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삼국시대가 시작된 배경.
유금필(庾錦弼)은 평산유씨(平山庾氏)의 시조로 45년간의 후삼국 전쟁을 종식시키고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는데 가장 큰 공훈(功勳)을 세운 무장(武將)이다. 후삼국시대는 한국 역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유일무이한 전국시대였고, 가장 역동적이고 변화무쌍한 내전(內戰)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유금필은 혜성같이 나타나 고려 최고의 용장으로 후백제 정벌에 결정적인 전공(戰功)을 세워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통일왕조의 군주로 만들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또 언제부터 무장(武將)으로 활동했는지는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만일 그가 태조와 비슷한 연령대였다면 서기 875년에서 878년 사이에 출생하였을 것이다. 유금필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공교롭게도 신라와 발해, 그리고 당(唐) 세 나라가 모두 내우외환으로 나라의 사정이 어려워 망국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유금필이 주군(主君)으로 섬겼던 고려(高麗)의 건국자 왕건은 송악의 호족인 왕륭(王隆)의 아들로 896년에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갔다. 왕륭, 왕건 부자의 가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 중국 당나라에서 귀화했다는 설도 있지만 고구려 유민의 후예라는 설이 보다 설득력이 있다. 이 무렵 신라는 국운(國運)이 기울어 쇠망(衰亡)의 종착지로 추락하고 있었다.
신라는 헌강왕(憲康王) 재위기부터 왕족들과 조정 대신들의 부정부패(不淨腐敗)로 국정이 문란해지고 지방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내부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나라 안 곳곳에서 도적 떼가 활개를 쳤고 왜구가 걸핏하면 해안 지방으로 침범하여 살인, 强姦, 약탈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특히 남해안은 828년에 장보고(張保皐)가 설치한 해상무역기지인 청해진(淸海鎭)이 장보고가 암살된 후 851년에 철폐되면서 왜구들이 수시로 침범과 노략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관군은 이름뿐이었지 변경의 국방은 커녕 서라벌의 치안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격으로 신라 왕실에서는 걸핏하면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서라벌에서는 피비린내가 가실 줄 몰랐고, 해마다 계속되는 천재지변과 흉작으로 먹을 것 없는 백성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힘 있는 자들은 도둑이 되고, 힘없는 자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유리걸식을 하고, 그럴 힘도 없는 사람들은 꼼짝없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실정이었다.
그런 가운데 곳곳에서 영웅호걸들이 몸을 일으켜 이른바 후삼국시대의 막이 올랐다. 가장 먼저 세력을 떨친 군웅(君雄)은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甄萱)이었다. 견훤은 900년에 오늘날의 전북 전주인 완산을 도읍으로 삼아 백제의 재건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했다. 그러자 이에 질세라 그 이듬해에는 궁예(弓裔)가 오늘날의 개성인 송악을 도읍으로 삼아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함으로써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가 정립하는 이른바 후삼국시대의 막이 올랐던 것이다.
◆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 신라와 정립
견훤과 궁예는 어떤 인물인가.
견훤(甄萱)은 오늘의 경북 상주지방의 호족 아자개(阿慈介)의 맏아들로 867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보다 10년 앞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자칭 '신라 왕실의 후예' 김부식(金富軾)이 궁예와 견훤을 얼마나 증오했던지 자신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서 이렇게 악담을 퍼부었다.
