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光宗)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과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여 고려 초기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여러 호족과 개국공신들을 제압하고 미약한 왕권을 강화하여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정비를 꾀한 군주이다.
집권 초기에 공신들을 우대한 광종은 중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실시하고, 화엄종(華嚴宗)을 중심으로 불교 통합을 추진하여 개국공신과 호족들을 제압하는데 성공, 마침내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완성했다.
그러나 광종의 왕권 강화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재위 말년에 들어서면서 광종은 왕권에 반발하는 호족과 공신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는 공포 정치를 펼쳤다. 광종이 이렇듯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무리하게 왕권 강화를 추진한 것은 태조(太祖) 사후(死後) 혜종(惠宗)과 정종(定宗)이 호족과 개국공신들의 암투 속에서 단명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 선대왕(先代王)들의 연이은 단명(短命)으로 왕위에 오르다.
949년 정종(定宗)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동복아우 소(昭)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4대 국왕 광종(光宗)이다. 광종은 태조(太祖)의 넷째 아들로 서열상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태조 왕건(王建)은 여러 호족들과의 연대를 통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943년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개국공신과 호족들이 저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가운데 고려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왕권이 안정되지 못한 가운데 즉위한 혜종(惠宗)과 정종에게 개국공신과 호족들을 누를 만한 독자적인 세력이 없었던 까닭이다.
혜종은 태조의 맏아들로서 921년에 정윤(正胤)으로 책봉되어 그동안 태조를 보필하며 쌓은 정치적, 군사적 경륜을 바탕으로 태조의 뒤를 이었다. 하지만 태조는 예전에 태조가 "무(武)가 일곱 살 나던 해에 왕통을 이을 만한 덕이 있음을 알았으나 어머니(莊和王后 吳氏)가 미천하여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스럽다."고 했을 정도로 다른 이복형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원 세력이 빈약했다.
따라서 태조는 죽기 전에 혜종으로 하여금 왕규(王規)의 딸을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이게 했다. 왕규는 광주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태조에게 두 딸을 시집보냈는데, 또다시 딸을 혜종의 비(婢)로 바침으로써 태조와 혜종의 장인이 되었다. 국왕의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왕규는 염상(廉相), 박수문(朴洙文)과 함께 태조의 임종을 지킨 세명의 재신 중 한사람으로, 태조의 유명(遺命)을 내외에 선포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혜종의 즉위와 함께 시중에 오른 왕규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요(堯)와 소(昭)를 제거하기 위해 혜종에게 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며 참소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복동생인 요와 소를 해치려는 음모라고 여긴 혜종은 오히려 자신의 딸을 소에게 출가시켰다. 그러자 왕규는 혜종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군왕으로 옹립할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왕규의 시해 음모는 최지몽(崔知夢)과 박술희(朴述熙)의 발빠른 대응으로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왕위를 노리는 세력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혜종은 결국 재위 2년만인 945년, 세른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태조의 셋째 아들 요가 주위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3대 국왕 정종(定宗)이다.
그러나 정종 역시 혜종과 마찬가지로 단명(短命)하고 말았다. 정종은 서경을 기반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식렴(王式廉)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왕규 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식렴을 비롯한 서경 세력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던 정종은 불안한 정국 속에서 왕권을 수호할 목적으로 왕식렴의 세력 기반인 서경으로의 천도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던 중 동복아우 소에게 선위한 채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가 정종이 재위한 지 4년만인 949년으로 그의 나이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광종은 혜종과 정종의 연이은 단명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두 선대왕(先代王)이 권력을 잡기 위한 호족들과 귀족들의 암투 속에서 고군분투하다 단명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로서는 누구보다도 왕권 강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광종은 혜종과 정종이 박술희와 왕식렴이라는 외부의 강력한 세력 기반에 의지해 왕권을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을 기르기 위해 힘썼다.
● 개혁을 위한 준비 단계
광종(光宗)은 즉위 첫해 대광(大匡) 박수경(朴守卿) 등에게 명하여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의 공적을 가리게 하였다. 이때 광종은 자신이 즉위하는 데에 공로가 있던 사람들에 대항 크게 포상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세력을 공고히 했다.
