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녹산(安祿山)의 반란 진압에 종군하여 전공(戰功)을 세우다.
이정기(李正己, 732~781). 고구려 멸망 이후 막대한 군사력을 이끌고 중원대륙 한복판에서 58년 간 독립왕국을 이루었던 고구려의 유장(遺將). 그러나 한반도와 맞먹는 중국 영토를 다스린 이정기의 역사는 베일에 싸인 채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굴복을 몰랐다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고구려 유민 출신 무장(武將) 고선지(高仙芝)와는 다르다. 중국인들과 타협하고 당나라의 장수가 된 고선지가 서역에 나가 혁혁한 전공(戰功)을 올리는 동안 이정기는 중국의 심장부로 진격했다. 산동성(山東省)의 치주 청주 제주 등 15개 현이 그의 세력하에 들어갔다. 이정기의 제국(濟國)에 위협을 느낀 당(唐)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격을 받은 그의 왕국은 4대 58년에 막을 내리지만 그는 고구려인의 끈질긴 개척정신의 상징이 됐다.
이정기가 중원대륙의 심장부를 장악하고 고구려 유민들의 독립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의 당나라는 현종(玄宗) 재위기에 국력이 절정에 달하였고 전통문화도 집대성되어 외형적으로는 화려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초기의 지배체제를 지탱해온 율령제(律令制)의 변질, 균전제(均田制) 및 조용조(租庸調) 세제의 이완(弛緩), 부병제(府兵制)의 붕괴 등으로 왕조의 기반이었던 자립 소농민층이 와해되기 시작하여, 이들은 토지를 상실하고 유민화하였다.
당나라는 토지와 유리된 도호(逃戶)를 조사하고, 전지(田地)와 재산에 대한 과세(課稅), 모병(募兵)의 조직화 등을 통하여 지배체제의 존속을 꾀하려 하였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 집권기에 억압되었던 귀족들이 현종(玄宗)대에 들어와 세력을 잡았고, 관료층 중에서도 구래(舊來)의 문벌귀족들은 농업생산력의 발전, 대토지 소유제의 전개, 상업자본의 이용 등으로 새로 진출한 교양인이나 지주·상인층 출신의 능리(能吏)와 대결하여 정치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세력을 잡은 문벌·귀족 출신의 재상 이임보(李林甫) 등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여념이 없었고, 세력유지를 위해 변방 절도사로 이민족이나 평민 등도 등용시켰다. 특히 징병제가 파탄된 후, 절도사들은 대량의 용병을 지휘하는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였는데, 안녹산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현종과 이임보에게 신임을 받아 유주(幽州)·평로(平盧)·하동(河東)의 절도사를 겸임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을 때, 이임보가 사망하자 중년을 넘기면서 정무(政務)에 지쳐 양귀비(楊貴妃)와의 애욕생활로 나날을 보내던 현종 밑에서 재정을 장악한 양귀비의 일족인 재상 양국충(楊國忠)은 동북 국경방비를 맡아 대병을 장악한 번장(蕃將) 안녹산과 대결하는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양국충의 견제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게 된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이 황상(皇上)의 눈을 흐리게 하고 국정(國政)을 농단하여 제멋대로 권력을 남용하면서 횡포를 부리고 있으니 양국충을 처단하여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거란(契丹)·철륵(鐵勒) 등 이민족으로 구성된 정예군 8,000여 기(騎)를 중심으로 한병(漢兵)·번병(蕃兵)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동도(東都) 낙양(洛陽)으로 진격하였다. 안녹산의 군대는 거병한지 10일도 되지 않아 박릉(搏陵)을 점령했다.
당나라의 관군은 무사안일에 젖어 있다가 안녹산의 반란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거듭하여 결국 낙양이 함락되었다. 756년 6월 4일에는 가서한(哥舒翰)이 이끄는 관군의 주력부대가 동관에서 반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장안(長安)마저 점령되었으며, 황제 현종(玄宗)은 사천(四川) 지역으로 도주했다. 장안이 함락되자 7월에 달아난 현종을 대신해 황태자가 군신의 추대로 제위에 오르니 그가 곧 숙종(肅宗)이다. 안록산의 반란으로 당나라가 흔들리자 하서 지역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당의 지배에서 이탈, 독립하려 했다. 동라 부족도 이에 동참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당나라에도, 안녹산에도, 위구르에도 심각한 문제였다. 8월에 위구르와 토번이 당에 사신을 파견해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당은 토번의 제의를 물리치고 위구르와의 군사연합을 선택했다.
위구르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11월에 투르크와 동라를 격파해 적병 3만명을 참살하고 1만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위구르는 돌궐의 부흥을 막을 수 있었다. 한편 안녹산(安祿山)은 실명과 등창으로 건강이 악화된 데다 횡포해져 757년(至德 2) l월, 아들 경서(慶緖)에게 암살되고, 경서는 범양의 본거지를 사사명(史思明)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숙종은 태자 광평왕(廣平王)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곽자의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여 삭방군(朔方軍)과 위구르[回紇] 원군의 도움으로 장안과 낙양 탈환에 성공하였다. 그후 일시 굴복한 사사명이 758년(肅宗 乾元 1) 다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토벌군을 상주(相州)에서 대파한 안경서를 죽이고 뤄양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761년(上元 2) 2월, 사사명도 그 아들 조의(朝義)에게 살해되어 반란군은 그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나, 조의는 당나라를 도운 위구르군의 공격과 범양절도사 이회선(李懷仙)에 의하여 763년(廣德 1) l월 타도되고 9년 여에 걸친 대란(大亂)은 종결되었다.
