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姜邯贊) 장군은 본래 문관(文官)으로 관직에 진출했으면서도 국난을 당하자 상원수(上元帥)로 전쟁터에 나가 뛰어난 지휘력과 탁월한 용병술로 요나라의 10만 대군을 격퇴시킨 고려 초기의 명장이다. 구주대첩(龜州大捷)으로 유명한 그의 빛나는 전공(戰功)으로 인해 고려는 외환을 극복하고 5백년 왕조사의 기틀을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강감찬 장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지략이 뛰어난 비범한 인물이었다. 전설적인 출생설화부터가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따르면 강감찬의 외모에 대해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어디 사람의 인격과 재능이 외모의 잘나고 못남에 정비례하랴. 그는 학문을 사랑하고 재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품이 고매하고 처신이 신중하며 위엄이 있어 정적(政敵)을 만들지 않았다. 또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관직에서는 청백리의 모범이었던 충신이자 영걸이었다.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구국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인 서울 관악구 봉천동 218번지의 낙성대(落星垈)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60년대 초 1964년부터 보수공사가 시작되었고, 1972년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다시 1973년부터 이듬해까지 대대적인 보수정화공사가 실시되어 사당인 안국사(安國詞)와 본래의 출생지에 서 있던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고 한자로 새겨진 삼층석탑도 옮겨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유허비를 세우고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하였다.
황폐해 있던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 낙성대가 새로운 사적지로 단장된 것과 함께 오랜 세월을 두고 잊혀진 채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던 그의 묘소도 1963년에 충북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 국사봉 뒤쪽 기슭에서 묘지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이듬해 12월에 후손들이 봉분을 다시 만들고 묘역도 정비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강감찬 장군을 찬양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극진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하심이여! 국가에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에는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顯宗) 원년에 역신이 변란을 일으키고 거란의 강적이 내습하여 안으로는 내홍(內訌)이, 밖으로는 환란(患亂)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장차 이 나라가 어찌 되었을지 알 수가 없다.'
을지문덕(乙支文德), 최영(崔瑩),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더불어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전공(戰功)을 세워 외침(外侵)을 물리치고 국난(國難)을 극복한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는 강감찬(姜邯贊) 장군은 서기 949년에 현재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인 경기도 금주(衿州)에서 출생하였다고 전해진다. 본명은 은천(殷川)이라고 했다.
● 명문가에서 태어나 처음엔 문신으로 등용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강감찬(姜邯贊) 편에는 세상에 전해져오는 이야기라면서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949년에 어떤 사신이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올 무렵에 어느 집 하늘에서 커다란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마침 그 집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 말을 듣고 사신이 기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 데려다 길렀는데 바로 강감찬이라는 이야기이다.
또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림(東國輿地勝覽)에도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뒷날 강감찬이 조정에서 벼슬을 할 때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강감찬을 보더니 자리에서 내려와 절을 올리면서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 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여기서 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곡성이란 도가(道家)애서 말하는 9성 가운데 네번째 별로서 학문을 주재하는 별 이름이니 강감찬이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력도 뛰어났다는 의미에서 생겨난 전설일 것이다.
또한 생가를 낙성대(落星垈)라고 부른 것도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엇을 것이다. 그러나 강감찬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니 임금의 사신이건 누구건 남이 데려다가 길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강감찬의 관향은 진주(晉州)로서 그의 5대조 여청(餘淸)이 신라로부터 시흥군으로 이사해 살았고, 아버지 궁진(弓珍)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건국에 공훈(功勳)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사람이다. 그가 태어난 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지 13년째 되는 해였다. 강감찬은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했고, 또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
건국 초였던 당시 고려는 안으로는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확립되어 광종(光宗) 때부터는 과거제도를 통해 인재를 뽑는 등 안정 궤도에 접어들었으나, 밖으로는 거란족(契丹族)의 침공 위협이 점차 커져가는 시기였다. 거란족은 만주 지역을 발판으로 세력을 키워 요나라를 세우고 926년에는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을 모아 건국했던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갈수록 강성해져 고려의 북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 고려(高麗)는 국호부터 고구려(高句麗)의 후신(後身)을 자처하는 한편, 고구려의 옛 땅을 찾고자 하는 북진정책을 취해왔으며, 발해가 망하자 그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요나라와의 교섭을 단절해 버렸다. 그 대신 요나라의 적국인 송나라와는 친교를 유지하니, 이에 분노한 요나라는 고려를 침략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강감찬이 태어나서 자랄 때는 그 무렵이었다. 그는 983년 12월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시 어전에서 보는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해 문관(文官)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때 이미 35세였으니 명문 출신에 총명한 머리로는 꽤나 늦은 나이였다.