곧이어 광종은 원보 식회와 원윤 신강 등에게 명하여 주(州), 현(縣)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공의 매수를 정하게 했다.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던 고려 초기에는 호족들이 그 일을 담당해 왔다. 그러므로 세공의 액수를 정한다는 것은 지방의 호족들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광종은 즉위한 해부터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대내외적으로 고려가 중원 제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주 의식을 나타냄과 동시에 고려 제왕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듬해 후주(後周)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는 후주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후 광종은 주로 불교 행사나 후주와의 외교 관계에 치중했을 뿐 특별한 개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이 시기 국내 정세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다. 성종(成宗)대에 최승로(崔承老)가 그의 시무책에서 "광종(光宗) 황상(皇上)께서는 아랫사람을 예로써 대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실수하는 법이 없었으며,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버리지 않으셨다.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정하며 형벌과 포상(褒賞)이 지나침이 없었으니, 광종의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三代)에 견줄 만하다."며 격찬할 정도였다. 이 시기 동안 광종은 여러가지 국내외 정책을 통해서 새 제왕으로서의 지위 및 정치적 기반을 닦는 한편, 차근차근 개혁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그러나 이후의 공포 정치에 견주어볼 때 이것은 마치 폭풍 전애와 같은 평온함이었다.
●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다.
재위 7년째 되던 해인 956년, 광종(光宗)은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개혁 정치의 중심에는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와 승려 균여(均如)가 있었다.
쌍기는 후주에서 대리평사(大理評事)를 지낸 인물로 봉책사(封冊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지 못하고 개경에 머물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광종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크게 만족하여 후주의 임금 세종(世宗)에게 표문을 올려 그를 신하로 삼게 해줄 것을 청했다. 후주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광종은 쌍기를 원보 한림학사(元甫翰林學士)에 임명하였다.
도대체 쌍기의 어떤 점이 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걸까? 아마 후주 건국 이후 국가체제를 정비하는데 관여했거나 그 과정을 지켜본 쌍기의 이야기가 왕권 강화와 이를 위한 통치체제의 정비를 염두에 두고 있던 광종에게 큰 감명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해 광종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여 쌍기에게 이를 주관하게 했다. 노비안검법이란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판별하여 양인의 신분을 되찾아준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의 실시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바로 호족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바로 노비였기 때문이다. 광종이 쌍기를 시켜 노비안검법을 주관하게 한 까닭은 연고가 없는 그를 내세워 공정을 기함으로써 그 시행 취지가 흐려지지 않도록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태조도 건국 직후 이와 같은 제도를 시행하려고 했으나 공신들의 동요가 우려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광종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공신과 호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심지어 광종의 비인 대목황후(大穆皇后) 황보씨(皇甫氏)까지 나서서 이를 폐지할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그러나 광종은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끝까지 노비안검법을 시행했다. 그리하여 호족들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노비안검법은 공신과 호족 세력을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신분 질서가 문란해지고 사회가 혼란해지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노비들이 거짓으로 주인을 모함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수없이 발생했던 것이다.
왕권 강화를 위한 광종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958년, 광종은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했다. 그해 5월에 실시한 첫번째 과거시험에서 광종은 쌍기를 지공거(知貢擧)에 임명하여 인재들을 선발하게 했다. 이것은 정치적 식견과 능력을 갖춘 새로운 관료층을 형성하기 위한 좇였다. 당시 고려 조정을 이루고 있던 관료들은 대부분 건국과 통일에 기여한 무장들이었다. 이들은 후삼국 통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던 존재였지만, 정치체제를 완성시키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 따라서 광종은 과거를 실시하여 유학적 소양을 갖춘 신진관리를 선발함으로써 자신을 충실히 보좌할 수 있는 인재들을 발굴하여 한 것이다.