'신라의 국운이 쇠퇴하고 정치가 어지러워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갈 곳이 없었다. 글하여 모든 반란자가 틈을 타서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처럼 되었으나 그 가운데서 가장 악독한 자는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었다..... 견훤은 처음부터 신라 백성으로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불측한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태한 틈을 기화로 도성과 고을들을 침략하고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으니 실로 천하의 원흉이며 인민들의 큰 원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신라 왕실의 후예요, 고려 중기의 유학자였던 김부식의 역사관에 따른 인물평에 불과하므로 이를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 견훤과 궁예야말로 난세에 몸을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를 부활시키고 탁월한 통치력을 발휘했던 당대의 영웅이었다. 이름 없는 농민에 불과했던 아자개가 제법 무리를 모아 문경, 가은 일대를 장악하고 대장군을 칭하며 호족이 되었을 때 견훤은 고향을 떠나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신라군에 입대하여 남해안을 방어하는 부대에서 군공(軍功)을 세워 비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아버지 아자개를 비롯하여 원주의 양길(梁吉), 죽주의 기훤(箕萱), 양길의 부하 장수였던 궁예 등이 저마다 독립적인 군사력을 형성하며 야심을 키워갈 무렵, 견훤도 무리를 모아 '백제의 부활'을 기치로 내걸고 거병(擧兵)하여 마침내 오늘날의 호남지방을 석권하는데 성공하고 백제가 멸망한지 237년 만에 후백제를 건국하고 연호를 정개(正開)라 정하며 자립했던 것이다.
한편, 궁예(弓裔)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삼국사기는 '그의 아버지가 신라의 마흔일곱번째 군왕인 헌안왕(憲安王)이요, 어머니는 그의 후궁인데, 어떤 사람은 마흔여덟번째 군왕인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어쨌든 왕건이 고려를 창업하기 전까지 견훤의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고 하며, 더욱이나 음력 5월 5일에 태어났으므로 앞으로 부모에게 해를 끼친다는 일관(日官)의 예언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말을 들은 국왕은 즉시 궁예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궁예는 유모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해 숨어서 자랐다는 것이다. 그때 유모가 난간 아래서 아기를 받다가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바람에 궁예는 한쪽 눈알이 터져 애꾸가 되었다고 한다.
예언 때문인지, 아니면 서자 출신으로 다음 왕위 계승에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인지 유모의 품에 안겨 서라벌에서 멀리 도망쳐 숨어 살며 자라난 궁예는 현재 강원도 영월군 남면 흥월리에 있던 세달사에 들어가 선종(善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중이 되어 청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중으로 한평생을 보낼 운명이 아니었다. 세상이 너무나 어지럽고, 어지러운 세상은 원대한 꿈을 지닌 그를 목탁이나 치고 염불이나 외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절에서 뛰쳐나와 먼저 죽주, 곧 오늘의 안성을 거점으로 한 기훤의 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箕萱)이 속이 좁고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으므로 그를 떠나 이번에는 오늘의 원주인 북원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양길(梁吉)에게 가서 의탁했다. 양길은 궁예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를 신임하여 군사 6백명을 나누어주고 영동지방을 공략하도록 했다. 궁예는 오늘의 주천, 영월, 평창 등을 점령하고 대관령을 넘어 강릉지방가지 장악하니 그의 군세(軍勢)는 3500명으로 불어났다. 속 좁은 김부식도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서 이 대목에 가서는 궁예가 '사졸들과 같이 고락을 함께 하며 빼앗고 주는 것가지 공평하게 하여 자기 이익을 앞세우지 않았다.'고 이례적이지만 긍정적으로 표현했다.
◆ 궁예의 부하 장수로 승승장구한 왕건
부하들로부터 대장군으로 추대된 궁예는 철원, 양구, 화천, 김화, 평강 일대까지 세력권을 확장하고 장차 나라를 창업할 준비로 관직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송악의 호족인 왕륭, 왕건 부자가 궁예에게 복속을 맹세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궁예가 896년에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군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했는데, 이 기록은 삼국유사에만 나오고 다른 사서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궁예가 그대에는 정식으로 개국을 선포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의견도 많다.
궁예는 898년에 금성태수 왕륭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의 아들 왕건을 송악태수로 삼고 송악에 궁궐을 짓도록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옛 상전이던 양길과 기훤의 연합군까지 격파하고, 왕건으로 하여금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까지 점령하도록 하여 그의 세력권은 북쪽으로는 대동강 이남, 남쪽으로는 금강 유역갖 넓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개국, 황제를 칭했으니 그해가 서기 901년이었다.
