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徐熙)는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서 큰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강직하고 울곧은 성격으로 임금이 잘못할 때마다 간언을 하여 잘못을 바로잡은 충신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희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요나라의 침략 당시 뛰어난 외교력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는 태조(太祖) 때부터 화북지방을 지배하며 국경을 맞대고 있는 거란족(契丹族)의 국가 요(遼)를 배제하고, 중국 중, 남부를 지배해 온 후진(後晉), 후주(後周)와 친교를 맺어왔다. 그러나 북쪽은 여진(女眞)과 거란(契丹)에 가로막혀 있어 해상으로 교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외교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거란은 끊임없이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희는 바다 건너 송나라에 가서 단절된 외교를 회복하고, 이를 빌미삼아 요나라가 쳐들어오자 적장과의 외교 담판을 통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까지 얻어냄으로써 역사에 길이 남을 공훈(功勳)을 세웠다.
● 송(宋)과의 단절된 외교를 회복하다.
천수(天授) 25년(서기 942년), 내의령을 지낸 서필(徐弼)의 아들로 태어난 서희(徐熙)는 열여덞살 나던 해인 96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에 올랐다가 이어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72년, 황명을 받아 송나라에 파견된 서희는 최업, 강례, 유은 등과 더불어 뱃길을 통해 송나라로 건너갔다. 북쪽으로는 여진(女眞)과 거란(契丹)에 가로막혀 있어 육로로는 송나라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황(宋皇)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은 어렵게 건너온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기는 커녕 오히려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것은 송나라가 건국된 지 10년이 넘도록 아무런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고려 조정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려(高麗)가 당시 송나라와 중원을 놓고 대립하고 있던 요(遼)외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여겼다.
서희는 성심을 다해 송나라의 태조에게 그 이유를 해명했다. 그동안 고려 조정이 외교사절을 보내지 못한 것은 여진과 거란이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설명한 것이다. 서희의 사리에 맞는 빼어난 말솜씨와 예의 바른 태도에 감명한 태조는 서운했던 마음을 풀고 비로소 고려와 정식으로 외교를 맺었다. 그리고 특별히 조칙을 내려 서희에게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라는 직책을 수여했다. 이로써 서희는 외교관으로 회려한 첫발을 내딛었다.
● 적국에게 국토를 내줄 수 없다.
993년 8월, 요나라의 80만 대군이 고려에 쳐들어왔다. 요나라는 이에 앞서 궐열(獗閱)을 사신으로 보내 화의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요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란족(契丹族)은 5세기 이래 내몽골 시라무렌 강 유역에 거주하던 몽골계 유목 민족이다. 당나라 때 강력한 힘을 가진 8개 부족이 연합하여 큰 세력을 이루었고, 10세기 초 추장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내외 몽골 및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나라를 세웠다. 그의 아들 태종(太宗)애에 이르러 국호를 요(遼)라 했고, 성종(聖宗)대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후삼국 통일 이후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북진정책(北進政策)을 추진했다. 특히 발해 유민에 대해 포용정책을 취함으로써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요나라는 고려와의 교류를 통해 국제 사회로부터의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나, 고려는 동족국가로 생각하고 있던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요나라는 계속해서 고려 조정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침략 쪽으로 정책을 바꿨다. 그러자 고려의 서쪽 경계에 살며 고려 조정에 협조해온 여진족은 이러한 요나라의 움직임을 통보해 왔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여진족의 보고를 받고도 그 사실을 의심하여 침략에 대한 방어책을 세우지 않았다. 여진족이 재차 요나라 군대의 진격 사실을 알려오자 그제야 고려 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급히 대비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성종(成宗)은 각 지방으로부터 군사를 불러모은 다음, 시중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로, 당시 내사시랑으로 있던 서희(徐熙)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崔亮)을 하군사로 각각 임명하여 북계로 나가 요나라 군사를 막게 했다. 성종 또한 서경을 거쳐 안북부로 나가 정세를 관망하였다.
소손녕(蕭遜寧)을 총지휘관으로 삼은 요나라의 80만 대군은 단숨에 봉산군까지 내려와 윤서안(尹誓安)이 이끄는 고려군을 격퇴시키고 사신을 통해 고려 군신의 항복을 요구해 왔다.
"대조(大趙)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 나라가 강계를 침탈하니 이에 와서 토벌한다."
태조 이래로 추진해 왔던 북진정책은 성종 때에 와서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요나라의 주장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손녕은 다시 사신을 보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대군을 이끌고 모조리 소탕할 것이니 즉시 항복하여 목숨을 보존하라."는 협박 서신을 보내왔다. 이어 소손녕은 "우리는 80만 대군이니 바른 시일 안에 압록강가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너희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러니 고려의 모든 군신들은 내 진영으로 와서 항복하라."며 계속해서 고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이러한 요나라의 요구를 두고 고려 조정에서는 군신회의가 열렸다. 고려의 중신들은 하나같이 소손녕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여 서경 이북의 땅을 요나라에 내어주고 절령으로 경계를 삼자는 할지론(割地論)을 펼쳤다. 성종 또한 이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때 그 의견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서희였다.