과거제 실시로 인해 공신들과 호족들은 다시 한 번 세력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고려는 개국공신이나 호족의 자제들을 능력이나 특별한 절차를 따지지 않고 관리로 임용해 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를 이어가며 막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제를 통해 기존의 정치 세력이 아닌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게 되자 이들의 세력은 자연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즉위 11년째인 960년 광종은 관리들의 관직과 지위에 따라 각기 다른 색깔의 옷을 입게 했다. 공복의 제정으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관료들의 서열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와 같은 제도들을 실시함으로써 광종은 집권 초기 공신과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 피의 숙청 시대
960년 3월, 광종(光宗)은 정식적으로 칭제(稱帝)를 선포하고 준풍(峻豊)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했으며,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石)라 호칭하도록 했다. 고려는 이때부터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1270년까지 3백여년 동안 명실상부한 황제국(皇帝國)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러한 조치는 대내적으로는 왕실의 위엄을 높여 어누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고, 대외적으로는 고려의 자주성을 나타내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중국애서는 후주가 멸명하고 송나라가 건국되었는데, 광종은 이와 같은 중국의 왕조 교체기를 이용하여 고려의 대외적인 지위 향상을 꾀했던 것이다.
왕권 안정에 대한 집념이 누구보다도 강했던 광종은 공신과 호족들은 물론 자신의 혈육에 대해서도 늘 경계하고, 한번 의심하면 살육도 주저하지 않았다. 왕권 강화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해온 호족들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었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호족들이 크게 반발할 때마다 광종은 무자비한 숙청으로 맞서야 했다. 피의 숙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그해 3월에 있었던 평농서사 권신의 참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광종은 "대상 준홍과 왕동 등이 무리를 모아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권신의 참소를 믿고 준홍과 왕동 등을 즉시 귀양보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요망한 무리들이 참소로 그 뜻을 펴게 되어 어질고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죄를 씌우고,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고, 아들이 그 아비를 무고하여 항상 감옥이 차 넘치므로 따로 임시 옥사를 설치했으며, 죄가 없음에도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연이어 생겨났다."고 할 정도로 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비단 호족이나 관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광종의 의심이 날로 심해지자 왕족들 중에서도 몸을 보전하지 못한 이가 생겨났다. 심지어는 광종이 맏아들 유(柚)까지도 의삼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자,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서로 잘 아는 두 사람끼리도 감히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결과 광종은 수많은 호족들은 물론 조카인 흥화군(興和君)과 경춘원군(景春原君)마저 비명에 죽게 했다. 최승로(崔承老)가 '시무 28조'에서 "이때 살아남은 신하는 겨우 40여명에 불과했다."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당시 광종의 숙청 작업이 얼마나 철저하게 진행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광종은 지방의 각 주, 현에서 풍채 좋은 사람들을 뽑아 시위군을 강화했다. 시위군의 강화는 곧 관부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과거를 통해 뽑은 신진 관료들과 함께 문무 양면에서 광종의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들과 신진 관료 및 시위군을 우대하며 이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펴 나감에 따라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특히 쌍기(雙冀)를 비롯한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한 나머지 그들에게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준 것은 물론이고 여자를 골라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광종의 지나친 우대정책은 결국 신하들의 큰 반발을 샀다.
● 불교와 외교정책
태조가 불교를 숭상했듯이 광종 또한 맹신에 가까울 정도로 불교를 신봉했다. 그는 과감한 개혁을 통해 불교 교단을 정비하고 사상을 통일했는데, 이것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당시 불교계는 경전과 이론 중심의 교종과 참선에 의한 실천 중심의 선종으로 양립되어 있었다. 광종은 먼저 균여(均如)를 내세워 화엄종(華嚴宗)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했다. 이때 교종을 중심으로 불교 사상을 통일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 선종이었기 때문이다.
광종은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난립해 있던 선종마저 통합하고자 중국에서 유학 중인 승려 혜거(惠居)를 귀국시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선종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지눌(知訥)에 희애 조계종(曹溪宗)으로 통합된다.