안녹산의 반란이 진압된 후 당에서는 절도사가 다스리는 번진(藩鎭)이 독립적인 정치집단으로 변화하는 등 지방할거의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대했던 것이 이정기(李正己)가 이끌던 치청번진(淄靑藩鎭)이었다.
696년 이진충이 지도하는 거란족의 반당 봉기(反唐蜂起)가 일어났을 때 영주에 주거하는 고구려 계통의 주민 일부가 만주 지역으로 탈주해 발해를 건국했다. 이 격동 속에서 영주에 계속 남은 고구려 계통 주민들은 영주가 다시 당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당나라의 군사로 활동했다. 당의 새로운 변경 방위체제인 절도사제의 도입에 따라 영주지역의 이민족들은 평로군의 병사로 많이 복무했다. 특히 안녹산이 평로절도사가 되면서 이들의 비중이 커졌으며, 평로군에는 고구려 계통의 장병이 많아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정기는 본명이 이희옥(李熺玉)으로 732년에 영주에서 태어났다. 이정기는 668년 평양성 함락 이후 당나라 군사들의 포로가 되어 영주로 끌려온 고구려인의 후손으로 이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다. 용맹스럽고 지략이 뛰어났던 이정기는 평로군에 입대해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755년에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정기는 고종사촌인 한인(漢人) 장수 후희일(候希逸)과 함께 안동도호 왕현지(王玄志)를 도와 안녹산의 심복인 서귀도(徐晷道)를 공격하여 사살하는 전공(戰公)을 세웠다. 당나라 조정은 왕현지를 평로절도사로 임명했으나 758년에 왕현지는 병사했다. 당나라 황제 숙종은 특사를 파견해 왕현지의 후임으로 그의 아들인 왕평달(王平達)을 임명했으나, 이정기는 왕평달을 살해하고 후희일을 새로운 절도사로 추대했다. 그러나 평로군은 안녹산의 군대에 쫓기고 북방으로부터는 해족의 침공까지 받아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졌다.
761년에 후희일은 이정기와 더불어 평로군 2만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발해만의 묘도 열도를 건너 등주에 상륙했다. 평로군은 인근의 청주에서 관군과 합류, 5월에 사조의(史朝義)의 군대를 격파하고 12월에는 범양에서 사조의의 휘하 장수인 이회선(李懷仙)이 지휘하는 군사들을 무찔렀다. 후희일은 이러한 전공(戰功)으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평로치청절도사라는 벼슬을 제수받게 된다. 762년 가을 정주에 당나라 군사들을 도와 사조의를 토벌하려는 위구르 군대가 도착했는데 이들의 횡포에 당의 절도사들도 속수무책이었으나 이정기가 담력과 무용을 발휘하여 위구르의 장사를 제압했다는 일화가 구당서(舊唐書)의 이정기열전(李正己列傳)에 전한다.
◆ 산동성 일대와 대운하를 장악하다.
안녹산의 반란이 당나라에 준 영향은 컸다. 국가가 파악하는 호구수가 755년의 891만에서 764년 290만으로 격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재정은 더욱 궁핍해졌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번진(蕃鎭)이 설치됐다. 이것은 안녹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각 지방의 병력을 충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내지에만 약 40개의 번진을 두었다. 번진은 평균 5~6개 주(州)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영역으로 하고 있었다. 군정권만을 장악했던 이전의 절도사와 달리 내지의 절도사는 대개 관찰사와 주의 자사 직을 역임했으므로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해 강대한 세력이 됐다.
번진의 수장인 절도사들의 독립성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절도사 가운데 특히 독립성이 강한 자들은 안녹산의 반란군 중에서 당나라에 투항한 자들이었다. 당 조정은 이 군벌들을 자의로 처분할 힘이 없었다. 당은 안녹산, 사사명 등에게 임명돼 할거하고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이들을 절도사, 자사 등으로 임명해 그 할거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룡 지방의 이회선(李懷仙), 위박 지방의 전승사(全承師), 성덕 지방의 이보신(李輔信)이 대표적인 존재로, 이들은 모두 하북에 있어 하북삼진(河北三鎭)으로 일컬어졌다.
이들 절도사는 사실상 하나의 독립왕국을 이루었다. 이들은 그들 영역 내의 모든 권력을 독립적으로 가지고 일체의 문무관료를 스스로 임명하고 법을 자체로 제정 운영했다. 이 중에는 독립된 나라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을 국왕이라 칭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황제라 칭하는 자도 있었다. 절도사들은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졌으므로 서로 전쟁을 해 영토를 확장하는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절도사들은 당나라로부터 독립한 존재였으나, 그들 자신이 당에 대한 '반역'을 공식 선언하지 않는 한 당나라의 절도사, 신하로 인정되고 당이 주는 고위관직을 수여받았다. 이들의 자녀는 당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들이 '반역'을 선언해도 다시 '귀순 입조'를 선언하면 종래의 관직과 은전이 허용됐다. 이리하여 절도사들의 '반역'과 '귀순'은 한 사람의 경우에도 여러 번 반복됐다.