● 외모와 달리 고매한 인품에 탁월한 자질 갖춰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은 강감찬의 사람됨에 대해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강가찬은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여 자기의 재산경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체격이 작고 용모가 보잘것없었으며, 평상시에는 해지고 때 묻은 옷을 입고 있어서 그를 보통사람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일단 엄숙한 태도로 조정에 나가서 국사를 처리하며 국책을 결정할 때에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당시에 풍년이 계속되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 나라가 평온한 것을 사람들은 강감찬의 공덕(功德)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겼다.'
이처럼 그는 외모는 비록 잘생기지 못했지만 위엄이 있어서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부족한 것 없이 부유한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것을 멀리하여 늘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관직에서도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했다.
강감찬은 이처럼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자질을 인정받아 뒤늦게 시작한 벼슬길이지만 착실히 승진을 거듭해 1010년에는 차관급인 예부시랑이 되었다. 그의 나이 62세 때였다.
요나라의 40만 대군이 고려를 침범해온 것이 바로 그해였다. 이보다 앞선 993년에 요나라의 첫번째 침입이 잇었다. 소손녕(蕭遜寧)을 총사령관으로 한 요나라의 80만 대군이 쳐들어온 그때에는 고려의 중군사(中軍使) 서희(徐熙)가 단신으로 적진에 걸어들어가 오로지 세 치 혀로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인 결과 화의가 성립되어 그대로 물러간 적이 있었으나 이번의 두번째 침공은 문제가 달랐다.
요나라의 두번째 침입이 있기 전에 이런 일이 잇었다. 1009년에 김치양(金致陽)이 황제의 어머니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밀통해서 몰래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려는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미리 안 목종(穆宗)이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康兆)를 시켜 김치양을 죽이도록 했다. 이때 강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와서 김치양 일파를 숙청한 뒤 목종과 천추태후까지 쫓아냈다. 그리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새 황제로 추대했으니 그가 현종(顯宗)이다. 하지만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강조가 내친 김에 목종까지 죽여 없앴고, 이 소식을 들은 요나라의 황제 성종(聖宗)이 트집을 잡아 임금을 죽인 역신 강조를 문죄한다는 명목으로 현종 즉위년 11월에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온 것이다.
이에 군권(軍權)을 장악한 강조가 행영도통사가 되어 30만 대군을 이끌고 적군을 막으로 나갔으나 통주에서 대패하고 자신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12월에 요나라 군사들이 서경까지 밀고 내려오자 고려 조정은 어전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는데 거의가 중과부적이요, 역부족이니 항복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그때 오로지 강감찬만이 반대하고 나섰다.
● 모두가 요(遼)에 항복하자고 할 때 유일하게 반대
"오늘의 사태는 모두가 강조의 탓이니 조금도 걱정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힘에 겨운 전쟁이니 마땅히 적의 예봉을 피하고 시간을 끌면서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비록 차관급이지만 그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던지라 아무도 반대하지 못했다. 강감찬은 황제에게 권해 남쪽으로 파난토록 했다. 현종이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하는 동안 양규(楊規), 김숙흥(金叔興), 정성(鄭成) 등의 맹장(猛將)들이 곳곳에서 유격전(遊擊戰)으로 요나라 군사들에게 피해를 입히며 적의 기세를 죽이는 한편, 하공진(河供辰) 등은 외교적 노력을 벌여 마침내 강화가 이루어졌다.
현종(顯宗)이 개경으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 2월이었다. 계책으로 항복의 치욕을 방지한 공로로 강감찬은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를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승진하였다. 그는 사직단을 수축할 것과 예관(禮官)을 시켜 예절에 관한 규범을 제정할 것을 황제에게 건의했다. 그리고 이부상서로 전임되었다.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외곽에 성곽을 축조하고, 강동 6성 및 각 지방의 성곽도 튼튼히 정비하여 국방력을 더욱 강화했다. 또한 과거제를 활성화시켜 인재를 발탁하고 우대함으로써 중앙집권제와 왕권을 동시에 강화하기도 했다.
당시 강감찬에게는 개령현에 토지 12결이 있었는데, 그는 임금에게 아뢴 뒤 이를 모두 자식이 군대에 간 집안에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모두 탄복했다. 이어서 그는 서경유수, 내사시랑 겸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로 임명되었는데, 현종이 임명장의 여백에 이렇게 써서 주었다고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은 전한다.
'경술년 중에 오랑캐의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이 침입한 전란이 있었다. 그때 만약 강공의 책략을 채용하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 옷을 입을 뻔했다.'
그해가 1018년, 그의 나이 이미 70세였다.
● 해마다 침범해 고려를 괴롭힌 요군(遼軍)
요나라의 세번째 침입이 벌어진 것이 바로 그해 1018년 12월이었다. 고려 황제의 내조(來朝)와 강동의 6성 반환이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계속 묵살하자 요나라는 마침내 소배압(蕭排押)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파견해 또 다시 고려를 침략했던 것이다. 요사(遼史)에 의하면 이때 요나라 군사를 총지휘한 소배압이 첫번째 고려 침공 때에 요군(遼軍)의 사령관이었던 소손녕(蕭遜寧)의 형이라고 전해진다.