화엄종의 통합은 962년 개경에 세운 귀법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광종은 균여를 이곳의 주지로 임명하여 후삼국 이후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된 화엄종을 통합하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광종은 태조와 어머니 신명순성황태후(神明順成皇太后)의 원찰(願刹)을 건립한 데 이어 귀법사를 비롯해 홍화사, 유암사, 삼귀사 등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그와 함께 갖가지 불교 행사를 벌였다.
또한 970년에는 거대한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이 불상을 조각하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사연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믄득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았는데, 아이는 보이지 않고 갑자기 땅에서 거대한 돌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광종은 그 돌로 불상을 만들기로 하고 전국 곳곳에 사람을 보내 조각할 사람을 찾았다. 이때 고승 혜명(慧明)이 자원하여 그의 감독 아래 장인 1백여명이 불상 조각에 착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상은 작업에 착수한 지 37년만에 완성되었는데, 흔히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불리는 이 불상은 높이 18.12미터, 둘레 9.9미터, 귀의 길이 1.8미터, 관의 높이 2.43미터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석불이다. 현재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석불이 바로 이것이다. 이 미륵불은 영험하여 나라가 태평하면 온몸에 광채가 나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온몸에 땀이 흘렀다고 한다.
광종은 또한 균여의 주관 아래 왕륜사에서 승과(僧科)를 실시하여 승려들의 자질 향상을 꾀했다. 그리고 혜거를 국사(國師)로, 탄문(坦文)을 왕사(王師)로 삼음으로써 왕사, 국사 제도의 기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종의 불교에 대한 맹신은 집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폐단을 낳았다. 광종은 참소만 듣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데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속으로 죄업을 빌고자 사원에서 여러 가지 불교 행사를 베풀었다. 그러자 거짓으로 출가한 무뢰배들이 걸식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또한 거리에서 백성들에게 떡가루, 쌀, 콩, 땔나무, 숯 등을 수없이 나누어주었으며, 황제가 행차하는 사원 근방에 방생소를 설치하고 불경을 강연하게 하였다. 이러한 각종 불교 행사로 인해 수많은 전곡이 탕진되었고, 이것은 결국 광종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광종은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려 노력했다. 즉위 초 광종은 후주와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치며 연호 광덕(光德)을 버리고 후주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960년에 후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서자 다시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964년 12월부터는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어 재위한 지 23년째인 972년에는 서희(徐熙)를 사신으로 송나라에 보내 외교 관계를 확고히 하였다.
광종은 국방정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북방개척에 힘썼던 광종은 967년에 낙릉을 점령하여 성을 쌓은 데 이어 968년에는 위화, 영삭, 장평, 안삭 등을 점령하여 성을 쌓았다. 또한 937년에는 장평, 박평, 고주 등을 점령하여 신도성을 수축했다. 이러한 광종의 북방정책은 고려의 영토를 확장하는 동시에 거란족과 여진족에 대한 방어책이기도 했다.
● 경종의 즉위와 함께 공신과 호족들이 재등장하다.
광종은 선대의 제왕들이 단명했던 것과는 달리 무려 26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여 고려 초기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 질서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공신과 호족들에 대한 지나친 숙청, 불교에 대한 맹신은 정국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의 개혁 정치를 실패로 되돌리고 말았다.
975년 광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맏아들 유(柚)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의 다섯번째 황제인 경종(景宗)이다. 광종의 죽음은 그동안 숨죽이고 지냈던 공신과 호족들의 화려한 부활을 의미했다. 이들의 재등장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는데, 이들은 광종 재위 말기부터 서서히 개혁 주체 세력들을 몰아내고 정치 일선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광종의 잘못된 정책들을 바로잡아 나갔다. 대사령을 내려 귀양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었으며, 죄에 대한 기록을 씻어주고 관직과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 임시 옥사를 헐고 참소하는 상소들을 불살라버리니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했다.
이로써 공신과 호족들은 다시 정치 일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경종의 구신들에 대한 예우가 지나쳐 복수법을 허락함으로써 또 한 차례 피바람을 부르는 대규모의 살육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상}
집권 초기에 공신들을 우대한 광종은 중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실시하고, 화엄종(華嚴宗)을 중심으로 불교 통합을 추진하여 개국공신과 호족들을 제압하는데 성공, 마침내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완성했다.