안녹산의 반란이 끝난 뒤 당나라 하삭 일대에 10여개 정도의 번진이 있었다. 번진의 집권자는 여러 차례 바뀌었기지만, 3~5대씩 전해 내려가면서 대개는 당이 멸망할 때까지도 계속 존재했다.
후희일(候希逸)은 나중에 정사를 게을리 하고, 불교 사원 건축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 지역경제를 파탄에 빠뜨렸다. 이즈음 치청군 내부에서 이정기의 인망이 높아지자, 후희일은 위협을 느끼고 이정기를 해임하려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은 765년 7월 후희일을 추방하고 이정기를 추대했다. 당나라 조정은 이정기에게 평로치청절도사 겸 해운압발해신라사(海運押渤海新羅使)라는 직책을 주어 발해 및 신라와의 교역을 담당하는 권한을 주는 등 무마책을 썼다.
이정기는 점차 산동성 일대를 복속시켜 청주, 치주, 밀주 등 10개 주를 확보하고, 휘하에 10만 군사를 거느리기에 이른다. 당시 당나라 조정과 대립한 최대 번진으로 꼽히는 하북삼진은 군사력이 각각 5~7만명이었고 세력권은 7~9주 정도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이정기의 세력을 '이웃 번진들이 모두 두려워하다'고 기록했다.
이정기는 어느 정도 세력기반을 다지자 관리 임명권, 조세 수취권 등 행정과 군사, 외교권 등을 독점하면서 독립적인 모습을 보인다. 777년에는 이영요(李靈曜)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당의 최대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운주, 서주 등 내륙 5개 주를 추가로 점령해 청주에 있던 치소(治所)를 운주로 옮겼다. 청주는 아들 이납(李納)에게 맡겼다.
서주는 초한전(楚漢戰) 시기에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의 도성인 팽성(彭城)이며, 예로부터 중국의 남북과 동서를 잇는 육상운수의 중심이었고 또한 강회조운(江淮漕運)의 요충지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장안에 있는 당 조정은 경제 공황에 빠졌다. 다급해진 덕종(德宗)은 780년 3월 하북삼진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변주에 성을 쌓고 이정기 진압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정기도 이에 맞서 이듬해인 781년 변주와 가까운 조주와 제음에서 병사를 징발해 훈련시키고, 사촌형인 이유(李洧)에게 서주자사를 맡긴 다음 증원군을 파견했다. 이정기의 군대는 당군을 연속 격파하면서 서주와 가까운 옹교와 와구까지 점령해 대운하를 통한 남쪽지방과의 물자수송을 두절시켰다. 치청번진으로서는 이때가 최고 융성기였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치청 지역의 정치가 엄정하고 법령이 일치하고 세금이 가벼우며 형벌이 엄중했다고 적혀 있다.
이정기가 통치한 15개 주의 영역은 지금의 산동성 일대와 안휘성, 강소성 일부까지 포괄, 현재의 한반도보다 넓었다. 인구도 84만호로 고구려 말기의 69만 7천호보다 많았다. 당시 당나라의 총인구가 5천 3백만, 호구수가 8백 40만이었으니, 약 10분의 1을 차지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의 경제력이다. 이정기가 다스린 지역은 곡물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으며 소금의 주요 생산지였다. 당 제국 재정수입이 절반이 소금에서 났으니 치청번진의 독립은 당 재정에 막대한 손실이었다.
치청번진의 철과 구리 생산량은 1백만관이 넘었는데, 당의 철, 구리 총 수액고인 1천 2백만관과 비교해 보면 치청의 경제적 부를 짐작할 수 있다. 치청은 이밖에도 비단 생산지로 유명했다. 당시 비단의 주요 생산지는 치청, 하북과 회남, 검남, 신남이었다. 현종(玄宗) 재위기에 국가의 비단 수입액은 7백 40만필이었다. 이 중 약 3분의 2를 하남도와 하북도가 부담했으니, 치청 8개주의 비단 생산고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정기는 781년 8월 등창으로 갑자기 병사하고 마는데, 그의 나이 49세였다.
◆ 이납의 제(濟) 왕조 건국
이정기(李正己)의 아들 이납(李納)이 절도사 자리를 계승했다. 이납은 이정기의 죽음을 숨긴 채 내륙 경락을 계속하나, 치청번진과 동맹관계에 있던 산남동도의 양숭의(梁崇義)마저 관군에 대패하고 사망하는 등 주변 상황도 불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당숙인 서주자사 이유와 덕주의 이사진(李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卿) 등이 작당해 당나라에 투항했다. 결국 운하는 1년만에 개통되고 장안도 평상 분위기를 찾게 됐다.