그동안 요는 참으로 끈질기게 고려를 괴롭혀왔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요나라는 해마다 고려에 군대를 보내 크고 작은 싸움을 걸어오는 한편, 사신을 보내 고려 황제가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성(上京城)에 들어와 직접 요나라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라는 무례한 요구를 하고, 또 강동 6성을 반환하지 않으면 무력(武力)으로 보복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적통을 자처하고 건국한 고려, 태조(太祖) 이래 북진정책을 추진해오던 고려가 거란 오랑캐의 그따위 돼먹지 못한 공갈협박에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다라서 양국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1013년에 요황(遼皇) 성종(聖宗)은 야율행평(耶律行平)과 이송무(李松茂)를 보내 강동 6성의 반환을 강요했고, 그 이듬해에는 소적렬(蕭敵烈)에게 군사를 주어 통주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홍화진 수비대장 정신용(鄭神勇)과 별장 주연(周演)이 맹렬한 전투 끝에 요군을 물리쳤다. 요군은 이듬해인 1015년 정월에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양안에 성을 쌓아 홍화진을 포위했으나 고적여(高積餘)와 조익(趙翊)이 고려군을 지휘하여 한 치의 양보가 없는 수성전(守城戰)으로 적군을 격퇴시켰다. 그러자 요나라는 그해 9월에 다시 이송무를 보내 같은 요구를 되풀이했고 고려 조정은 여전히 냉담하게 거부했다.
끈질긴 요나라는 1016년에는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렬(蕭屈烈)이 거느린 군사들을 파견하여 침공해왔고, 1017년에도 소합탁(蕭合卓)의 군대를 보내 침공했으나 모두 강민첨(姜民瞻), 김승위(金勝威)가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격파되어 패퇴(敗退)하였다. 그러자 1018년 12월에 마침내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요나라가 10만 대군을 보내 세번째 고려 침략을 개시하자 현종은 강감찬을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임명하여 상원수(上元帥)의 직책을 제수하고,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副元首)로, 내사사인 박종검(朴從儉)과 병부낭중 유참(柳參)을 각각 판관으로 삼아 그동안 요나라의 내침에 대비하여 길러온 20만 8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적군을 막도록 했다.
강감찬이 전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오늘의 안주인 영주에 주력부대를 주둔하여 현재 의주인 홍화진까지 이르게 하고, 1만 2천여명의 기병을 선발하여 산중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의 동쪽을 흐르는 대천(大川)의 물을 막고 기다리게 했다가 적군이 진격해오자 일시에 막았던 물을 터놓게 했다. 강감찬은 적군이 뜻밖의 기습에 당황하여 큰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명령을 내려 적병들에게 활을 쏘거나 접근전(接近戰)을 통해 수많은 적병을 참살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첫번째 전투는 고려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소배압은 홍화진을 우회하여 개경을 향해 바로 남진했다. 강감찬은 강민첨으로 하여금 요군을 추격하도록 하는 한편, 도처에서 적을 무찔러 무수한 사상자를 내게 했다. 그로나 소배압의 주력부대는 이듬해인 1019년 정월에 이미 개경에서 10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오늘의 황해도 신계까지 남하하고 있었다.
● 상원수로 출전, 요나라의 10만 대군을 거의 전멸시켜
요군이 개경 가까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현종은 도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농작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거두어들이며, 성밖의 집들까지 모두 부수게 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명림답부(明臨答夫)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 이래 우리 민족이 중국 세력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자주 사용하던 청야전술(淸野戰術)이었다. 고려 조정은 또 한번 비밀리에 기병 3백명을 금교역으로 보내 어둠을 틈타 적군을 기습토록 하여 큰 타격을 가했다.
전선(戰線)의 강감찬도 병마판관 김종현(金種鉉)에게 군사 1만명을 따로 주어 개경으로 달려가 수도를 방어토록 하였다. 사상자가 늘어나고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소배압은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강감찬은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곳곳에서 적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남은 적군이 구주에 집결하자 마침내 양군의 주력 병력이 전면전(全面戰)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는 처음에 밀고 밀리는 공방전(攻防戰)으로 전개되다가 김종현이 거느린 고려군 기갑병 1만여명이 합세하자 전황은 급변했다. 게다가 바람까지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었다. 화공을 당하면 큰일이라고 여긴 소배압은 퇴각을 서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강감찬의 호령 일하에 고려군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요나라의 10만 대군은 거의 몰살하다시피 한 참패를 당했으며 살아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간 적병은 2~3천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요나라 황제 성종은 간신히 목숨만 살아서 돌아온 소배압을 질책하며 패전(敗戰)의 책임을 물어 파직하고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이 구주대첩(龜州大捷) 이후 요나라는 다시는 고려를 침범하지 못했다. 백발백수가 성성한 71세의 개선장군 강감찬이 삼군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수많은 포로와 노획 물자를 바치니 현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도성 밖 영파역까지 마중 나와 연회를 베풀고 극진히 환영했다. 고려사(高麗史)는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전한다.
