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李資謙)은 황실의 외척(外戚)으로 한때 황제를 능가하는 권세를 누렸으나,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역모(逆謀)를 꿈꾸다 근황파(近皇派)에게 붙잡혀 죽은 인물이다. 그는 문종(文宗)의 장인이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자연(李子淵)의 손자로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올랐으나, 누이인 순종(順宗)의 비(妃) 장경궁주(長慶宮主)의 간통사건과 사촌인 이자의(李資誼)의 반란, 그리고 숙종(肅宗)의 경원(慶源) 이씨(李氏) 배제정책으로 인해 한때 야인생활을 하기도 했다.
예종(睿宗)의 즉위와 함께 관직에 복귀한 이자겸은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면서 국구(國舅)이자 총신(寵臣)이 되어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예종이 죽고 나서는 제위를 노리는 황자와 황손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외손자를 옹립한 뒤 인종(仁宗)에게 자신의 두 딸을 출가시키는 등 큰 권세를 누렸다.
그의 지나친 전횡을 보다 못한 인종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척준경(拓俊京)과 함께 궁궐을 불태우고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거했다. 이때부터 국권을 좌지우지하며 권세를 부리다가 반역을 도모하여 저잣거리에 십팔자위황설(十八子爲皇說)을 퍼뜨리고 황후를 시켜 인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뒤 인종의 밀명을 받은 김향(金珦), 척준경 등에게 붙잡혀 영광으로 귀양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이와 함께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80여년 동안 고려 최고의 문벌 가문으로 자리해 왔던 경원 이씨의 권세도 끝나고 말았다.
● 숙종(肅宗)의 왕권 강화책으로 권부에서 밀려나다.
이자겸(李資謙)은 문종(文宗)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중서령(中書令)을 지낸 이자연(李子淵)의 손자로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해주(海州) 최씨(崔氏)로 숙종(肅宗) 때에 문하시중을 지낸 최사추(崔思諏)의 딸이다.
이자겸의 첫 관직 생활은 문음(文蔭)으로 편전을 숙위하는 정7품직인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관직 생활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순종(順宗)의 비(妃)였던 누이동생 장경궁주(長慶宮主) 때문이었다. 순종이 세상을 떠난 뒤 외궁에 머무르던 장경궁주 이씨가 궁궐의 노복과 간통하다 발각되어 궁주의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이자겸 또한 관직에서 쫓겨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이자겸은 한동안 야인으로 허송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면서 외척이자 당대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으로 조정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며 권세와 영광을 누려왔던 경원(慶源) 이씨(李氏)의 영화(榮華)는 숙종의 즉위와 함께 잠시 빛을 잃어야 했다. 황실과의 중첩혼으로 큰 세력을 형성해 왔던 경원 이씨는 헌종(獻宗)이 열한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부터 내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헌종의 어머니 사숙태후(思肅太后)를 중심으로 그의 일가가 국정을 장악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사촌 이자의(李資誼)가 자신의 친조카인 한산후(漢山侯) 왕균(王筠)을 옹립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자 헌종의 숙부인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가 소태보(邵台輔), 왕국모(王國模) 등의 협조를 받아 반란을 진압하고 그해 10월 선위를 받아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15대 황제인 숙종(肅宗)이다. 외척의 발호로 왕권이 약화되고 왕실의 위엄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숙종은 조정의 요직으로부터 경원 이씨를 배제하는 것은 물론 왕실과의 혼인을 배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숙종은 먼저 소태보를 문하시중에 임명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1098년 3월, 유사에게 특명을 내려 태자첨사부(太子詹事府)를 설치함으로써 왕위 계승권자인 태자의 지위를 강화하였고, 이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천태종(天台宗)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경원 이씨를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의 비호 아래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법상종(法相宗)을 억누르고, 나아가 선종(禪宗)을 끌어들여 불교를 통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경원 이씨는 이러한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인해 정권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이자겸 또한 이와 같은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예종(睿宗)이 등극한 뒤에야 경원 이씨는 비로소 지난날의 영화를 재현할 수 있었는데, 그 중심에 이자겸이 있었다.
● 황제의 장인으로 정계에 복귀하다.
한동안 정계에서 밀려나 절치부심하던 이자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1106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관직에 복귀한 이자겸은 2년 뒤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면서 비로소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연이은 정치적 악재로 큰 수난을 겪었던 이자겸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딸을 예종에게 출가시킬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문벌귀족간의 혼인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문벌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서로간의 혼례를 통해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었는데, 이자겸의 장인인 최사추와 숙종의 처남이자 예종의 외숙부로 그와 동서지간이었던 유인저(柳因楮)의 영향력이 작용했던 것이다.
예종의 장인이 된 이자겸은 이듬해인 1109년, 예빈경 추밀원부사를 시작으로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이듬해에는 전중감 지추밀원사, 그 다음 해에는 어사대부를 거쳐 검교사공(檢校司空)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임명됨으로써 불과 3년만에 재상의 반열에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이자겸의 승진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1112년 2월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고, 이어 9월에는 수사공 병부상서 판삼사사가 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12월에는 검교사도 주국, 1114년 7월에는 수사공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를 거쳐 그 해 12월 마침내 원자를 낳은 그의 딸 연덕궁주(延德宮主)가 황후로 책봉되면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수태위에 올랐다.
이듬해인 1115년에는 이자겸 자신뿐 아니라 집안에도 경사가 겹쳤다. 이자겸 자신은 익성공신 수태위, 그의 어머니 김씨는 통의국대부인, 그의 부인 최씨는 조선국대부인에 책봉됨으로써 한 집에서 하루에 세통의 칙서를 받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1116년, 이자겸은 황제의 장인이자 총신으로 서경으로 행차하는 예종을 호종했고, 이듬해에는 김인존(金仁存), 조중장(趙重長)과 함께 남경에 가 있는 예종을 대신하여 개경을 지키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이후 이자겸은 판이부사 등을 거쳐 동덕공신(同德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책봉되었고, 1121년에는 추성좌리공신 소성군개국백에 책봉되었다. 이때 그의 아들인 이지미(李知彌)와 이공의(李公意)도 함께 승진했다.
그러나 이렇듯 순탄한 그의 앞날에도 잠시 먹구름이 드리웠다. 1122년, 예종이 그만 병상에 눕고 만 것이다. 소식을 접한 이자겸은 조정의 중신들과 함께 순복전으로 나아가 예종의 쾌차를 빌었다. 이때 그의 외손자인 태자 왕구(王構)의 나이가 겨우 열네살밖에 되지 않아 만일 예종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때까지 누려왔던 영화가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었다. 한때 본의 아니게 야인생활을 했던 그로서는 또 다시 그러한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두 파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자겸을 비롯한 외척들은 태자를 내세워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했고, 한안인(韓案仁)을 중심으로 한 조정 대신들은 어린 태자 대신 황제의 동생 중 한사람을 내세워 외척들의 발호를 막으려 했다.