그러나 이납은 당군과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이듬해인 782년 화서의 이희열(李希烈)과 남북 양동작전을 전개해 변주를 재탈환했다. 다급해진 덕종(德宗)은 멀리 영남까지 총동원령을 내리고 선무절도사 유현좌(劉玄佐)를 앞세워 이납을 치게 했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 조정에서도 무리한 군사징발과 논공행상에 대한 무장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결국 783년 장안 서북방에서 치청 토벌을 위해 관동으로 출병하던 경원군(經原軍)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했다. 덕종은 봉천, 양주 등지로 피난을 가야 했다. 덕종은 '자신을 비판하는 조칙'을 발표하고 반당 행위를 해 온 번진들에게 관직을 주면서 회유했다. 치청번진으로서는 위기의 순간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즈음 이납은 국호를 제(濟)라 하고 왕위에 올라 백관을 두었다. 이납은 당과 화해하고 수성(守城)에 힘썼다. 792년 이납은 3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정기로부터 통치기반을 물려받은지 12년만의 일이다. 덕종은 이납이 죽자 애도의 표시로 3일 동안 조회(朝會)를 폐했다.
이납의 사후 그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대를 이었다. 이사고는 지방관을 임명할 때 그들의 처자를 중앙에 머물게 해 반란을 예방했다. 이사고 집권기에는 당 조정과의 관계는 무난했으나 번진들 사이에 영토 쟁탈전이 벌어졌다. 치청 북부에는 소금 사지로 유명한 체주와 이납 대부터 군사 요충지로 쓰인 덕주가 있었다. 이를 놓고 하북삼진의 하나인 성덕번진과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이정기가 산동지역을 장악하고 자립한 사건은 한국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정기 가문은 발해와 신라를 상대로 국제죠역에도 힘썼는데, 이는 신라 지방세력의 성장을 가져왔고, 결국 이들이 신라를 대체하게 됐다. 주요 재정원이던 산동지역을 상실한 당나라도 양자강 하류지역을 새로운 재원으로 삼아야 했다.
◆ 이정기 가문의 몰락
805년에 당의 덕종이 사망하고 태자인 이송이 순종(順宗)으로 즉위했는데, 그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장자인 이순이 헌종(憲宗)으로 즉위했다. 이듬해인 806년 제나라에서는 이사고가 사망해 이복동생 이사도가 뒤를 이었다. 헌종은 당 중흥의 영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번진을 타도하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헌종은 덕종의 양세법(兩稅法) 시행으로 재정에 여유가 생긴 상황에서 황제 직속의 금군(禁軍)을 증강했다.
차례로 군소 반당(反唐) 번진을 토벌한 헌종은 814년 7월 회서절도사 오소양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오원제(吳元濟)가 세습 승인을 요청하자 이를 불허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자립을 문책한다는 명목으로 토벌군을 일으켰다. 다음 목표가 제나라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사도는 815년 초 선제공격을 감행, 강회의 하음창(河陰倉)을 불태우고 교량들을 파괴했다. 하음창은 당 조정이 회서 번진과 제나라 토벌을 위해 150간의 창고를 짓고 각종 군수물자를 비축해 놓은 곳으로 이곳에 저장된 쌀만 2백만석이었다. 이어 장안과 가까운 하남부(河南府)에 10여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병사와 밀정을 상주시켰다. 당시 당 조정에서는 배도와 재상 무원형이 번진 토벌론을 강력 주창하고 있었다. 이사도는 장안에 자객을 보내 무원형을 암살하고 배도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러한 이사도의 강경책으로 민심은 소란해지고 조정 대신들이 제나라에 대한 토벌 반대론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헌종은 단호히 배격했다. 12월이 되자 헌종은 마침내 제나라 토벌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당의 토벌군 선봉은 서주에 치소를 둔 무령군 절도사의 군대였다. 무령군 절도사 이원(李元)은 아장 왕지흥(王支興)을 파견해 이사도의 군사 9천여명을 격파하고 우마 4천두를 노획했다. 816년 무령군은 치청의 평음을 점령했다. 강회의 친당 번진과 투항해온 번진들이 속속 관군에 가담해 제나라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태가 됐다. 818년 7월에는 창주절도사 정권(鄭卷)이 제주 복성현을 점령했고, 10월에는 무령군 절도사 이색(李索)이 연주를, 뒤이어 천웅절도사 전홍정(全弘正)이 운주를 점령해 평로치청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다.
이사도의 수하로 도지병마사였던 유오는 정세가 불리해지자 운주성에서 이사도를 죽이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819년 2월의 일이다.
이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당나라 황제 헌종이 7월 신라에 양주절도사 조공(趙恭)을 보내 치청번진을 토벌할 증원군을 요청하자 헌덕왕(憲德王)은 순천군장군 김웅원(金雄元)에게 군사 3만여명을 주어 당나라로 파병했다는 기록이 있다.