그리고 903년에는 오늘의 양산지방 호족인 김인훈(金忍訓)이 견훤의 공격을 받아 구원을 청해오자 왕건에게 군사를 주어 파견해 이를 지원토록 했다. 왕건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자 궁예는 청년 장수 왕건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궁예가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정한 것이 그 이듬해인 904년이었다. 마진은 마하진단(摩荷震檀)의 약칭이니 곧 '동방의 대제국'이란 듯이요, 무태란 병란(兵亂)을 평정하고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구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황제 궁예는 1년 뒤인 905년 7월에 송악에서 철원으로 환도하고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이는 아무래도 왕건을 비롯한 고구려계 호족의 근거지인 송악보다는 자신이 개국하고 자립한 철원으로 돌아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또 궁예는 그해에 왕건에게 명령을 내려 정기장군 검식(黔式)과 더불어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상주를 공격하도록 했다. 왕건은 이때 견훤의 군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궁예의 적수는 견훤과 신라뿐이었다.
909년에 궁예는 왕건에게 한찬 벼슬을 주고 해군대장군에 임명하여 황해도를 남하해 후백제의 배후인 나주를 침공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수군을 거느린 왕건은 후백제가 중국의 오월로 보내는 선박을 나포하고, 이어서 종희(宗希) 김언(金言) 등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2천 5백여명을 거느리고 진도와 고이도를 점령했다. 왕건의 목표가 나주라는 사실을 안 견훤은 친히 정예 수군을 거느리고 오늘의 목포에서 영암 북쪽인 덕진포에 이르는 해안에 포진했다. 육지에도 후백제의 육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후백제의 군세가 강성한 것을 본 왕건의 휘하 장졸들이 겁을 먹자 왕건은 이렇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의지에 달린 것이지 수가 많은데 달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전함들을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자 후백제 수군이 일시 후퇴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건은 바람을 이용하여 맹렬한 화공을 펼쳤다. 결국 후백제 수군은 5백여명이 전사하고 전함 8백여척이 불타는 타격을 입었다. 견훤의 비참한 패배였다. 이 전투는 왕건이 단순히 송악의 호족 출신이란 후광 때문에 입신출세한 것이 아니라 출중한 지략과 탁월한 지도력을 갖춘 영웅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승전(勝戰)이었다. 왕건은 나주에 주둔하면서 압해도와 갈초도를 근거지로 인근 해역을 누비며 유격전으로 마진의 수군을 괴롭히던 후백제의 수군 장수 능창(能昌)을 생포하여 궁예에게 보냈다. 능창은 해전(海戰) 전술에 능해 '수달'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견훤의 신임을 받았던 자였다. 궁예는 그를 처형하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왕건의 수군에 의해 중국과의 뱃길이 막히자 견훤은 그 이듬해인 910년에 친히 보병과 기병 3천여명을 거느리고 나주성을 포위했다. 급보를 받은 궁예는 다시 왕건을 파견했고, 왕건은 또 다시 견훤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견훤과의 싸움에서 두번째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그 다음해인 911년에 궁예는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각각 바꾸었다.
◆ 왕건의 두 부인 유씨와 오씨의 사연
왕건이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를 공격하기 위해 나주 포구에 상륙한 것도 그해였다. 나주는 현재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영산포까지 바다로 이어진 포구였다. 왕건이 뒷날 고려의 두번째 황제인 혜종(惠宗)의 어머니가 되는 장화황후(莊和皇后) 나주 오씨(羅州吳氏)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태조 왕건에게는 29명의 후비(后妃)가 있었고, 그 사이에서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다. 그러나 고려를 창업할 당시에는 경주 출신 신혜황후(神惠皇后) 유씨(柳氏)와 장화황후 오씨 두 명의 부인만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후비열전(后妃列傳)에 따르면 신혜황후 유씨는 정주의 호족인 유천궁(柳天弓)의 딸이다. 유천궁은 정주에서 가장 큰 부자여서 그 고을 사람들이 유 장자라고 불렀다. 왕건이 궁예의 부하 장수로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가 버드나무 아래서 말을 멈추고 잠시 쉬고 있는데, 마침 유씨가 가까운 시냇가에 서 있었다. 처녀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는지 왕건이 다가가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다. 처녀는 이 고을 유 장자의 딸이라고 대답했다.