"저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취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사실은 우리 고려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적군의 병력이 많은 것만 보고 서경 이북의 땅을 내놓는 것은 결코 올바른 계책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삼각산 이북은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인데 만일 요나라가 한없는 욕심으로 또 다시 내놓으라고 강요한다면 그마저도 내주시겠습니까? 옛 나라도 그렇기만 태조께서 이 나라를 건국하신 이래 우리 영토를 다른 나라에 내준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라에게 굴복하여 영토를 내준다면 자손만대의 치욕이 될 것입니다."
서희는 요나라 군사들이 더 이상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고 계속해서 항복만을 요구해 오는 것을 보고 그들의 속셈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때 민관어사 이지백(李支白)이 서희의 의견에 찬성하면서 중국풍을 즐기는 성종을 은근히 꼬집고 나섰다.
"차라리 금은보화를 소손녕에게 주고 그의 속마음을 타진해 보는 것이 어떠합니까? 국토를 경솔히 적국에 할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선대로부터 전해오던 연등회(燃燈會)나 팔관회(八關會) 등의 국가적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다른 나라의 풍습을 멀리함으로써 나라를 보전하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성종은 서희와 이지백의 주장을 듣고 자신이 한순간 잘못 생각한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요나라와의 화의를 취소했다.
● 싸우지 않고 외적을 몰아낸 외교 능력
고려 조정이 화전 양론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사이 소손녕은 진영에 앉아 고려가 항복해 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서희와 이지백의 주장으로 결국 요나라와의 화의를 포기한 고려가 항복한다는 답변을 보낼 리가 없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려가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소손녕은 다시 한 번 힘을 과시할 목적으로 안융진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그곳을 지키고 있던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劉方)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군사 3천여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는 패배를 당했다. 대도수는 발해가 멸망하자 고려로 귀화한 발해 황족 대광현(大光顯)의 후손으로 어느 누구보다도 요나라와의 전투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뜻밖의 패배를 당한 소손녕(蕭遜寧)은 진영만 굳게 지키고 앉은 채 사람을 보내 고려의 항복을 독촉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합문사 장영(張英)을 요나라 진영으로 보냈지만 소손녕은 거드름을 피우며 만나주지 않았다.
이때 소손녕의 속셈을 훤히 꿰둟어 보고 있던 서희는 적진으로 나아가 소손녕과 담판을 짓겠다고 자원하였다. 서희는 안융진 공략에 실패한 뒤 더 이상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고 계속해서 항복만을 요구하는 소손녕의 태도에서 화해의 가능성을 탐지했던 것이다.
서희가 요나라 진영에 도착하자 소손녕은 여전히 거드름을 피우며 그에게 뜰 아래서 절할 것을 요구했다. 서희는 즉시 반박하고 나섰다.
"무릇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에는 뜰 아래서 절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대가 요나라의 신하이듯 나 도한 고려의 신하로 양국의 대신이 만나는데 어찌 군신의 예의를 갖추라는 것인가?"
소손녕은 서희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서희가 누구인가? 송나라의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을 설득하여 10여년 동안 단절되었던 국교를 회복하고 벼슬까지 받은 그였다. 게다가 서희는 안융진 전투(安戎鎭戰鬪)에서의 패배로 요나라 군사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자신을 낮추면 협상 과정에서 적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결코 소손녕에게 기가 꺾일 서희가 아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뜰에서 상견례를 한 후 마주 앉아 협상에 들어갔다. 먼저 소손녕이 입을 열었다.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예로부터 우리의 것이었다. 또한 고려는 우리 요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멀리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에 부득이 공격을 감행하게 되었다."
이에 서희는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반박했다.
"우리 고려는 옛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므로 국호 또한 '고려(高麗)'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굳이 지리적인 경계를 따지자면 지금 그대 나라의 도읍인 동경(東京)도 실은 우리 고려의 땅이랄 수 있는데 어찌 침탈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뿐 아니라 압록강 안팎 역시 우리 영토인데 지금은 여진족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어 그대의 나라에 가는 것이 바다 건너 송나라에 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결국 그대의 나라와 우리 고려가 국교를 맺지 못하게 된 것은 모두 여진족 때문이다. 만약 여진족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은 뒤 성을 쌓고 길을 열면 어찌 국교를 맺지 않겠는가!"
소손녕이 내세운 침략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송나라와의 결전에 앞서 고려와 송나라의 동맹관계를 단절시키고, 더 나아가 고려를 자신들에게 복속시킴으로써 송나라와의 결전에 전력을 쏟기 위해서였다. 둘째는 고구려의 계승권을 가진 요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장악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압록강 동쪽 평안도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사전에 고려의 도전 의지를 꺾어 놓겠다는 의도였다.