819년 7월은 이미 이사도 세력이 토평된 다음이다. 중국의 기록에도 신라군이 출병했다고 전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신라의 출병을 부정하기에는 주저된다. 신라인 무장인 장보고(張保皐)가 무령군의 장교로 치청번진 토벌에 참여했다. 이후 장보고가 해상무역을 주도한 것은 재당 신라인(在唐新羅人)이라는 기반 외에도 3만명은 아닐지라도 신라군이 파병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파견된 신라군은 소수이나 재당 신라인을 포함해 3만의 군사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여 중원대륙에서 위세를 떨치며 당시 동양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당나라를 위협했던 고구려 유민들의 독립 정권인 치청번진은 이정기 사후 41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정기(李正己, 732~781). 고구려 멸망 이후 막대한 군사력을 이끌고 중원대륙 한복판에서 58년 간 독립왕국을 이루었던 고구려의 유장(遺將). 그러나 한반도와 맞먹는 중국 영토를 다스린 이정기의 역사는 베일에 싸인 채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굴복을 몰랐다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고구려 유민 출신 무장(武將) 고선지(高仙芝)와는 다르다. 중국인들과 타협하고 당나라의 장수가 된 고선지가 서역에 나가 혁혁한 전공(戰功)을 올리는 동안 이정기는 중국의 심장부로 진격했다. 산동성(山東省)의 치주 청주 제주 등 15개 현이 그의 세력하에 들어갔다. 이정기의 제국(濟國)에 위협을 느낀 당(唐)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공격을 받은 그의 왕국은 4대 58년에 막을 내리지만 그는 고구려인의 끈질긴 개척정신의 상징이 됐다.
이정기가 중원대륙의 심장부를 장악하고 고구려 유민들의 독립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국의 당나라는 현종(玄宗) 재위기에 국력이 절정에 달하였고 전통문화도 집대성되어 외형적으로는 화려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초기의 지배체제를 지탱해온 율령제(律令制)의 변질, 균전제(均田制) 및 조용조(租庸調) 세제의 이완(弛緩), 부병제(府兵制)의 붕괴 등으로 왕조의 기반이었던 자립 소농민층이 와해되기 시작하여, 이들은 토지를 상실하고 유민화하였다.
당나라는 토지와 유리된 도호(逃戶)를 조사하고, 전지(田地)와 재산에 대한 과세(課稅), 모병(募兵)의 조직화 등을 통하여 지배체제의 존속을 꾀하려 하였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 집권기에 억압되었던 귀족들이 현종(玄宗)대에 들어와 세력을 잡았고, 관료층 중에서도 구래(舊來)의 문벌귀족들은 농업생산력의 발전, 대토지 소유제의 전개, 상업자본의 이용 등으로 새로 진출한 교양인이나 지주·상인층 출신의 능리(能吏)와 대결하여 정치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세력을 잡은 문벌·귀족 출신의 재상 이임보(李林甫) 등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여념이 없었고, 세력유지를 위해 변방 절도사로 이민족이나 평민 등도 등용시켰다. 특히 징병제가 파탄된 후, 절도사들은 대량의 용병을 지휘하는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였는데, 안녹산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현종과 이임보에게 신임을 받아 유주(幽州)·평로(平盧)·하동(河東)의 절도사를 겸임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을 때, 이임보가 사망하자 중년을 넘기면서 정무(政務)에 지쳐 양귀비(楊貴妃)와의 애욕생활로 나날을 보내던 현종 밑에서 재정을 장악한 양귀비의 일족인 재상 양국충(楊國忠)은 동북 국경방비를 맡아 대병을 장악한 번장(蕃將) 안녹산과 대결하는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양국충의 견제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게 된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이 황상(皇上)의 눈을 흐리게 하고 국정(國政)을 농단하여 제멋대로 권력을 남용하면서 횡포를 부리고 있으니 양국충을 처단하여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거란(契丹)·철륵(鐵勒) 등 이민족으로 구성된 정예군 8,000여 기(騎)를 중심으로 한병(漢兵)·번병(蕃兵)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동도(東都) 낙양(洛陽)으로 진격하였다. 안녹산의 군대는 거병한지 10일도 되지 않아 박릉(搏陵)을 점령했다.
당나라의 관군은 무사안일에 젖어 있다가 안녹산의 반란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거듭하여 결국 낙양이 함락되었다. 756년 6월 4일에는 가서한(哥舒翰)이 이끄는 관군의 주력부대가 동관에서 반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장안(長安)마저 점령되었으며, 황제 현종(玄宗)은 사천(四川) 지역으로 도주했다. 장안이 함락되자 7월에 달아난 현종을 대신해 황태자가 군신의 추대로 제위에 오르니 그가 곧 숙종(肅宗)이다. 안록산의 반란으로 당나라가 흔들리자 하서 지역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이 당의 지배에서 이탈, 독립하려 했다. 동라 부족도 이에 동참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당나라에도, 안녹산에도, 위구르에도 심각한 문제였다. 8월에 위구르와 토번이 당에 사신을 파견해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당은 토번의 제의를 물리치고 위구르와의 군사연합을 선택했다.
위구르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11월에 투르크와 동라를 격파해 적병 3만명을 참살하고 1만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위구르는 돌궐의 부흥을 막을 수 있었다. 한편 안녹산(安祿山)은 실명과 등창으로 건강이 악화된 데다 횡포해져 757년(至德 2) l월, 아들 경서(慶緖)에게 암살되고, 경서는 범양의 본거지를 사사명(史思明)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숙종은 태자 광평왕(廣平王)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곽자의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여 삭방군(朔方軍)과 위구르[回紇] 원군의 도움으로 장안과 낙양 탈환에 성공하였다. 그후 일시 굴복한 사사명이 758년(肅宗 乾元 1) 다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토벌군을 상주(相州)에서 대파한 안경서를 죽이고 뤄양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761년(上元 2) 2월, 사사명도 그 아들 조의(朝義)에게 살해되어 반란군은 그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나, 조의는 당나라를 도운 위구르군의 공격과 범양절도사 이회선(李懷仙)에 의하여 763년(廣德 1) l월 타도되고 9년 여에 걸친 대란(大亂)은 종결되었다.