왕건이 부하들과 함께 그 집에 가서 머물렀는데 워낙 큰 부자여서 왕건의 군사 모두에게 풍성한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자기 딸에게 왕건을 모시게 했다. 그 뒤 유씨는 전쟁으로 바쁜 왕건과 소식이 끊겼으므로 정절을 지키고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불러 정식으로 부인으로 삼았다. 신혜황후는 비록 자식은 낳지 못했지만 영웅의 부인답게 대담하고 매서운 데가 있었다. 그러니까 첫 사내를 위해 수절했으며, 뒷날 왕건이 장수들의 추대에도 망설이자 갑옷을 꺼내 남편에게 입혀주며 혁명을 감행토록 부추긴 것이다.
둘째 부인 오씨는 대대로 목포에 살던 다련군(多漣君)의 딸이다. 후비열전에 따르면 일찍이 오씨의 꿈에 용이 와서 뱃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놀라서 깨어 부모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부모도 기이하게 여겼다. 오씨는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왕건의 눈에 들어 동침을 했는데, 왕건은 그녀의 가문이 한미했기 때문에 성교 후 임신을 피하기 위해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했다. 오씨가 얼른 그 정액을 입으로 흡수하여 마침내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태자인 왕무(王武), 뒷날의 혜종이라고 전한다. 고려사는 혜종이 912년에 태어났다고 했으니, 당시 왕건이 910년에 후백제에게 일시 빼앗겼던 나주를 공략하여 재탈환하고, 913년에 궁예의 소환령에 따라 철원으로 돌아갔다는 기록과 부합된다.
◆ 왕건의 반정(反正)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궁예
그렇다면 유금필(庾錦弼) 장군은 언제부터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측근으로 활동했던 것일까.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을 당시에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그는 궁예의 개국 초기부터 무장(武將)으로 활약하며 왕건처럼 후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해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는 고려 건국 이전의 그에 대한 기록은 남기지 않고 있다. 개국 공신 대열에도 포함되지 않았고, 개국시의 조정에도 참여하지 않은 사실을 감안할 때, 그는 왕건의 반정(反正)을 비판할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강릉의 왕순식(王順式)이나 의성의 홍술(洪述) 같은 인물들처럼 지역에 세력을 형성한 명망 있는 호족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찍이 명성을 얻어 왕건의 눈에 들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궁예가 갑자기 왕건의 반정으로 제위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은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승려였던 궁예(弓裔)는 당시 미륵신앙에 몰두하여 스스로 미륵불의 현신이요, 생불로 자처하여 자신이 불경을 저술하는가 하면, 관심법(觀心法)을 행한다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황후 강씨와 두 아들까지 살해했다고 전한다. 이 정도면 미쳤다고 밖에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군사들과 함께 거친 잠자리와 음식을 마다하지 않고, 재물을 똑같이 나누며, 백성들의 미륵신앙에 부응하여 자신이 곧 세상을 구하고자 현신한 미륵불이라며 희망을 불어넣어준 일세의 영웅 궁예가 어찌하여 광기에 사로잡힌 폭군(暴君)으로 돌변했는지는 역사의 수수께끼다. 어쩌면 그는 원대한 이상과 포부에 비해 너무나 실현의 진도가 느린 현실에 대해 분노한 것은 아니었을까.