그러나 광종의 왕권 강화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재위 말년에 들어서면서 광종은 왕권에 반발하는 호족과 공신들을 가차없이 숙청하는 공포 정치를 펼쳤다. 광종이 이렇듯 피의 숙청을 단행하며 무리하게 왕권 강화를 추진한 것은 태조(太祖) 사후(死後) 혜종(惠宗)과 정종(定宗)이 호족과 개국공신들의 암투 속에서 단명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 선대왕(先代王)들의 연이은 단명(短命)으로 왕위에 오르다.
949년 정종(定宗)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동복아우 소(昭)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4대 국왕 광종(光宗)이다. 광종은 태조(太祖)의 넷째 아들로 서열상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해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태조 왕건(王建)은 여러 호족들과의 연대를 통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943년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개국공신과 호족들이 저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가운데 고려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왕권이 안정되지 못한 가운데 즉위한 혜종(惠宗)과 정종에게 개국공신과 호족들을 누를 만한 독자적인 세력이 없었던 까닭이다.
혜종은 태조의 맏아들로서 921년에 정윤(正胤)으로 책봉되어 그동안 태조를 보필하며 쌓은 정치적, 군사적 경륜을 바탕으로 태조의 뒤를 이었다. 하지만 태조는 예전에 태조가 "무(武)가 일곱 살 나던 해에 왕통을 이을 만한 덕이 있음을 알았으나 어머니(莊和王后 吳氏)가 미천하여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스럽다."고 했을 정도로 다른 이복형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원 세력이 빈약했다.
따라서 태조는 죽기 전에 혜종으로 하여금 왕규(王規)의 딸을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이게 했다. 왕규는 광주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 태조에게 두 딸을 시집보냈는데, 또다시 딸을 혜종의 비(婢)로 바침으로써 태조와 혜종의 장인이 되었다. 국왕의 외척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왕규는 염상(廉相), 박수문(朴洙文)과 함께 태조의 임종을 지킨 세명의 재신 중 한사람으로, 태조의 유명(遺命)을 내외에 선포하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혜종의 즉위와 함께 시중에 오른 왕규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 요(堯)와 소(昭)를 제거하기 위해 혜종에게 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며 참소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복동생인 요와 소를 해치려는 음모라고 여긴 혜종은 오히려 자신의 딸을 소에게 출가시켰다. 그러자 왕규는 혜종을 제거하고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군왕으로 옹립할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왕규의 시해 음모는 최지몽(崔知夢)과 박술희(朴述熙)의 발빠른 대응으로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왕위를 노리는 세력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혜종은 결국 재위 2년만인 945년, 세른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태조의 셋째 아들 요가 주위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 제3대 국왕 정종(定宗)이다.
그러나 정종 역시 혜종과 마찬가지로 단명(短命)하고 말았다. 정종은 서경을 기반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왕식렴(王式廉)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왕규 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식렴을 비롯한 서경 세력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던 정종은 불안한 정국 속에서 왕권을 수호할 목적으로 왕식렴의 세력 기반인 서경으로의 천도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던 중 동복아우 소에게 선위한 채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가 정종이 재위한 지 4년만인 949년으로 그의 나이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광종은 혜종과 정종의 연이은 단명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두 선대왕(先代王)이 권력을 잡기 위한 호족들과 귀족들의 암투 속에서 고군분투하다 단명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로서는 누구보다도 왕권 강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광종은 혜종과 정종이 박술희와 왕식렴이라는 외부의 강력한 세력 기반에 의지해 왕권을 유지했던 것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을 기르기 위해 힘썼다.
● 개혁을 위한 준비 단계
광종(光宗)은 즉위 첫해 대광(大匡) 박수경(朴守卿) 등에게 명하여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의 공적을 가리게 하였다. 이때 광종은 자신이 즉위하는 데에 공로가 있던 사람들에 대항 크게 포상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세력을 공고히 했다.