안녹산의 반란이 진압된 후 당에서는 절도사가 다스리는 번진(藩鎭)이 독립적인 정치집단으로 변화하는 등 지방할거의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대했던 것이 이정기(李正己)가 이끌던 치청번진(淄靑藩鎭)이었다.
696년 이진충이 지도하는 거란족의 반당 봉기(反唐蜂起)가 일어났을 때 영주에 주거하는 고구려 계통의 주민 일부가 만주 지역으로 탈주해 발해를 건국했다. 이 격동 속에서 영주에 계속 남은 고구려 계통 주민들은 영주가 다시 당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당나라의 군사로 활동했다. 당의 새로운 변경 방위체제인 절도사제의 도입에 따라 영주지역의 이민족들은 평로군의 병사로 많이 복무했다. 특히 안녹산이 평로절도사가 되면서 이들의 비중이 커졌으며, 평로군에는 고구려 계통의 장병이 많아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정기는 본명이 이희옥(李熺玉)으로 732년에 영주에서 태어났다. 이정기는 668년 평양성 함락 이후 당나라 군사들의 포로가 되어 영주로 끌려온 고구려인의 후손으로 이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다. 용맹스럽고 지략이 뛰어났던 이정기는 평로군에 입대해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755년에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정기는 고종사촌인 한인(漢人) 장수 후희일(候希逸)과 함께 안동도호 왕현지(王玄志)를 도와 안녹산의 심복인 서귀도(徐晷道)를 공격하여 사살하는 전공(戰公)을 세웠다. 당나라 조정은 왕현지를 평로절도사로 임명했으나 758년에 왕현지는 병사했다. 당나라 황제 숙종은 특사를 파견해 왕현지의 후임으로 그의 아들인 왕평달(王平達)을 임명했으나, 이정기는 왕평달을 살해하고 후희일을 새로운 절도사로 추대했다. 그러나 평로군은 안녹산의 군대에 쫓기고 북방으로부터는 해족의 침공까지 받아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졌다.
761년에 후희일은 이정기와 더불어 평로군 2만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발해만의 묘도 열도를 건너 등주에 상륙했다. 평로군은 인근의 청주에서 관군과 합류, 5월에 사조의(史朝義)의 군대를 격파하고 12월에는 범양에서 사조의의 휘하 장수인 이회선(李懷仙)이 지휘하는 군사들을 무찔렀다. 후희일은 이러한 전공(戰功)으로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평로치청절도사라는 벼슬을 제수받게 된다. 762년 가을 정주에 당나라 군사들을 도와 사조의를 토벌하려는 위구르 군대가 도착했는데 이들의 횡포에 당의 절도사들도 속수무책이었으나 이정기가 담력과 무용을 발휘하여 위구르의 장사를 제압했다는 일화가 구당서(舊唐書)의 이정기열전(李正己列傳)에 전한다.
◆ 산동성 일대와 대운하를 장악하다.
안녹산의 반란이 당나라에 준 영향은 컸다. 국가가 파악하는 호구수가 755년의 891만에서 764년 290만으로 격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재정은 더욱 궁핍해졌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번진(蕃鎭)이 설치됐다. 이것은 안녹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각 지방의 병력을 충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내지에만 약 40개의 번진을 두었다. 번진은 평균 5~6개 주(州)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영역으로 하고 있었다. 군정권만을 장악했던 이전의 절도사와 달리 내지의 절도사는 대개 관찰사와 주의 자사 직을 역임했으므로 민정권과 재정권까지 장악해 강대한 세력이 됐다.
번진의 수장인 절도사들의 독립성은 지역에 따라 달랐다. 절도사 가운데 특히 독립성이 강한 자들은 안녹산의 반란군 중에서 당나라에 투항한 자들이었다. 당 조정은 이 군벌들을 자의로 처분할 힘이 없었다. 당은 안녹산, 사사명 등에게 임명돼 할거하고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이들을 절도사, 자사 등으로 임명해 그 할거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룡 지방의 이회선(李懷仙), 위박 지방의 전승사(全承師), 성덕 지방의 이보신(李輔信)이 대표적인 존재로, 이들은 모두 하북에 있어 하북삼진(河北三鎭)으로 일컬어졌다.
이들 절도사는 사실상 하나의 독립왕국을 이루었다. 이들은 그들 영역 내의 모든 권력을 독립적으로 가지고 일체의 문무관료를 스스로 임명하고 법을 자체로 제정 운영했다. 이 중에는 독립된 나라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을 국왕이라 칭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황제라 칭하는 자도 있었다. 절도사들은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졌으므로 서로 전쟁을 해 영토를 확장하는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절도사들은 당나라로부터 독립한 존재였으나, 그들 자신이 당에 대한 '반역'을 공식 선언하지 않는 한 당나라의 절도사, 신하로 인정되고 당이 주는 고위관직을 수여받았다. 이들의 자녀는 당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들이 '반역'을 선언해도 다시 '귀순 입조'를 선언하면 종래의 관직과 은전이 허용됐다. 이리하여 절도사들의 '반역'과 '귀순'은 한 사람의 경우에도 여러 번 반복됐다.