다행히 예종은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고, 한안인으로 하여금 태자에게 옥새(玉璽)를 전하게 한 뒤 세상을 떠났다. 병석에 누운 지 불과 한달 만이었다. 이자겸은 예종의 유지를 앞세워 재빨리 태자 왕구의 즉위식을 거행했고, 이로써 고려 제17대 황제인 인종(仁宗)이 제위에 올랐다. 이자겸은 그 공로로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에 책봉되었다.
● 외조부이자 국구로 국정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다.
인종의 즉위와 함께 이자겸은 어린 외손자를 돌본다는 명목 아래 조정을 장악했고, 그리하여 그의 권세는 황제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인종 즉위년의 논의를 보면 그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인종은 1122년 7월 "중서령 이자겸은 태후의 아버지요, 짐(朕)에게는 외조부(外祖父)가 되니, 그에 대한 예우가 백관(百官)과 동일할 수 없다. 여러 대신들은 이에 대해 의논하여 짐에게 알리도록 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그러자 정극영(鄭克永)과 최유(崔遺) 등이 "옛글에 천자(天子)가 신하로 하지 않는 것이 셋이 있다고 하였는데 황후의 부모가 그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자겸은 마땅히 글을 올리는 데 있어 신(臣)이라 칭하지 않으며, 군신간의 큰 잔치에는 뜰에서 하례하지 않고 바로 장막으로 나아가 절하고, 성상(聖上)의 답례를 받은 다음 자리에 앉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모두들 그 의견에 찬성하고 나섰으나, 김부식(金富軾) 한사람만이 중국의 고사를 예로 들며 "글월을 올릴 때에는 신을 칭하고, 군신간의 예절에 있어서는 여러 사람을 따라야 하며, 궁중 안에서는 일가(一家)의 예를 따라야 합니다." 하고 반대했다. 이에 인종은 강후현(康逅賢)을 이자겸에게 보내 이자겸의 뜻을 물었고, 이자겸은 김부식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자칫 불의(不義)에 빠질 뻔했다며 김부식의 의견에 따를 것을 청했다.
이때 비록 이자겸이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김부식의 반대만 없었다면 황제와 동등한 예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종이 결국에는 이자겸에게 물어 결정을 내린 만큼 그의 권세는 이미 황제를 능가하고 있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권세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반대세력 제거에 나섰다. 그 첫번째가 예종의 후사를 놓고 대립했던 한안인 세력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자겸은 인종이 즉위한 그해 12월, 당파를 만들어 음모를 꾀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한안인과 문공미를 제거했다. 이때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帶方公) 왕보(王甫)를 비롯하여 한안인과 문공미의 친인척들, 그리고 평소 이들과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 모두 화를 입었다.
이것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의 문벌귀족들이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지방 출신의 신진 관료들을 제거한 사건이기도 했다. 즉, 예종 때 부당하게 국정에 간여해온 외척과 중앙의 문벌귀족 세력이 인종 즉위 후 더욱 강대해지자 한안인과 문공미를 중심으로 한 유신들이 대방공 왕보를 내세워 이들을 제거하고자 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이자겸 등이 선수를 쳐 이들을 제거한 것이다.
이자겸은 1124년, 어머니 통의국대부인 김씨가 죽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정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해 2월 이자겸은 자신을 도와 한안인과 문공미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최홍재(崔弘齋)마저 제거해 버렸다.
이자겸은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하면서 더욱 교만해졌고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일삼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누군가 자신을 해치지나 않을까 해서 항상 주위 사람들을 의심했다. 거기에는 군사권을 쥐고 있던 최홍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이자겸의 생각을 눈치 챈 권인이란 자가 어느날 이자겸을 찾아와 "최홍재가 정정숙, 이신의와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이것은 장차 상공(上公)께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말고했다.
이자겸은 즉시 그 사실을 인종에게 보고한 뒤 최홍재를 승주 욕지도로 귀양보내고 정정숙과 이신의를 비롯해 최홍재의 아들들과 친인척들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이로써 조정 안에는 더 이상 그의 말에 불복하거나 맞서는 자가 없었다.
이자겸의 권세가 날로 높아지자 이를 두려워한 인종은 그해 5월 추밀원사 박승중(朴承仲)을 보내 "공은 선제(先帝)께서 부탁하신 바이요, 어린 몸이 존경하고 가까이하는 터이므로 임무가 크고 책임이 무거우며, 공이 크고 두터워 여러 신하들과 같이 부를 수 없으니 이제부터 내리는 조서에는 공의 이름을 쓰지 아니할 것이며 경(卿)이라고도 일컫지 않으리라. 이것은 비록 특별한 일이기는 하나 옛 법전에 따른 것이니 공경히 받고 혹시라도 사양하지 말 것이며 상복을 벗고 조정으로 나오라."는 조서와 함께 의복, 띠, 안마, 금은 등 많은 물품을 내렸다. 이에 이자겸은 표문을 올려 감사의 뜻을 표하며 어머니의 상을 끝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때 이자겸은 이미 황제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달 뒤 박승중이 상소를 올려 인종이 내린 조서와 이자겸이 올린 표문을 사관에게 주어 역사에 기록할 것을 청한 것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말 수 있다.
이자겸은 어머니의 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 영문하상서도성사(領門下尙書都省事) 판이병부(判吏兵部)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선국공(朝鮮國公)에 봉해지고 식읍 8천호 등을 하사받았다. 이와 함께 자신이 거처하는 부를 숭덕부(崇德府), 궁을 의천궁(懿親宮)이라 칭했고, 그의 아내 최씨는 진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들도 모두 승진하거나 관직에 올랐다. 이지미는 비서감 추밀원사, 이공의는 상서형부시랑, 이지언은 상서공부낭중 겸 어사집단, 이지재는 상서호부낭중 지다방사, 이지윤은 전중내급사, 이지원은 합문지후에 각각 임명되었고, 승려가 된 아들 의장 또한 수좌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때 인종은 몸소 건덕전(乾德殿) 밖에까지 나와 조서를 전했고, 문무백관은 뜰에 나가 하례한 다음 이자겸의 사저로 나아가 또 다시 하례했다.
이와 같이 황제에 버금가는 권세와 함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이자겸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그해 8월 인종에게 강제로 그의 셋재 딸을 비(婢)로 삼게 한 데 이어 이듬해 정월에는 넷째 딸마저도 비로 삼게 했다. 이로써 그는 황제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중적 신분을 확보했다.
국공에 오른 이자겸은 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칭하고 중앙과 지방 관원이 하례하는 글을 올릴 때에는 전(箋)이라고 하게 하는 등 더욱 교만을 부렸다. 그의 아들들 또한 서로 경쟁적으로 집을 지어 집들이 길거리에 쭉 뻗어 있었으며, 권세를 믿고 기고만장해져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노복들을 풀어 다른 사람들의 말과 수레를 빼앗아 자신의 물건을 실어 나르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자겸은 인종이 직접 그의 집으로 나와 책봉의 명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을 뿐 아니라 강제로 그 날짜까지 정하려고 했다. 이러한 이자겸의 지나친 행동은 결국 파국을 불러왔다.