궁예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중원 대륙까지 아우른 대제국 건설을 꿈꾼 불세출의 영웅이었지만 원대한 포부에 비해 너무나 성급했기에 일을 그르쳤는지도 모른다. 태봉의 남동쪽에는 명맥뿐이지만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신라가 있었고, 남서쪽에는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또 다른 난세의 영웅 견훤(甄萱)의 후백제가 있었건만, 궁예는 삼한통일에 앞서서 고구려의 고토 수복을 서둘렀으며, 중앙집권제 확립을 위해 제도개혁을 무리하게 강행하는 바람에 수구, 기득권 세력인 수많은 호족의 반감을 자초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미륵신앙을 통한 불국토 건설이라는 이상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참혹하게 탄압하는 결정적 실수를 범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은 갈수록 폭정을 일삼는 궁예와 죽음의 위협에 전전긍긍하는 신하들 사이에서 처신을 잘한 덕분에 암암리에 지지 세력이 늘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철원으로 소환되었다. 왕건이 913년에 광치나(匡治奈), 곧 백관의 우두머리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듬해에 자청하여 나주로 내려간 것도 궁예의 의심을 받아 언제 죽을지 몰라 자위적 방책으로 선택한 일이었다.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왕건은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등 유력한 장수들의 추대로 우두머리가 되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창업했던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태조(太祖) 즉위 조의 문헌에 따르면 궁예는 왕건의 반정군을 피해 산골로 도망쳤다가 이틀을 굶고 마을에 내려와 보리이삭을 훔쳐 먹었는데, 부양에서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이는 오로지 왕건의 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왜곡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또 왕건이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마지못해 거사에 앞장섰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어쩌면 궁예의 공포정치 아래서 기회만 엿보던 왕건이 때가 왔다고 판단되자 추종세력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혁명을 주동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궁예를 내쫓은 왕건은 정식으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로 고쳤다. 왕건을 추대한 신숭겸 등 4명의 장수들은 개국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 무렵 유금필은 야인으로 지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유금필은 왕건의 반정 이후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야인으로 머물러 있다가 왕건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고려 조정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 왕건을 섬기며 전공(戰功)을 세우다.
왕건은 개국 초기에 궁예의 부하 장수였던 환선길(桓宣吉), 임춘길(林春吉)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실패하는 사건이 계속 벌어져 골머리를 앓았다. 궁예의 충직한 신하였던 이흔암(李痕巖)이 왕건의 반정에 반발하여 웅주성을 후백제에 내주고 철원으로 상경하자 모반의 기미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제거한 것도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에 경고를 주기 위한 하나의 조치였다. 더구나 골암성 주변의 여진족들이 백성들을 대거 불모로 잡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염려하던 왕건은 능력이 출중한 인물을 골암성으로 보내 여진족을 무마시켜야 했는데 적임자를 찾기가 만만치 않아 고민을 거듭했다. 이때 왕건이 떠올린 인물이 유금필이었다.
왕건의 부름을 받고 입궐한 유금필은 정식으로 황명을 받아 군사 3천여명을 거느리고 골암성으로 떠났다. 그는 골암성에 도착한 후 주변 여진족 추장 3백여명을 불러 큰 잔치를 베풀어 일단 그들을 달랬다. 그리고 그들이 술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게 되었을 때, 그들을 모조리 포박하여 고려에 복종할 것을 강요했다. 술에 취한 상황이라 추장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유금필에게 굴복했고, 유금필은 곧 그 사실을 각 마을에 알려 이렇게 말했다.
"이미 너희들의 추장이 복종을 맹세했으니, 너희들도 와서 복종하라!"
추장들이 붙잡혀 있는 상태라 그들은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투항해왔는데, 그 숫자가 약 1천 5백여명에 이르렀다. 또한 그들에게 붙잡혀 있던 고려의 주민 3천여명도 돌려받았다.
유금필이 전투도 치르지 않고 쉽게 북방을 안정시키자, 왕건은 몹시 기뻐하며 유금필에게 표창을 내렸다. 유금필은 그 후에도 여러 해 동안 골암성에 머물렀고, 그 덕분에 북방은 평안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유금필의 진면목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능력이 마음껏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925년 연산진전투(燕山鎭戰鬪) 때부터였다. 그는 정서대장군에 임명되어 연산진 공략에 나섰는데, 이곳은 원래 태봉의 영토였다가 왕건이 반정을 일으켜 고려를 세우자 공주, 홍성, 예산 등과 함께 백제에 귀순한 지역이었다. 또한 고려의 군사적 요충지인 청주를 위협하고 있는 곳이라 항상 왕건이 되찾기를 갈망하던 요새였다.