서희는 소손녕이 내세운 두 가지 이유 중 두번재 것은 명목에 불과하고, 근본적인 침략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국교 단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반박과 설득을 통해 요나라에게 철군 명분을 주었다. 서희의 배어난 말솜씨와 높은 기개로 보아 어떤 위협으로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손녕은 마침내 철군하였다. 서희의 국제 정세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논리 정연한 주장 등이 가져온 외교적 승리였다.
요나라와의 담판 결과, 고려는 요나라로부터 고구려 계승권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 280리에 달하는 지역을 얻어냈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이후 처음으로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렀다. 요나라는 형식적이나마 고려를 복속시켰으며, 고려와 송나라의 외교 단절에 성공했다. 고려는 실리를 얻었고, 요나라는 명분을 얻은 셈이다.
그러나 요나라가 압록강 동쪽을 고려의 영토로 인정했다 하더라도 여진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상 아직 완전한 고려의 땅이 아니었다. 994년에 서희는 황명을 받아 압록강 동쪽 280리의 개척에 나섰다. 군사들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진군한 서희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장흥 및 귀화의 두 진과 곽주와 귀주에 성을 쌓은 것을 시작으로 3년에 걸쳐 홍화진, 용주, 철주, 통주에 성을 쌓음으로써 강동 6주를 완성하였다.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얻은 땅에 자신의 손으로 성을 쌓음으로써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이다.
●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울곧은 성품
외교의 달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서희(徐熙)는 성격 또한 강직하고 올곧았다. 그는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잘못을 하면 즉시 직언을 올려 이를 시정하게 했다. 당시 성종(成宗)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은 모두 화의를 주장하고 나섰으나, 서희는 끝까지 이에 반대하여 결국 자신의 외교적 수완으로 이를 훌륭하게 해결했던 것이 대표적 예이다.
983년 성종은 서희를 수행하여 서경에 갔다. 그때 성종은 갑자기 미복 차림을 하고 영명사에 놀러가자고 했다. 이에 서희는 간곡하게 간하여 성종을 말렸다. 또 성종을 수행하여 해주에 갔을 때였다. 성종이 불쑥 그의 막사를 찾아와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그러나 서희는 "지존께서 들어오실 만한 곳이 못됩니다"라며 이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성종은 그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서희는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며 한사코 이를 거절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御酒)를 올렸다.
한번은 정우현(丁于鉉)이라는 관리가 봉사(奉事)를 올려 시정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그것이 성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성종은 정우현의 죄를 묻고자 한다며 중신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중신들 모두 성종의 의견에 찬성했다. 이때 서희는 정우현이 올린 봉사는 지극히 옳은 것이며, 모든 허물은 자신에게 있으니 오히려 정우현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며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성종은 말과 음식 등을 내려 직언으로 황제의 잘못을 바로잡은 서희를 위로해 주었다.
이렇듯 서희는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비록 황제 앞이라도 서슴없이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서희의 성격은 아버지 서필(徐弼)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광종(光宗)이 재위하던 당시 한번은 그동안 자신을 보필해 온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금으로 만든 술잔을 내렸다. 이에 서필은 금으로 만든 술잔은 분에 넘치는 일이며, 군신간에는 사용하는 그릇에도 차이가 있는데 신하가 금 그릇을 사용하면 임금에게는 어떤 그릇을 사용해야 하느냐며 이를 극구 거절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서필은 광종을 찾아가 자신의 집을 나라에 바치겠다고 했다. 광종이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묻자, 서필은 이렇게 대답했다.
"소신은 재상으로서 지금까지 아무런 불편 없이 잘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찌 제 자식들까지 재상의 집에서 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에서 주는 녹봉으로 작은 집이나마 새로 마련하여 자식들을 키우며 살겠습니다."
결국 서필은 자신의 집을 내놓고 가족과 함께 허름한 초가에서 살았다. 서필의 그러한 행동은 광종의 지나친 한화정책(漢化政策)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난히 중국 문화를 좋아했던 광종은 송나라에서 귀화한 사람들을 요직에 등용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대신들의 집을 빼앗아 그들에게 거처로 주기도 했다. 서필은 몇 차례에 걸쳐 이를 시정해줄 것을 광종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집을 바침으로써 광종을 은근히 꾸짖은 것이다. 그 후 광종은 다시는 대신들의 집을 빼앗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아버지 서필의 강직한 성품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서희는 오히려 성종의 총애를 받아 나랏일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성종이 서희를 얼마나 아끼고 총애했는지는 서희가 병석에 누웠을 때 성종이 보여준 행동에 잘 나타나 있다. 996년 병에 걸린 서희가 치료차 개국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성종은 친히 개국사에 들러 서희를 병문안하고, 어의 한 벌과 말 세 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주하고, 다시 개국사에 곡식 1천석을 시주하는 등 정성을 다하여 그의 완쾌를 빌었다.
그러나 서희의 완쾌를 그토록 염원했던 성종은 재위 16년만인 997년 10월, 서희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어 외교의 달인으로 한 세대를 풍미했던 서희도 그 이듬해인 998년, 쉰일곱살의 나이로 성종의 뒤를 따랐다. 서희는 현종(顯宗)대에 이르러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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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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