● 조정에 휘몰아친 피바람
1126년 2월, 고려는 황궁이 불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등 한차례 큰 혼란을 겪었다. 그것은 이자겸의 도를 벗어난 전횡에서 비롯되었다. 이자겸은 인종이 어느덧 열여덟살이 되어 스스로 국정을 처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사사건건 간섭하며 국정을 농락했다. 인종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자겸이 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종의 속마음을 눈치 챈 근신(近臣)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이 지녹연(智祿延) 등과 함께 인종을 알현하여 이자겸을 제거하기를 청했다. 이자겸은 비밀리에 김찬을 평장사 이공수(李公壽)와 김인존에게 보내 이자겸을 제거할 방법을 묻게 했다. 이때 이공수와 김인존은 "성상(聖上)께서 외가(外家)에서 성장하였으니 그 은혜를 저버릴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의 무리가 조정에 가득하여 경솔하게 움직일 수 없으니 부디 때를 기다리도록 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조정이 온통 이자겸의 일족과 그를 따르는 무리로 가득했기 때문에 자칫 비밀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오히려 화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인종은 더 이상 계획을 미룰 수 없었다. 지녹연 등은 인종의 뜻을 받들어 상작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修), 장군 고석(高錫) 등과 함께 이자겸 등을 붙잡아 귀양보낼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먼저 군사들을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 척준신(拓俊臣), 김정분(金精奮), 전기상(全基象) 등 이자겸을 따르는 사람들을 죽여 그 시체를 궁궐 밖으로 내던졌다.
이 소식을 듣고 신변에 위험을 느낀 이자겸은 척준경과 아들 이자미 등을 집으로 불러들여 대책을 의논했다. 그것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문하시랑평장사로 있던 척준경은 윤관(尹瓘)의 부하 장수로 여진(女眞)과의 전쟁에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웠던 용장으로 이지원의 장인으로서 이자겸과 사돈을 맺어 병부상서인 동생 척준신과 함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 척준경은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이대로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면서 최식(崔植), 이후진(李逅眞) 등 수십명을 데리고 주작문으로 나갔다. 그 사이 이자겸은 무리들을 시켜 최탁, 오탁, 권수 등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처자와 노복들을 잡아 가두도록 했다.
궁궐 가까이에 이르러 동생과 아들 등의 시체를 직접 목격한 뒤 자신도 화를 입게 될까 두려워진 척준경은 이지보, 최식 등과 함께 군사를 소집하여 군기고에 들어가 무장을 갖춘 뒤 승평문을 포위했다. 이때 현화사의 승려로 있던 이자겸의 아들 의장 또한 승려 1백여명을 거느리고 달려와 합세했다.
이와 같이 왕권수호세력과 이자겸 일파 사이에 일촉즉발의 대립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인종이 직접 이자겸의 무리를 제압하기 위해 나섰다. 인종이 신봉문으로 나아가 군사들에게 "너희들은 어찌하여 무기를 소지하고 이곳에 왔느냐?"고 묻자 이자겸의 군사들은 "듣자오니 궁중에 도둑이 들었다 하기에 사직을 호위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인종은 "그런 일은 없으며 짐 역시 아무 탈이 없으니 너희는 갑옷을 벗고 그만 해산하라."며 무장해제를 종용했다.
이때 위기를 느낀 척준경이 칼을 뽑아 들고 군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려 활을 쏘도록 했는데, 화살이 인종 앞에 이르렀다. 의장이 거느린 승려들은 도끼로 신봉문의 기둥을 찍었다. 이자겸은 최학란과 소억을 시켜 "궁중에서 난리를 일으킨 자를 내어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궁중이 매우 소란스러워질 것입니다."라고 위협하게 했다. 그러나 인종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만일 이자겸의 위협에 못 이겨 오탁, 지녹연 등을 넘겨준다면 이자겸과 그 추종 세력을 제거하려던 그간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해질녘이 되자 척준경은 "날이 저물어가므로 도둑이 밤을 이용해 출동할 듯하니 그들이 행동하기 전에 궁문에 불을 지르고 수색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자겸은 아들 이지미를 시켜 평장사 이공수에게 그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이공수는 "궁궐이 서로 나란히 있으므로 만일 불을 지른다면 끄기가 어려울 것이니 그것은 옳지 않소."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자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을 개시했다. 동화문에 불을 놓고 군사들을 시켜 궁궐의 모든 문을 지키게 한 뒤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조리 죽여라."고 지시한 것이다. 불길은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온 궁궐로 퍼져 나갔다. 척준경은 이때의 화재와 인종을 향해 활을 쏜 일로 뒷날 이자겸을 제거하는 공훈(功勳)을 세웠음에도 조정의 탄핵을 받게 된다.
시위들이 불길을 피해 흩어져 달아난 가운데 산호정(山呼亭)에 이른 인종은 "짐이 김인존의 말을 들어 좀더 신중을 기하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하고 탄식했다. 결국 해를 당할까 두려워진 인종은 이자겸에게 제위를 물려받으라는 글을 지어 보냈다.
그러나 인종의 양위 조서를 받은 이자겸은 양부(兩府)의 비난을 염려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공수가 "비록 성상(聖上)의 조서(詔書)가 있다고는 하나 이공(李公)이 어떻게 감히 그리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이자겸은 "신(臣)에게 두 마음이 없사오니, 성상께서는 부디 소신의 마음을 알아주소서." 하고 울면서 조서를 되돌려 보냈다.
이 사건으로 궁궐 대부분이 불탔으며, 최탁과 오탁을 비롯해 권수, 고석, 안보린 등 인종을 도와 거사(擧事)에 참여했던 신하들은 모두 척준경에게 목숨을 잃었다. 거사를 주도했던 지녹연은 모진 고문 끝에 귀양을 가다 충주에 이르러 팔과 다리가 잘린 채 생매장되었고, 김찬은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졌으며, 이들 두 사람의 처자들은 지방 관청의 노비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인종과 왕권수호세력의 이자겸 제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조정은 완전히 이자겸 일파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해 3월 이자겸은 인종을 협박하여 자신의 집 서원에 거처하도록 했다. 이자겸의 위세에 눌린 인종은 마지못해 서원으로 갔는데 이 과정에서 어의(御衣)가 찢어지고 복두(輹頭)가 문설주에 부딪쳐 부서지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인종이 마루에 오르자 그제야 모습을 나타낸 이자겸은 그의 아내와 함께 손뼉을 치며 땅을 두드리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황후가 궁으로 들어갈 때에는 태자를 낳기를 원했고, 태자가 태어나자 오래 사시기를 하늘에 기원하여 무슨 짓이라도 다하여 왔으니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나의 지성을 알 터인데, 도리어 오늘날 적신(賊臣)의 말을 믿으시고 굴욕을 해하고자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라며 원망하기까지 했다.