곧이어 광종은 원보 식회와 원윤 신강 등에게 명하여 주(州), 현(縣)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공의 매수를 정하게 했다.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았던 고려 초기에는 호족들이 그 일을 담당해 왔다. 그러므로 세공의 액수를 정한다는 것은 지방의 호족들을 통제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광종은 즉위한 해부터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대내외적으로 고려가 중원 제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자주 의식을 나타냄과 동시에 고려 제왕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듬해 후주(後周)와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부터는 후주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후 광종은 주로 불교 행사나 후주와의 외교 관계에 치중했을 뿐 특별한 개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이 시기 국내 정세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다. 성종(成宗)대에 최승로(崔承老)가 그의 시무책에서 "광종(光宗) 황상(皇上)께서는 아랫사람을 예로써 대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 실수하는 법이 없었으며,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버리지 않으셨다.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정하며 형벌과 포상(褒賞)이 지나침이 없었으니, 광종의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三代)에 견줄 만하다."며 격찬할 정도였다. 이 시기 동안 광종은 여러가지 국내외 정책을 통해서 새 제왕으로서의 지위 및 정치적 기반을 닦는 한편, 차근차근 개혁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그러나 이후의 공포 정치에 견주어볼 때 이것은 마치 폭풍 전애와 같은 평온함이었다.
●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다.
재위 7년째 되던 해인 956년, 광종(光宗)은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개혁 정치의 중심에는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와 승려 균여(均如)가 있었다.
쌍기는 후주에서 대리평사(大理評事)를 지낸 인물로 봉책사(封冊使) 설문우(薛文遇)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지 못하고 개경에 머물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광종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크게 만족하여 후주의 임금 세종(世宗)에게 표문을 올려 그를 신하로 삼게 해줄 것을 청했다. 후주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광종은 쌍기를 원보 한림학사(元甫翰林學士)에 임명하였다.
도대체 쌍기의 어떤 점이 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걸까? 아마 후주 건국 이후 국가체제를 정비하는데 관여했거나 그 과정을 지켜본 쌍기의 이야기가 왕권 강화와 이를 위한 통치체제의 정비를 염두에 두고 있던 광종에게 큰 감명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해 광종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여 쌍기에게 이를 주관하게 했다. 노비안검법이란 원래는 노비가 아니었으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판별하여 양인의 신분을 되찾아준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의 실시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바로 호족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바로 노비였기 때문이다. 광종이 쌍기를 시켜 노비안검법을 주관하게 한 까닭은 연고가 없는 그를 내세워 공정을 기함으로써 그 시행 취지가 흐려지지 않도록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태조도 건국 직후 이와 같은 제도를 시행하려고 했으나 공신들의 동요가 우려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광종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공신과 호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심지어 광종의 비인 대목황후(大穆皇后) 황보씨(皇甫氏)까지 나서서 이를 폐지할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그러나 광종은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끝까지 노비안검법을 시행했다. 그리하여 호족들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노비안검법은 공신과 호족 세력을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신분 질서가 문란해지고 사회가 혼란해지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노비들이 거짓으로 주인을 모함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수없이 발생했던 것이다.
왕권 강화를 위한 광종의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958년, 광종은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했다. 그해 5월에 실시한 첫번째 과거시험에서 광종은 쌍기를 지공거(知貢擧)에 임명하여 인재들을 선발하게 했다. 이것은 정치적 식견과 능력을 갖춘 새로운 관료층을 형성하기 위한 좇였다. 당시 고려 조정을 이루고 있던 관료들은 대부분 건국과 통일에 기여한 무장들이었다. 이들은 후삼국 통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던 존재였지만, 정치체제를 완성시키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 따라서 광종은 과거를 실시하여 유학적 소양을 갖춘 신진관리를 선발함으로써 자신을 충실히 보좌할 수 있는 인재들을 발굴하여 한 것이다.