안녹산의 반란이 끝난 뒤 당나라 하삭 일대에 10여개 정도의 번진이 있었다. 번진의 집권자는 여러 차례 바뀌었기지만, 3~5대씩 전해 내려가면서 대개는 당이 멸망할 때까지도 계속 존재했다.
후희일(候希逸)은 나중에 정사를 게을리 하고, 불교 사원 건축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 지역경제를 파탄에 빠뜨렸다. 이즈음 치청군 내부에서 이정기의 인망이 높아지자, 후희일은 위협을 느끼고 이정기를 해임하려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은 765년 7월 후희일을 추방하고 이정기를 추대했다. 당나라 조정은 이정기에게 평로치청절도사 겸 해운압발해신라사(海運押渤海新羅使)라는 직책을 주어 발해 및 신라와의 교역을 담당하는 권한을 주는 등 무마책을 썼다.
이정기는 점차 산동성 일대를 복속시켜 청주, 치주, 밀주 등 10개 주를 확보하고, 휘하에 10만 군사를 거느리기에 이른다. 당시 당나라 조정과 대립한 최대 번진으로 꼽히는 하북삼진은 군사력이 각각 5~7만명이었고 세력권은 7~9주 정도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이정기의 세력을 '이웃 번진들이 모두 두려워하다'고 기록했다.
이정기는 어느 정도 세력기반을 다지자 관리 임명권, 조세 수취권 등 행정과 군사, 외교권 등을 독점하면서 독립적인 모습을 보인다. 777년에는 이영요(李靈曜)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당의 최대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운주, 서주 등 내륙 5개 주를 추가로 점령해 청주에 있던 치소(治所)를 운주로 옮겼다. 청주는 아들 이납(李納)에게 맡겼다.
서주는 초한전(楚漢戰) 시기에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의 도성인 팽성(彭城)이며, 예로부터 중국의 남북과 동서를 잇는 육상운수의 중심이었고 또한 강회조운(江淮漕運)의 요충지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장안에 있는 당 조정은 경제 공황에 빠졌다. 다급해진 덕종(德宗)은 780년 3월 하북삼진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변주에 성을 쌓고 이정기 진압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정기도 이에 맞서 이듬해인 781년 변주와 가까운 조주와 제음에서 병사를 징발해 훈련시키고, 사촌형인 이유(李洧)에게 서주자사를 맡긴 다음 증원군을 파견했다. 이정기의 군대는 당군을 연속 격파하면서 서주와 가까운 옹교와 와구까지 점령해 대운하를 통한 남쪽지방과의 물자수송을 두절시켰다. 치청번진으로서는 이때가 최고 융성기였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치청 지역의 정치가 엄정하고 법령이 일치하고 세금이 가벼우며 형벌이 엄중했다고 적혀 있다.
이정기가 통치한 15개 주의 영역은 지금의 산동성 일대와 안휘성, 강소성 일부까지 포괄, 현재의 한반도보다 넓었다. 인구도 84만호로 고구려 말기의 69만 7천호보다 많았다. 당시 당나라의 총인구가 5천 3백만, 호구수가 8백 40만이었으니, 약 10분의 1을 차지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의 경제력이다. 이정기가 다스린 지역은 곡물이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으며 소금의 주요 생산지였다. 당 제국 재정수입이 절반이 소금에서 났으니 치청번진의 독립은 당 재정에 막대한 손실이었다.
치청번진의 철과 구리 생산량은 1백만관이 넘었는데, 당의 철, 구리 총 수액고인 1천 2백만관과 비교해 보면 치청의 경제적 부를 짐작할 수 있다. 치청은 이밖에도 비단 생산지로 유명했다. 당시 비단의 주요 생산지는 치청, 하북과 회남, 검남, 신남이었다. 현종(玄宗) 재위기에 국가의 비단 수입액은 7백 40만필이었다. 이 중 약 3분의 2를 하남도와 하북도가 부담했으니, 치청 8개주의 비단 생산고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정기는 781년 8월 등창으로 갑자기 병사하고 마는데, 그의 나이 49세였다.
◆ 이납의 제(濟) 왕조 건국
이정기(李正己)의 아들 이납(李納)이 절도사 자리를 계승했다. 이납은 이정기의 죽음을 숨긴 채 내륙 경락을 계속하나, 치청번진과 동맹관계에 있던 산남동도의 양숭의(梁崇義)마저 관군에 대패하고 사망하는 등 주변 상황도 불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당숙인 서주자사 이유와 덕주의 이사진(李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卿) 등이 작당해 당나라에 투항했다. 결국 운하는 1년만에 개통되고 장안도 평상 분위기를 찾게 됐다.