●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그 후 이자겸은 인종을 자신의 집에 감금하다시피 한 채 온갖 횡포를 부렸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인종은 어느날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 최사전(崔思全)에게 은밀히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의논했다. 최사전은 "이자겸이 멋대로 권세를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척준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상(聖上)께서 만일 척준경을 매수하여 그에게 병권을 귀속시키면 이자겸은 다만 고립된 한사람이 될 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인종은 "척준경이 이자겸의 심복이 되어 혼인을 맺기까지 했고, 척준신과 척순이 모두 관병(官兵)에게 살해당했으니 그것이 염려가 된다."며 점을 쳐보았다. 길하다는 점괘가 나오자 이에 용기를 얻은 인종은 최사전에게 밀명을 내렸다. 최사전은 척준경을 찾아가 "태조(太祖)와 역대 제왕의 신령이 하늘에 계시니 그 화복이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자겸은 궁중의 제도를 믿을 뿐이요, 신의(信義)가 없으니 그가 하자는 대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공(公)은 오직 한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공(功)을 세우도록 하시오." 라며 충의(忠義)로써 타일렀다. 그러자 의외로 척준경은 혼쾌히 인종의 뜻에 찬성했다.
이때 척준경이 쉽게 호응한 것은 지난 2월 거사를 진압하는 과정을 놓고 이자겸과 반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노복이 척준경의 노복과 다투다가 "너의 주인이 임금에게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놓았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할 것이요, 너도 역시 적몰되어 관노가 되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나를 욕하느냐?"며 꾸짖었다. 노복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듣고 크게 화가 난 척준경은 그 길로 이자겸의 집으로 달려가 "내 죄가 크니 관아에 가서 스스로 변명하리라." 하고 따진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이자겸은 아들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 화해를 청했지만, 척준경은 "전날의 난리는 모두 너희가 한 짓인데, 어찌 내 죄라고만 하느냐? 차라리 고향에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겠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노복들의 하찮은 싸움에서 번진 두 집안의 갈등으로 결국 이자겸은 죽음을 맞게 된다.
인종이 계속해서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이자겸은 그해 5월 인종을 죽이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기 위해 음모를 꾸몄는데, 당시 상황을 고려사(高麗史) 역신열전(逆臣烈傳) 이자겸조(李資謙條)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5월 초하루 임금이 연경궁(延慶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자겸이 궁의 남쪽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북쪽 담을 뚫어 궁 안으로 통하게 하고, 군기고의 갑옷과 무기를 가져다 집 안에 간직하였다. 임금이 홀로 북쪽 동산에 나아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얼마 후에 이자겸이 십팔자(十八子)의 비결대로 제위를 노림 떡에 독약을 넣어 임금에게 드렸는데 왕비가 비밀리에 임금께 그 사실을 알려 대신 그 떡을 까마귀에게 주었더니 까마귀가 죽었다. 이자겸은 다시 독약을 보내 왕비를 시켜서 임금께 드리게 했는데, 왕비가 대접을 들고 가다 일부러 넘어져 엎질러 버렸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의 반목을 알게 된 최사전은 이자겸이 계속해서 인종을 독살하려 하자 다시 척준경을 찾아가 그를 종용했다. 마침내 인종의 뜻에 따라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결심을 곧힌 척준경은 글을 올려 충성을 맹세했다. 인종은 "국공(國公)이 비록 제 분수를 모르고 방자하나 아직 반란을 일으킨 형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좀 더 기다렸다가 이에 대응해도 늦지 않다."며 척준경에게 때를 기다리라고 전했다. 지난 2월 섣불리 움직였다가 화를 당한 인종으로서는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 후 인종은 내시 조의를 척준경에게 보내 "오늘 숭덕부(崇德府)의 군사들이 무기를 지니고 대궐 북쪽에 이르러 장차 침문으로 들어올 듯한데, 만일 짐이 해(害)를 당한다면 실로 짐이 부덕한 탓이다. 하지만 원통한 것은 태조께서 창업한 이래 역대 선황이 서로 계승하여 짐에게까지 이르렀는데, 만일 다른 성(姓)으로 바뀌게 된다면 짐의 죄만이 아니라 보필하는 대신들에게도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라건대 경은 일은 잘 도모하라."는 밀지를 전했다.
척준경은 즉시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과 상의한 뒤 갑옷을 입고 궁궐로 들어가 인종을 호위했다. 이자겸의 무리가 인종을 호위해 나오는 척준경을 향해 활을 쏘자, 척준경은 칼을 빼어 들고 호통을 쳐서 이들을 쫓아 버렸다. 그 후 인종이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군기감에 머물고 있을 때, 척준경이 강후현을 시켜 이자겸을 불렀다.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이자겸은 궁궐로 들어가 척준경을 찾았다. 척준경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이자겸과 그의 처자를 체포하여 팔관보에 가두게 하고, 그를 따르는 장수들의 목을 베었다.
이자겸은 아내 최씨와 아들 이지윤과 함께 영광으로 귀양가고, 이지미는 합주, 이공의는 진도, 이지언은 거제, 이지보는 삼척, 의장과 이지원은 함종, 이자겸의 추종자인 박표, 문중경 등과 그의 무리들 또한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졌다. 이자겸의 친당인 평장사 이자덕(李慈德)과 김인규(金仁奎) 등은 모두 수령으로 좌천되었다.
그 해 12월에 이자겸은 귀양지 영광에서 처형되었고, 간관들의 상소에 따라 인종의 비로 있던 그의 두 딸 또한 폐비(廢妃)로 전락하여 이자겸의 제위 찬탈 음모는 일단락되었다. 외척이자 고려 최고의 문벌귀족으로써 온갖 권세를 누리며 국정을 농락하다 제위까지 넘보았던 이자겸의 욕심은 결국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불러왔다. 문종(文宗)대부터 7대 80여년 동안 큰 권세를 누려왔던 경원(慶源) 이씨(李氏) 가문은 이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이자겸을 제거하는데 공훈(功勳)을 세워 뒷날 문하시중에 오른 이공수가 간신히 경원 이씨의 명맥을 이었을 뿐이다. 이공수는 이자연(李子淵)의 동생 이자상(李子相)의 손자로 평장사를 지낸 이예(李例)의 아들이다.
이자겸을 제거한 공로로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오른 척준경의 권세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는 1년 뒤인 1127년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이 "병오년(서기 1126년) 봄 2월에 척준경이 최식 등과 더불어 대궐을 침범할 때에 성상께서 신봉문 문루로 나오셔서 군사들을 타이르니 모두 갑옷을 벗고 환성을 올려 만세를 부르는데, 오직 척준경이 조서를 받들지 않고 군사를 위협하여 활을 쏘니 화살이 성상의 수레 위로 지나가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군사를 거느리고 난입하여 궁궐을 불태우고 이튿날 성상께서 남궁으로 옮기시자 성상의 측근들을 모두 죽였으니, 옛날부터 난신(亂臣) 중에 이와 같은 자는 없습니다. 5월의 사건은 일시의 공로요, 2월의 사건은 만세(萬世)의 대역(大逆)이오니, 어찌 일시의 공으로 만세의 죄를 덮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탄핵하여 암타도로 유배된 것이다.
