 이은 우야소[烏雅束]는 더욱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여진 부락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정주관 부근까지 진출한 우야소의 군대와 고려군 사이에 무력충돌(武力衝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 여진 정벌을 감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성격이 급하고 경솔했던 임간은 여진족의 전력을 얕잡아 보고 제대로 훈련도 되지 않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역습을 당해 크게 패하고 말았다. 다행히 추밀원 별가 척준경(拓俊京)이 여진족의 추격을 물리쳐 겨우 정주관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자 숙종은 임간을 파직하고 윤관을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에 임명하여 여진 정벌을 명했다.
윤관은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족과 싸웠으나, 워낙 기동성이 뛰어난 여진족의 맹공에 병력의 반을 잃는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여진군과 전투를 벌였던 군사들 대부분이 죽고, 적군에게 포위당하는 신세가 된 윤관은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간신히 여진족과 화친을 맺고 굴욕적인 철수를 해야 했다. 연이은 두차례의 패전(敗戰)으로 고려는 정주와 장성을 제외한 모든 여진 부락을 동여진(東女眞)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첫번째 출전에서 수치스러운 패전을 기록한 윤관은 여진을 정벌할 대책을 강구했다. 패전의 원인이 여진의 날랜 기병과 대적할 수 있는 군사가 없음에 있다고 판단한 그는 이에 맞설 수 있는 군사를 길러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먼저 윤관은 숙종에게 나아가 "공자(孔子)의 춘추(春秋)에 따르면 임금이 욕을 당하면 그 신하는 목숨을 내놓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臣)은 성상(聖上)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성상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라며 패전(敗戰) 사실을 아뢰었다. 숙종 또한 굳게 믿었던 윤관이 대패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해 돌아온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때 패전의 죄를 물어 윤관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대신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나, 윤관의 충심을 익히 알고 있던 숙종은 대신들의 상소를 물리쳤다. 이때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과 대책을 내놓았다.
"저들은 원래 말을 타고 생활하는 족속으로 우리의 보병으로는 아무리 힘을 합쳐 싸워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습니다. 신이 패배한 까닭을 잘 알고 있으니 병력을 증강하고 기병을 양성하여 적을 공격한다면 반드시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숙종은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해 12월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별무반(別武班)'이라는 특수부대를 창설하여 여진 정벌을 위한 만반의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별무반은 기병으로 이루어진 신기군(神騎軍), 보병 중심의 신보군(神步軍), 승려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되었는데, 말을 가진 사람은 기병부대인 신기군에 속했고, 보병인 신보군은 20세 이상으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제외한 말이 없는 사람으로 조직되었다. 항마군은 사원(寺院)에 예속된 하급 승려들을 징발하여 조직했다.
이듬해 1105년, 윤관이 태자소보 판상서병부사 한림원사에 올라 한창 군사훈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 숙종이 재위 1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자신이 강력하게 추진해왔던 여진 정벌과 남경 천도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숙종은 죽기 얼마 전 태자 우(優)와 총신 윤관에게 "저 북방의 오랑캐를 반드시 징벌하여 우리 고려의 영토를 넓히고 새 도읍지 남경에서 대고려제국의 아침을 맞을 수만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노라."는 밀지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숙종으로서는 비록 선위라는 절차를 밟기는 했지만 조카를 내쫓고 등극했다는 정치적 부담과 이전까지 고려를 상국(上國)으로 받들며 조공을 바쳐왔던 여진에게 두차례나 패전한 치욕으로 인해 죽는 그 순간까지도 고려의 중흥을 당부한 것이다.
예종 즉위 후 윤관은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라 천수사(千壽寺)의 공사를 감독하는 한편,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신기군과 신보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 정벌을 위한 군사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윤관은 예종(睿宗)에게 서경(書經)을 강의하고 옷과 띠를 하사받는 등 문관(文官)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여 연영전학사를 거쳐 상주국 감수국사에 올랐다.
● 인의(忍意)로 거둔 대승(大勝)으로 9성을 쌓다.
1107년, 드디어 윤관(尹瓘)은 정벌군 원수로서 부원수 오연총(吳?투?)과 함께 여진 정벌에 나섰다. 어느 날 변방에서 "여진이 멋대로 날뛰어 변성을 침입하고, 그 추장이 조롱박 하나를 긴 나무에 걸어 여러 부락에 돌려가며 보이면서 일을 의논하는데, 그 의중을 추측할 수 없습니다."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예종(睿宗)은 그동안 간직해 두었던 숙종(肅宗)의 밀지를 꺼내 대신들에게 보이며 여진 정벌의 뜻을 밝혔다. 숙종의 밀지를 읽고 난 대신들은 "선황의 유지가 이와 같이 깊고 간절한데 어찌 잊겠습니까?"라며 여진 정벌에 찬성했다.