그러나 이납은 당군과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이듬해인 782년 화서의 이희열(李希烈)과 남북 양동작전을 전개해 변주를 재탈환했다. 다급해진 덕종(德宗)은 멀리 영남까지 총동원령을 내리고 선무절도사 유현좌(劉玄佐)를 앞세워 이납을 치게 했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 조정에서도 무리한 군사징발과 논공행상에 대한 무장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결국 783년 장안 서북방에서 치청 토벌을 위해 관동으로 출병하던 경원군(經原軍)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했다. 덕종은 봉천, 양주 등지로 피난을 가야 했다. 덕종은 '자신을 비판하는 조칙'을 발표하고 반당 행위를 해 온 번진들에게 관직을 주면서 회유했다. 치청번진으로서는 위기의 순간에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즈음 이납은 국호를 제(濟)라 하고 왕위에 올라 백관을 두었다. 이납은 당과 화해하고 수성(守城)에 힘썼다. 792년 이납은 34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정기로부터 통치기반을 물려받은지 12년만의 일이다. 덕종은 이납이 죽자 애도의 표시로 3일 동안 조회(朝會)를 폐했다.
이납의 사후 그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대를 이었다. 이사고는 지방관을 임명할 때 그들의 처자를 중앙에 머물게 해 반란을 예방했다. 이사고 집권기에는 당 조정과의 관계는 무난했으나 번진들 사이에 영토 쟁탈전이 벌어졌다. 치청 북부에는 소금 사지로 유명한 체주와 이납 대부터 군사 요충지로 쓰인 덕주가 있었다. 이를 놓고 하북삼진의 하나인 성덕번진과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이정기가 산동지역을 장악하고 자립한 사건은 한국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정기 가문은 발해와 신라를 상대로 국제죠역에도 힘썼는데, 이는 신라 지방세력의 성장을 가져왔고, 결국 이들이 신라를 대체하게 됐다. 주요 재정원이던 산동지역을 상실한 당나라도 양자강 하류지역을 새로운 재원으로 삼아야 했다.
◆ 이정기 가문의 몰락
805년에 당의 덕종이 사망하고 태자인 이송이 순종(順宗)으로 즉위했는데, 그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병사하고 장자인 이순이 헌종(憲宗)으로 즉위했다. 이듬해인 806년 제나라에서는 이사고가 사망해 이복동생 이사도가 뒤를 이었다. 헌종은 당 중흥의 영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번진을 타도하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헌종은 덕종의 양세법(兩稅法) 시행으로 재정에 여유가 생긴 상황에서 황제 직속의 금군(禁軍)을 증강했다.
차례로 군소 반당(反唐) 번진을 토벌한 헌종은 814년 7월 회서절도사 오소양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오원제(吳元濟)가 세습 승인을 요청하자 이를 불허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자립을 문책한다는 명목으로 토벌군을 일으켰다. 다음 목표가 제나라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사도는 815년 초 선제공격을 감행, 강회의 하음창(河陰倉)을 불태우고 교량들을 파괴했다. 하음창은 당 조정이 회서 번진과 제나라 토벌을 위해 150간의 창고를 짓고 각종 군수물자를 비축해 놓은 곳으로 이곳에 저장된 쌀만 2백만석이었다. 이어 장안과 가까운 하남부(河南府)에 10여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병사와 밀정을 상주시켰다. 당시 당 조정에서는 배도와 재상 무원형이 번진 토벌론을 강력 주창하고 있었다. 이사도는 장안에 자객을 보내 무원형을 암살하고 배도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러한 이사도의 강경책으로 민심은 소란해지고 조정 대신들이 제나라에 대한 토벌 반대론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헌종은 단호히 배격했다. 12월이 되자 헌종은 마침내 제나라 토벌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당의 토벌군 선봉은 서주에 치소를 둔 무령군 절도사의 군대였다. 무령군 절도사 이원(李元)은 아장 왕지흥(王支興)을 파견해 이사도의 군사 9천여명을 격파하고 우마 4천두를 노획했다. 816년 무령군은 치청의 평음을 점령했다. 강회의 친당 번진과 투항해온 번진들이 속속 관군에 가담해 제나라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태가 됐다. 818년 7월에는 창주절도사 정권(鄭卷)이 제주 복성현을 점령했고, 10월에는 무령군 절도사 이색(李索)이 연주를, 뒤이어 천웅절도사 전홍정(全弘正)이 운주를 점령해 평로치청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다.
이사도의 수하로 도지병마사였던 유오는 정세가 불리해지자 운주성에서 이사도를 죽이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819년 2월의 일이다.
이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당나라 황제 헌종이 7월 신라에 양주절도사 조공(趙恭)을 보내 치청번진을 토벌할 증원군을 요청하자 헌덕왕(憲德王)은 순천군장군 김웅원(金雄元)에게 군사 3만여명을 주어 당나라로 파병했다는 기록이 있다.
819년 7월은 이미 이사도 세력이 토평된 다음이다. 중국의 기록에도 신라군이 출병했다고 전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신라의 출병을 부정하기에는 주저된다. 신라인 무장인 장보고(張保皐)가 무령군의 장교로 치청번진 토벌에 참여했다. 이후 장보고가 해상무역을 주도한 것은 재당 신라인(在唐新羅人)이라는 기반 외에도 3만명은 아닐지라도 신라군이 파병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파견된 신라군은 소수이나 재당 신라인을 포함해 3만의 군사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여 중원대륙에서 위세를 떨치며 당시 동양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당나라를 위협했던 고구려 유민들의 독립 정권인 치청번진은 이정기 사후 41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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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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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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