예종(睿宗)의 즉위와 함께 관직에 복귀한 이자겸은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면서 국구(國舅)이자 총신(寵臣)이 되어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예종이 죽고 나서는 제위를 노리는 황자와 황손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외손자를 옹립한 뒤 인종(仁宗)에게 자신의 두 딸을 출가시키는 등 큰 권세를 누렸다.
그의 지나친 전횡을 보다 못한 인종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척준경(拓俊京)과 함께 궁궐을 불태우고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거했다. 이때부터 국권을 좌지우지하며 권세를 부리다가 반역을 도모하여 저잣거리에 십팔자위황설(十八子爲皇說)을 퍼뜨리고 황후를 시켜 인종을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뒤 인종의 밀명을 받은 김향(金珦), 척준경 등에게 붙잡혀 영광으로 귀양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이와 함께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 80여년 동안 고려 최고의 문벌 가문으로 자리해 왔던 경원 이씨의 권세도 끝나고 말았다.
● 숙종(肅宗)의 왕권 강화책으로 권부에서 밀려나다.
이자겸(李資謙)은 문종(文宗)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중서령(中書令)을 지낸 이자연(李子淵)의 손자로 경원백(慶源伯) 이호(李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해주(海州) 최씨(崔氏)로 숙종(肅宗) 때에 문하시중을 지낸 최사추(崔思諏)의 딸이다.
이자겸의 첫 관직 생활은 문음(文蔭)으로 편전을 숙위하는 정7품직인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관직 생활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순종(順宗)의 비(妃)였던 누이동생 장경궁주(長慶宮主) 때문이었다. 순종이 세상을 떠난 뒤 외궁에 머무르던 장경궁주 이씨가 궁궐의 노복과 간통하다 발각되어 궁주의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이자겸 또한 관직에서 쫓겨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이자겸은 한동안 야인으로 허송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면서 외척이자 당대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으로 조정의 주요 관직을 차지하며 권세와 영광을 누려왔던 경원(慶源) 이씨(李氏)의 영화(榮華)는 숙종의 즉위와 함께 잠시 빛을 잃어야 했다. 황실과의 중첩혼으로 큰 세력을 형성해 왔던 경원 이씨는 헌종(獻宗)이 열한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부터 내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헌종의 어머니 사숙태후(思肅太后)를 중심으로 그의 일가가 국정을 장악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사촌 이자의(李資誼)가 자신의 친조카인 한산후(漢山侯) 왕균(王筠)을 옹립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자 헌종의 숙부인 계림공(鷄林公) 왕희(王熙)가 소태보(邵台輔), 왕국모(王國模) 등의 협조를 받아 반란을 진압하고 그해 10월 선위를 받아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15대 황제인 숙종(肅宗)이다. 외척의 발호로 왕권이 약화되고 왕실의 위엄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숙종은 조정의 요직으로부터 경원 이씨를 배제하는 것은 물론 왕실과의 혼인을 배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숙종은 먼저 소태보를 문하시중에 임명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해 나갔다. 1098년 3월, 유사에게 특명을 내려 태자첨사부(太子詹事府)를 설치함으로써 왕위 계승권자인 태자의 지위를 강화하였고, 이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천태종(天台宗)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경원 이씨를 중심으로 한 문벌귀족의 비호 아래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법상종(法相宗)을 억누르고, 나아가 선종(禪宗)을 끌어들여 불교를 통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경원 이씨는 이러한 숙종의 왕권 강화책으로 인해 정권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이자겸 또한 이와 같은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예종(睿宗)이 등극한 뒤에야 경원 이씨는 비로소 지난날의 영화를 재현할 수 있었는데, 그 중심에 이자겸이 있었다.
● 황제의 장인으로 정계에 복귀하다.
한동안 정계에서 밀려나 절치부심하던 이자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1106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관직에 복귀한 이자겸은 2년 뒤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비가 되면서 비로소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연이은 정치적 악재로 큰 수난을 겪었던 이자겸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딸을 예종에게 출가시킬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문벌귀족간의 혼인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문벌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서로간의 혼례를 통해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었는데, 이자겸의 장인인 최사추와 숙종의 처남이자 예종의 외숙부로 그와 동서지간이었던 유인저(柳因楮)의 영향력이 작용했던 것이다.
예종의 장인이 된 이자겸은 이듬해인 1109년, 예빈경 추밀원부사를 시작으로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이듬해에는 전중감 지추밀원사, 그 다음 해에는 어사대부를 거쳐 검교사공(檢校司空)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임명됨으로써 불과 3년만에 재상의 반열에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이자겸의 승진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1112년 2월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고, 이어 9월에는 수사공 병부상서 판삼사사가 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12월에는 검교사도 주국, 1114년 7월에는 수사공 상서좌복야 참지정사를 거쳐 그 해 12월 마침내 원자를 낳은 그의 딸 연덕궁주(延德宮主)가 황후로 책봉되면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수태위에 올랐다.
이듬해인 1115년에는 이자겸 자신뿐 아니라 집안에도 경사가 겹쳤다. 이자겸 자신은 익성공신 수태위, 그의 어머니 김씨는 통의국대부인, 그의 부인 최씨는 조선국대부인에 책봉됨으로써 한 집에서 하루에 세통의 칙서를 받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1116년, 이자겸은 황제의 장인이자 총신으로 서경으로 행차하는 예종을 호종했고, 이듬해에는 김인존(金仁存), 조중장(趙重長)과 함께 남경에 가 있는 예종을 대신하여 개경을 지키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이후 이자겸은 판이부사 등을 거쳐 동덕공신(同德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책봉되었고, 1121년에는 추성좌리공신 소성군개국백에 책봉되었다. 이때 그의 아들인 이지미(李知彌)와 이공의(李公意)도 함께 승진했다.
그러나 이렇듯 순탄한 그의 앞날에도 잠시 먹구름이 드리웠다. 1122년, 예종이 그만 병상에 눕고 만 것이다. 소식을 접한 이자겸은 조정의 중신들과 함께 순복전으로 나아가 예종의 쾌차를 빌었다. 이때 그의 외손자인 태자 왕구(王構)의 나이가 겨우 열네살밖에 되지 않아 만일 예종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때까지 누려왔던 영화가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었다. 한때 본의 아니게 야인생활을 했던 그로서는 또 다시 그러한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두 파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자겸을 비롯한 외척들은 태자를 내세워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 했고, 한안인(韓案仁)을 중심으로 한 조정 대신들은 어린 태자 대신 황제의 동생 중 한사람을 내세워 외척들의 발호를 막으려 했다.
다행히 예종은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고, 한안인으로 하여금 태자에게 옥새(玉璽)를 전하게 한 뒤 세상을 떠났다. 병석에 누운 지 불과 한달 만이었다. 이자겸은 예종의 유지를 앞세워 재빨리 태자 왕구의 즉위식을 거행했고, 이로써 고려 제17대 황제인 인종(仁宗)이 제위에 올랐다. 이자겸은 그 공로로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에 책봉되었다.