과거제 실시로 인해 공신들과 호족들은 다시 한 번 세력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고려는 개국공신이나 호족의 자제들을 능력이나 특별한 절차를 따지지 않고 관리로 임용해 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를 이어가며 막강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제를 통해 기존의 정치 세력이 아닌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게 되자 이들의 세력은 자연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어 즉위 11년째인 960년 광종은 관리들의 관직과 지위에 따라 각기 다른 색깔의 옷을 입게 했다. 공복의 제정으로 국왕을 중심으로 한 관료들의 서열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와 같은 제도들을 실시함으로써 광종은 집권 초기 공신과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 피의 숙청 시대
960년 3월, 광종(光宗)은 정식적으로 칭제(稱帝)를 선포하고 준풍(峻豊)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사용했으며,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石)라 호칭하도록 했다. 고려는 이때부터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1270년까지 3백여년 동안 명실상부한 황제국(皇帝國)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러한 조치는 대내적으로는 왕실의 위엄을 높여 어누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고, 대외적으로는 고려의 자주성을 나타내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중국애서는 후주가 멸명하고 송나라가 건국되었는데, 광종은 이와 같은 중국의 왕조 교체기를 이용하여 고려의 대외적인 지위 향상을 꾀했던 것이다.
왕권 안정에 대한 집념이 누구보다도 강했던 광종은 공신과 호족들은 물론 자신의 혈육에 대해서도 늘 경계하고, 한번 의심하면 살육도 주저하지 않았다. 왕권 강화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성장해온 호족들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없었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호족들이 크게 반발할 때마다 광종은 무자비한 숙청으로 맞서야 했다. 피의 숙청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그해 3월에 있었던 평농서사 권신의 참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광종은 "대상 준홍과 왕동 등이 무리를 모아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권신의 참소를 믿고 준홍과 왕동 등을 즉시 귀양보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요망한 무리들이 참소로 그 뜻을 펴게 되어 어질고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죄를 씌우고,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고, 아들이 그 아비를 무고하여 항상 감옥이 차 넘치므로 따로 임시 옥사를 설치했으며, 죄가 없음에도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연이어 생겨났다."고 할 정도로 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비단 호족이나 관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광종의 의심이 날로 심해지자 왕족들 중에서도 몸을 보전하지 못한 이가 생겨났다. 심지어는 광종이 맏아들 유(柚)까지도 의삼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자,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서로 잘 아는 두 사람끼리도 감히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결과 광종은 수많은 호족들은 물론 조카인 흥화군(興和君)과 경춘원군(景春原君)마저 비명에 죽게 했다. 최승로(崔承老)가 '시무 28조'에서 "이때 살아남은 신하는 겨우 40여명에 불과했다."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당시 광종의 숙청 작업이 얼마나 철저하게 진행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광종은 지방의 각 주, 현에서 풍채 좋은 사람들을 뽑아 시위군을 강화했다. 시위군의 강화는 곧 관부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과거를 통해 뽑은 신진 관료들과 함께 문무 양면에서 광종의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들과 신진 관료 및 시위군을 우대하며 이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펴 나감에 따라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특히 쌍기(雙冀)를 비롯한 귀화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한 나머지 그들에게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준 것은 물론이고 여자를 골라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광종의 지나친 우대정책은 결국 신하들의 큰 반발을 샀다.
● 불교와 외교정책
태조가 불교를 숭상했듯이 광종 또한 맹신에 가까울 정도로 불교를 신봉했다. 그는 과감한 개혁을 통해 불교 교단을 정비하고 사상을 통일했는데, 이것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당시 불교계는 경전과 이론 중심의 교종과 참선에 의한 실천 중심의 선종으로 양립되어 있었다. 광종은 먼저 균여(均如)를 내세워 화엄종(華嚴宗)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했다. 이때 교종을 중심으로 불교 사상을 통일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호족들의 사상적 기반이 선종이었기 때문이다.
광종은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난립해 있던 선종마저 통합하고자 중국에서 유학 중인 승려 혜거(惠居)를 귀국시켰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선종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지눌(知訥)에 희애 조계종(曹溪宗)으로 통합된다.