'임금이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의 꽃을 손수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준 뒤,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축배를 들어 그를 위로하고 찬양하여 마지않으니 강감찬은 분에 넘치는 우대에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의를 표시했다. 나라에서는 개선을 기념하여 역의 이름을 홍의로 고치고 역리들에게 특별히 주와 현의 아전들이 쓰는 것과 같은 갓과 띠를 주었다.'
요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은 뒤 강감찬은 연로함을 사유로 은퇴를 주청했으나 황제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3일에 한 번씩 입궐케 하고, 작위와 함께 식읍 3백호를 하사했다. 그는 이듬해 6월에야 비로소 실무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러나 황제는 은퇴한 그에게 계속 벼슬을 내려 1031년에는 수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고, 이듬해에는 식읍을 1000호로 늘려주었다. 하지만 강감찬은 여전히 평민과 다름없이 검소한 의복과 음식으로 조용히 노년을 보내다가 그 이듬해인 1032년에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강감찬이 죽자 황제가 3일간 조회를 멈추고 인헌(仁憲)이란 시호를 주고 백관에게 그의 장례식에 참석토록 명령했다.
● 출생지 봉천동에 낙성대, 청원 옥산면에 묘소
끝으로 강감찬 장군이 출장입상한 구국의 영웅이었을 분만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고 존경받던 목민관이었음을 전해주는 전설 한 가지를 소개한다.
그가 남경판관으로 있을 때 호환(虎患)이 자주 일어나 사람들이 마음놓고 살 수가 없었다. 하루는 걸음이 가장 빠른 사령(使令)을 불러 "여기서 제일 높은 산이 어디냐?"고 물었다. 사령이 "예, 삼각산이 제일 높고, 그 곡대기가 백운대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강감찬이 편지를 한 장 써서 사령에게 주면서 "얘야, 너 그곳에 가면 늙은 중이 바위에 앉아 이를 잡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보이면 따라 올 테니 데리고 오너라" 하고 일렀다.
대낮에도 호랑이가 사람을 마구 물어가던 때라 사령이 벌벌 떨면서 백운대로 올라가자 과연 노승 하나가 이를 잡고 있었다. 강감찬이 준 편지를 보이자 그가 군말 없이 따라왔다.
노승이 대령하자 강감찬이 호통을 쳤다.
"너는 어찌 짐승으로서 감히 사람들을 해치느냐? 너희 무리를 이끌고 백두산 이북으로 가되 암수 한 마리씩만 남기고 모조리 사라져야 하느니라."
노승으로 둔갑한 호랑이가 앞발이 닳도록 용서를 빌었으나, 강감찬은 "듣기 싫다! 썩 물러가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소리지르면서 궁시(弓矢)를 겨누어 쏘려고 했다. 그 뒤부터 남경에서 호환이 없어졌다고 한다.
낙성대 버스종점에서 서울대학교 후문 쪽으로 5분쯤 올라가면 길 왼쪽에 강감찬 장군의 사당인 안국사가 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 낙성교를 건너 안국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높이 4.48m의 사리탑 형식의 삼층석탑이 보인다. 남면으로 향한 초층 탑신에 '강감찬낙성대(姜邯贊落星垈)'라고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원래 이 탑은 낙성대 위치에서 북쪽으?? 약 300m 떨어진 봉천동 218-14번지 농가 마당에 서 있었다. 고고학자 김희경(金禧庚) 박사가 오랜 수소문과 현지답사 끝에 낙성대를 발견해 세상에 소개하던 1960년대 초에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봉천리 탑동에 속했다.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구국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유적인 생가터 낙성대 위치가 밝혀지자 1964년부터 보수공사가 시작되고, 높이 4.48m의 삼층석탑은 1972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이듬해부터 2년 동안 현재의 자리에 강감찬 장군 유적지 정화공사를 실시하며 사당인 안국사와 안국문, 낙성교를 만들고 삼층석탑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리고 석탑이 있던 본래 잘에는 유허비를 세웠다.
한편, 낙성대와 더불어 우리 못난 후손들에 의해 까마득히 잊혀져 있던 강감찬 장군의 묘소도 19세손인 강우근(江祐根)씨 형제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끝에 1963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국살 구암동 국사봉 뒤쪽 기슭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로써 이듬해 12월 그 위치에 묘소를 새로 만들고 묘역을 정비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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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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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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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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