● 외조부이자 국구로 국정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다.
인종의 즉위와 함께 이자겸은 어린 외손자를 돌본다는 명목 아래 조정을 장악했고, 그리하여 그의 권세는 황제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인종 즉위년의 논의를 보면 그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인종은 1122년 7월 "중서령 이자겸은 태후의 아버지요, 짐(朕)에게는 외조부(外祖父)가 되니, 그에 대한 예우가 백관(百官)과 동일할 수 없다. 여러 대신들은 이에 대해 의논하여 짐에게 알리도록 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그러자 정극영(鄭克永)과 최유(崔遺) 등이 "옛글에 천자(天子)가 신하로 하지 않는 것이 셋이 있다고 하였는데 황후의 부모가 그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자겸은 마땅히 글을 올리는 데 있어 신(臣)이라 칭하지 않으며, 군신간의 큰 잔치에는 뜰에서 하례하지 않고 바로 장막으로 나아가 절하고, 성상(聖上)의 답례를 받은 다음 자리에 앉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모두들 그 의견에 찬성하고 나섰으나, 김부식(金富軾) 한사람만이 중국의 고사를 예로 들며 "글월을 올릴 때에는 신을 칭하고, 군신간의 예절에 있어서는 여러 사람을 따라야 하며, 궁중 안에서는 일가(一家)의 예를 따라야 합니다." 하고 반대했다. 이에 인종은 강후현(康逅賢)을 이자겸에게 보내 이자겸의 뜻을 물었고, 이자겸은 김부식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자칫 불의(不義)에 빠질 뻔했다며 김부식의 의견에 따를 것을 청했다.
이때 비록 이자겸이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김부식의 반대만 없었다면 황제와 동등한 예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종이 결국에는 이자겸에게 물어 결정을 내린 만큼 그의 권세는 이미 황제를 능가하고 있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권세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반대세력 제거에 나섰다. 그 첫번째가 예종의 후사를 놓고 대립했던 한안인 세력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자겸은 인종이 즉위한 그해 12월, 당파를 만들어 음모를 꾀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한안인과 문공미를 제거했다. 이때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帶方公) 왕보(王甫)를 비롯하여 한안인과 문공미의 친인척들, 그리고 평소 이들과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 모두 화를 입었다.
이것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의 문벌귀족들이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지방 출신의 신진 관료들을 제거한 사건이기도 했다. 즉, 예종 때 부당하게 국정에 간여해온 외척과 중앙의 문벌귀족 세력이 인종 즉위 후 더욱 강대해지자 한안인과 문공미를 중심으로 한 유신들이 대방공 왕보를 내세워 이들을 제거하고자 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이자겸 등이 선수를 쳐 이들을 제거한 것이다.
이자겸은 1124년, 어머니 통의국대부인 김씨가 죽자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조정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해 2월 이자겸은 자신을 도와 한안인과 문공미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최홍재(崔弘齋)마저 제거해 버렸다.
이자겸은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하면서 더욱 교만해졌고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일삼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누군가 자신을 해치지나 않을까 해서 항상 주위 사람들을 의심했다. 거기에는 군사권을 쥐고 있던 최홍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이자겸의 생각을 눈치 챈 권인이란 자가 어느날 이자겸을 찾아와 "최홍재가 정정숙, 이신의와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이것은 장차 상공(上公)께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말고했다.
이자겸은 즉시 그 사실을 인종에게 보고한 뒤 최홍재를 승주 욕지도로 귀양보내고 정정숙과 이신의를 비롯해 최홍재의 아들들과 친인척들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이로써 조정 안에는 더 이상 그의 말에 불복하거나 맞서는 자가 없었다.
이자겸의 권세가 날로 높아지자 이를 두려워한 인종은 그해 5월 추밀원사 박승중(朴承仲)을 보내 "공은 선제(先帝)께서 부탁하신 바이요, 어린 몸이 존경하고 가까이하는 터이므로 임무가 크고 책임이 무거우며, 공이 크고 두터워 여러 신하들과 같이 부를 수 없으니 이제부터 내리는 조서에는 공의 이름을 쓰지 아니할 것이며 경(卿)이라고도 일컫지 않으리라. 이것은 비록 특별한 일이기는 하나 옛 법전에 따른 것이니 공경히 받고 혹시라도 사양하지 말 것이며 상복을 벗고 조정으로 나오라."는 조서와 함께 의복, 띠, 안마, 금은 등 많은 물품을 내렸다. 이에 이자겸은 표문을 올려 감사의 뜻을 표하며 어머니의 상을 끝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이때 이자겸은 이미 황제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달 뒤 박승중이 상소를 올려 인종이 내린 조서와 이자겸이 올린 표문을 사관에게 주어 역사에 기록할 것을 청한 것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말 수 있다.
이자겸은 어머니의 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 영문하상서도성사(領門下尙書都省事) 판이병부(判吏兵部)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선국공(朝鮮國公)에 봉해지고 식읍 8천호 등을 하사받았다. 이와 함께 자신이 거처하는 부를 숭덕부(崇德府), 궁을 의천궁(懿親宮)이라 칭했고, 그의 아내 최씨는 진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들도 모두 승진하거나 관직에 올랐다. 이지미는 비서감 추밀원사, 이공의는 상서형부시랑, 이지언은 상서공부낭중 겸 어사집단, 이지재는 상서호부낭중 지다방사, 이지윤은 전중내급사, 이지원은 합문지후에 각각 임명되었고, 승려가 된 아들 의장 또한 수좌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때 인종은 몸소 건덕전(乾德殿) 밖에까지 나와 조서를 전했고, 문무백관은 뜰에 나가 하례한 다음 이자겸의 사저로 나아가 또 다시 하례했다.
이와 같이 황제에 버금가는 권세와 함게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도 이자겸은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그해 8월 인종에게 강제로 그의 셋재 딸을 비(婢)로 삼게 한 데 이어 이듬해 정월에는 넷째 딸마저도 비로 삼게 했다. 이로써 그는 황제의 외조부이자 장인이라는 이중적 신분을 확보했다.
국공에 오른 이자겸은 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칭하고 중앙과 지방 관원이 하례하는 글을 올릴 때에는 전(箋)이라고 하게 하는 등 더욱 교만을 부렸다. 그의 아들들 또한 서로 경쟁적으로 집을 지어 집들이 길거리에 쭉 뻗어 있었으며, 권세를 믿고 기고만장해져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노복들을 풀어 다른 사람들의 말과 수레를 빼앗아 자신의 물건을 실어 나르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자겸은 인종이 직접 그의 집으로 나와 책봉의 명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을 뿐 아니라 강제로 그 날짜까지 정하려고 했다. 이러한 이자겸의 지나친 행동은 결국 파국을 불러왔다.