화엄종의 통합은 962년 개경에 세운 귀법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광종은 균여를 이곳의 주지로 임명하여 후삼국 이후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된 화엄종을 통합하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광종은 태조와 어머니 신명순성황태후(神明順成皇太后)의 원찰(願刹)을 건립한 데 이어 귀법사를 비롯해 홍화사, 유암사, 삼귀사 등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그와 함께 갖가지 불교 행사를 벌였다.
또한 970년에는 거대한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이 불상을 조각하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사연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나물을 캐다가 믄득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보았는데, 아이는 보이지 않고 갑자기 땅에서 거대한 돌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광종은 그 돌로 불상을 만들기로 하고 전국 곳곳에 사람을 보내 조각할 사람을 찾았다. 이때 고승 혜명(慧明)이 자원하여 그의 감독 아래 장인 1백여명이 불상 조각에 착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상은 작업에 착수한 지 37년만에 완성되었는데, 흔히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불리는 이 불상은 높이 18.12미터, 둘레 9.9미터, 귀의 길이 1.8미터, 관의 높이 2.43미터로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석불이다. 현재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석불이 바로 이것이다. 이 미륵불은 영험하여 나라가 태평하면 온몸에 광채가 나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온몸에 땀이 흘렀다고 한다.
광종은 또한 균여의 주관 아래 왕륜사에서 승과(僧科)를 실시하여 승려들의 자질 향상을 꾀했다. 그리고 혜거를 국사(國師)로, 탄문(坦文)을 왕사(王師)로 삼음으로써 왕사, 국사 제도의 기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종의 불교에 대한 맹신은 집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폐단을 낳았다. 광종은 참소만 듣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데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음속으로 죄업을 빌고자 사원에서 여러 가지 불교 행사를 베풀었다. 그러자 거짓으로 출가한 무뢰배들이 걸식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또한 거리에서 백성들에게 떡가루, 쌀, 콩, 땔나무, 숯 등을 수없이 나누어주었으며, 황제가 행차하는 사원 근방에 방생소를 설치하고 불경을 강연하게 하였다. 이러한 각종 불교 행사로 인해 수많은 전곡이 탕진되었고, 이것은 결국 광종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광종은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려 노력했다. 즉위 초 광종은 후주와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치며 연호 광덕(光德)을 버리고 후주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960년에 후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서자 다시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964년 12월부터는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어 재위한 지 23년째인 972년에는 서희(徐熙)를 사신으로 송나라에 보내 외교 관계를 확고히 하였다.
광종은 국방정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북방개척에 힘썼던 광종은 967년에 낙릉을 점령하여 성을 쌓은 데 이어 968년에는 위화, 영삭, 장평, 안삭 등을 점령하여 성을 쌓았다. 또한 937년에는 장평, 박평, 고주 등을 점령하여 신도성을 수축했다. 이러한 광종의 북방정책은 고려의 영토를 확장하는 동시에 거란족과 여진족에 대한 방어책이기도 했다.
● 경종의 즉위와 함께 공신과 호족들이 재등장하다.
광종은 선대의 제왕들이 단명했던 것과는 달리 무려 26년을 왕위에 있으면서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여 고려 초기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 질서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공신과 호족들에 대한 지나친 숙청, 불교에 대한 맹신은 정국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신의 개혁 정치를 실패로 되돌리고 말았다.
975년 광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맏아들 유(柚)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고려의 다섯번째 황제인 경종(景宗)이다. 광종의 죽음은 그동안 숨죽이고 지냈던 공신과 호족들의 화려한 부활을 의미했다. 이들의 재등장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는데, 이들은 광종 재위 말기부터 서서히 개혁 주체 세력들을 몰아내고 정치 일선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광종의 잘못된 정책들을 바로잡아 나갔다. 대사령을 내려 귀양간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었으며, 죄에 대한 기록을 씻어주고 관직과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 임시 옥사를 헐고 참소하는 상소들을 불살라버리니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했다.
이로써 공신과 호족들은 다시 정치 일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경종의 구신들에 대한 예우가 지나쳐 복수법을 허락함으로써 또 한 차례 피바람을 부르는 대규모의 살육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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