그해 윤10월에 윤관은 황제 앞에서 "신이 일찍이 선황의 밀지를 받았고, 또 지금 이렇듯 엄명을 받았사오니, 어찌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적의 보루(堡壘)를 깨뜨려 지난날의 치욕을 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출사표(出師表)를 대신했다. 첫 출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돌아온 이후 절치부심하며 여진 정벌을 준비해 왔고, 마침내 지난날의 치욕을 설욕할 기회를 맞은 윤관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윤관이 애써 양성한 별무반의 군사 17만명을 거느리고 여진 정벌에 나서자 예종은 서경(西京)까지 행차하며 그를 배웅했다. 국경 근처 장춘에 도착한 윤관은 행군을 멈추고 진을 쳤다. 지난번처럼 쓰라린 패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윤관은 먼저 막료들과 의논하여 병마판관 최홍정(崔弘貞)과 황군상(黃群相)에게 군사를 주어 정주와 장성으로 보냈다. 그리고 포로로 데리고 있던 여진의 추장들을 풀어주겠다며 거짓으로 여진족을 유인했다. 틈을 보아 기습할 생각이었다.
이에 추장 고라 등 4백여명이 나타났고, 윤관은 술과 음식으로 우선 그들의 환심을 샀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진의 추장들은 경계를 풀고 마음껏 마시기 시작했다. 이들이 모수 술에 취하자 윤관은 명령을 내려 단숨에 이들을 잡아 죽이게 하고 또한 관문까지 왔다가 의심을 품고 들어오지 않은 여진족 5, 60명은 김부필(金夫必)과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퇴로를 차단하게 했으며 최홍정에게 기습공격하도록 하여 대부분 사로잡거나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윤관은 멈추지 않고 그 여세를 몰아 대공세에 나섰다. 그는 직접 병사 5만 3천명을 거느리고 정주 대화문으로 진격하는 한편, 중군병마사 김한충(金漢忠)에게는 병사 3만 6천 700명을 주어 안륙수로, 좌군병마사 문관(文寬)에게 병사 3만 3천 900명을 주어 정주 홍화문으로, 우군병마사 김덕진(金德眞)에게 병사 4만 3천 8백명을 주어 선덕진 안해로, 양유송(梁柳頌), 정승용(丁昇用) 등에게 선병 2천 600명을 주어 도린포로 각각 진격하게 했다. 그러자 추장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여진족들은 고려군의 기세에 눌려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고려군은 곧 여진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석성에 들어간 여진족들이 성문을 굳게 닫은 채 돌을 던지고 화살을 날리며 강력하게 대응해 왔던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윤관은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날이 저물게 되면 도리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윤관은 병마녹사 척준경을 불러 "날은 저물고 사태는 급박하니, 너는 장군 이관진(李瓘鎭)과 더불어 반드시 성을 공략하도록 하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척준경은 "오늘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성을 파하여 공(公)의 은혜에 보답할 때입니다."라며 힘을 다하여 싸울 것을 다짐했다.
척준경은 훗날 이자겸(李資謙)에 협조하여 경원(慶源) 이씨(李氏) 가문의 권력 독점과 전횡에 한몫을 했던 장본인이 되지만, 이때에는 윤관에게 있어 둘도 없이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지난날 임간이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할 때에 척준경은 퇴로를 열어 임간을 구출했지만 패전(敗戰)의 죄로 탄핵을 받아 임간과 함께 파직된 적이 있었다. 이때 윤관이 나서서 적극 변호하여 오히려 그를 천우위록사 참군사로 승진시켜 주었다. 척준경이 윤관에게 목숨을 걸고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다.
척준경이 즉시 창과 방패를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여진의 추장 서너명을 격살하자, 윤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명하여 여진족을 격파하고 석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최홍정과 김부필 등이 이위동에서 적병 1200명을 참살하고 중군은 고사한 등 35촌을 빼앗고 적병 380명을 베고 230명을 사로잡았으며, 좌군은 심곤 등 31촌을 빼앗고 적병 950명을 참살하였다. 윤관의 본대는 대내파지에서 37촌을 빼앗고 적병 2120명의 목을 베고 500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윤관은 병마녹사 유영약(柳英躍)을 보내 예종에게 승전보(勝戰報)를 알리고, 장수들을 보내 점령지마다 성을 쌓기 시작했다. 또한 영주성 안에 호국인왕사와 진동보제사라는 두개의 사찰을 지었는데, 이것은 숙종의 염원을 풀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진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듬해인 1108년 1월,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정병 8천명을 인솔하고 가한촌 좁은 길을 지나다가 매복해 있던 여진족의 습격을 받았다.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윤관을 비롯한 고려군은 포위되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연총은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윤관이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척준경이 순식간에 여진족 10여명을 해치웠다. 곧이어 최홍정과 이관직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났고, 윤관은 이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해 영주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윤관이 영주성에 머물고 있을 때 여진족 2만명이 또 다시 공격해 왔다. 이때 윤관은 "저들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도저히 대적할 수 없으니, 다만 굳게 지켜야 한다."며 철저하게 수비 위주로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를 듣고 있던 척준경이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가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적의 군사는 자꾸만 늘어나고 성안에 있는 군량은 금세 바닥이 날 것입니다. 만약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찌 하려 하십니까? 장군들께서는 아무래도 지난날 싸움에서 우리가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잊으셨나 봅니다. 지금 내가 나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반드시 승리할 것이니 장군들께서는 성루에 올라 그 모습을 똑똑히 보도록 하십시오."