● 조정에 휘몰아친 피바람
1126년 2월, 고려는 황궁이 불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등 한차례 큰 혼란을 겪었다. 그것은 이자겸의 도를 벗어난 전횡에서 비롯되었다. 이자겸은 인종이 어느덧 열여덟살이 되어 스스로 국정을 처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사사건건 간섭하며 국정을 농락했다. 인종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이자겸이 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종의 속마음을 눈치 챈 근신(近臣) 김찬(金粲)과 안보린(安甫鱗)이 지녹연(智祿延) 등과 함께 인종을 알현하여 이자겸을 제거하기를 청했다. 이자겸은 비밀리에 김찬을 평장사 이공수(李公壽)와 김인존에게 보내 이자겸을 제거할 방법을 묻게 했다. 이때 이공수와 김인존은 "성상(聖上)께서 외가(外家)에서 성장하였으니 그 은혜를 저버릴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의 무리가 조정에 가득하여 경솔하게 움직일 수 없으니 부디 때를 기다리도록 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조정이 온통 이자겸의 일족과 그를 따르는 무리로 가득했기 때문에 자칫 비밀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오히려 화를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인종은 더 이상 계획을 미룰 수 없었다. 지녹연 등은 인종의 뜻을 받들어 상작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修), 장군 고석(高錫) 등과 함께 이자겸 등을 붙잡아 귀양보낼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먼저 군사들을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 척준신(拓俊臣), 김정분(金精奮), 전기상(全基象) 등 이자겸을 따르는 사람들을 죽여 그 시체를 궁궐 밖으로 내던졌다.
이 소식을 듣고 신변에 위험을 느낀 이자겸은 척준경과 아들 이자미 등을 집으로 불러들여 대책을 의논했다. 그것은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문하시랑평장사로 있던 척준경은 윤관(尹瓘)의 부하 장수로 여진(女眞)과의 전쟁에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웠던 용장으로 이지원의 장인으로서 이자겸과 사돈을 맺어 병부상서인 동생 척준신과 함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 척준경은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이대로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다."면서 최식(崔植), 이후진(李逅眞) 등 수십명을 데리고 주작문으로 나갔다. 그 사이 이자겸은 무리들을 시켜 최탁, 오탁, 권수 등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처자와 노복들을 잡아 가두도록 했다.
궁궐 가까이에 이르러 동생과 아들 등의 시체를 직접 목격한 뒤 자신도 화를 입게 될까 두려워진 척준경은 이지보, 최식 등과 함께 군사를 소집하여 군기고에 들어가 무장을 갖춘 뒤 승평문을 포위했다. 이때 현화사의 승려로 있던 이자겸의 아들 의장 또한 승려 1백여명을 거느리고 달려와 합세했다.
이와 같이 왕권수호세력과 이자겸 일파 사이에 일촉즉발의 대립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인종이 직접 이자겸의 무리를 제압하기 위해 나섰다. 인종이 신봉문으로 나아가 군사들에게 "너희들은 어찌하여 무기를 소지하고 이곳에 왔느냐?"고 묻자 이자겸의 군사들은 "듣자오니 궁중에 도둑이 들었다 하기에 사직을 호위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인종은 "그런 일은 없으며 짐 역시 아무 탈이 없으니 너희는 갑옷을 벗고 그만 해산하라."며 무장해제를 종용했다.
이때 위기를 느낀 척준경이 칼을 뽑아 들고 군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려 활을 쏘도록 했는데, 화살이 인종 앞에 이르렀다. 의장이 거느린 승려들은 도끼로 신봉문의 기둥을 찍었다. 이자겸은 최학란과 소억을 시켜 "궁중에서 난리를 일으킨 자를 내어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궁중이 매우 소란스러워질 것입니다."라고 위협하게 했다. 그러나 인종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만일 이자겸의 위협에 못 이겨 오탁, 지녹연 등을 넘겨준다면 이자겸과 그 추종 세력을 제거하려던 그간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해질녘이 되자 척준경은 "날이 저물어가므로 도둑이 밤을 이용해 출동할 듯하니 그들이 행동하기 전에 궁문에 불을 지르고 수색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이자겸은 아들 이지미를 시켜 평장사 이공수에게 그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이공수는 "궁궐이 서로 나란히 있으므로 만일 불을 지른다면 끄기가 어려울 것이니 그것은 옳지 않소."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자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을 개시했다. 동화문에 불을 놓고 군사들을 시켜 궁궐의 모든 문을 지키게 한 뒤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조리 죽여라."고 지시한 것이다. 불길은 때마침 불어온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온 궁궐로 퍼져 나갔다. 척준경은 이때의 화재와 인종을 향해 활을 쏜 일로 뒷날 이자겸을 제거하는 공훈(功勳)을 세웠음에도 조정의 탄핵을 받게 된다.
시위들이 불길을 피해 흩어져 달아난 가운데 산호정(山呼亭)에 이른 인종은 "짐이 김인존의 말을 들어 좀더 신중을 기하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하고 탄식했다. 결국 해를 당할까 두려워진 인종은 이자겸에게 제위를 물려받으라는 글을 지어 보냈다.
그러나 인종의 양위 조서를 받은 이자겸은 양부(兩府)의 비난을 염려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공수가 "비록 성상(聖上)의 조서(詔書)가 있다고는 하나 이공(李公)이 어떻게 감히 그리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이자겸은 "신(臣)에게 두 마음이 없사오니, 성상께서는 부디 소신의 마음을 알아주소서." 하고 울면서 조서를 되돌려 보냈다.
이 사건으로 궁궐 대부분이 불탔으며, 최탁과 오탁을 비롯해 권수, 고석, 안보린 등 인종을 도와 거사(擧事)에 참여했던 신하들은 모두 척준경에게 목숨을 잃었다. 거사를 주도했던 지녹연은 모진 고문 끝에 귀양을 가다 충주에 이르러 팔과 다리가 잘린 채 생매장되었고, 김찬은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졌으며, 이들 두 사람의 처자들은 지방 관청의 노비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인종과 왕권수호세력의 이자겸 제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조정은 완전히 이자겸 일파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해 3월 이자겸은 인종을 협박하여 자신의 집 서원에 거처하도록 했다. 이자겸의 위세에 눌린 인종은 마지못해 서원으로 갔는데 이 과정에서 어의(御衣)가 찢어지고 복두(輹頭)가 문설주에 부딪쳐 부서지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인종이 마루에 오르자 그제야 모습을 나타낸 이자겸은 그의 아내와 함께 손뼉을 치며 땅을 두드리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황후가 궁으로 들어갈 때에는 태자를 낳기를 원했고, 태자가 태어나자 오래 사시기를 하늘에 기원하여 무슨 짓이라도 다하여 왔으니 천지신명(天地神明)이 나의 지성을 알 터인데, 도리어 오늘날 적신(賊臣)의 말을 믿으시고 굴욕을 해하고자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라며 원망하기까지 했다.