유금필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연산진으로 쳐들어가 후백제 장수 길환(吉奐)을 참살하고 다시 임존군을 공격하여 후백제 군사 3천여명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해 10월에는 조물군에서 왕건과 견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일전을 벌였는데, 양쪽 군대는 팽팽한 접전을 벌이며 어느 쪽도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왕건은 지구전을 펼쳐 적군이 피로에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임존성을 무너뜨린 유금필이 군대를 이끌고 가세하여 전세는 단번에 고려군에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견훤이 불리함을 인식하고 서로 화친할 것을 제의하자 왕건이 받아들이려 했다. 그때 유금필은 화의를 강력하게 반대하며 공격할 것을 요청했지만, 왕건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견훤의 화의를 받아들여 서로 인질을 교환했다. 유금필은 이처럼 장수로서의 용맹과 기상을 중시하고, 싸움에 임하면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고려와 후백제 간의 휴전(休戰) 상태는 고려에 인질로 갔던 견훤의 처남인 진호(鎭浩)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반년도 못 가 깨지고 말았다. 견훤은 배후의 신라부터 복속시킨 뒤 고려와 상대하려는 전략으로 신라를 향해 칼을 빼어 들었다.
927년 9월, 견훤은 경상도 북부를 공략하다가 느닷없이 말머리를 돌려 서라벌을 기습했다. 신라는 고려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구원병이 이르기 전에 서라벌은 함락당하고 말았다. 견훤은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景順王)을 새 국왕으로 앉힌 뒤 수많은 재물을 약탈하여 유유히 돌아갔다. 이에 노한 왕건이 친히 기병 5천여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치러 내려갔다.
◆ 전장에서는 물러서지 않는 승리의 화신
왕건과 견훤의 군대는 공산에서 서로 맞붙어 대회전(大會戰)을 벌였다. 그러나 견훤이 미리 고려군의 매복지점을 파악하고 이것을 역이용해 역습을 가하자 왕건의 군대는 후백제군의 습격을 받고 순식간에 무너졌다. 후백제군은 승기를 잡자 고려의 황제 왕건이 지휘하는 중군을 그물처럼 겹겹이 에워싸고 시시각각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왕건의 장수들이 결사적으로 방어했으나 파도처럼 쉴새없이 밀려드는 후백제 군사들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신숭겸(申崇謙)이 황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경호무사들로 하여금 황제를 모시고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빠져나가도록 한 뒤에 자신이 황제의 전차를 몰고 적진으로 돌격했다. 최필(崔弼), 한장(韓長), 상애(尙厓) 등 후백제의 이름난 장수들이 고려의 황제를 잡아 큰 공을 세우려고 그를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공격하니, 신숭겸은 장검(長劍)을 휘두르며 끝까지 저항하다가 마침내 머리 없는 시체가 되어 전장에 나뒹굴고 말았다.
신숭겸과 김낙의 희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왕건은 송악으로 돌아가 부하들을 잃은 슬픔에 잠기게 된다. 공산전투(公山戰鬪) 이후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되자 고려의 힘은 한동안 열세에 놓였다. 그러나 견훤의 군사들이 노략질을 심하게 하여 이에 분노를 느낀 경상도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대거 고려로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928년 김훤(金煊), 애술(崖述) 등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청주를 침범하자 유금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적군을 격퇴시켰다. 이어 그는 930년 병산전투(甁山戰鬪)에 참전하여 후백제 군사 8천여명을 참살하는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참소에 휘말려 곡도로 유배되는 처지에 놓였다.