말을 마친 척준경은 결사대 수십명을 데리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여진족의 선발대와 맞붙은 척준경은 비호처럼 칼을 휘둘러 순식간에 적병 19명의 목을 베었고, 기가 질린 여진족들은 줄행랑을 쳐 버렸다.
마침내 윤관은 여진을 정벌하고 점령지에 아홉개의 성을 쌓았다. 이것이 동북(東北) 9성(城)이다. 동북 9성은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驗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으로, 윤관은 이곳에 남도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이때 윤관의 군대는 여진족의 전략적 거점 135곳을 공격하여 적병 4900여명을 참살하고 130명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공(戰功)으로 윤관은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事) 군국중지사(軍國重知事)에 임명되고 자줏빛으로 수놓은 안구(鞍具) 등을 하사받았다.
윤관은 그해 4월 개경으로 개선하여 예종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윤관과 오연총이 부월(斧鉞)을 바치자 예종은 문덕전(文德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이들의 공로를 치하했다.
● 패장(敗將)의 멍에를 쓴 채 쓸쓸한 최후를 맞다.
그러나 윤관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여진은 9성의 반환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국경을 어지럽혔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으로서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연총이 출전하여 웅주에서 여진족을 크게 무찔렀으나 이들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다.
그해 7월, 다시 여진 정벌에 나선 윤관은 휘하 장수 왕사지와 척준경을 보내 여진족을 격퇴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여진족은 침략을 멈추지 않는 한편, 영원히 고려를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줄 것을 애원했다. 이에 고려는 여진과 적극적인 강화교섭(講和交涉)을 시작했고, 예종은 6부를 소집하여 9성을 반환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윤관은 동북 지방에 나가 있었다.
당시 예종은 여진 정벌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했던 예종은 한쪽에서 생사를 건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음에도 군신들을 불러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그러자 우간의대부 이재(李宰)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지금 나라에 사고가 많고 백성들의 살림이 평안하지 못한데, 성상(聖上)께서는 군신(群臣)들과 어울려 매일 같이 주연을 베풀며 밤새도록 궁궐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하니 백성들이 크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9성을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절대 불가하오니 신중하게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이재가 예종에게 이와 같은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일 때문이었다. 윤관과 같이 여진 정벌에 나섰던 임언(林彦)은 전황을 보고하기 위해 잠시 개경에 들렀다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목격했다. 예종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조정 신료들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평장사 김경용(金景鎔)이 잔뜩 취한 채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즉시 자리를 빠져나온 임언은 이재를 만나 "동북 변경이 이렇듯 위태로운데 어떻게 평장사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춤을 출 수 있단 말이오? 조정의 내노라 하는 관료들 중 이를 말리는 사람도 하나 없고....."라며 긴 탄식을 늘어놓았다. 이에 이재는 자신의 책무대로 예종에게 직간을 올린 것이다.
하지만 예종은 이재의 상소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를 해임했다. 이러한 예종으로서는 여진의 강화 요청이 내심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정의 실세였던 평장사 최홍사(崔鴻謝)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신들이 9성 반환에 찬성한 반면, 반대한 대신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9성 반환에 찬성한 대신들은 여진 정벌에 있어 한 길만 막으면 여진족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 맞지 않았고,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만만치 않을 것이며, 새로 개척한 땅이 도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안전을 기할 수 없으며,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1109년 7월 3일, 예종은 문무백관들과 의논하여 마침내 9성을 반환하기로 결정했고, 보름 뒤부터는 철군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윤관을 비롯한 수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걸고 경략했던 9성은 다시 여진족의 차지가 되고 말았다. 9성을 쌓은 지 불과 1년만의 일이었다.
9성의 반환으로 인해 사실상 여진 정벌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윤관은 패장(敗將)의 모함을 받고 관직과 공신작호(功臣爵號)마저 삭탈당했다. 윤관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한 윤관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윤관을 처벌해야 한다는 재상과 대간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다행히 예종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1110년 다시 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지만 윤관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9성 반환은 그의 의욕마저 꺽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나깨나 여진 정벌에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정벌전(征伐戰)을 완수하고 어렵게 쌓은 9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얼마 후 고려는 여진에 사대의 예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는 치욕을 당해야만 했다. 1115년 우야소의 뒤를 이은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국호를 금(金)이라 하고 칭제(稱帝)를 선포하였는데, 2년 뒤에는 국서를 보내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해 왔다. 이어 1128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 사대의 예를 강요했을 뿐 아니라 송나라와의 교류에도 사사건건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집권자 이자겸 등이 금나라의 이와 같은 요구에 타협함으로써 고려의 북진정책(北進政策)은 일시에 좌절되고 말았다.
윤관이 살아 있었다면 땅을 치고 피를 토할 일이었다. 그러나 윤관은 이러한 치욕의 역사를 도저히 볼 수 없었는지 9성이 반환된 지 2년만인 1111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사후 삭탈당했던 관작을 되돌려 받았으며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고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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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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