●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
그 후 이자겸은 인종을 자신의 집에 감금하다시피 한 채 온갖 횡포를 부렸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인종은 어느날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 최사전(崔思全)에게 은밀히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의논했다. 최사전은 "이자겸이 멋대로 권세를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척준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상(聖上)께서 만일 척준경을 매수하여 그에게 병권을 귀속시키면 이자겸은 다만 고립된 한사람이 될 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인종은 "척준경이 이자겸의 심복이 되어 혼인을 맺기까지 했고, 척준신과 척순이 모두 관병(官兵)에게 살해당했으니 그것이 염려가 된다."며 점을 쳐보았다. 길하다는 점괘가 나오자 이에 용기를 얻은 인종은 최사전에게 밀명을 내렸다. 최사전은 척준경을 찾아가 "태조(太祖)와 역대 제왕의 신령이 하늘에 계시니 그 화복이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자겸은 궁중의 제도를 믿을 뿐이요, 신의(信義)가 없으니 그가 하자는 대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공(公)은 오직 한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공(功)을 세우도록 하시오." 라며 충의(忠義)로써 타일렀다. 그러자 의외로 척준경은 혼쾌히 인종의 뜻에 찬성했다.
이때 척준경이 쉽게 호응한 것은 지난 2월 거사를 진압하는 과정을 놓고 이자겸과 반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의 노복이 척준경의 노복과 다투다가 "너의 주인이 임금에게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놓았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할 것이요, 너도 역시 적몰되어 관노가 되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나를 욕하느냐?"며 꾸짖었다. 노복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듣고 크게 화가 난 척준경은 그 길로 이자겸의 집으로 달려가 "내 죄가 크니 관아에 가서 스스로 변명하리라." 하고 따진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이자겸은 아들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 화해를 청했지만, 척준경은 "전날의 난리는 모두 너희가 한 짓인데, 어찌 내 죄라고만 하느냐? 차라리 고향에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겠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노복들의 하찮은 싸움에서 번진 두 집안의 갈등으로 결국 이자겸은 죽음을 맞게 된다.
인종이 계속해서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이자겸은 그해 5월 인종을 죽이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기 위해 음모를 꾸몄는데, 당시 상황을 고려사(高麗史) 역신열전(逆臣烈傳) 이자겸조(李資謙條)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5월 초하루 임금이 연경궁(延慶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자겸이 궁의 남쪽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북쪽 담을 뚫어 궁 안으로 통하게 하고, 군기고의 갑옷과 무기를 가져다 집 안에 간직하였다. 임금이 홀로 북쪽 동산에 나아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얼마 후에 이자겸이 십팔자(十八子)의 비결대로 제위를 노림 떡에 독약을 넣어 임금에게 드렸는데 왕비가 비밀리에 임금께 그 사실을 알려 대신 그 떡을 까마귀에게 주었더니 까마귀가 죽었다. 이자겸은 다시 독약을 보내 왕비를 시켜서 임금께 드리게 했는데, 왕비가 대접을 들고 가다 일부러 넘어져 엎질러 버렸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의 반목을 알게 된 최사전은 이자겸이 계속해서 인종을 독살하려 하자 다시 척준경을 찾아가 그를 종용했다. 마침내 인종의 뜻에 따라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결심을 곧힌 척준경은 글을 올려 충성을 맹세했다. 인종은 "국공(國公)이 비록 제 분수를 모르고 방자하나 아직 반란을 일으킨 형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좀 더 기다렸다가 이에 대응해도 늦지 않다."며 척준경에게 때를 기다리라고 전했다. 지난 2월 섣불리 움직였다가 화를 당한 인종으로서는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 후 인종은 내시 조의를 척준경에게 보내 "오늘 숭덕부(崇德府)의 군사들이 무기를 지니고 대궐 북쪽에 이르러 장차 침문으로 들어올 듯한데, 만일 짐이 해(害)를 당한다면 실로 짐이 부덕한 탓이다. 하지만 원통한 것은 태조께서 창업한 이래 역대 선황이 서로 계승하여 짐에게까지 이르렀는데, 만일 다른 성(姓)으로 바뀌게 된다면 짐의 죄만이 아니라 보필하는 대신들에게도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라건대 경은 일은 잘 도모하라."는 밀지를 전했다.
척준경은 즉시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과 상의한 뒤 갑옷을 입고 궁궐로 들어가 인종을 호위했다. 이자겸의 무리가 인종을 호위해 나오는 척준경을 향해 활을 쏘자, 척준경은 칼을 빼어 들고 호통을 쳐서 이들을 쫓아 버렸다. 그 후 인종이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군기감에 머물고 있을 때, 척준경이 강후현을 시켜 이자겸을 불렀다.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이자겸은 궁궐로 들어가 척준경을 찾았다. 척준경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이자겸과 그의 처자를 체포하여 팔관보에 가두게 하고, 그를 따르는 장수들의 목을 베었다.
이자겸은 아내 최씨와 아들 이지윤과 함께 영광으로 귀양가고, 이지미는 합주, 이공의는 진도, 이지언은 거제, 이지보는 삼척, 의장과 이지원은 함종, 이자겸의 추종자인 박표, 문중경 등과 그의 무리들 또한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졌다. 이자겸의 친당인 평장사 이자덕(李慈德)과 김인규(金仁奎) 등은 모두 수령으로 좌천되었다.
그 해 12월에 이자겸은 귀양지 영광에서 처형되었고, 간관들의 상소에 따라 인종의 비로 있던 그의 두 딸 또한 폐비(廢妃)로 전락하여 이자겸의 제위 찬탈 음모는 일단락되었다. 외척이자 고려 최고의 문벌귀족으로써 온갖 권세를 누리며 국정을 농락하다 제위까지 넘보았던 이자겸의 욕심은 결국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불러왔다. 문종(文宗)대부터 7대 80여년 동안 큰 권세를 누려왔던 경원(慶源) 이씨(李氏) 가문은 이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이자겸을 제거하는데 공훈(功勳)을 세워 뒷날 문하시중에 오른 이공수가 간신히 경원 이씨의 명맥을 이었을 뿐이다. 이공수는 이자연(李子淵)의 동생 이자상(李子相)의 손자로 평장사를 지낸 이예(李例)의 아들이다.
이자겸을 제거한 공로로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오른 척준경의 권세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는 1년 뒤인 1127년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이 "병오년(서기 1126년) 봄 2월에 척준경이 최식 등과 더불어 대궐을 침범할 때에 성상께서 신봉문 문루로 나오셔서 군사들을 타이르니 모두 갑옷을 벗고 환성을 올려 만세를 부르는데, 오직 척준경이 조서를 받들지 않고 군사를 위협하여 활을 쏘니 화살이 성상의 수레 위로 지나가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군사를 거느리고 난입하여 궁궐을 불태우고 이튿날 성상께서 남궁으로 옮기시자 성상의 측근들을 모두 죽였으니, 옛날부터 난신(亂臣) 중에 이와 같은 자는 없습니다. 5월의 사건은 일시의 공로요, 2월의 사건은 만세(萬世)의 대역(大逆)이오니, 어찌 일시의 공으로 만세의 죄를 덮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탄핵하여 암타도로 유배된 것이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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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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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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