유금필의 유배는 고려에 치명타를 안겼다. 견훤이 수군 장수 상애(尙厓)와 상귀(尙鬼)를 파견하여 고려의 황도 개경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저산도 목장에 키우고 있던 군마를 대거 약탈해 갔다. 또한 대우도를 습격하여 고려의 후방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왕건이 대광 만세를 시켜 그들을 물리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유금필은 곡도와 포울도의 장정을 모아 의용군을 편성하고 백제 수군을 공략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왕건은 "참소하는 말만 믿고 어진 사람을 내쫓은 것은 짐의 불찰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유배에서 풀어주었다. 이듬해 유금필은 정남대장군에 임명되어 의성부를 지켰는데, 그때 왕건이 급히 사자를 보내 그에게 "나는 신라가 백제의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일찍이 대광 능장영과 주렬, 궁총회를 파견하여 진수토록 했는데, 백제군이 벌써 혜산진, 탕정 등지에 이르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다고 하니 신라 경도까지 침범할까 우려된다. 그대는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는 명령을 전했다.
당시 후백제는 충청도 서해안 지역과 경북 지역을 동시에 공격하고 있었는데, 빈 껍데기나 다름없던 서라벌은 신검(神劍)이 이끄는 백제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왕건이 그 점을 염려하여 급히 유금필을 서라벌로 파견하고자 보낸 서찰이었다.
명령을 받은 유금필은 그날로 서라벌로 달려갔다. 많은 병력을 이끌고 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따라 그는 별동대 80명만 선발하여 인솔해 갔다. 그만큼 서라벌은 시간을 다투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서라벌 근처에 이르렀을 때에 백제 대군이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유금필이 부하들에게 비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만약 여기서 적을 만나면 나는 필연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인바, 그대들이 나와 함께 죽을 지도 모르니 각자 살 도리를 강구하라."
그러자 휘하 장졸들이 대답했다.
"우리들이 죽으면 죽었지, 어찌 장군님만을 홀로 죽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병사들의 전의를 확인한 유금필은 불과 80명의 병력으로 백제군 진지를 돌파해 들어갔다. 유금필이 마치 성난 야수처럼 고함을 치며 칼을 휘두르자 그의 앞을 가로막던 무수한 적병들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져 갔다. 후백제 군사들은 유금필이 달려오고 있다는 말만 듣고도 겁을 먹고 움츠렸다. 그의 명성과 용맹은 그토록 대단했던 것이다.
마침내 저지선을 뚫고 서라벌에 도착하자, 신라 백성들이 모두 성밖으로 나와 눈물로 그를 맞이했다. 유금필은 그곳에 7일간 머물면서 신검의 군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고 백제 장수 금달(錦達), 환궁(桓躬) 등 7명을 생포하기까지 했다.
승전보를 받은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우리 유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신하들에게 외쳤다.
왕건은 유금필이 돌아오자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
"그대 같은 공훈(功勳)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니, 내가 이 일을 마음에 새겨두고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러자 유금필이 대답했다.
"국난을 당하여 자기 일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위기에 직면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신하된 자의 직분이거늘, 성상(聖上)께서는 왜 이 지경까지 하십니까?"
왕건의 지나친 찬사에 대한 따끔한 충고였다. 그 소리를 듣고 왕건은 더욱 그를 아꼈다고 한다.
◆ 후백제의 내분과 고려의 삼한통일
934년에는 왕건이 운주를 정벌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는데, 견훤이 그 소문을 듣고 갑사 5천여명을 선발하여 달려왔다. 견훤이 고려군의 형세가 만만치 않음을 알고 화의를 요청하자, 왕건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의 중론은 화의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유금필은 이번에도 싸울 것을 주장했다.
왕건이 그의 의견을 존중하여 견훤의 화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자 유금필은 기병부대를 이끌고 백제군을 쳐서 적병 3천여명을 죽이고 견훤의 책사 종훈(宗勳)과 후백제 최고의 용장인 최필(崔弼)을 포로로 잡았다.
운주전투(運舟戰鬪)의 승리로 고려군은 공주 이북의 30여개 성을 얻는 쾌거를 올렸고, 후백제는 기세가 꺾여 내분에 휘말리게 된다.
935년에 그는 나주 회복전에도 나섰다. 929년에 후백제는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나주를 거의 장악했고, 남아 있던 고려군은 뱃길이 끊겨 고려 조정과 통교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왕건은 여러 차례 군대를 파견해 나주 회복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다시 신하들에게 장수를 천거토록 했는데, 처음에는 홍유(洪儒)와 박술희(朴述熙)가 출전을 자청하였으나 왕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공훤(公萱)이 유금필을 천거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벌써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자에 신라의 길이 막혔을 때 그가 가서 열었는데, 나는 그 수고를 생각하고 감히 다시 명령하지 못하고 있다."
유금필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아뢰었다.
"저는 이미 늙었으나 이번 일은 국가 대사인데, 어찌 있는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그 소리에 왕건이 크게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대가 만일 이번 명령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칭송을 뒤로 하고 유금필은 나주로 떠났다. 그리고 공략에 성공하여 뱃길을 열고, 나주의 상당 부분을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운주전투(運舟戰鬪)에서 대패하고 다시 나주까지 고려에 빼앗긴 후백제 조정은 935년 무렵부터 심한 내분을 겪는다. 견훤은 여러 명의 아내에게서 10여명의 아들을 뒀는데, 그 중 넷째아들 금강(金剛)을 가장 총애하고 있었다. 그는 내심 금강에게 제위를 물려주고자 했지만, 주변의 반대가 심해 금강을 태자로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운주전투에서 패배한 후에야 자신이 이미 늙었음을 절감하고 금강에게 양위하려 했다.
하지만 금강의 제위 계승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가장 유력한 제위 계승권자는 신검(神劍)이었고, 많은 신하들이 그로 하여금 제위를 잇게 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그럼에도 견훤은 금강을 태자로 지명했다. 그러자 신검은 능환(能煥), 신덕(新德) 등 자신을 지지하는 권신들의 도움을 받아 935년 3월에 정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렸다.
사건의 전후 관계로 볼 때 신검과 금강은 배다른 형제가 분명하다. 신검은 적출로서 장자였고, 금강은 서자였던 셈이다. 즉, 견훤이 서자이자 이복동생인 금강을 태자에 앉히자, 적자 세력들이 대거 반발하여 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금산사에 갇힌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만인 그해 6월에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귀순했다. 왕건은 견훤을 상부(尙父)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고, 그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순왕(景順王)은 대세가 왕건에게 있다는 판다을 하고 자신도 고려에 투항할 뜻을 비친다.
그런 가운데 신검은 그해 10월에 제위에 오른다. 그리고 다음달에 경순왕이 스스로 신하들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가서 왕건에게 투항한다. 대세는 그렇게 왕건에게 기울어지고 있었고, 신검 정권은 안정되지 못했다. 936년 2월에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朴英規)마저 투항하자 왕건은 삼한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해 9월에 8만 7천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출정한다.
일리천전투(一利川戰鬪)에서 대패하고 완산주로 퇴각한 신검은 천하의 기운이 이미 자신에게서 멀어졌음을 절감하고 고려군에 항복할 뜻을 전한다. 완산주로 입성한 왕건이 정식으로 신검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약 50년에 걸친 후삼국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물론 유금필도 후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에 역시 참전했을 것이다.
후삼국 전쟁이 최종적으로 고려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왕건이 삼한통일을 이루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장수를 꼽으라면 역시 유금필(庾錦弼)일 것이다. 그는 뛰어난 판단력과 무서운 용맹으로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명성을 날려 당시 백제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유금필이 참전한 전투에서 고려군은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만일 왕건에게 유금필이 없었다면 결코 견훤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고려사(高麗史)는 그런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금필은 장령으로서의 전략을 가졌으며, 병사들에게는 늘 신망을 얻었다. 출정할 때마다 명령을 받으면 즉각 출발하였고, 집에 들러 잔 적도 없었다. 개선할 때면 태조는 반드시 마중을 나가 위로하여 주었으며, 시종일관 다른 장수들이 받지 못하는 총애와 대우를 해주었다.'
그는 941년에 죽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994년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유금필에게는 긍, 관유, 경 등의 아들이 있었고, 태조의 아홉번째 비(妃)인 동양원부인 유씨는 그의 딸이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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